룽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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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전국국방회의 부의장
중화민국 군사참의원장
중화민국 운남성 정부주석
'''
'''정체'''
龍雲
'''간체'''
龙云
'''한국식 독음'''
용운
'''영문'''
Long Yun
''''''
지주(志舟)
'''출생'''
1884년 11월 19일 청나라 운남성 은안현[1]
'''사망'''
1962년 6월 27일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국적'''
청나라 [image]
중화민국 [image]
중화민국 [image]
중화인민공화국 [image]
'''학력'''
운남육군강무당
'''직업'''
군인, 정치가
1. 개요
2. 생애
2.1. 초기 이력
2.2. 운남왕 시절
2.4. 몰락
2.5. 중공 합류와 말년
3. 매체에서
4. 참고문헌


1. 개요


중화민국의 군벌. 윈난성의 군벌로 십여년간 윈난성의 지배자였으나 장제스에게 숙청당하고 중화인민공화국에 합류했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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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룽윈
1884년 운남성에서 소수민족인 이족(로로족[2]) 가정에서 태어났다. 사천성에서 보로운동을 주장하는 비밀결사 조직원으로 활동하다가 1910년, 고향으로 돌아와 운남성의 신군 19진에 입대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운남육군강무당 교관인 탕지야오를 만나게 되었다. 탕지야오가 룽윈을 눈여겨 보고 사관후보생으로 넣어주면서 룽윈의 군생활이 시작되었다. 1914년 운남육군강무당 4기 기병과를 졸업한 룽윈은 탕지야오의 친위대를 지휘하는 장교로 부임했고 1921년 구핀전이 쿠데타를 일으키자 탕지야오를 지지하며 광서성으로 퇴각, 전적총지휘에 올라 구핀전을 토벌했다. 그 공으로 1921년 3월, 전군 5군 군장 겸 쿤밍 진수사에 올랐다. 1925년 3월, 쑨원이 사망하자 탕지야오는 뜬금포로 자신을 국민당 부원수로 자칭하면서 국민당의 영도권을 요구하였는데 이것이 거절당하면서 국민당과의 전쟁이 발발한다. 룽윈은 부대를 이끌고 국민당에 복종하고 있는 광서군벌의 황소횡, 범석생 등과 교전하였다.

2.2. 운남왕 시절


1927년 2월 5일, 국민당을 옹호하며 정변을 일으켜 탕지야오를 축출하고 2월 6일, 이 사실을 전국에 통전하며 성정부 개조를 선포했다. 6월, 경쟁자인 호약우(胡若愚)의 쿠데타로 부상을 당하고 감금당했으나 부하들의 반격으로 구출되어 운남성의 기반을 닦게 되었다.[3] 1927년 8월, 국민혁명군 38군 군장에 임명되면서 국민정부에 합류하게 되었으나 척박한 운남성의 사정상 운남 밖을 나가지 않고 안빈낙도하는 정치를 추구했다. 1928년 1월, 룽윈은 운남성 정부주석 겸 13로군 총지휘에 임명되었으며 1929년 편견회의 편견위원에 선출되었으며 그해 3월 반장전쟁이 일어나자 토역 10로군 총지휘에 임명되었다. 룽윈은 운남성의 토비들을 토벌하여 운남성의 치안을 안정시켰으며 1930년 중원대전이 발발하자 리쭝런, 바이충시 등에게 참가를 권유받았으나 거절하고 중앙 옹호 통전을 보내고 광서성을 공략했으나 계계군벌의 강력한 저항으로 퇴각했다. 1931년 6월, 훈정이 실시되면서 국민정부 정부위원에 선출되었다. 1934년 11월, 운남성의 아편 경작과 매매에 대한 금지령을 내려 운남성의 아편 유통을 척결하는데 성공했다. 1935년 5월, 대장정을 추격하던 장제스와 만나 회담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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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장제스와 만난 룽윈
1935년, 공산군을 추격하기 위해 중앙군 5만명이 쿤밍에 진주하면서 외부와 단절되어 운남성에서 따로 놀던 시대는 가게 되었다. 그해 9월 중화민국 육군군관학교 분교가 쿤밍에 수립되었고 운남군 장교들은 선진 군사기술 및 정치훈련을 받기 위해 난징, 항저우 또는 사천성에 파견되어야 했다. 1935년 11월, 국민정부는 법폐개혁을 단행하여 운남성에서도 중앙에서 발행한 지폐를 사용하게 되었다. 장제스는 룽윈을 2로 초비총사령관, 운남-귀주 수정주임에 임명했으며 1935년 5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감찰위원에 선출되었다. 이때 육군군관학교 운남분교의 사관후보생들이 룽윈의 하야 운동을 벌이자 장제스는 룽윈을 지지하며 사관후보생들을 투옥했다.
1936년 2차 양광사변이 일어났을 때도 참가를 거부하고 중앙을 옹호했다.
인근 남부 성들의 군벌들이 민중을 벗겨먹었다고 할 정도로 큰 착취를 일삼았지만, 룽윈은 자신의 영지에서 상당히 선정을 베풀었다. 1936~1937년에 걸쳐 공업 육성, 공공생활 개선, 위생개선 운동을 하여 운남성의 민생을 개선하는 데 힘썼다.
장제스(난징정부)와의 관계는 미묘한데, 1936년 서안 사건이 일어나자 장쉐량에 대한 토벌군을 일으키겠다고 선언하면서 중앙을 강력히 옹호하고 장쉐량이 유치하고 불충불효한 반역자라고 큰 비난을 퍼붓기도 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난징정부가 자신의 영지에 간섭하는 것을 우려했다. 중앙의 영향력 확대 시도에 저항하여 법폐 유통을 방해하였고 운남성만의 독자통화를 유통시켰다. 또한 장정중이던 홍군이 자신의 영내에 진입하자 자신의 병력이 소모될 것을 우려, 난징정부의 토벌명령을 한귀로 흘려버리고 홍군 측과 협상을 해서 공산군이 시한내 운남성을 벗어나면 공격하지 않는다는 협정을 맺기도 했다. 사실 룽윈뿐만 아니라 구이저우성, 쓰촨성, 장시성 등의 남부 군벌들 대부분이 장제스의 명령을 무시하고 홍군과 비슷한 협정을 맺고 그냥 자신의 영지를 빨리 통과시켰다. 그들에게 입장에서는 지나가는 홍군을 공격하다가 자신의 병력을 감소시키느니 차라리 그 병력을 보존해서 중앙의 장제스 직속군의 진주를 막는 것이 자신의 영지를 지키는데 더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2.3. 중일전쟁 시기


중일전쟁 발발 후 장제스가 리쭝런에게 난징에서 회담하여 일본에 공동으로 대항하기 위한 대책을 강구하자고 제안하자 사천성의 지배자 류샹과 함께 전보를 쳐서 이는 일본과의 전쟁을 이용하여 지방군벌들을 제거하려는 장제스의 음모라고 주장하며 리쭝런에게 난징으로 가지 말 것을 촉구했으나 리쭝런은 제2차 상하이 사변에서 장제스가 중앙군을 대거 투입하는 성의를 보이자 난징으로 가게 되었다. 전쟁이 격화되면서 중앙정부가 서남지역으로 퇴각하게 되자 37년 12월, 중앙은행 쿤밍 지점이 개설되고 국세 징수권을 박탈당하는 등 운남성은 전보다도 더 중앙의 간섭을 받게 되었다. 장제스는 룽윈에게 즉각 전선에 병력을 파견할 것을 지시했고 룽윈은 1938년 1월, 3개 사단을 대일전선에 투입했으나 장제스는 룽윈의 충성심을 여전히 의심했다.
1938년, 우한에 주재하던 공산당 대표 저우언라이와 교류하면서 중국 공산당과 친밀한 관계가 되었고 운남성의 반장 학생운동과 공산당 지하활동을 지원하였다. 우한과 광저우가 함락된 이후 운남성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는데 운남성에는 많은 피난민과 더불어 서남연합대학이 들어왔고 49개의 공장도 이전해왔다. 이 때문에 운남성은 전쟁 기간 내내 국민정부의 전시통제가 제일 덜한 지역으로 남았으며 학생운동이 매우 활발하였다. 1938년, 왕징웨이일본군의 공작에 포섭되어 일본쪽으로 넘어갈 때 쿤밍에 도착한 왕징웨이는 룽윈에게 일본군에 붙어 장제스에게 맞서자고 제안했으나 룽윈은 왕징웨이의 제안을 즉시 거절하고 왕징웨이에게 정신 차리고 충칭으로 돌아갈 것을 권했다. 왕징웨이가 듣지 않고 베트남으로 가자 장제스에게 왕징웨이의 제안을 보고함으로 왕징웨이의 편에 설 생각이 없음을 드러냈다. 1939년 2월 10일, 룽윈은 성명을 발표해서 왕징웨이의 화평운동은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하고 장제스의 항일정책을 지지하면서도 일본이 중국의 주권을 존중한다면 화평에 반대하지 않겠다는 애매한 반응을 보였다. 이후 왕징웨이가 300만원을 운남성 재정개혁을 빌미로 룽윈에게 송금하는 등 왕징웨이와의 접촉이 아주 없진 않았고 이 때문에 장제스는 룽윈을 계속 의심하게 되었다. 왕징웨이가 아예 상하이로 가버린 후에야 룽윈은 왕징웨이와 완전히 손절매를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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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 시기의 룽윈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후 일본군이 버마를 점령한 후 살윈강을 넘어 운남으로 진공하려는 것을 클레어 셰놀트의 지원을 받아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중앙의 통제가 강해져서 1939년 시점에서 운남성에서 자체 발행하는 신부진폐의 가치는 계속 떨어졌고 1942년 시점에서 법폐만 통용되게 되었다. 1939년, 운남성의 주요 산품인 주석 거래가 국민정부 대외교역위원회에게 장악되면서 운남성은 계속해서 중앙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룽윈은 격노하여 신부진폐 없이는 모든 산품의 거래를 금지한다는 훈령을 내리며 저항했으나 결국 장제스에게 보조금을 받는 대가로 교역권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중앙군이 계속해서 운남에 들어오자 룽윈은 저항했으나 1940년 시점에서 굴복할 수밖에 없었고 대가로 군사위원회 전검행영주임에 임명되었다. 룽윈과 중앙의 불화는 계속되어 1940년 4월, 삼민주의청년단에서 룽윈을 독살하려고 시도하려다가 적발된 적이 있었다. 1944년 대륙타통작전 이후 리지선의 반정부활동을 지지하면서 장제스 타도를 도모했다.

2.4. 몰락


결국 장제스는 룽윈을 제거하기로 결정하였다. 1945년 4월, 장제스는 쿤밍방위사령부 사령관 두위밍을 소환하여 룽윈을 군사참의원 원장에 임명함으로 운남에서 제거하는 방안을 논의하였고 7월, 운남 출신의 측근인 이종황에게 운남성 정부주석 취임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8월에 일본이 갑작스럽게 항복하면서 운남성에 대한 조치는 잠시 미뤄졌다. 이러한 정보가 새어나갔지만 룽윈은 중앙이 자신을 해임하고자 한다면 명령서 하나로 충분하다는 반응을 보이며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4개 사단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파견하였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진주한 운남군은 약탈과 학정으로 베트남 사람들의 원성을 샀으며 북베트남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군사정부의 수립까지 도모하여 연합국과 장제스의 불만을 동시에 사게 되었다.
결국 1945년 10월 2일, 장제스는 룽윈을 모든 공직, 당직에서 해임한 후 군사참의원 원장에 임명하겠다는 명령서를 두위밍에게 전달했고 두위밍은 10월 3일 새벽, 중앙군 5군을 동원해 룽윈의 자택을 포위했다. 룽윈은 민간인으로 변장하고 뒷문을 통해 운남군 사령부로 달아났으며 운남군과 정부군의 소규모 교전이 발생했다. 룽윈은 두위밍이 장제스의 명령을 전달하자 교전을 중지하라고 지시했다고 주장했는데 실제로 교전은 더 이어졌다.
어쨌거나 룽윈이 자신이 장제스의 충실한 부하로 선전하고 다녔고 두위밍이 다짜고짜 선빵을 때린 건 사실이라서 두위밍은 책임을 묻고 10월 16일 쿤밍방위사령부 사령관에서 해임되었다. 이후 룽윈은 측근인 노한에게 성정부 주석 자리를 물려주겠으니 그가 인도차이나에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했으나 장제스는 10월 5일까지 충칭으로 올 것을 명령했다. 룽윈이 몰래 동원하려 한 민병대는 중앙군에게 모두 제압당했고 룽윈은 항복하고 충칭을 거쳐 난징으로 갔다. 이후 장제스는 프랑스와 협상하여 프랑스령 광주만을 반환받는 조건으로 인도차이나에서 운남군을 철수시켰다.
이후 룽윈은 3년 동안 군사참의원장이라는 허울좋은 직함만 달고 감금되어 살았으며 다이리의 감시를 받았다. 장제스는 룽윈의 접견을 거부했고 룽윈은 공포에 떨었다. 결국 룽윈은 1948년 12월, 난징을 탈출하기로 마음먹고 친분이 있던 클레어 셰놀트 장군에게 특사를 보내 누군가 자신을 해치려 하니 제발 난징에서 빠져나가게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룽윈과 각별한 친분이 있었던 셰놀트는 룽윈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하고 C-46 수송기를 불러 룽윈의 탈출을 준비했다. 룽윈도 자신의 부관에게 전용차를 타고 가게 하여 특무의 주의를 끌게 한 다음 변장을 하고 개인비서 유종악, 부관 주지고를 대동하고 셰놀트가 준비한 비행기를 타고 상하이를 경유하여 광저우로 도주했다. 광저우에 도착한 룽윈은 곧이어 영국령 홍콩으로 망명했다.

2.5. 중공 합류와 말년


홍콩에서 룽윈은 중국 국민당 혁명위원회 중앙위원으로 합류했고 1949년 8월, 성명을 발표하여 중국 인민정치협상회의의 소집을 옹호한다고 통전했다. 이어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 중앙인민정부 위원에 선출되었다. 1950년 1월, 룽윈은 중공에 합류하여 혁명군사위원회 위원장, 서남군정위원회 부위원장, 서남행정위원회 부주석,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 정협 상무위원, 민혁 중앙상무위원 겸 부주석을 역임했다. 이후 1958년까지 전국국방회의 부의장으로 재직했다.
이때 정협협상회의에서 중국 정부의 무분별한 대외원조와 자신의 민족인 이족에 대한 성급한 사회주의화를 비판한 것이 화근이 되었다. 그의 요지는 "우리 중국은 아직 후진국이라 대외원조를 할 여력이 없으니, 제3세계에 대한 지원활동은 소련에 맡기고 중단해야한다"는 것과 "이족은 아직 노예제사회라서 급격한 토지개혁과 같은 사회주의 정책은 민족의 정체성을 지켜내기 힘드니 시기상조다"는 것이었다. 이는 합리적인 이야기였으나, 하필이면 반우파 투쟁시기라서 마오쩌둥에 대한 자그마한 비판도 크게 문제가 될 수 있었다. 당으로부터는 발언을 취소하면 문제삼지 않겠다는 언질이 있었으나, 그는 자신의 견해를 고집해서 "반당분자", "우파분자"의 낙인이 찍히고 모든 직위를 잃고 야인이 되었다. 이후 1962년 베이징에서 병환으로 사망했고 우파 지정은 취소되었다.
하지만 몇년 후 벌어진 문화대혁명에서 홍위병은 그의 가족을 박해했고, 자택은 훼손되었다.
덩샤오핑 집권후인 1980년에 완전히 복권되었다.

3. 매체에서


호이4에서 운남성의 국가원수로 등장한다. 초기에는 린뱌오와 초상화를 같이 쓰는 굴욕을 겪었으나 1.5패치와 waking the tiger DLC 발매 이후 마부팡과 함께 초상화가 구현되어 원래 얼굴을 되찾았다. 중화민국에 복속을 선택하면 정치력 소모를 통한 합병 디시전 중 첫단계인 군대통합 디시전 선택 이후 중화민국의 3티어 장성진으로 추가된다.

4. 참고문헌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 군신정권, 진지양, 고려원.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왕징웨이 연구, 배경한, 일조각.
  • 장개석은 왜 패하였는가, 로이드 이스트만, 지식산업사.
  • 송미령 평전, 진정일, 한울.

[1] 장개석은 왜 패하였는가에 따르면 1888년 출생.[2] 로로족은 비하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중화인민공화국 건립후에 공식적으로는 이족(彝族)이라고 한다.[3] 이때 호약우와 평화협정을 맺은 후 그에게 연화를 베풀다가 검객을 시켜 그의 머리를 쪼개버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