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징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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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저우 국민정부의 초대 주석
중화민국 난징 국민정부의 초대 주석
'''
'''본명'''
왕자오밍(汪兆銘)[1]
'''정체'''
汪精衛
'''간체'''
汪精卫
'''한국식 독음'''
왕정위
'''영문'''
Wang Jingwei
''''''
정위(精衛)
'''출생'''
1883년 5월 4일 청나라 광동성 삼수현
'''사망'''
1944년 11월 10일 일본 제국 나고야
'''국적'''
청나라 [image]
중화민국 [image]
중화민국 [image]
왕징웨이 정권 [image]
'''학력'''
호세이대학
'''직업'''
정치가
'''주석
재임 기간
'''
광저우 국민정부 주석 1925년 7월 1일 ~ 1926년 3월 23일
왕징웨이 정권 주석 1940년 3월 30일 ~ 1944년 11월 10일
'''행정원장
재임 기간
'''
4대 1932년 1월 28일 ~ 1935년 12월 16일
1. 개요
2. 생애
2.1. 일본 유학과 혁명의 길
2.2. 호법운동에서 국민정부 수립까지
2.5. 혁명의 영웅에서 민족의 반역자로
2.6. 비참한 말로
3. 여담
4. 매체에서
5. 주요 경력
6. 참고문헌
7. 관련문서
7.1. 인물
7.2. 사건
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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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본명은 왕자오밍(汪兆銘, 왕조명), 보통 사람들에게는 왕징웨이로 불렸다.
중화민국정치인. 국민혁명 기간 중 중국 국민당 좌파 계열의 수장이었으며 쑨원의 보좌관, 정치적 후계자, 중국 국민당의 주축, 장제스의 라이벌, 그러나 친일 정권인 왕징웨이 정권의 지도자로 중국 근대사의 한간(매국노)으로 평가되는 인물이다.

2. 생애



2.1. 일본 유학과 혁명의 길


"그가 여자가 아니라 남자라는 것이 안타깝다. 그래도 사랑스럽다."

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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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왕징웨이
1883년 3월 광동성 싼수이 현(三穗縣)에서 태어났다.[2] 4살 때부터 부친과 형에게서 경전 교육을 받았으며 18살이 되던 1901년 광동성 1, 2차 과거시험을 동시에 수석 합격하며 문장가로서 명성을 날렸다. 1902년 주즈신 등과 군익학사(群益學社)라는 모임을 만들어 실학을 연구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 시점부터 새로운 세계에 대한 관심을 가진 것으로 추측된다. 1904년 여름, 양광총독 천춘쉬안이 인재육성을 위해 선발한 56명의 일본 관비유학생으로 뽑혀 도쿄의 호세이대학 속성과에 2회 입학생으로 입학했다. 그와 같이 일본으로 파견된 사람으론 국민당 우파의 거물 이론가 후한민, 동맹회 회원으로 두각을 드러낸 주즈신, 구잉펀 등이 있었다.
1904년 가을 일본에 도착한 왕징웨이는 1년 6개월 동안 중국인 통역이 있는 수업을 들으며 법학통론, 민법, 상법, 헌법, 행정법, 형법, 국제법, 경제법, 재정학 등 법학의 기본 과목들을 공부했는데 당시 교수진이 도쿄제국대학 법과의 교수를 겸직하는 우수한 인물들로 사실상 도쿄제국대학 법과의 축소판이라 할만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서구적 학문, 사상, 제도를 접하여 국민주권과 공화사상의 영향을 받게 되었고 이 때문에 반청사상과 공화혁명을 추구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왕징웨이는 동기들 사이에서도 두각을 드러내어 1905년 4월과 6월에 치러진 1학기 시험에서 223명 중 1등을 차지했고 1906년 7월의 졸업고사에서 230명 중 4등을 차지했다. 이 당시 동기였던 후한민이 당시 그의 재능은 아무도 따라갈 자가 없었다고 회고했을 정도였다.
그러던 중 쑨원이 1905년 7월 중순 유럽에서 일본으로 건너와 쑹자오런, 황싱, 천텐화 등과 함께 도쿄의 중국인 유학생들이 모여 구성된 흥중회, 화흥회, 광복회 등을 통합하여 1905년 7월 30일 도쿄 아카사카의 흑룡회 본부에서 중국혁명동맹회 창립 준비대회를 열게 이른다. 왕징웨이는 1903년 후난 성 창사에서 설립된 화흥회 설립멤버였던 쑹자오런과의 인맥으로 인하여[3] 이 단계에서부터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후이성 등과 함께 7월 30일 준비대회에 참석한 왕징웨이는 이후 중국혁명동맹회의 중심적인 인물이 되어 황싱, 천톈화 등 7인과 함께 동맹회 장정 기초위원이 되었으며 8월 20일 창립대회에서 평의부 의장이 되어 쑨원의 측근이 되기에 이른다.
한편 청국 유학생들의 정치활동에 위기감을 느낀 청나라 조정의 요청에 따라 일본 문부성이 1905년 11월 청국유학생취체규칙(淸國留學生取締規則)을 공포해 유학생의 행동을 제한하려 했다. 쑹자오런, 추진 등을 중심으로 동맹휴업과 귀국 운동이 벌어져 유학생들은 일본 헌법이 보장한 '행동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이라고 항의했으며, 2천여 명의 유학생이 귀국하고 그 외 수천명의 유학생들이 40일의 동맹휴업을 진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천톈화는 자살로 항의하기까지 했다. 반대로 왕징웨이는 동맹휴업에 반대하고 후한민, 주즈신 등과 함께 '유학을 유지하자는 동지회'를 결성하여 학업을 계속할 것을 주장했는데 결국 1906년 1월 일본의 정계에서 주거에 대한 규정을 완화시킴에 따라 협상에 성공한 동맹회 학생들이 학업을 재개하는 것으로 사태는 마무리되었다. 귀국파와 유학 유지파가 갈라진 내분 상황에서 왕징웨이는 쑨원의 든든한 측근으로 활약했다.
이후 중국동맹회의 기관지인 민보에서 입헌파인 량치차오와의 논쟁에서 승리함으로써 혁명파의 토대를 견고히 하였다.[4]
그러나 1908년경부터 뚜렷한 중심이 없던 중국동맹회는 분열되기 시작했고, 이러한 문제를 타파하기 위해 왕징웨이는 암살단을 조직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그는 후한민에게 "나는 혁명의 땔감이 될테니, 당신은 혁명을 위한 솥이 되어달라."라는 사실상의 유언을 남겼다. 한편 손문에게는 "지금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미봉책으로는 불가능하며 모종의 적극적인 수단이 있어야한다."라고 말하였는데, 이것을 토대로 보면 왕징웨이는 자신의 희생을 통해 정체된 혁명파의 활기를 불러일으키려고 노력한 것으로 추측된다.
결국 1910년, 선통제의 아버지인 섭정 순친왕에 대한 암살시도에 가담하였으나, 폭탄이 조기에 발견되어 실패하고 종신형을 선고받았다.[5] 그러나 1911년 신해혁명으로 인해 석방되었으며, 옥중에 투옥되던 당시 쓴 시편들이 외부로 알려지며 그는 신화적 인물로 떠오르게 되었다. 다만 이 시기에 청황실의 포섭을 받아 이미 변절했다는 식의 비난이 있다. 신해혁명 이후 위안스카이 정권이 들어서자 위안스카이로부터 특별비를 받고 있었다는 의혹도 있다.
이후 북양정부와 광동의 세력가들로부터 여러번 권력권유를 받았으나, '자기 희생의 각오로 혁명에 참여한 사람이 혁명의 성공을 이유로 관직에 오르는 것은 혁명을 출세의 도구로 만드는 것이다.'라는 생각으로 모든 관직을 거부하고 파리로 유학을 떠났다. 파리 유학 시절에도 1917년 귀국하여 쑨원의 1차 호법운동에 참여하는 등 정치활동을 계속했다.
1919년부터는 5.4운동에 참여, 파리에서 산동성의 일본조차를 승인하는 베르사유 조약을 반대하고 조약 완성 이후에는 승인을 거부하는 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제국주의와 국제연맹의 한계를 꿰뚫는 데는 실패했고, 언젠가는 산동성이 중국으로 돌아오리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는 등 여전히 국제적인 현실감각은 부족한 면을 보였다. 다만 일본에 대해서는 '일본은 군국주의 국가로서 결국 독일과 똑같으며 종국적으로 중국에 대한 침략을 시작할 것이다.'라고 하는 등 현실주의적 시각을 일부 보여주기도 하였다.

2.2. 호법운동에서 국민정부 수립까지


1919년 중국 국민당이 창설되고 국민혁명이 시작되자 왕징웨이는 2차 호법운동 등에 참여하며 쑨원을 보좌했고 영풍함 사건 직전에는 천중밍과의 화해를 주장하기도 했다. 쑨원은 점차 그에게 국민당 중앙정치위원회 위원 등 여러 요직을 맡기면서 점차 후한민, 랴오중카이, 다이지타오와 함께 국민당의 주축 세력의 리더이자 장차 쑨원의 후계자로 부상한다.
랴오중카이는 국민당 재정부장이자 국민당 좌파의 중요 인물로서 제1차 국공합작 달성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였으며, 쑨원의 부인인 쑹칭링의 총애를 받았고 후한민과도 친한 사이었다. 후한민은 중국동맹회 창단 멤버이자 당 우파의 수장이었으며 여러 혁명활동에 참여하여 오랜 경력이 있으며 강경한 인물로 명망이 높았다.
반면 왕징웨이는 좌파이긴 했지만 중도파의 역할을 자처했으며, 당 내부의 분쟁을 조정하는 걸로 지지도가 높았지만 그만큼 자기 기반이 약했다. 그러나 랴오중카이는 쑨원 사망 이후 곧 암살당하며, 후한민은 그의 사촌동생 후이성이 랴오중카이 암살에 관여되었다는 이유로 일방적으로 소련으로 추방된다.
장제스는 쑨원의 후계자라기보단 그냥 신뢰했던 측근 중 한 사람으로 생각되었고 대권주자라기보단 그냥 군사실력자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나 쉬충즈 숙청, 중산함 사건으로 국민당을 영도하며 쑨원의 후계자를 자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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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산함 사건 직전의 왕징웨이와 장제스.
1925년, 쑨원이 죽자 왕징웨이는 장제스와 합작하여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을 구실로 외교부장 후한민, 군정부장 쉬충즈 등을 모두 숙청하여 광저우 국민정부를 장악하지만 군사적 권위를 확보하려는 과정에서 장제스와 불화를 빚게 되고 '''중산함 사건 과정에서 믿었던 장제스가''' 정변을 일으키고 탄옌카이, 리지선, 주페이더 등 군사실력자들이 모두 자신을 외면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고 모든 공직에서 사퇴, 프랑스로 외유를 떠났다.

2.3. 국민혁명반장전쟁


이후 국민당은 장제스의 주도 아래에 1926년 7월 국민당의 1차 북벌을 개시하였다. 당시 황푸군관학교 교장이자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주석으로 당권과 군권을 장악한 장제스우한, 난창, 상하이, 난징 등 주요 도시를 잇달아 점령했다. 이에 국민당 좌파와 공산당은 장제스를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로 떠났던 왕징웨이를 추대하여 장제스를 견제하려고 했는데 이것이 바로 영왕운동이다. 결국 왕징웨이는 4월에 중국으로 귀국하였는데 장제스는 왕징웨이에게 힘을 합쳐 공산당을 몰아내면 자신은 정치에 손을 떼고 군사적 업무만 관장하겠다고 합작을 제안했으나 왕징웨이는 장제스의 처지를 동정하면서도 그의 제안에 확답을 주지 않고 우한 정부에 합류했다.
결국 장제스는 4.12 상하이 쿠데타를 단행하여 독자적인 청당을 하여 공산당원들을 학살하고 난징 국민정부를 수립했다. 장제스가 설마 군사정변까지 일으킬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왕징웨이와 우한정부는 닷새가 지난 4월 17일에야 반격에 들어가 장제스를 출당시키고 장제스를 반역자이자 반혁명수괴라고 비난했다. 그리고 그의 목에 25만 위안의 현상금을 걸었다. 탕성즈저우언라이는 난징을 먼저 공격하자고 주장했으나 미하일 보로딘 등이 북벌을 강력히 주장해서 일단 난징과의 대결은 접어두고 왕징웨이는 4월 19일 2차 북벌을 선포했다.
왕징웨이는 펑위샹과 동맹을 맺어 장쭤린의 공격을 저지하려 했고 더 나아가 장제스의 배신에 대처하려 했지만 도리어 펑위샹은 왕징웨이를 위협(...)해 국민당 내부의 공산당을 축출할 것을 요구하였다. 거기에 공산당이 아예 국민당을 장악하기 위한 술수를 벌이는 것이 포착되자 경악한 왕징웨이는 국공합작 파기를 결정하고 분공정책을 취하는데 이후 그는 장제스보다도 더한 반공인사가 되었다. 그가 훗날 일본에 붙은 이유 중 하나도 공산당과 합작하는 항일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
한편 우한 정부 역시 재정적 곤란에 시달렸고 이로 인하여 여력을 상실한 왕징웨이는 우한 정부와 난징 정부를 합병하는 조건으로 장제스의 사직을 요구했는데 탕성즈, 장파쿠이의 공격과 장쭝창의 공격을 동시에 받던 장제스가 이를 받아들여 사직하면서 영한합작이 성립되고 우한 국민정부와 난징 국민정부는 합쳐졌다. 하지만 서산회의파가 왕징웨이를 맹렬하게 비난하였으며 왕징웨이는 후한민, 탄옌카이, 차이위안페이, 리례쥔과 함께 국민정부 상임위원에, 차이위안페이, 셰츠와 함께 특별위원회 상무위원에 선출되었으나 실질적인 권력이 없었다.
왕징웨이는 제대로 삐진 나머지 천궁보의 설득으로 우한의 탕성즈와 손을 잡지만 세력 확장에 눈이 멀어 다른 군벌들의 눈치따윈 안중에도 없던 탕성즈가 특별위원회의 권위를 생까고 안휘성을 침공하자 빡친 리쭝런, 바이충시, 주페이더, 펑위샹, 리지선 등이 협공해서 당계전쟁을 선포해서 탕성즈를 다굴 놓아 박살내버렸고 왕징웨이는 탕성즈를 버리고 달아나야 했다. 다시 동맹자를 잃은 왕징웨이는 다시 장제스랑 손잡기로 결정, 그의 복귀를 도왔으나 장파쿠이가 일으킨 장황사변에 이어 광저우 폭동이 일어나자 이에 원인을 제공했다는 비난을 받고 궁지에 몰려 1927년 12월 요양을 목적으로 다시 외유를 떠나고 장제스에게 이용만 당했다고 여겨 다시 반장을 외치게 된다. 이때 이론적으로 따로 노는 경향이 있던 간나이광은 개조파에서 이탈하여 미국 유학을 떠나버리는 등 세력에 타격이 있었다.
그러던 중 국민당의 2차 북벌 이후 편견회의 과정에서 장제스와 사이가 틀어진 군벌들이 연이어 반란을 일으켰다. 1929년 2월 광서파가 호남 사건을 일으키자 장제스가 토벌을 선포, 3월에 1차 장계전쟁이 발발했고 5월에는 펑위샹이 반란을 일으켜 1차 장풍전쟁이 벌어졌다. 장제스는 이를 모두 진압했지만 서산회의파가 꾸준히 반장세력을 지원하면서 9월 장파쿠이가 반란을 일으켜 2차 장계전쟁이 벌어졌고 10월에 쑹저위안, 스여우싼 등 서북계의 잔여세력들이 봉기하여 2차 장풍전쟁이 일어났으며 12월에는 근성있게 재기한 탕성즈가 들고 일어나 장당전쟁이 일어났다. 마침내 1930년 2월에 서산회의파쥐정, 셰츠, 쩌우루, 쉬충즈 등의 설득으로 펑위샹과 합작한 옌시산이 장제스 하야를 요구하며 반장 진영에 합류했고 4월에 중원대전이 발발했다. 왕징웨이는 1930년 7월 귀국하여 8월의 확대회의에 참여, 9월 베이핑 국민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정부위원에 선출되었으나 장쉐량이 장제스 옹호를 타전하고 나서면서 베이핑 국민정부는 11월 해체되었고 왕징웨이는 영국령 홍콩으로 도주했다.
1931년 탕산 사건이 발생하자 왕징웨이는 이번엔 개조파, 서산파, 광동파, 광서파를 모두 규합하여 광저우 국민정부를 수립하고 1차 양광사변을 일으켜 장제스에 맞섰으나 만주사변의 발생으로 난징과 광저우는 협력하게 되었고 왕징웨이는 자신을 무시하는 광동파에 빈정이 상해 아예 발상을 전환, 다시 장제스와 손잡기로 결정했다. 한편 이 시기 그는 군사력으로 외교적 노력이 좌절되는 사태를 여러번 목격하였고 결국 이로 인한 절망은 반제국주의를 추구하는 대신 제국주의와 타협하는 방향으로 비틀어지고 말았다.

2.4. 장왕합작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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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원장 겸 외교부장 시절 타임지에 실린 왕징웨이
1932년 1월 자신을 무시하는 광동파에 불만을 품은 왕징웨이는 어제의 적인 장제스와 협력하여, 장제스가 군사위원장에, 자신이 행정원장이 된다는 조건으로 개조파-친장파 합작을 성사하여 장왕합작의 시대를 열었다. 이로써 왕징웨이는 당권을, 장제스는 군권을 장악하고 1935년까지 두 사람이 난징 정부를 영도하였다. 하지만 장제스가 왕징웨이를 크게 견제했기 때문에 합작이란 말이 무색하게 왕징웨이의 권력은 매우 제한적이었고 자기 분야에 있어서도 장제스의 심복들에게 밀려 기를 펴지 못했다. 이때 왕징웨이는 나치 독일에 외교 방문을 하여 아돌프 히틀러와 친분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정치적 성향이 점차 극우적 성향으로 변하여 유럽 파시즘 계열의 극우파 세력을 새로이 조직하게 된다.
하지만 1931년 만주사변, 1932년 제1차 상하이 사변, 1933년 열하사변 등 일본의 도발이 연이어 이어졌고 일본은 화북분리공작을 벌이며 화북을 중국에서 독립시켜 괴뢰국으로 만들려고 시도했다. 일본과 전면전을 벌일 능력이 없던 국민정부는 일본에 계속 저자세로 양보할 수밖에 없었고 이 때문에 국내에선 국민정부의 대일정책에 대한 불만이 확산되었다. 왕징웨이는 1933년 8월 18일 외교부장 뤄원간당고정전협정에 불만을 품고 사직하자 외교부장을 겸임하며 <선안내 후양외 정책>이라 불리는 적극적인 대일 유화책을 전개하였다. 이걸 두고 공산당과 반장 군벌들은 국민정부의 친일성 운운하며 정치적인 공격 소재로 삼았으며 반일감정에 부풀어 오른 학생과 지식인들의 불만은 가중되었다. 하지만 중국이 일본에 맞설 기반이 전무한 상황에서 일본이 국민정부의 반일 여론 감독을 감시하며 경제적, 군사적 압박을 가하고 있었으니 국민정부가 표면상 반일 여론을 탄압하며 일본에 대한 공세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1935년 11월 1일, 5기 6중전회 개막식에서 왕징웨이는 '일본의 침략에 묵인하는 국민정부를 징벌한다'라는 명분을 가진 전직 군인 출신 기자가 쏜 세발의 총탄을 맞았고 신속히 병원에 옮겨져 수술을 받은 덕에 목숨은 건질 수 있었으나 당시 의료기술로 척추에 맞은 세번째 총알을 빼낼 수가 없어 독일까지 가서 치료했으나 끝내 제거하지 못했고 결국 이것이 골수종양으로 번져 그를 죽음으로 몰고갔다. 이후 그는 다시 요양과 치료를 위해 유럽으로 떠났다. 이 사건의 배후로는 장제스의 수하인 남의사의 수장 다이리가 지목되었으나 알고 보니 광동파 리지선천밍수의 소행이었고 원래 암살 목표는 왕징웨이가 아니라 장제스였으나 그날 장제스가 불참하면서 왕징웨이로 목표가 수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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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격 직후의 왕징웨이
이후 서안 사건이 발생하자 권력을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판단해 서둘러 귀환했지만 왕징웨이가 귀국하기도 전에 장제스가 풀려나면서 일은 다 끝나버렸다. 싱가포르와 마닐라를 거쳐 1937년 1월 14일 상하이를 통해 귀국한 이후 정계에 복귀, 상무위원회 주석에 추대되면서 외형적인 장왕합작이 복구되긴 했지만 공산당과 합작하여 항일을 주장하려는 장제스의 국공합작 정책에 반대하며 선안내 후양외 정책을 주장했다. 이때부터 왕징웨이가 친일파로서의 길을 준비했다고 보는것이 정설이다.

2.5. 혁명의 영웅에서 민족의 반역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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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 마우
장징후이
왕징웨이
도조 히데키
완 와이타야콘
호세 P. 라우렐
찬드라 보세
버마국 수상
만주국 수상
왕징웨이 정권 주석
일본 제국 수상
타이 왕국 왕자
필리핀 제2공화국 통령
자유 인도 임시정부 주석

형은 쉬운 길을 가십시오. 동생은 어려운 길을 가겠습니다.[6]

충칭을 탈출하기 직전 장제스에게 남긴 편지

그러던 중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줄곧 대일 주화론을 주장한 바가 있으며 난징 함락 이후 실질적인 수도로 기능하던 우한마저 함락되자 왕징웨이는 더 이상의 항전이 무의미한 걸 넘어 항전하는 것이 중국을 죽이는 길로 판단하였고 일본과의 비밀협상 끝에 1938년, 충칭을 탈출하고 하노이를 거쳐 상하이에 있는 일본군과 합류하며 저우포하이, 천궁보, 리시쿤 등과 함께 중화민국 난징 국민정부, 즉 왕징웨이(또는 왕자오밍) 정권을 수립하여 정부 주석 대리[7] 겸 행정원장에 오른다. 이 과정과 왕징웨이의 선택을 찬양한 밀도 있는 르포가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에서 발표되었다. 그 르포를 쓴 사람은 바로 박태원이었다. 월북을 했기 때문에 이런 친일 수필은 잘 이야기되지 않는다.
왕징웨이는 자신의 명망에 수많은 중국인들이 자신의 선택에 동조할 것이라 주장했지만 장제스에 적대적인 군벌들조차 왕징웨이를 무시했다.[8] 일본은 왕징웨이를 내세워서 장제스 정부를 무너뜨리고 왕징웨이와 협상하여 중국을 굴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화친파를 일소시켜 장제스 정권의 정통성만 굳건히 해주게 되어버렸다. 그리고 왕징웨이와 같이 합류했던 일부 인사들이 일본이 자신들을 괴뢰로 내세워 이용하려는 것을 깨닫고 분노하여 홍콩으로 탈출하여 왕징웨이와의 일본의 협정을 공개하여 그의 비겁함을 규탄함으로 왕징웨이의 평판은 땅에 떨어졌다.
그가 일본군과 화친하려고 한 이유에는 크게 세가지로 나누어지는데 첫번째는 권력욕에 사로잡혀 민족을 배반했다는 민족배반론(한간론), 충동적인 성격으로 판단을 그르쳤다는 실수론, 일본의 무자비한 침략으로 민중들이 고통받는 것을 볼 수 없었다는 고육지책(자기희생)으로 나서게 되었다는 자기희생론 등이 주어진다. 이 중 단순히 어느 한쪽만으로 판단하는것은 어려우며 왕징웨이가 여러번 권력투쟁과 냉혹한 국제정세로 인하여 좌절하게 되면서 그의 민족주의가 변질되게 되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대개 비판론이든 희생론이든 각자의 주장을 어느 정도 반영하며 실수론은 비판론이나 희생론에서도 상당히 인용된다.

2.6. 비참한 말로


"내가 충칭에 있을때 , 국민당 부총재, 국방최고회외 부주석으로 이 기관과 함께 옮겨 다녀도 안전에는 별 문제가 없었고 (중략) 패전하여 죽더라도 사후에 이름을 얻을 터인데, 왜 충칭을 떠났을까? 나는 20살 조금 넘어 혁명에 투신한 이후로 한번도 나 자신을 위한 계산을 한 적이 없다."

1940년 3월경. 왕징웨이의 회고


1942년경 왕징웨이의 음성
왕징웨이는 일본군과의 화친이 가능하다고 믿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일본내에서의 파벌은 국민당과 비교가 안될정도로 지독했다. 결국 여러번의 혼란과 당시 총리였던 고노에 후미마로의 무책임함이 더해져 결국 정권 수립은 매우 어렵게 진행되었다. 우선 정권이 발족하고 수개월이 지나고나서야 일본이 간신히 승인했고, 기존의 일본 괴뢰정권들은 왕징웨이에게 크게 반발했다. 결국 왕징웨이 정권의 몇차례의 권력 회복 시도는 모두 실패하고 일본군은 그의 이름으로 점령지에서 무척이나 잔인한 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왕징웨이의 유서라고 공개된 문서를 보면, 왕징웨이는 그래도 자신이 일본에 붙음으로 점령지 민중들의 삶을 지켜냈다고 자부한 모양이다.
이러한 와중에 왕징웨이는 1944년에 일본에서 골수암으로 사망했다. 사망 후 유언에 따라 쑨원의 곁에 안장되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장제스허잉친에게 무덤을 폭파시키라고 지시했다. 1946년 1월 21일, 허잉친의 밀명을 받은 육군총부 참모장 소의숙, 육군 총공병부장 마숭륙, 74군 군장 구유달, 난징시장 마초준 등이 왕징웨이 무덤 폭파 계획을 집행하였다. 이들은 왕징웨이의 시신을 파내 청량산에서 불태우고 왕징웨이의 무덤은 다이너마이트 150킬로그램을 동원하여 2차례에 걸쳐 폭파시켰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왕징웨이의 셋째 딸 왕문순이 왜 이렇게까지 하냐고 따지자 허잉친은 애매한 태도를 보이면서 답변하지 않았다. 이후 폭파에 참여했던 구유달은 왕징웨이의 망령이 자신을 괴롭힌다는 환상에 시달렸으며 국공내전 중 산동성에서 공산군과 교전하다가 갑자기 "왕 선생님!"을 연호하더니 권총으로 자살했다.
왕징웨이의 가족들도 처벌을 면치 못했는데 아내 천비쥔은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상하이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는데 국민당 정권이 대만으로 도피했지만 공산당도 천비쥔은 석방하지 않았고, 1959년 감옥에서 사망했다.
광동성장을 지낸 처남 진춘포는 사형과 재산몰수를 선고받았다. 괴뢰군 육군소장을 지낸 장남 왕문영은 사형이 예상되었으나 아버지 때문에 억지로 한 것으로 인정되어 징역 7년, 공권박탈 7년, 재산몰수를 선고받았다. 차남 왕문제는 광동교도총대 대대장을 지냈다가 이후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받았고 왕징웨이의 장녀 왕문성의 남편인 사위 하문걸도 징역 2년 6개월, 공권박탈 5년, 재산몰수를 선고받았다. 이후 왕문영, 왕문성, 왕문순, 왕문제는 모두 영국령 홍콩으로 망명하였으며 차녀 왕문빈은 인도네시아에서 천주교 수녀가 되었다.

3. 여담


오늘날 중국에서는 매국노의 대표격으로 간주된다. 간단히 말해 '중국의 이완용'인 셈.
민국 시절에는 정가에서 손꼽히는 미남 중 한 명이었다. 후세에는 주은래, 매란방 [9], 장학량 등과 함께 4대 미남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다만 후일 나이도 들고, 병도 들고, 상술했듯이 1935년에 얼굴에 총까지 맞아서 외모가 급격하게 망가졌다. 그래도 1943년 대동아회의 때 참석한 다른 외국인들로부터 놀라울 정도의 미남이라는 평가를 받는 등 죽기 전까지 젊을 때 명성을 떨쳤던 외모가 아주 죽진 않았다.
마오쩌둥과 개인적인 친분은 없었지만 국공합작시절인 1924년 마오쩌둥이 국민당 조직부장으로 일할 때 같이 사진을 찍은 적이 있다.# 사진에서 맨 뒷줄 왼쪽 두번째가 마오쩌둥이고 맨 앞줄 오른쪽 네번째가 왕징웨이다.
조선경비대 창설인원중 한명인 '이성가'라는 인물이 왕징웨이의 군대 출신이었다. 건군기 과정에서 창군 준비단계인 군사영어학교를 거쳐 110명의 군 경력자를 장교로 임관 시켰다. 원래는 중국군(광복군 포함), 만주군, 일본군이 1:1:1 비율로 임관할려고 하였으나 중국군(광복군)계가 보이콧 하여 실제로는 딱 2명만 중국계였다. 그중 한명은 오리지널 광복군 출신이고, 나머지 한명이었던 이성가가 바로 왕징웨이계이다. 그는 이후 8사단장으로 한국전쟁때 큰 공을 세웠다.
1920년 한국의 독립운동 역사를 다룬 역사서인 백암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의 서문을 써주기도 했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는 2명의 중국인의 서문이 실려있는데 하나는 이 왕징웨이의 글이고, 다른 하나는 당시 활동한 중국의 무정부주의 계열 운동가인 경정성(景定成)의 것이다. 국회도서관 소장 한국독립운동지혈사 판본의 설명 중

4.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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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신해혁명에 등장한 젊은 왕징웨이. 배우 여소군이 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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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소군은 영화 건군대업에서도 왕징웨이를 맡았다.
영화 <색, 계>의 시대적 배경은 왕징웨이 난징정부 집권기다. 도조 히데키와 함께 뉴스를 통해 잠깐 등장한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게임 폴아웃3DLC오퍼레이션 앵커리지의 최종보스격 인물인 징웨이 중공군 앵커리지 전선 사령관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이름의 한자 精衛도 똑같고, 왕징웨이가 친일파였다는 걸 감안한 건지 플레이어의 설득 스킬이 높을 경우 죽을 때 할복자살을 한다. 이건 뭐 일본군도 아니고...
호이4에서 중화민국이 파시즘화되면 중국의 지도자로 등장하는데, 명색이 한때 국민당의 영도자였고 쑨원의 후계자였던 사람인데 개인 초상화도 없이 웬 듣보잡 아시아 공통 인물 사진을 돌려쓰고 있다. 이를 보다 못해서 고유 초상화를 추가하는 모드도 나왔다. 중국을 중점으로 다룬 DLC Waking the Tiger가 나오면서 고유 초상화가 나왔다. 꼭 파시즘쪽으로 가지 않더라도 서안 사건 이벤트에서 중공과의 협력이 아닌 전쟁을 선택한다면 장제스를 대신해서 중화민국의 지도자가 된다. 다만 방어전시 안정도를 올려주는 유니크한 특성으로 이후의 중일전쟁에서 큰 도움이 되는 장제스와는 달리 아무 특성도 없기 때문에 전쟁에는 도움이 되지 못한다. 중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할 경우 해안가만 합병하고 내륙지역에 중화민국 괴뢰정부를 수립하는데 이때 중국 지도자로 나온다. 파시즘 일본에게 괴뢰화되면 당연히 파시즘 정부가 집권하니 당연한 일이지만. 근데 이때 국기가 북양정부 국기로 바뀌는 고증오류가 있다.
위 게임의 모드 카이저라이히에서는 독일 제국의 개입으로 국민혁명이 실패한 이후 프랑스 코뮌으로 망명했다. 국민혁명 직전에 랴오중카이 암살 미수 사건을 빌미로 장제스가 후한민 등의 우파를 전부 숙청한 상황에서 그 장제스가 암살당하면서 국민당의 우파는 사실상 궤멸상태에 들어갔고 왕징웨이, 랴오중카이 등이 주도하는 국민당 내 좌파인 '민생파'가 당권을 잡으면서 국민당의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다. 프랑스 코뮌의 영향때문인지 정치적 성향은 더욱 좌경화되어 급진사회주의로 분류된다. 쑨촨팡 사후 중국 남부가 아수라장이 되면 10년간의 망명 생활을 끝내고 고국으로 돌아와 다시 한번 북벌을 시작한다.
대한민국 드라마 자유인 이회영에서 등장인물로 나오는데, 배우는 정흥채.

5. 주요 경력


'''광저우 국민정부 역대 주석'''
[image]
국민정부 수립

초대

상무위원제 실시
왕징웨이
1925년 7월 1일 ~ 1926년 3월 23일
'''난징 국민정부 역대 행정원장'''
[image]
3대

4대

5대
쑨커

왕징웨이
(1932년 1월 28일 ~ 1935년 12월 16일)

장제스[10]
'''난징 국민정부 역대 외교부장'''
[image]
7대

8대

9대
뤄원간

왕징웨이
(1933년 8월 18일 ~ 1935년 12월 12일)

장췬
'''왕징웨이 정권 역대 주석'''
왕징웨이 정권 수립

초대[11]

2대
왕징웨이
(1940년 3월 30일 ~ 1944년 11월 10일)

천궁보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역대 위원장'''
[image]
군사위원회 신설

1대

2대
왕징웨이
(1925년 7월 3일 ~ 1926년 4월 7일)

장제스

6. 참고문헌


  • 왕징웨이 연구, 배경한, 일조각.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7. 관련문서



7.1. 인물



7.2. 사건



8. 둘러보기




[1] 한국식 독음 왕조명[2] 이곳은 현재 구이저우 성에 속한다.[3] 쑹자오런은 왕징웨이의 호세이대학 후배였다.[4] 다만 오늘날 학계에서는 량치차오의 우세라고 판단하고 있다. 애초에 입헌파의 상징이었던 신민총보에서는 량치차오 혼자 논쟁을 진행한 반면, 민보측에서는 장병린, 왕징웨이, 후한민 세 명이 일방적으로 두들겨 패는 형식이었기 때문에, 애초에 정상적인 토론이 진행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한쪽은 한 번 의견을 개진하는데 세 번을 반복해야 하고 한쪽은 한 사람의 주장을 세 번 비판하니 토론이 진행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입헌파측이 견지한 '제국주의의 간섭'과 '대다수 국민들의 의식 부족'에 대해서는 명확한 설명을 하지 못해 결국 입헌파의 주장을 완전히 반박하는 것에는 실패하고 말았다.[5] 사형이 선고되지 않은 이유는 민심을 안정화시키기 위함으로 추측된다.[6] 중국에서는 자신보다 나이 어린 사람에게도 존중의 의미로 형이란 표현을 썼다. 예컨대 장제스도 자신보다 한참 어린 장쉐량을 한경(장쉐량의 자)형으로 부르곤 했다. 한국에서도 성인 남성들 사이에서 '김형', '이형' 하는 식으로 서로를 호칭하기도 하는데 최근에는 보기 어렵다. 90년대까지 소설 등에서는 볼 수 있는 표현이었지만 이미 사회에서는 죽은지 한참 된 표현이 되어있었다.[7] 명목상 정부주석은 기존의 주석이었던 린썬인데 왕징웨이는 린썬에게 충칭에서 난징으로 와서 주석에 복귀해달라는 요구를 했지만 린썬은 당연히 이딴 괴뢰정부 따위는 씹었다.[8] 우페이푸, 돤치루이, 차오쿤의 경우 일본에 협력하는것을 거부했고 펑위샹, 옌시산, 리쭝런은 일본과 싸웠다. 중요한건 이 6명 모두 장제스와 사이가 안좋았거나 안좋은 적이 있었고 돤치루이의 경우 한때 일본의 지원까지 받았던 군벌이었다. 일본이 포섭할 수 있었던 인물은 기껏해야 재정부장이나 외교차장 정도를 지낸 잔챙이들 정도였다.[9] 유명한 경극 배우이다. [10] 왕징웨이가 신병치료를 위해 12월 16일 정식 사퇴하기 이전까지 행정원 부원장 쿵샹시가 대행.[11] 엄밀히 말해서 충칭의 린썬을 주석으로 추대한 상황이었으나 린썬이 괴뢰정부의 주석으로 취임할 리 없으니 왕징웨이가 행정원장 겸 주석 대리로 정무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