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양광사변
1. 개요
1936년 6월 1일 계계군벌과 월계군벌들이 광동파의 정신적 지주였던 후한민이 사망하자 항일을 구실로 장제스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킨 사건. 30만에 달하는 병력이 반장의 기치 아래에 결집되었으나 싱겁게 진압되었다. 6월 1일에 일어났단 이유로 6.1 사변이라고도 한다. 1차 양광사변이 상대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그냥 양광사변이라는 표현은 대개 이 2차 양광사변을 뜻한다.
2. 배경
2.1. 1차 양광사변 이후의 양광
1931년 2월, 장제스가 입법원장 후한민을 의견충돌로 감금하는 탕산 사건이 벌어지자 광동파, 광서파, 개조파, 서산회의파 등 반장세력들은 이를 계기로 광저우에 결집하여 광저우 국민정부를 수립하고 장제스 토벌을 선포했다. 그런데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이 발생하면서 중국은 거국적인 협력 분위기에 접어들었고 광저우 국민정부와 난징 국민정부는 장제스의 하야를 조건으로 재통합했다. 1931년 12월 장제스가 하야하고 1932년 1월 1일 후한민, 당소의, 천지탕, 리쭝런 등 60여명은 중국 국민당 비상회의와 광저우 국민정부를 취소하고 당권을 중앙에, 통치권을 통일된 난징 국민정부에 반납할 것을 선언했다.
또한 양광의 실력자들은 광저우에서 소집했던 4전대회의 결의에 따라 중앙집행위원회 서남집행부, 서남정무위원회, 서남군사위원회 분회를 설치하여 초공작전에 노력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표면상 양광의 실력자들은 중앙에 복종을 표하며 공산당을 토벌하는데 앞장서겠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공산당 토벌을 구실로 자신들의 영역에 특수한 통치기관을 설치하여 사실상 반독립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표면상으로는 후한민, 등택여, 쩌우루 등의 국민당 원로와 실력자들이 양광의 책임자였으나 이들 무력화되어 광서에는 리쭝런, 바이충시가, 광동에서는 천지탕이 마음대로 통치권을 행사했고 성 주석과 성 의회는 이들 군벌들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장제스는 초공작전에 모든 노력을 경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양광의 반독립적 상태를 일단 묵인하였다.
1935년의 법폐개혁 때도 양광은 11월 5일 독자적인 법폐개혁을 발표, 중앙세력의 침투를 저지하고자 했다.
2.2. 복건사변과 후한민의 죽음
그러던 중 1933년 복건에서 차이팅카이, 천밍수, 장광나이, 리지선 등 광동파와 복건의 실력자들이 장제스에 대항하여 중화공화국을 선포하는 복건사변이 발생했다. 이들은 공산당과 국민당 내부의 반장 인사들이 자신을 지지할 것으로 예상하였으나 반장 인사들 대부분은 복건사변을 반란으로 간주하고 성토할 뿐이었고 제5차 초공작전에 나서고 있던 장제스는 잘 닦여진 도로망을 이용하여 신속하게 대부대를 복건에 투입하고 중화공화국을 내부에서 분열시켜 순식간에 제압해버렸다. 광서파나 천지탕이 복건사변을 지지한 바는 없었으나 장제스나 신속하게 복건사변을 진압하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아 언제든지 자신들도 복건에서처럼 진압당할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1936년 5월 12일, 후한민이 뇌일혈로 급사하자 양광의 구심점이 되던 거물이 사라졌고 공공연하게 서남정무위원회를 해체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와 양광의 실력자들은 자신들의 보호막이 제거되었다고 느끼게 되었다. 이들의 우려를 뒷받침하는 정세적인 증거도 있었다. 중국 공산당의 대장정을 추격하기 위해 50만에 달하는 중앙군이 호남-운남-귀주 접경에 따라 양광에 대한 포위망을 형성했고 광서파의 수입수단인 아편을 단속하며 경제적으로 압박했다. 또한 양광 지역에 1935년에 도입된 법폐 사용, 서남 정치분회 폐지, 복건, 강서, 귀주에 주둔한 양광의 군대 개편, 현은의 중앙은행 양도 등을 요구했다. 여기에 중앙정부는 광동성 정부가 발행한 법폐를 법폐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발언을 공공연하게 하여 광동성민들의 광동성 정부에 대한 불신이 날로 높아졌으며 광동법폐의 가치가 폭락하였다. 또한 중앙정부의 해관과 우체국은 광동법폐를 수수하지 않으면서 양광의 경제적 붕괴를 초래하였다.
이에 양광의 실력자들은 후한민이 죽은 이상 장제스가 양광을 토벌할 것이라 여겨 광저우에 모여 항일을 구실로 선제적인 반장활동에 나서기로 결의했다. 마침 당시 중국에서는 일본의 톈진 무단 파병 사건과 더불어 1935년에 시작된 12.9 운동을 더욱 고조시켰다. 지식인들은 6월 1일 전국 각계 구국연합회를 성립하여 장제스에게 선안내 후양외 정책을 파기하고 항일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이렇게 전국 각지의 항일여론이 비등하자 양광은 항일을 반장의 구실로 사용하기로 하였다.
3. 전개
3.1. 중화민국 국민혁명항일구국군 선포
1936년 5월 29일 리쭝런, 바이충시, 천지탕이 연명으로 톈진의 일본군 증강에 반대한다는 통전을 보냈다.
리쭝런의 회고에 따르면, 2차 양광사변의 시작에 앞서 상당히 재밌는 일화가 있다. 천지탕은 장제스가 정말로 자신을 토벌할 생각이 있는지 떠보기 위해 난징으로 동생을 파견하여 장제스의 의중을 물었다. 장제스는 양광을 분열시키기 위해 광서파는 용서할 수 없으나 천지탕을 토벌할 생각은 없다고 천지탕에게 보증해주었다. 하지만 미신을 신봉하던 천지탕은 장제스의 관상이 1936년을 넘기지 못하고 죽을 관상이라는 말을 들었고 [1] 또한 만약 자신이 장제스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킨다면 '배반이 일어나 날개가 제거'되는 일이 벌어진다는 점괘를 듣게 되었다. 이 때문에 천지탕은 자신이 반란을 일으키면 장제스가 마침내 붕괴되어 죽게 될 것이라 여겨 반장의 뜻을 결의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이 점괘가 맞아떨어지긴 했다. 문제는 그 배신으로 망한게 장제스가 아니라 천지탕이었다는게 문제지.(...)
1936년 6월 1일, 양광의 실력자들은 서남정무위원회, 중국 국민당 서남집행부의 명의로 자신들이 장제스에 반대하며 북상해서 항일할 것이라는 <북상 항일 선언>을 선포하며 중국 국민당 중앙과 난징 국민정부에 항일을 요구하고 군사위원회를 설치했다. 또한 6월 7일 북상항일하겠다고 선언하고 휘하의 30만 군대를 중화민국 국민혁명항일구국군 1집단군과 4집단군으로 개칭하여 호남성으로 진군, 6월 12일 형양을 점령했다. 이는 명목상 항일이었지만 누가 봐도 알 수 있듯이 장제스에 대항한 반란이었다. 소련의 이즈베스티야 지는 장제스를 지지하며 양광사변에 대해 신랄하게 논평했다.
왕징웨이도 반대하는 입장을 발표했다.
하지만 동조하는 세력도 있어 복건사변으로 망명했던 차이팅카이가 귀국하여 합류했고 섬서성으로 퇴각한 중국 공산당도 즉시 호응하여 마오쩌둥과 주더의 명의로 6월 12일 양광의 북상 항일 선언을 지지한다는 공개전보를 타전하고 6월 13일 <당면한 정치 정세에 관한 결의>를 통과시켜 "서남파의 전쟁은 군벌의 단순한 내전이 아니라 어느 정도 민족 혁명의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된다. 오늘날에는 항일전과 반장전을 근본적으로 구분하기는 불가능하다."라고 입장을 확인했다. 운광영을 대표로 파견하여 내전중지, 일치항일, 민주통일 전선 구축을 비롯한 항일구국협정을 제안했다. 리쭝런도 찬성하고 항일투쟁을 위해 공산당과 협조하고 싶다는 뜻을 피력했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은 코민테른의 압력에 따라 8월 말부터 반장항일에서 핍장항일로 전략을 수정하고 반장 구호를 폐기했다. 이에 공산당은 남방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항일을 하기 어려워지니 리쭝런에게 장제스가 항일을 한다는 전제로 평화적으로 사변을 해결할 것을 주문하였다."나는 양광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데 반대한다. 양광에서 항일을 주장하며 내쟁을 일으키는 것 또한 전혀 올바르지 않다."[2]
3.2. 광동의 빠른 붕괴와 천지탕의 망명
7월 5일, 양광의 군세가 호남에 진격을 개시했다. 장제스는 즉각 강서, 복건의 중앙군을 광동 성경에 집중시키고 귀주, 사천의 중앙군을 강서로 이동시켰다. 이로 인해 사천의 장궈타오가 잠시 어부지리를 얻었다. 2차 양광사변에 대응하기 위해 7월 10일 중국 국민당 중앙위원회 제5기 2차 전원회의가 개최되었다. 7월 13일에 장제스는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이는 항일을 하지 않는다는 중앙에 대한 비난을 잠재우는 한편 장제스 역시 항일을 도외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밝히는 발언이었다. 장제스는 전면전을 피하고 양광을 분열시키기 위한 술책을 사용했다. 조사통계국 국장 다이리는 스파이 정개민을 광동에 침입시켜 광동군 2개 사단과 어뢰정 2척을 광동군으로부터 이탈시켰다. 이후 장제스는 7월 13일 서남정무위원회와 중국 국민당 서남집행부를 취소하고 광서군의 주력인 항일구국군 제1군 군장 위한머우를 광동 수정주임에 임명하였으며 천지탕의 본직과 겸직을 모두 해임했다. 또한 리쭝런과 바이충시는 각각 광서 수정주임과 광서 수정부주임으로 임명했다. 천지탕의 점괘대로(...) 장제스의 회유에 광동파 소속 공군 장령들이 즉시 비행기를 타고 난징으로 날아가 장제스에 충성을 맹세했으며 7월 8일 위한머우도 광저우를 떠나 난징으로 가서 광동 수정주임에 취임함으로 중앙에 충성을 맹세했다. 참모장 리한훈 역시 장제스에게 포섭되어 칭병하고 홍콩으로 피신해서 자신이 천지탕의 편에 설 뜻이 없음을 분명히 밝혔다."외교에 있어 최저한도는 영토, 주권의 완전함을 확보하는 것이다. (...) 만약 우리를 압박하여 위만주국을 승인하는 협정을 체결하고 영토, 주건에 손해를 주려고 한다면 그때가 바로 우리가 용인할 수 없는 시기이며 우리가 마지막으로 희생할 때다."
부하들이 연이어 배신한데에 이어 경제적 상황도 최악이었다. 1936년 6월 시점에서 광동법폐는 100 홍콩달러와 172원으로 교환할 수 있었으나 7월 초에 198원으로 폭락했고 이어 220원까지 폭락하여 광동성은 유례없는 인플레이션에 시달려 성민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다. 미가폭동으로 아예 식량위기가 찾아오자 천지탕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7월 17일 자정, 리쭝런을 자택에 초대해 자신은 하야하고 곧 떠날 것임을 밝히고 해산 비용으로 현금 20만 원을 건낸 다음에 7월 18일 하야를 선언하고 자신이 재산을 은닉해둔 영국령 홍콩으로 망명했다.
광동을 장악한 장제스는 광서파를 회유하기 위해 리쭝런을 광서 수정주임에 임명했다. 이에 리쭝런도 일단 반장을 그만두고 광서로 돌아갔다. 장제스는 초공작전에 투입 중이던 후쭝난[3] 의 군대를 호남에 진주시키고 위한머우에게 광동의 지배권을 맡긴 다음에 쑹쯔량을 파견하여 광동의 경제개혁을 집행했다. 8월 11일, 장제스는 비서 천부레이를 대동하고 비행기 편으로 국민당의 1차 북벌이 선포된지 10년 만에 광저우를 방문하여 황포군관학교에서 투숙했다. 또한 광동의 정객들을 회유하는 한편 광서파 처리를 준비했다.
3.3. 광서의 항복
광동은 빠르게 진압되었고 광서도 일단 물러섰으나 장제스는 반기를 든 광서파를 놔둘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강경한 무력진압은 19로군의 잔당을 비롯하여 반장파들의 봉기를 야기할 수 있으므로 장제스는 다른 방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장제스는 바이충시에게 해외 시찰을 명령하고 리쭝런을 군사위원회 상무위원으로 임명하여 난징으로 불러들었다. 이것이 자신들을 숙청하려는 술수로 간주한 리쭝런과 바이충시는 모두 거부했다. 이에 장제스는 리쭝런을 군사위원회 상무위원에 재임명하고 바이충시에게 절강성 주석 자리를 주었으며 황소횡에게 광서 수정주임 자리를 주어 광서파의 내분을 꾀했다. 광서파는 이에 반발하여 10만명의 군대를 소집하여 장제스에 대항한 반란을 소집했다.
8월 11일부터 광저우를 방문 중이던 장제스는 서두르지 않고 광서를 봉쇄한 다음에 위협폭격과 항복을 선동하는 전단지를 살포했다. 이는 장제스가 광서에서 무리하게 전투를 벌이고 싶지 않았으며 당시 중국에서 항일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았기 때문에 내전을 벌이기 시기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장제스는 리쭝런에게 광서 수정주임 자리를, 바이충시에게 군사위원회 상임위원 자리를 주면서 광서의 통치권을 보장하고 매달 200만 원의 경비를 제공하겠다는 관대한 조건을 내밀며 평화적인 해결을 제시했다. 광서파 역시 일치항일 주장이 팽배한 가운데 끈질기게 반장을 주장할 수 없었으므로 장제스가 관대한 조건을 제시하자 이를 수용하여 9월 17일 장제스와 리쭝런이 광저우에서 만나 광서가 중앙에 복종할 것을 선언하면서 2차 양광사변은 종결되었다.[4]
4. 결과
중원대전으로 펑위샹 세력이 완전히 몰락하고 옌시산도 더 이상 장제스에 개기지 않게 되었으며 만주사변과 열하사변으로 장쉐량을 비롯한 봉천군벌이 몰락하게 되면서 마지막까지 위협적인 반장세력으로 남아있던 양광은 이렇게 장제스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이제 중화민국에서 장제스에게 저항할 수 있는 군벌들은 모두 제거되었고 난징 국민정부의 영향력은 사천, 운남, 귀주를 비롯한 중국 서부의 오지에까지 침투하여 중앙군이 초공을 명목으로 서쪽으로 진출하고 성정부와 경제개혁을 단행하게 되었다. 하지만 불과 몇달 후인 12월 12일 서안 사건이 터지면서 중국은 뒤집히게 된다.
한편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39년, 천지탕은 1200만 원을 국고에 기부하는 조건으로 용서를 받고 장제스에게 충성을 맹세한 다음에 다시 귀국할 수 있었다.
5. 매체에서
Hearts of Iron 시리즈에서 이벤트 형식으로 구현되어 있었다. 이 이벤트가 발동되면 독립정권으로 남아 있는 광동성을 흡수할 수 있다. 하지만 호이4에서는 가차없이 사라졌고 중국 쪽을 더 풍부하게 만든 Waking the Tiger DLC가 나온 후에도 구현되지 않았다. 다만 중국 쪽에서 나온 모드인 8년 항전 모드에서는 충실히 구현되어 있다. 정치력을 소모하여 광동과 광서를 매수할 수 있는데 재수가 좋으면 양광을 모두 합병할 수 있지만 재수 없으면 정치력만 소모하고 매수에 실패한다. 당연히 광동이나 광서 한 성만 매수성공하는 경우도 생긴다.
6. 참고문헌
- 나가노 히로무, 서안사변(서울: 일월서각, 1982).
- 배경한, 왕징웨이 연구 : 현대 중국 민족주의의 굴절(서울: 일조각, 2012).
- 신승하, 중화민국과 공산혁명(서울: 대명출판사, 2004)
- 조너선 펜비, 장제스 평전 : 현대 중국의 개척자(서울: 민음사, 2014)
- 중국공산당중앙당사연구실, 중국 공산당 역사 1권 상(서울: 서교출판사, 2016).
- 강진아, 「1930년대 廣東省의 輸入米 課稅論爭과 南京政府」 『東洋史學硏究』 75(2001).
- 강진아, 「1930년대 中國 廣東省의 화폐통일정책의 붕괴과정: 외환위기와 소양권(小洋券)」 『經濟史學』 30(1) (2001).
7. 관련문서
7.1. 인물
7.2. 사건
- 편견회의(1929)
- 반장전쟁(1929~1930)
- 제1차 초공작전(1930.12.19~1931.1.3)
- 탕산 사건(1931.2.28)
- 제2차 초공작전(1931.4.1~1931.5.31)
- 1차 양광사변(1931.5.27~1932.1.1)
- 나카무라 사건(1931.6.27)
- 만보산 사건(1931.7.1)
- 제3차 초공작전(1931.7.1~1931.9.20)
- 류탸오후 사건(1931.9.18)
- 만주사변(1931.9.18~1932.3.1)
- 3차 장왕합작(1932.1)
- 마옥산 사건(1932.1.18)
- 제1차 상하이 사변(1932.1.28~1932.5.5)
- 송호정전협정(1932.5.5)
- 제4차 초공작전(1932~1933)
- 열하사변(1933)
- 당고정전협정(1933.5.31)
- 폐량개원(1933.4.5)
- 제5차 초공작전(1933.10.16~1934.11.10)
- 복건사변(1933.11.20)
- 대장정(1934~1935)
- 하북 사건(1935.5.2~1935.5.24)
- 장북 사건(1935.6.5)
- 하매 협정(1935.6.10)
- 돈목방교령(1935.6.10)
- 진토 협정(1935.6.27)
- 타다 성명(1935.9.24)
- 히로타 3원칙(1935.10.4)
- 왕징웨이 저격 사건(1935.11.1)
- 법폐개혁(1935.11.4)
- 중미은협정(1935.11.13)
- 기동사변(1935.11.25)
- 12.9 운동(1935.12.9)
- 동정항일(1936)
- 수동사변(1936.11.14)
- 7군자 체포 사건(1936.11.23)
- 서안 사건(1936.12.12)
- 루거우차오 사건(1937.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