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장전쟁
1. 개요
중화민국 초기인 1929년~1930년, 국민혁명 완성 이후 국민정부 주석에 취임한 장제스의 패권을 분쇄하기 위해, 국민혁명 과정에서 국민당에 합류한 군벌들이 국민당의 반장파 정객들과 합세하여 일으킨 '''반란'''.
2. 배경
2.1. 군벌이 할거한 중화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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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당시의 중국 군벌이 지배한 영역을 표시한 지도. 적색 지역이 다 군벌들이 다스리는 땅이다. 광둥 쪽의 파란색이 국민당 정부. 광시 쪽의 파란색은 국민당에 합세한 군벌 리쭝런 등의 영지다. 산시는 옌시산, 산시 옆의 ㄷ모양의 영지는 펑위샹, 산둥과 만주를 차지한 것은 장쭤린, 우한 쪽은 우페이푸, 푸젠~저장은 쑨촨팡, 그외에 쓰촨의 류샹과 윈난의 룽윈 등이 보인다. 다만 소소한 오류가 보이는데 예컨대 하남성은 1925년 시점에서 우페이푸의 영역이었으며 국민혁명 이후 펑위샹이 국민혁명군 제2집단군 총사령에 취임하고 나서야 펑위샹의 세력권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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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벌 직후의 지도. 파란색을 난징정부, 만주가 장쉐량, 광서가 리쭝런, 그 외에 펑위샹, 옌시산의 이름이 보인다.[4]
문제는 위의 지도를 보면 한눈에 알 수 있듯이 군벌들이 차지한 땅이 전국시대의 각 제후국이 차지한 영토보다 넓었다는 점이다. 처음 북벌을 시작했을 때의 국민당 장악 지역은 광동성을 중심으로 한 남쪽에 있는 청색으로 칠해진 작은 지역에 불과했다. 국민혁명군은 북벌 과정에서 각 군벌들을 상대로 역치, 즉 깃발을 바꿔 달아 국민정부에 복종할 것을 요구했는데 쑨촨팡, 장쭝창처럼 듣지 않고 토벌된 이들도 있지만 상당한 숫자의 군벌이 국민정부에 합류했다. 이들은 말로는 삼민주의를 순봉하고 국민정부에 충성한다고 했지만 대다수는 과거의 군벌 근성을 버리지 못한 야심가들이었다.
그런 이유로, 회유에 따른 국민정부 합류 이후에도 대부분의 군벌들은 자신이 지배하는 영역을 그대로 유지하는 사실상 독자적인 통치를 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국민당으로 '''완장만 바꿔 단 셈'''이다. 여기에 무대는 인구가 많기로 유명한 중국. 그래서 내전이나 반란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정부군이나 반란군이나 수십만의 대군을 일으켜서 그야말로 치열한 교전을 펼쳤다.
2.2. 편견회의
국민당의 2차 북벌로 1928년 6월, 베이징을 점령한 장제스는 오랜 세월의 내전 동안 지나치게 비대해진 국민혁명군을 재편하는 데 착수하였다. 당시 국민혁명군은 84개 군, 3백 개 사단으로 팽창하여 군인의 수는 220만 명이 넘었다. 거기다 이 숫자는 장쉐량(張學良)의 동북군과 운남, 사천의 지방군을 포함하지 않은 숫자다. 여기에 연간 국가수입이 4억 5천만 원으로 이중 외채 지불액을 제외하면 3억 5천만 원 정도였는데 이중 3억 원이 군비로 사용되고 있었다. 때문에 1929년 1월, 국민정부는 난징에서 장제스를 위원장으로 편견회의(編遺會議)를 열어 군대 재편을 논의하였다.
그 결과,
1. 전국을 6개의 편견구로 나누어 통괄한다.
2. 전국의 육군병력은 보병 65개 사(師, 사단), 기병 8개 여(旅, 여단), 보병 16개 단(團, 연대), 공병 8개 단의 계 80만 명 이하로 한다.
3. 군비는 국가 총수입의 4할을 초과하지 않는다.
라는 내용을 결정하고 1월 25일 회의를 마쳤다. 이렇게 줄이고 줄였지만 80만이라는 수는 상비군으로서 세계 최대 규모였다. 그나마 이 이상은 줄일 수도 없었다. 그리고 실제로는 감축도 되지 않아 중국 전역에 200만 이상의 병력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자세한 것은 편견회의 문서 참조.
3. 전개
3.1. 리쭝런의 반란 (1차 장계전쟁 蔣桂戰爭)[5]
결국 계계군벌 리쭝런과 바이충시가 호남 사건을 일으켜 반장전쟁의 첫 타자로 나섰다. 1차 장계전쟁 문서 참조.
3.2. 펑위샹의 반란 (1차 장풍전쟁 蔣馮戰爭)[6]
1차 장계전쟁이 채 진압되기도 전에 펑위샹과 장제스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1차 장풍전쟁이 일어났다. 1차 장풍전쟁 문서 참조.
3.3. 중동로 사건
이 와중에 장쉐량의 봉천군벌과 소련 사이의 전쟁이 벌어졌다. 장쉐량이 경제위기 타개를 위해 중동로를 무리하게 회수하자 격노한 소련이 바실리 블류헤르 장군의 극동군을 출동시켜 봉천군벌을 박살내버린 것이다.
3.4. 2차 장계전쟁
두 번의 내전에 이어 서산회의파가 광서파와 펑위샹 사이를 오가고, 소련이 만주로 쳐들어오는가 하면 프랑스의 왕징웨이가 영도하는 개조파마저 군벌들과의 제휴에 회의적이었던 기존의 입장을 번복하고 장제스에 대한 무력투쟁을 외치는 등 중국 내부의 정세는 날이 갈수록 혼란해졌고 이 와중에 장제스에 대한 암살 시도까지 벌어지는 등 중화민국은 개판오분전으로 치달았다. 설상가상으로 9월에 장파쿠이가 계계군벌의 잔여세력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키면서 광동과 광서 지역이 다시 전화에 휩싸였다. 자세한 것은 2차 장계전쟁 문서 참조.
3.5. 2차 장풍전쟁
2차 장계전쟁의 혼란을 틈타 펑위샹의 잔여 세력이 봉기하면서 2차 장풍전쟁이 일어났다. 자세한 것은 2차 장풍전쟁 문서 참조.
3.6. 장당전쟁[7]
12월, 장파쿠이 토벌을 위해 동원되었던 스여우싼, 탕성즈가 반장파에 가담하여 난징을 공격하면서 장당전쟁이 발발했다. 장당전쟁 문서 참조.
3.7. 중원대전
결국 1930년, 마지막까지 조용했던 옌시산이 반장의 기치를 들면서 중원대전이 발발했다. 자세한 것은 중원대전 문서 참조.
4. 결말
1930년 11월 4일 펑위샹과 옌시산이 모두 하야하고 베이핑 국민정부가 해체되면서 6개월에 걸친 중원대전은 종식되었다. 이 대전으로 중앙군 100만, 반군 60만이 동원되었고 사상자는 중앙군 9만 5천, 반군 20만에 달하였다. 중화민국의 통일에 대한 대가는 너무나 컸던 셈이다. 하지만 군벌조직이 이것으로 모두 와해된 것도 아니어서 장쉐량, 천지탕처럼 장제스의 편에 섰던 군벌들이나 반장전쟁과 별 관계없던 사천의 류샹, 운남의 룽윈, 신강의 성스차이, 서북의 마가군벌을 비롯한 군벌들을 제외하고도 리쭝런, 옌시산 등은 결국 장제스와 화해하고 다시 세력을 구축하게 되었다.
국민정부의 위상과 장제스의 권력은 반장전쟁의 승리로 획기적으로 상승했지만 이후 장제스는 약법 제정 문제를 놓고 후한민과 충돌하다가 후한민을 감금하는 탕산 사건을 일으켰고 이에 반발한 광동파가 서산파, 개조파, 광서파와 연합하여 1차 양광사변을 일으켰다. 이 와중에 일본 제국이 만주사변을 일으키면서 중국 대륙의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다.
5. 여담
반장전쟁을 모티브로 한 보드게임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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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상단으로부터 시계방향으로 장개석(장제스), 하응흠(허잉친), 장학량(장쉐량), 이종인(리쭝런), 염석산(옌시산), 풍옥상(펑위샹)
중원대전이 가장 격렬했던 시기에 펑위샹 군대는 장제스를 상대로 하루에 1만 발 이상의 포를 쏘아대는[8] 엄청난 물량공세를 보인 바가 있는데 이후 중일전쟁 시기조차 중국군이 이 정도의 포탄을 쏘아댄 일은 없었다.(...)
6. 참고문헌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2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장제스 일기를 읽다, 레이 황, 푸른 역사.
- 장학량 정권 연구, 송한용 전남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 北伐完成 직후 蔣介石의 中央軍體制 確立 努力과 編遣會議, 배경한, 동양사학연구 48권, 동양사학회.
7. 관련문서
7.1. 인물
7.1.1. 난징 국민정부
7.1.2. 서산회의파
7.1.3. 개조파
7.1.4. 반장군벌
7.1.5. 친장군벌
7.2. 사건
7.2.1. 배경관련 사건
- 국민당의 1차 북벌
- 국공결렬
- 영한합작
- 당계전쟁
- 장황사변
- 광저우 폭동
- 국민당의 2차 북벌
- 편견회의(1929.1.1~1929.12.15)
7.2.2. 반장전쟁 중의 사건
- 호남 사건(1929.2.21)
- 1차 장계전쟁(1929.3.26~1929.6.27)
- 1차 장풍전쟁(1929.5.23~1929.7.12)
- 중동로 사건(1929.7.10)
- 2차 장계전쟁(1929.9.7~1929.12.19)
- 봉소전쟁(1929.9.19~1929.12.22)
- 2차 장풍전쟁(1929.10.11~1929.11.20)
- 장당전쟁(1929.12.5~1930.1.14)
- 중원대전(1930.4.5~1930.11.4)
- 창사 폭동(1930.6.11~1930.9.13)
7.2.3. 이후의 사건
- 제1차 초공작전(1930.12.19~1931.1.3)
- 탕산 사건(1931.2.28)
- 제2차 초공작전(1931.4.1~1931.5.31)
- 나카무라 사건(1931.6.27)
- 만보산 사건(1931.7.1)
- 제3차 초공작전(1931.7.1~1931.9.20)
- 만주사변(1931.9.18~1932.3.1)
- 제1차 상하이 사변(1932.1.28~1932.5.5)
- 장왕합작(1932.1)
- 제4차 초공작전(1932~1933)
- 열하사변(1933)
- 폐량개원(1933.4.5)
- 제5차 초공작전(1933.10.16~1934.11.10)
- 복건사변(1933.11.20)
- 대장정(1934~1936)
[1] 장개석-계군(광서파벌)의 전쟁이란 뜻이다.[2] 말 그대로 장개석-풍옥상 계열 전쟁.[3] 장개석-당생지 전쟁.[4] 지도에는 난징 10년의 지도라고 적혀 있지만 불과 1931년에 장쉐량이 만주사변으로 퇴갤하고 1930년 펑위샹이 반장전쟁으로 퇴갤하여 풍계군벌이 와해되는 등 이후 영토 변동이 심했으며 1937년 시점에서는 국민정부의 지배력이 초공작전, 대장정 추격, 국방건설 등을 통해 광동, 광서, 운남, 사천, 귀주에 이르게 되었다.[5] 장개석-계군(광서파벌)의 전쟁이란 뜻이다.[6] 말 그대로 장개석-풍옥상 계열 전쟁.[7] 장개석-당생지 전쟁.[8] 이 포는 소련의 지원으로 펑위샹의 무기고에 쌓여있던 물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