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론파
1. 개요
동방 가톨릭 교회의 한 일파로, 공식 명칭은 '''안티오키아의 시리아 마론 교회(ܥܕܬܐ ܣܘܪܝܝܬܐ ܡܪܘܢܝܬܐ ܕܐܢܛܝܘܟܝܐ)'''이며 안티오키아 총대주교를 수장으로 한다. 기원은 5세기경 수도자이자 레바논 지역의 주교인 성 마론에서 찾을 수 있다. 오늘날 레바논과 시리아에서 가장 유력한 기독교 공동체이며 레반트와 키프로스에 주로 분포한다. 키프로스의 마론파 신자들은 독자적인 아랍어 방언을 쓰고 있다.
영어식 표현의 '''철자'''에 영향받아 마로니트 교회라고 쓰기도 한다. 만약 영어식 발음을 음역한다면 마러나이트, 혹은 매러나이트라고 해야 한다. '마로니트'는 다분히 영어 철자에 영향받은 표기.
가톨릭 교회의 입장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일파중 하나. 아람어를 비롯한 초대 교회들의 전례적 흔적을 듬뿍 간직한 일파로, 지리적인 고립성으로 인해 잠시 교류가 되지 않았을 뿐 교황청과의 종교적 일치가 '공식적'으로는 끊어진 적이 없는 동방 가톨릭 교회이다.[1] 로마 가톨릭의 입장에서는 초대 교회들의 전례를 연구하는 데에 굉장한 도움이 되는 교회로, 자치권을 최대한 인정해주는 중이다. 마론파의 대주교로서 스스로 안티오키아 총대주교를 뽑으면 교황이 인정해주는 식으로 공인하는 게 대표적인 예.
2. 역사
[1] 실제로는 지리적인 요인으로 어쩔 수 없이 끊어졌다. 물론 교황청이 잊었을 뿐 마론파는 교황청의 우위를 저버린 적이 없음은 맞다.
하지만 당시 마론파에 속한 공동체들은 칼케돈 신조를 지지하였다. 다만 이후 칼케돈파와 단성론의 절충안인 단의론을 지지하기도 하였다. 결국 시리아에서 다수파인 비칼케돈파로부터 탄압을 받아 은둔적인 수도 공동체의 성격을 띄었다. 7세기 말엽에 이르러 지중해 동부 연안 지역에 이슬람이 전파되자 마론파는 이를 피해 레바논 산맥 안으로 숨어들었다. 이 때 마론파를 이끈 지도자는 비잔틴 교회로부터 최초의 마론파 주교로 임명받은 요한 마론(John Maron, 혹은 Joannes Maro : ? ~ 707)이었고, 그의 지도 하에 여러 기독교 유파들이 마론파 교회로 통합되어 이슬람 세력에 함께 저항했다. 이슬람 세력의 공격을 막아낸 마론파는 685년에 비잔틴 교회에서 분리해 나와 독자적인 교회를 세웠으며, 직접 주교를 임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러한 특성과 지리적인 고립성으로 인해 이슬람교 세력이 시리아를 정복한 이후 마론파의 존재는 오랫동안 잊혀졌다. 장장 약 400년간 로마 교회의 기억에서 사라졌던 마론파는 1099년, 거의 12세기에 들어서야 제1차 십자군 원정 당시 서유럽 군대가 레바논을 통과할 때 이들을 맞이하러 나옴으로써 그 존재가 기독교 세계에 다시 알려졌다. 이 때 이래로 마론파는 서유럽 기독교 세계와 관계를 맺었다. 그리하여 1182년 마론파는 교황과의 일치를 재천명하기에 이른다. 그에 화답하여 십자군 전쟁에 기여한 마론파에게 로마 교회가 1182년에 그 정통성을 인정해 주어 가톨릭 교회의 일원이 되었다. 제 1차 십자군 원정 이후로도 마론파는 맘루크 왕조 등으로부터 지속적인 탄압을 받았으나, 로마 교회 및 유럽 국가들의 지원과의 관계를 계속 유지했으며, 동지중해 연안에서 가톨릭 세력을 상징하는 역할을 했다. 그 후 1516년 라테라노 공의회에는 마론파 주교들이 직접 참석하게 되고, 1584년에는 마론파 신자들이 신학 대학을 세우고 이어 수도원도 세우게 된다.
성경 전권이 아랍어로 번역된 것은 마론파 신도들의 힘이 컸다. 중세 시대 성경의 아랍어 번역은 성경 전 권을 일괄적으로 번역하는 것이 아닌 필요한 부분만 그때그때 발췌번역하는 경우가 많아서 번역 전반의 완성도가 떨어졌으며, 중동의 기독교인들은 콥트어 혹은 아람어로 된 성경만을 사용해야 하던 불편함이 있었다. 17세기 초 다마스쿠스의 마론파 대주교 사르키스 알 루지(Sarkis al-Ruzi)는 중세부터 이루어진 성경의 단편적인 번역본 자료들을 모아 로마로 보냈으며, 마론파 성직자들의 도움으로 로마에서 1671년 성경 전 권이 아랍어로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교회의 중심 지역이 레바논이어서 오늘날에도 레바논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가톨릭 마론파 신자들이 다수를 차지한다. 가톨릭 마론파 신자들은 레바논 외에 시리아와 이스라엘, 키프로스, 미국, 캐나다, 호주, 브라질 등지에도 분포해 있는데 전체 신자 수는 300만이 조금 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원래의 레바논 지역은 소레바논이라 불리며 오스만 제국에게서 자치권을 얻은 마론파 기독교들의 거주지였다. 레바논 산맥의 북부는 마론파 교도들이 거주하고 레바논 산맥 남부는 드루즈교 신도들이 무슬림들의 탄압을 피해 거주하고 있었는데, 영역을 두고 마론파와 드루즈교 사이에 무력 충돌이 자주 벌어졌다. 1860년대 드루즈교도들이 마론파 신도 1만여 명을 학살하고 레바논 내 기근이 발생하자, 마론파 신도들은 레바논 산맥에서 내려와 시리아와 이집트 등의 도회지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프랑스가 이 지역을 식민 통치한 후에는 소레바논 내에서 독립운동의 바람이 거세게 불자 종파 간 대립을 조장해서 통치하기 쉬우라고 시리아 영토 일부를 레바논에 편입시켰는데 기존의 소레바논과 이들 지역을 합해 대레바논 즉 현재의 레바논이 탄생하게 된다. 이후 기독교인의 비율은 51%로 떨어지고, 무슬림의 비율이 49%까지 올라갔다.(1932년 센서스) 이후 기독교인들이 대거 해외로 유출되고 난민을 받는 등의 결과로 기독교-이슬람 인구가 역전된 것이다.
다만 51%라는 비율은 기독교도들을 지원해 레바논에 대한 영향력을 키우고자 했던 프랑스 위임통치 정부가 1932년 조사 당시 외국에 있는 레바논 기독교도들까지 포함시켜 실상을 조작한 것이다. 그 결과 인구 79만 3226명 중 기독교도가 39만 6746명으로 여타 집단보다 250명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 실상은 기독교도와 무슬림 비율이 같거나 후자가 살짝 우세한 것이었다. 프랑스 당국은 이러한 각색된 결과로 레바논 의회의 의석 배분에 있어 기독교도와 무슬림 비율을 6대 5로 설정하였고, 이는 독립 후에 그대로 적용되어 사실 5보다는 6에 가까웠던 무슬림들의 상대적 박탈감과 내전의 씨앗이 되었다. 천년 이상 공존하던 레바논의 아랍인들이 십자군 이후 최초로 종교를 따라 대립하게 된 것이다. 이 이후 민족주의를 접한 마론파 신도들은 자신들을 고대 페니키아인의 직계 후예라는 정체성을 가지게 되고, 바트당 범아랍주의 성향의 영향을 받던 다른 아랍계 기독교인들과 다른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
1982년 마론 민병대인 팔랑헤가 이스라엘의 지원으로 레바논에서 팔레스타인 난민촌을 뒤엎으면서 벌인 학살로 세계적인 비난을 받았고, 그 대가로 상당수의 정치적 권력을 타 종파에게 내주어야 했다. 마론파는 시리아의 지원을 받는[2] 헤즈볼라의 집권을 저지할려고 했음에도 결국 헤즈볼라가 레바논 여당이 되던 것도 마론파의 실책이 벌어들인 자충수라는 평도 자자하다. 다만 21세기 와서는 친 시리아계 정파인 3월 8일 동맹의 제1정파는 자유애국인동이고 반 시리아파인 3월 14일 동맹의 제1정파는 순니파의 지지세가 강한 미래운동이라는게 굉장히 아이러니 하다. 레바논의 정치
레바논 헌법상 대통령이 마론파 가톨릭 신자여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종교 간 권력 분점을 위한 제도로 북아일랜드에도 유사한 제도가 있다.
키프로스에는 코르마티키스(Kormakitis)라는 일종의 언어섬 같은 마론파 마을이 있다. 1974년 이전까지는 인근에 3개의 마론파 마을이 더 있었으나, 키프로스 전쟁으로 다른 마을에 거주하는 마론파는 거의 남키프로스로 쫓겨났고, 북키프로스 터키 공화국에 속한 코르마티키스 마을은 인구가 1/6 이하로 줄어든 채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이들이 쓰는 키프로스 마론파 아랍어도 위험에 처해있다. 900명이 모어로 사용하는데, 이들 모두가 30세 이상이다.[3]
3. 전례
마론파는 동서분열 이전의 초대교회에서 기원했으나, 지금은 엄연히 가톨릭 교회의 일원(동방 가톨릭 교회)으로 인정되며, 스스로 교황의 수위권에 따르고 있고 교리적으로도 가톨릭 교회의 교리를 따른다. 다만 교황이 마론파 주교를 직접 선임하는 것이 아니라, 주교들이 자체적으로 마론파의 안티오키아 총대주교를 선출하면 교황이 이를 추인하는 형식을 취한다.
전례에 있어서도 마론파는 라틴 전례 형식을 굳이 따르지 않아도 되도록 허락되고, 동방 정교회 전례에서 유래한 마론파 고유의 전례와 전례력을 따른다.[4] 전례 언어는 시리아 정교회 등 서 시리아 전례를 따르는 다른 교회들과 마찬가지로 아람어이다.
[2] 여담이지만 레바논 내의 시리아 정교회 교인들 대다수는 친 시리아파에게 표를 몰아줬다고...[3] 이게 2000년 자료였으니 상황에 반전이 없었다면 지금은 최소 50세에 육박할 것이다.[4] 독자적 전례를 유지하는 것은 동방 그리스도교에서 가톨릭 교회로 귀의한 대부분의 교회에서 공통된 사항이며, 특이한 경우로 오랜 전통의 성 암브로시오 전례를 계속하도록 허락받은 밀라노 교구의 케이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