루이스 잠페리니
1. 소개
나는 평생토록 항상 경주를 완주했기에 여기까지 왔고 포기하지 않았다.[1]
2. 어린 시절
성씨에서 알 수 있듯 가난한 이탈리아 이민자 집안의 차남으로 태어나 가난으로 어릴 적에 여러 학교를 전전하며 살았다.
체구도 작아서 놀림도 많이 당하고 살았던 잠페리니는 그를 갱생시키려던 형 피트 잠페리니(Pete Zamperini)[2] 의 노력으로 달리기 능력을 교사에게 인정받고 토렌스 고등학교 때부터 육상 선수로 본격적인 훈련을 받았다.
3. 육상선수 경력
미국의 前 육상 선수로 1936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하여 5000m 8위를 기록했다.
육상선수로 USC에 진학을 한 그는 올림픽 선발전에서 당당히 선발되어 1936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했다. 아깝게 메달은 못 땄지만 아직 20살로 젊은 잠페리니는 훗날 세계적인 육상선수가 될 수도 있었다.
4. 제2차 세계대전 참전
올림픽이 끝난 후 발발한 2차대전에 미합중국 육군 항공대(미합중국 공군의 전신)에 장교로 입대하여 B-24 폭격기 승무원(폭격수)으로 태평양 전선에서 활약했다.
그런데 실종된 아군 폭격기를 수색하던 도중, 타고 있던 폭격기가 고장나 잠페리니와 승무원들[3] 은 태평양 한가운데에 표류하게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중사가 사망하기도 했다. 그렇게 무려 47일간을 버티던 중 마셜 제도 부근에서 '''일본 해군에게 구조되어''' 해군 포로 수용소에 있다가 오오모리의 일본 육군 포로 수용소로 압송되었다.
인권 개념이 희박한 일제답게 잔혹한 고문과 배고픈 나날들이 이어졌고, 특히 악명 높았던 와타나베 무츠히로(渡辺 睦裕) 군조(육군 중사)의 학대까지 더해져 그 역시 앙상한 가죽만 남은 상태가 되었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일본군의 옥쇄정책 때문에 도쿄로 또 압송돼 종전 때까지 계속 갇혀 지냈다.
5. 전쟁 이후
전후 고국으로 금의환향하여 많은 환대와 축복속에서 전역 후(최종 계급 대위.) 수많은 강연회와 방송에 출연 하여 일약 유명인이 되었다. 한편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일본군에 대한 심한 트라우마가 있었음에도 1998 나가노 동계올림픽에 성화 봉송주자로 참가하면서 자신을 괴롭혔던 사람들을 용서하려고도 했었다. 하지만 막상 그 소식을 들은 일본군 잔당들은 끝까지 자신들의 악행을 부정하며 뻔뻔스러운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특히 와타나베는 끝까지 그를 만나는 것을 거부했다.
2014년 7월 2일 운명할 때까지 나름 국가대표 육상선수 출신이었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97세라는 나이까지 장수했다. 추후 그의 일대기가 영화 언브로큰으로 제작되었으나 아쉽게도 영화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사망했다.
6. 참고문헌
[1] 원문: I'd made it this far and refused to give up because all my life I had always finished the race.[2] 전쟁 중엔 미합중국 해군에 입대했으며 최종 계급은 갑판상사(CPO)다.[3] 잠페리니의 동료 조종사였던 중위 1명과 중사 1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