뤄원간 사건
1. 개요
1922년 11월 18일, 북양정부 왕충후이 내각의 재정총장 뤄원간이 국고를 이용해 사익을 추구한 혐의로 불법체포된 사건을 말한다.
2. 배경
1922년 1차 직봉전쟁 이후 베이징을 장악한 차오쿤과 우페이푸의 직예군벌은 자신들의 집권을 정당화할 겸 자유주의 지식인들과 구 국회의원들이 주장하던 구 국회와 약법을 회복하는 법통중광을 이루고 안휘파가 옹립한 대총통 쉬스창을 축출한 후 리위안훙을 새 총통으로 추대했다. 이로 인하여 남방에서 호법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쑨원은 더 이상 총통을 자처할 명분이 없어졌으며 후스, 차이위안페이, 리다자오 등 베이징의 지식인들은 <호인정부론>을 내세우며 훌륭한 인물들로 정치를 하면 정치가 잘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하였다.
하지만 리위안훙의 총통 복직에 대해서 쑨원은 인정하지 않았으며 봉천군벌의 수장 장쭤린, 안휘군벌의 최후의 실력자 루융샹 등이 모두 인정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취했다. 또한 탕지야오, 루룽팅 등 서남군벌들도 베이징의 새 정부의 정통성을 무시하고 연성자치론을 주장했으며 구 국회에서도 광동의 호법국회에서 보선된 '민팔의원'를 비롯한 상당수 국회의원들은 복구된 국회에 합류하지 않았다. 후스 등은 국무총리 왕충후이에게 남북화의를 실시하자고 제안했으나 왕충후이는 직예군벌의 눈치를 보느라 이를 행하지 않고 자유주의 지식인들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 여기에 1922년 7월부터 월급지불 정지 사태가 터지면서 5개월 넘게 급료가 밀린 교직원들의 항의가 이어졌고 교통총장 고은홍이 교직원들을 모욕하는 사태가 발생하면서 여덟개 국립대학의 교장들이 모두 항의사퇴하고, 육군부, 참모부, 사법부, 내무부, 농상부 등 각 부의 공무원과 군인들도 모두 파업했다.
여기에 왕충후이 내각은 인사 문제로 국회와 극심한 갈등을 빚고 있었고 왕충후이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하야하겠다는 뜻을 밝혔으나 리위안훙의 필사적인 만류로 마지못해 총리로 근무 중이었다. 여기에 재정정책을 해결하려던 왕충후이를 의회는 내외채 모집시 반드시 국회의 의결을 거치게 해야 한다는 동의안을 상정하려고 하면서 견제하려 했고 내각 붕괴는 시간문제로 보였다.
3. 전개
3.1. 뤄원간 체포
그러던 중 1922년 11월 18일, 한밤중에 재정총장 뤄원간과 재정부 고장사장(庫藏司長) 황체렴(黃體濂)이 긴급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베이징 경찰총감은 중의원 의장 우징롄과 부의장 장백렬이 뤄원간을 리위안훙 총통에게 고발하고 총통이 긴급체포령을 내렸기 때문이었다고 설명했다. 이는 11월 14일, 뤄원간이 국차관단(國借款團)의 대표로 위탁된 양의은행과 체결한 오국차관합동(奥國借款合同)이 국회의 의결을 거치지 않은 불법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중화민국은 과거 청나라부터 위안스카이 시절까지 오스트리아-헝가리로부터 총 410만 파운드의 차관을 빌린 적이 있었는데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면서 이에 대한 상환을 거부하였다. 이후 오스트리아 공화국이 출범하자 북양정부는 오스트리아와 다시 차관 상황에 대해 협의하고 있었다. 뤄원간은 오스트리아에 이자를 합쳐 총 577만 7190파운드를 새로운 채표로 교환, 연리 8리(厘)로 쳐서 10년에 걸쳐 상환하기로 합의한 상태였다. 하지만 국회는 이를 국회를 무시하고 뤄원간이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자행한 불법행위로 간주하였다.
이어 중의원은 <뤄원간사판안(査瓣安)>을 채택하고 뤄원간의 죄를 다음과 같이 거론하였다.
- 1. 거액의 국가이권을 상실하면서 국회에 제교(堤交)하여 의결을 거치지 않았다.
- 2. 합동 내용에는 총통의 비준, 국무회의의 통과를 거쳐 첨자(簽字)하기로 되어 있는데 이와 같은 절차를 거치지 않고 사사로이 첨자하였다.
- 3. 문제의 오국차관은 파리회의에서 패전국인 오스트리아가 승전국인 중국에게 배상하는 형식으로 무효가 되었으므로 새로운 채표(債票)로 교환해줄 필요가 없다. 그런데도 문제의 합동을 첨자한 것은 뤄원간이 오스트리아 차관단으로부터 거액의 수회(收賄)를 받았기 때문이다. 수회의 증거는 화의은행이 발행한 각각 8만, 3만, 5천 파운드 짜리 수표이다. 특히 8만 파운드 수표에는 재정부의 부인(部印)과 뤄원간의 친필 서명이 있다.
3.2. 내각의 항의와 1차 반전
하지만 뤄원간의 죄가 전부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의 체포가 적법한 절차를 밟지 않은 불법체포였다. 현직 각료를 체포하시 위해서는 사법부가 간여해야 했으나 총통은 사법부를 무시하였으며 중의원 역시 의결을 거치지 않고 원장과 부원장 단독으로 원인(院印)을 사용하여 각료체포를 촉구하였다. 이에 따라 국무총리 왕충후이와 내각은 총통에게 엄중하게 항의하면서 문제의 오국차관합동은 국무원의 비중을 거친 것이므로 뤄원간이 사사로이 첨자한 것이 아니고, 또한 법정수속을 무시한 각료의 체포에 대한 유감 성명을 발표하라고 요구했다. 리위안훙 총통은 불법체포를 인정하고 자신이 체포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는 변명을 하였으나 끝내 유감성명을 내지 않았다. 이는 내각 각원 중에서도 국회와 가까운 보정파 각원들이 합동안이 총리에게만 보고되었지 국무회의 의결을 거치지 않았으므로 내각에도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며 중의원을 지지하였고 중의원 의원들도 유감성명의 발표에 적극 반대하였기 때문이었다. 한편 중의원은 뤄원간사판안에 이어 합동취소안을 압도적인 찬성으로 통과시켰으며 의장단의 불법행위는 불문에 부쳤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났다. 검찰청의 조사 결과 뤄원간의 뇌물 수수 혐의가 혐의 없음으로 드러난 것이다. 증거로 채택된 3만 파운드와 5천 파운드 수표는 협상에 참여했던 이탈리아 자본가에 대한 수고비였지 뤄원간과 아무 관계가 없었으며 8만 파운드 수표 역시 재정부가 정식으로 수령하여 교통부에 지급한 것으로 뤄원간의 소유가 아니었다. 중의원은 주장은 뤄원간이 뇌물을 받고 오스트리아에 갚지 않아도 될 차관을 갚게 하였다는 것이었는데 기본 전제인 뇌물 수수가 무혐의로 밝혀짐에 따라 사태는 급변하였다. 11월 22일, 우페이푸가 리위안훙에게 항의전보를 보내서 불법체포를 비난하였고 리위안훙은 뤄원간의 보석을 허락하였다. 뤄원간은 검찰청에서 석방되어 총통부 예관처(禮官處)에 머물면서 재판을 받게 하였다. 또한 각의는 중의원이 뤄원간사판안에 대해, 꼬우면 탄핵수속을 밟으라면서 사판 요구를 되돌려보냈다.
또한 이 사태의 본질이 정쟁에 있음을 간파한 베이징, 톈진의 언론은 뤄원간 체포의 위법성을 문제삼았다. <국민일보>는 기소수속도 없이 각원을 체포한 것을 비판했으며 <노력> 역시 국회와 총통을 비판했다. 후스는 아예 뤄원간의 혐의 자체가 무고일리가 틀림없다고 주장하였다.
3.3. 2차 반전과 내각의 붕괴
하지만 뤄원간의 체포는 처음부터 중의원과 결탁하여 총통이 되고 싶었던 직예군벌 천보파[1] 의 수장 차오쿤과 긴밀히 연계되어 있던 것이었다. 따라서 11월 23일, 차오쿤은 전보를 보내 뤄원간이 뇌물은 받지 않았다 하더라도 합동안의 내용이 중국에 큰 손실을 초래하며 국무회의와 국회동의를 거치지 않은 독직의 혐의가 있다고 비판하고 특별법정을 통해 철저하게 규명할 것을 요구했다. 차오쿤은 국고 손실에 대해 다음과 같은 예를 들었다.
- 1. 원래의 차관은 일부 외에는 4,5리의 낮은 이율이었으나 신차채표는 일률적으로 8리로 책정하였다.
- 2. 오스트리아와 선전포고한 기간은 이자도 물지 않아야 하는데 그 기간까지 쳐서 복리로 계산하여 채무가 증가하였다.
- 3. 원래의 치관 중 일부는 군수품 구매차관으로 60여만 파운드의 선금을 준 채 전시관계로 물품을 인도받지 못했는데 이번에 군수품구매차관을 취소하면서 선금까지 포기하였다.
사태가 이렇게 치닫자 우페이푸는 개각 지지를 철회하고 리위안훙 총통에 대한 옹호와 차오쿤에 대한 복종을 선언하고 뤄원간 사건에 더 이상 개입하지 않겠다는 통전을 쳤다. 결국 11월 25일, 차오쿤을 지지하는 보정파 각료를 제외한 나머지 관료들이 전원 사직하였고 이로써 자유주의 지식인들의 기대를 모았던 호인내각은 붕괴되었다.
3.4. 결국 무죄
언론과 지식인들은 뤄원간 사건에 시종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후스는 결국 오스트리아 차관은 갚아야 할 물건이라고 주장하면서 중의원의 취소결의안을 비판하고 이번 사건을 계기로 호인정치가 인격적으로 믿을 수 있는 것으로 판명나길 기대했으나 결국 내각이 붕괴되면서 그의 기대는 무산되었다. 차오쿤과 직예파 독군들, 중의원의 기세에 눌려 불법체포는 끝내 조사되지도 못했으며 뤄원간의 뇌물 수수 혐의에 대해서만 조사가 행해졌다.
1923년 1월 11일, 검찰청은 뤄원간의 범죄혐의가 부족하며 행위가 범죄를 구성하지 않는다고 판명하고 뤄원간에게 불기소처분을 내려 그를 석방하였다. 또한 차오쿤이 주장한 국고 상실 혐의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반박하였다.
- 1. 3만 파운드와 5천 파운드 짜리 수표는 각각 안리양행(安利洋行) 총리와 매판(買瓣)의 수속비다. 8만 파운드 짜리 수표는 재정부와 오국차관단의 차관총액 계산법의 차이에 따른 차액의 일부로서 재정부가 정식으로 수령하였고 재정부는 이를 66만 8천원으로 계싼하여 그중 50만원을 교통부에 지급, 광구철도차관 상환에 쓰도록 하였으며 나머지는 중국은행에 입금시켰다. 따라서 뤄원간의 수조 혐의는 성립하지 않는다.
- 2. 합동의 내용 중 총통의 비준과 각의의 통과를 거친 후 첨자하기로 규정하고 실제로 이러한 절차를 밟지 않은 것은 위법이기는 하지만 범죄를 구성하지는 않는다.
- 3. 파리회의에서 오국차관을 중국측에 배상금으로 주어 무효화한다는 규정이 없으므로 이를 상환할 의무가 있는데다가 또 전후 영토변경으로 오스트리아인이 이탈리아 국적을 갖게 되어 이탈리아인의 차관 채권 소지가 75%, 나머지는 영국, 프랑스 양국인이 소지하고 있으므로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3국인에게 상환을 해야 한다. 게다가 중국의 관세증가를 규정한 조약에는 아직 첨자하지 않고 있는 이탈리아, 프랑스 양국 공사가 이 차관의 상환을 조건으로 첨자하겠다고 누차 독촉하였으므로 관세증가를 위해서도 불가불 문제의 합동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연 8리의 이자를 복리로 계산하여 채무 총액이 늘어난 것은, 그동안 만기가 넘은 채 원리금 상환을 하지 않은 부분에 대하여 오국차관단 측이 고율의 이자를 요구한 것을 8리로 낮추어 조정하면서 기타 부분까지 덩달아 8리로 올라가게 됨으로써 손실이 커진 것은 사실이나 즉시 현금으로 상환할 능력이 없는 중국 측으로서는 불가피한 결정이었다. 또 복리의 계산법은 선례도 있으므로 부당한 것은 아니었다. 또 선금을 포기하면서까지 군수품 구매차관을 취소한 것은 그렇게 하는 편이 이 차관을 존속시키는 것보다 유리하기 때문에 취해진 조처였다. 요컨대 재정부는 상대방과의 교섭과정에서 국익에 최대한으로 손실을 줄이려 노력했고 이러한 노력이 어느 정도는 문제의 합동에서 반영되었다. 따라서 자기 이익을 도모하기 위하여 국가에 손해를 끼쳤다고 볼 수 없으므로 범죄를 구성하지 않는다.
3.5. 2차 체포와 학생분규
검찰청의 조사와 이와 같았음에도 새로 입각한 장소증 내각의 교욱총장 팽윤이(彭允彝)가 1월 15일, 사건의 재심을 요구함에 따라 뤄원간은 또 다시 체포되었다. 1차 체포의 불법문제를 퉁치고 넘어간 것도 문제였지만 사법부랑 관계도 없는 교육총장의 요구에 따라 체포가 이루어진 것은 사법을 완전히 무시한 일이었다. 베이징대학 총장 차이위안페이는 항의 표시로 1월 17일, 사직서를 정부에 제출하였고 교육총장이 사법독립에 간섭하고 인권유린을 자행하였는데 이것이 각의에서 받아들여진 것에 대해 항의하였다. 또한 이는 단순히 항의성 사직이 아니라 즉각 베이징을 떠남으로써 진심임을 드러냈다. 이어 그는 <뤄원간의 불법 체포에 대하여 알리는 글>을 발표하여 자신의 항의가 정치개혁의 희망이 없는 북양정부에 대한 불인(不認)의 뜻임을 드러내어 여론의 호응을 받았다.
1월 18일, 베이징의 대학생들이 대회를 열고 차이위안페이의 사직을 만류하여 중의원에 내각동의안을 표결에 부칠 때 교육총장 팽윤이의 임명을 부결할 것을 청원하기로 결의하였다. 중의원은 학생들의 요구에 동의를 표하는 등 팽윤이의 임명 부결에 대해서 대체적으로 낙관적인 분위기였다. 하지만 1월 19일, 중의원에서 내각동의안이 심의되고 있을때 베이징의 대학생 1천명이 중의원에 청원하기 위해 나타나자 경찰들이 학생들을 공격하여 수백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고 팽윤이의 임명 동의안은 끝내 비준되었다. 이에 대해 베이징학생연합회가 조직되어 팽윤이 총장에 대한 임명 불인과 중의원장 우징롄의 처벌을 요구하였다. 결국 베이징 학생들의 분노는 국회 불인정과 팽윤이 타도 운동으로 이어졌다.
4. 결과
이로 인하여 북양정부의 정치개혁에 대한 자유주의자들의 희망을 반영한 <호인정부론>은 무참하게 짓밟혔다. 앞서 본 바와 같이 차이위안페이가 불합작주의를 천명하면서 앞으로는 북양정부와 상종을 하지 않겠다고 밝혔고 이에 대해서 천두슈는 비민중적이라고 혹평하였으나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차이위안페이의 불합작주의를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운동에 비견하면서 크게 칭찬했다. 중국 국민당의 사오리쯔는 아예 베이징의 모든 지식인들이 북양정부에 대한 불합작운동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북양정부를 뒤엎기 위한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민당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베이징의 지식인들은 크게 호응하지 않았으나 이어 차오쿤이 총통이 되기 위해 '최고문제'를 거론하기 시작하고 1923년 6월 회선 사건이 발생함에 따라 북양정부에 대한 지식인들의 기대와 희망은 완전히 사라졌다. 이로 인하여 북양정부는 쩡치를 비롯한 중국 청년당 등 일부 국가주의 정파로부터 공산주의의 대안 정도로만 제한적인 지지를 받게 되었고 나머지 정파들에게는 철저히 외면당하다가 국민혁명으로 참혹하게 무너져 내리고 만다.
5. 참고문헌
- 제1차 직봉전쟁후 자유주의지식인의 북경정부관 - 호인정부론과 나문간사건을 중심으로, 윤혜영, 동양사학연구 26호, 동양사학회.
- 조곤의 부패선거(1923년)과 법통문제의 종식, 윤혜영, 동양사학연구 28호, 동양사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