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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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VS LICINIVS CRASSVS'''
(BC 115 ~ BC 53)
1. 개요
2. 생애
2.1. 막대한 부
2.2. 1차 삼두정치
2.3. 파르티아 원정과 최후
3. 평가
3.1. 군사적 재능
3.2. 가족


1. 개요


기원전 1세기에 살았던 고대 로마정치가.
율리우스 카이사르, 폼페이우스와 함께 삼두정치의 일원이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2. 생애


본래 집정관을 지냈던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아들[1]로 푸블리우스는 마리우스 - 술라의 내전 와중에 마리우스파에 의해 살해당한다. 이후 킨나의 술라파 박해를 피해 도주했던 크라수스는 술라의 2차 로마 진격 당시 휘하의 무장으로 합류, 술라 휘하에서 큰 공적을 세웠다.

2.1. 막대한 부


이후 술라의 오른팔이 되어 숙청당한 반술라파의 재산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서 큰 재산을 벌었으며,[2][3] 그 외에도 권력을 이용하여 부를 축적하기도 했고 임대업이나 부동산 같은 여러 가지 사업을 벌여 부를 쌓았다. 전문 노예들로 이루어진 단체를 거느렸으며 전문인력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노예들을 빌려주는 사업을 했고, 설계가 영 좋지 못한 건물이나 화재로 타버린 건물을 싼 값에 사들여 수리하고 개축하여 되파는 사업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사업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 알려진 소방서를 매수해서 불끄는 것을 늦추는 사이 불에 탄 집을 싸게 사들인 후 리모델링해 비싸게 팔아 차익을 챙겼다는 일화는 야사로 크라수스가 실제로 그랬다는 증거는 없다. 하지만 이 기상천외한 수익 창출 방식에 후대 사람들이 크게 감명을 받았는지 이 이야기는 크라수스의 재산 형성 과정을 설명할 때 빠지지 않는 일화가 되었다. 거기다 일화로 소개되는 건 그나마 다행인 수준이고 내용을 깊게 다루지 않는 책에선 아예 그런 방법만으로 큰 돈을 벌었다고 설명하는 경우가 부지기수.[4] 실제로 그랬는지 아닌지는 둘째치고 로마 시대 인물이 후세인들에게 진작부터 민영화의 폐해(...)를 경고했다는 점에서 충분히 의미있는 일화이기도 하다.
다만 역사학자들은 이 정도로 악독한 짓을 해서 돈을 벌었다고 보지 않는다. 로마에서 정치가로 활동하려면 가문과 재산도 중요하지만 시민들의 지지 역시 필수적이다. 때문에 로마의 정치가들은 시민들에게 성대한 연회와 오락거리를 자주 제공하고, 가난한 시민 계급에게는 빵과 포도주를 무상으로 나눠주기도 했으며, 오히려 이런 데 돈을 쓰지 않는 사람들을 쩨쩨하다고 비웃기까지 했다. 그런데 화재가 난 남의 집 불을 늦게 끄고, 거기다 그 집을 헐값으로 거저 먹는 악독한 짓을 했다면 정계 입문은 커녕 매장당해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친구들에게는 이자를 받지 않고 돈을 빌려주었는데, 약속한 기한이 지나면 어찌나 크라수스의 빚 독촉이 심한지 친구들이 차라리 이자를 내는 쪽이 마음 편하겠다고 생각했다는 일화도 있다.[5] 하지만 로마 제일의 부자임에도 의외로 평소에는 소박한 음식을 먹었고, 자기 사는 집 외에는 별장을 지은 적도 없었다고 한다. 2008년 포브스 지가 역사적 인물들 중에 갑부들만 뽑아 그 재산을 현재의 가치로 환산한 순위에서 전체 75명 중 8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여기서 포브스 지가 현재 가치로 환산한 크라수스의 재산은 약 1698억 달러(2016년 달러-원 환율 기준으로 '''202조 3167억 원''').[6]
이렇게 모은 막대한 자금력[7]을 바탕으로 당시 정계의 유력자로 떠오른다. 정계에서는 폼페이우스와는 라이벌 관계였으며,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후원하기도 했다. 카이사르가 제안한 삼두정치에 참가하면서 로마 정계를 장악하다시피하게 된다.

2.2. 1차 삼두정치


카이사르, 폼페이우스와 함께 삼두정치를 구성하여 막대한 이득을 보았다. 하지만 폼페이우스의 지중해 해적 소탕 + 동방 정복,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에 비견되는 군사적 성공이 없었기 때문에 점차 삼두 가운데서 약세로 밀리게 된다. 돈으로 어느 정도 우위를 점하던 카이사르마저 갈리아 정복으로 막대한 를 얻으면서 점차 크라수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크라수스도 삼두정치 이전에 스파르타쿠스노예반란을 진압한 군공이 있었다. 하지만 로마인들은 노예 반란이라는 사건 자체를 수치스럽게 여겼고, 다른 나라의 왕이나 야만족의 군대와는 달리 노예와 싸워 이겼다는 것을 그다지 명예로운 승리로 여기지 않았다. 실제로 이런 이유로 스파르타쿠스 반란에 대한 기록은 사소한 것도 꼼꼼하게 기록했던 로마인답지 않게 대단히 부실한 편이다. 게다가 크라수스가 스파르타쿠스 반란을 진압하고 나서 바로 폼페이우스가 개선식을 했기 때문[8]에 그 빛에 가려져버렸다. 폼페이우스가 전차를 타고 화려하게 행진한 것과 달리 크라수스는 겨우 겨우 우겨서 소규모의 개선식을 했을 뿐이다.

2.3. 파르티아 원정과 최후


이렇듯 다른 두 경쟁자에 비해 군공이 초라한 처지였던 크라수스는 무리하게 파르티아 원정을 추진했다. 사실 당시 파르티아가 특별히 로마를 공격한 것도, 지원이 들어온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파르티아 공격은 명분도 필요성도 없었다. 그 때문에 크라수스가 파르티아를 노린 것은 특히 '부유한 파르티아의 재물'을 탐낸 측면이 많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크라수스는 과도한 욕심 탓인지, 로마군 지휘관의 평균적인 수준에도 못 미치는 형편없는 졸속 지휘를 한 끝에 카르헤 전투에서 참패, 그 자신도 목숨을 잃었다.[9] 게다가 대장기마저 파르티아에게 강탈당했으며, 아들 푸블리우스 크라수스마저 목숨을 잃고 다수의 로마군이 파르티아에 포로로 잡혀서 끌려가는 참사를 당했다.[10]
물론 세계 어느 나라에서건 군기를 잃는 것은 불명예스럽게 여겨지지만, 유달리 명예를 중시하고 시민들 대다수가 참전 군인이던 로마 사회에서 대장기를 잃었다는 건 나라 전체의 수치로 여겨졌다.
여담으로 이 대장기를 되찾기 위해서 파르티아 원정은 계속되었는데, 카이사르가 시도하려다가 암살되었고, 후에 트라야누스 시기에 메소포타미아까지 진격해 최대 유프라테스 강까지 영토를 확장했지만 그러기까지 로마도 너무나 힘들었다.[11]

3. 평가


일반적으로 크라수스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매우 좋지 않았다. 우선 그 최후가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으며, 카르헤 전투로마 공화정 시대의 가장 치욕적인 패전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 돈 욕심이 많았으며 인격이 영 그랬던 것도 욕먹기 딱 좋은 거리다.
그러나 크라수스에 대한 이런 평가는 너무 박한 감이 있다. 당시 역사 기록에서는 크라수스를 단순한 졸부로 평가하지 않았으며 실제로도 그는 로마 공공을 위해 많은 재산을 아낌없이 내놓았다. 물론 당시 로마의 정치인들이 인기를 얻기 위해 자비로 공공사업을 벌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스파르타쿠스 반란 진압 후 로마에서 벌인 대규모 행사에서 재산의 10분의 1을 썼다는 일화도 있을 정도로 쓸 땐 쓸 줄 아는 사람이었다. 또한 같은 시대를 살았던 이들은 로마 정계에서 그 무게감이 대단하고 위엄 있는 인물로 묘사했다. 군사적인 재능이 취약해 말로가 비참하긴 했어도 그것만으로 지금 같은 박한 평가를 내리기엔 무리가 있다.
크라수스가 그렇게 부족한 인물이었다면 아예 삼두의 일인으로 끼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는 후대의 2차 삼두정치 때 비슷하게 일찍 권좌에서 밀려난 레피두스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데, 두 사람 모두 삼두에 낄 수 있었던 것은 그만한 실력과 세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생각해봐도 삼두정치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는 말은 곧 수십 명의 원로, 수백명의 로마 유력자 중 최정상의 위치를 가진 3인 중 하나였다는 뜻이니 결국 정치, 재력 어느 면에서나 최정상을 차지한 인물이었던것은 확실하다. 결국 삼두정치란 정치동맹을 뛰어넘어 3명의 로마 최고 권력자란 뜻으로 사실상 로마는 3명의 왕을 모시게 된거나 다름없었다.
현대의 기준으로도 그리고 당시 시각으로도 크라수스는 재계를 대표했던 인물로 당시 기록에도 크라수스는 소위 '기사' 계급, 즉 자산가 계급을 확실히 통제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카이사르가 (고위층 자제들이 큰 빚을 지는 게 일상화되던 시절에서도) 막대한 수준의 빚에 허덕일 때 그 빚 모두를 보증섰던 것이 크라수스고 본인부터가 최대의 채권자였다. 갈리아 전쟁으로 카이사르가 독립하기 전까지 카이사르를 막후에서 조정한 것은 크라수스였다는 것이 당대 사람들의, 또 후대 역사가들의 평가이다. 삼두정치에 참여한 직접적인 이유도 당시 새로 편입된 동방 속주의 징세 업무를 맡았던 기사 계급[12]의 곤란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정치적 측면에서도 해마다 8명만이 뽑히는 법무관이 된다는 것은 시민들의 지지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며 개중에서도 크라수스는 수석 법무관이었다. 거기다 당시 최전성기를 맞아 로마 최고의 장군이란 평가를 받으며 엄청난 인기를 누리던 폼페이우스의 유일한 대항마로 여겨질 만큼 로마 정계의 거물이었다. 직위나 경력이 더 높은 인물이야 원로원에 드글드글했지만 이미 당대 최고의 유력자는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 두 사람으로 압축됐고 원로원이 이들을 견제하는데 골몰했던 걸 감안하면 크라수스의 정치적 위상을 알 수 있다.
물론, 술라 시대에 재산을 배로 불리고 스파르타쿠스 진압 당시 보였던 여러 비인간적인 행태를 간과할 수는 없다. 분명 능력면에선[13] 재평가를 받을 만하지만 그가 지닌 인격적인 결함은 충분히 비난받아야 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군사적 재능의 부족과 그에 따른 미비한 군공이 끝까지 크라수스의 발목을 잡았다. 고대 로마는 군사력을 바탕으로 주변을 정복하며 성장한 정복 국가였으며 시민 대다수는 참전 경력이 있거나 곧 참전할 예비군이었기에 국가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군대와 군사적 업적을 대단히 중시하는 사회였다. 군사적 재능과 공적이 부족한 사람이 최고위에 오르기가 대단히 힘든,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사회구조[14]다 보니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가 이루어낸 역사적 위업에 가까운 어마어마한 군 경력은 크라수스에겐 거대한 벽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거기에 더해 마리우스 - 술라의 시절을 거치면서 최후의 수단으로 사병을 동원한 쿠데타가 공공연히 자행되기 시작하면서 개인적인 사병의 규모와 군사적 재능의 유무가 최고권력을 얻느냐 못 얻느냐를 가르는 조건이 되는 시절[15]이 오면서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군사적 업적과 능력에 대한 크라수스의 부담감은 더 늘어났을테고 실제로도 삼두정치가 진행될수록 크라수스의 위치는 점차적으로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보다 한 단계 낮아진 이 둘의 조율자 정도로 내려가 있었다.
크라수스가 파르티아 원정을 강행했을 때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는 이를 결국 승인해주긴 했어도 두 사람 다 크라수스의 만용에 가까운 행동에 크게 놀랐고 지휘관급 인재와 병력을 더해줄 정도로 크라수스의 원정에 불안감을 가졌다. 이는 두 사람 모두 크라수스의 군사적 재능이 빈약함을 알았기 때문인데 그 이유로 이 두 사람은 크라수스가 현실에 안주하며 자기들의 완충지대 역할 정도에 머물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크라수스의 야망은 이 둘의 밑에서 양자를 조율하는 수준에서 머물 정도로 작은 것이 아니었고 그렇기에 이를 한 번에 만회하기 위한 파르티아 원정을 강행했다가 본인 능력의 한계로 비참하게 실패하고 만다. 결국 크라수스의 사망으로 완충지대가 사라져버린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는 곧 서로 대립하게 됐고 폼페이우스가 원로원의 편으로 돌아서면서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전면전이 시작되게 된다.
고대 로마인들의 인물 평가에서 대단히 중요한 요소는 '''"어떻게 죽었는가"'''이다. 설령 패배해서 죽었다 하더라도 로마 귀족답게 장렬하게 싸우다 죽었다면 대체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16] 하지만 크라수스의 죽음은 그런 장렬한 최후와는 거리가 멀었고, 이것이 사후 크라수스의 평판에 큰 영향을 미쳤다.
만약 그가 만용을 부리지 않고, 존버를 하면서 계속 막후 정치인 스타일로 남았다면 아우구스투스 시대까지 살아남아 원로로 존경받았을지도 모른다. 카이사르는 크라수스의 아들인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를 매우 총애한데다 크라수스와도 서로 사이가 좋았다. 폼페이우스라면 몰라도 카이사르가 딱히 크라수스를 견제한 모습은 보이지 않고, 오히려 파르티아 원정에 금쪽같은 갈리아 기병까지 붙여줄 정도였다.
때문에 카이사르 암살 후에도 살았다고 가정할 경우, 크라수스는 옥타비아누스 역시 지지했을 것이고(자금과 세력이 필요했던 옥타비아누스 역시 마찬가지), 그대로 아우구스투스 시절에 아그리파 다음 가는 원로가 되었을 가능성이 적지 않았다. 그의 정치적 감각이나 포지션으로 미뤄보아도 자기 명운을 카이사르 암살파, 안토니우스, 키케로에 걸 리가 없으니 말이다.[17]
그렇지만 결론적으로 재능이 야망을 따르지 못해 파멸해버린 전형적인 유형이 바로 크라수스이다.
그의 아들인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갈리아 원정에서 활약하여 "솔개를 낳았다"는 소릴 들을 정도로 아버지보다 여러모로 낫다고 평가받았는데, 여기서 또 한번 고대 로마인들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뛰어난 재력을 바탕으로 한 자선 사업으로 로마 사회에 꾸준히 기여하면서 원로회에서의 정치력 역량도 돋보여 끝내 삼두정치의 일각을 차지했던 위대한 인물보다 몇몇번의 전쟁들과 원정들에서 활약을 보인 그의 아들을 더 우위에 놓았다는 기록은 당시 로마인들이 어느정도로 전공을 중시하는 풍조였는지 상상해볼 수 있게 한다. 안타깝게도 그런 아들 조차 역시 아버지를 따라 파르티아 원정에 종군하다가 카르헤 전투에서 전사했다. 데키무스 브루투스와 함께 카이사르에게 총애받았던 인물.

3.1. 군사적 재능


군사적 측면에서 능력자라고 보기는 힘들다. 그나마 군재가 아주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실질적인 지휘능력은 총사령관은 절대 시키면 안되고, 준비한 병력으로 전쟁을 하는 일선 지휘관이나 가능한 수준.
크라수스가 처음으로 참여한 전투는 확실치 않지만, 기록상으로는 아마 콜리네 성문 전투로 보인다. 여기서는 술라를 보좌하며 우익을 지휘해 삼니움군을 괴멸시켰다. 최소한 군재가 있긴 하다는 걸 보여준 대목.
그의 가장 큰 군사적 공적이라 할 수 있는 스파르타쿠스 반란 진압의 경우, 문서에서 알 수 있듯이 스파르타쿠스가 초인적인 지휘력을 발휘하여 거의 오합지졸에 가까운 노예나 거지로 이루어진 군대로 로마 정규군을 박살낸 거물 중에 거물이었고, 또한 그가 이끌던 군단병들이 노예군 앞에서 등돌려 도망치는 바람에 몇 개 중대를 상대로 그 유명한 10분의 1형을 집행하여 공포로 겨우 부대를 통제할 수 있었을 정도로 사기가 떨어진 상태였던 만큼 당대 로마인들의 의도적인 외면을 감안한다면 스파르타쿠스를 격파한 그의 군사적 재능도 나쁘지 않다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경쟁자인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능력이 너무나도 컸던데다 애초에 그가 이끌던 부대는 정규군이므로 그 정도의 재능으론 당대는 물론이고 현재의 평가에서도 좋은 점수를 받기는 힘들다.
카이사르의 경우 당시 갈리아가 대규모의 내전과 게르만족의 침공으로 약화됐다고는 하나 늘상 더 적은 병력으로 압도적인 숫자의 갈리아 군대를 번번히 격파했으며 특히 스파르타쿠스와 비견될 만한 베르킨게토릭스와의 결전에서는 초반의 패배를 극복하고 수십만의 대군을 이끌었던 베르킨게토릭스를 격전 끝에 항복시켰다. 갈리아 군대도 로마 정규군에 비하면 현격한 질 차이를 보이지만 아무리 그 차이를 크게 잡아도 스파르타쿠스가 이끌었던 노예 군단의 질과는 비교할 수준이 아니다. 거기다 카이사르는 수배의 병력 차이를 극복하고[18] 승리했지만 크라수스는 스파르타쿠스군보다 더 많은 병력[19]인 5만이 넘는 병력으로 승리했다. 카이사르는 게르만족의 수에비족중 가장 강력한 세력인 아리오비스투스와 브리튼족의 세력중 가장 강력한 카시벨라우누스를 고전 끝에 이이제이로 제압하였다. 그리고 갈리아족중 인망이 두터웠던 인두티오마투스와 가장 교활하기로 소문난 암비오릭스를 계략으로 몰락시켰다. 정리하면 갈리아 정복이라고 하지만 카이사르가 갈리아에서 갈리아족 하고만 싸운 건 아니었고 오히려 처음에는 게르만족으로부터 로마에 우호적인 갈리아 부족을 보호하기 위해 참전했으며, 갈리아 내부 일에 적극적으로 개입함은 물론 예방 전쟁 차원에서 라인 강을 넘고, 심지어 브리타니아에까지 상륙하고, 결국엔 카이사르(로마)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한 갈리아족의 반발과 전면 봉기를 맞아 이를 분쇄함으로써 갈리아를 제패한 것이다. 그만큼 카이사르는 다양한 전략적/전술적/외교적 상황에서 다양한 지형에서 다양한 적을 맞아 전투를 벌였으며, 8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갈리아 전쟁은 카이사르에게 단 한 번의 치명적인 실패도 용인될 수 없는 뛰어난 군대지휘관 겸 외교정치가로서의 역량을 요구했으며 카이사르는 단 한 번도 어긋남이 없는 성공을 거두어 냈다. 그에 반해 크라수스는 노예 반란을 진압한 기간도 고작 1년 이하인 데다 요구되는 역량도 훨씬 단순했다. 게다가 사기가 떨어진 상태였다고는 하지만 병사들을 어떻게든 통솔해서 데려가거나 처벌 대상자만 최소한으로, 병사들이 납득할 만한 기준을 제시해 처벌하는 역량도 부족해서 닥치고 데키마티오[20] 같은 혹형을 남발했고, 당연히 억울하게 중벌을 받은 병사들의 불만이 원로원까지 전해져서 전투에서 이기고도 평판이 바닥을 달렸다. 이러하니 박한 평가가 나올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폼페이우스와의 비교에선 더더욱 초라해진다. 폼페이우스 문서에서도 나오듯 폼페이우스의 군공은 화려함 그 자체로 괜히 로마 역사상 최고의 명장 중 한 명으로 꼽히는것이 아니다. 특히 지중해 해적 토벌과 폰토스 왕 미트리다테스 6세[21]와의 전투는 왜 폼페이우스가 천재 장군이라고 불렸는지를 잘 보여준다. 폼페이우스가 싸운 군대들도 대부분 크라수스가 싸웠던 스파르타쿠스의 군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정예군들[22]이었고 미트리다테스 6세나 세르토리우스[23]같은 적 지휘관들도 스파르타쿠스만큼은 아니더라도 매우 유능한 인물이었다. 다시 한번 스파르타쿠스 반란에 대한 로마인의 의도적 외면을 감안하더라도 크라수스의 공적이 폼페이우스와 비교할 수준이 못 되는 건 자명한 사실이다. 더군다나 폼페이우스는 원로원이 내부 인물로는 더이상 문제 해결이 불가능한 상황[24]에 처했을 때 사실상의 비상수단으로 법률을 어겨가며[25] 전권을 위임하여 투입한 인물이다. '마그누스'란 별명[26]이 괜히 붙은 게 아닌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의 비교는 사실상 불가능한 수준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카르헤 전투에서의 어마어마한 대삽질이 크라수스의 군사적 재능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줬을 뿐만 아니라 크라수스의 인생과 행적 모두에 있어 박한 평가를 내리게 만드는 결정적 이유가 된다. 그리고 두 사람의 원정은 명분과 실리를 따지고 하였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입지를 높이는 동시에 갈리아족이 로마를 침략하여 약탈하여 토벌한다는 명분을 가지면서 하였고 폼페이우스는 동방에 있는 로마의 동맹국가를 폰토스 왕국이 침공하여 그들을 지원하고 폰토스를 응징한다는 명분을 가지고 하였다. 그러나 크라수스는 자신의 군공을 과시한다는 개인적인 실리를 추구하지만 파르티아는 딱히 로마를 침공하지도 않았고 속주에 무력도발도 하지 않았는데 국가적 실리를 고려하지 않고 공격한다는 만용을 부리고 있었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는 군공을 세워 자신의 입지를 다진다는 개인적 실리도 있지만 로마의 국익에 따라 국가적 실리를 따지고 하였다.
문서에서 상세히 설명하고 있지만 카르헤 전투는 시작부터 크라수스의 오판을 바탕으로 억지로 이뤄졌으며[27] 그렇게 억지로 시작한 전쟁임에도 불구하고 크라수스는 적국에 대한 조사도 제대로 하지 않았고[28] 병력을 제대로 훈련시키고 전장에 기꺼이 나가 싸울 수 있도록 동기부여도 제대로 해야 했으나 그 전처럼 도망가면 또 처형하지 이런 생각으로 돈 아끼려고 대충 훈련시켰고, 동맹국의 조언[29]을 무시함은 물론, 적국의 계략에 휘말린 데다[30] 부하의 조언[31] 역시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지휘관인 크라수스가 최악의 판단만을 고집한 결과 로마군은 기병 위주의 적군에게 유리하고 보병 위주의 아군에겐 불리한 최악의 장소인 사방이 뻥 뚫린 평지에서 적과 마주쳤고 전투 와중에도 차라리 아들이 어떻게든 뭔가 타개해 보려다가 전사했지, 정작 크라수스는 별다른 지휘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결국 로마군은 병력상의 우위[32]에도 불구하고 전사자 2만, 포로 1만이라는 참혹한 패배를 당한다.
비록 파르티아가 후일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침공도 막아냈고 그를 물리친 아우구스투스도 전쟁보단 화친을 선택했을 만큼 만만치 않은 국가였다곤 하지만[33] 그 점이 크라수스의 패배를 가려주진 못한다.[34] 간단한 반증 사례로 카르헤 전투 이후 패잔병 1만을 수습해 달아난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는 그 병력만으로도 파르티아의 반격을 막아낸다. 이외에도 카르헤 전투 당시 파르티아군을 이끌었던 수레나스의 탁월한 능력이나 당시 파르티아군의 합성궁의 성능을 강조하는 견해도 있지만 이 역시 크라수스의 무능을 가려주진 못한다.
카이사르나 폼페이우스였다면 '''애시당초부터 로마와 심각한 트러블 없이 그럭저럭 지내고 있는[35] 나라를 상대로 '군공을 세우겠다'는 이유만으로 전쟁을 일으키지도 않았을 것'''이고, 막상 전쟁을 결심했다면 일단 병사들 훈련과 준비부터 제대로 시켰을 것이고, 그 다음 침공에 나선 뒤에도 수레나스의 계략에 휘말려 평지로 진격할 일 따윈 없었을 것이며 이는 다른 능력은 몰라도 군사적 재능은 탁월했다는 안토니우스도 철저하게 병력을 준비한데다 11만 명이나 투입한 뒤에 파르티아 침공 때 산맥을 따라 진공했다는 점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물론 파르티아의 저항이 격렬했던데다 배후를 맡고 있던 동맹국 아르메니아가 통수를 치고 보급로를 끊어버려서 2만 명 이상의 병력을 손실하고 패배하여 철군하긴 했으나, 그래도 크라수스와 달리 파르티아에 적잖은 피해를 주고 철군했다는 점에서 애초에 패배의 질이 다르다. 카르헤 전투 이전에도 로마군이 비슷한 수준의 기병을 가진 아르메니아와의 전투에서 기병이 움직이기 힘든 지형에 아르메니아 기병을 몰아넣어 승리한 적이 있다. 파르티아 기병이 로마 군단병보다 강해서 진 게 아니라 크라수스의 능력이 수레나스보다 못했기 때문에 진 것이다.
합성궁의 경우 역시 근접거리에서 직사로 쏜 게 아니라면 로마군의 견고한 방패를 뚫지는 못한다. 카르헤 전투 문서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궁기병들은 로마군한테 근접거리까지 접근 자체를 하지 않았다. 경무장이거나 아예 비무장에 가까운 궁기병 특성상 접근했으면 바로 썰렸을 테니까. 뭣보다 파르티아군의 화살은 방패로 보호받지 못하는 팔다리에 부상을 입히고 계속 귀갑진을 편 상태를 강제해 피로감과 불안감을 쌓았을 뿐, 로마군의 방패를 뚫지는 못했다. 사실상 카르헤 전투에서 로마군에게 결정타를 가한건 궁기병이 아니라 중무장 기병인 카타프락토이였다.
카르헤 전투에 대해 결론지어 말하자면 만약 카이사르나 폼페이우스같은 당대의 명장들이 나섰을 경우 카르헤 전투같은 대참사가 일어나진 않았을 것이다 이는 후대에 안토니우스가 파르티아를 침공했을 때 동맹국인 아르메니아가 배반해서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큰 피해없이 부대를 후퇴시킨 점에서도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이다.[36] 결국 카르헤 전투에서의 참담한 패배는 크라수스의 군사적 재능이 당대의 경쟁자인 카이사르나 폼페이우스에 비교 불가능한 수준이었음을 증명해준다 할 것이다.

3.2. 가족


크라수스에게 알려진 자식은 장남인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2세와 차남인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가 있다.
장남 마르쿠스는 내전기까지 살아남은 것으로 보이며 카이사르 충성파로 남아 북이탈리아 일대를 다스렸다고 한다. 차남 푸블리우스는 항목 참조.
손자인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3세는 아우구스투스와 함께 안토니우스에 대적하였으며, 기원전 30년에 아우구스투스와 함께 집정관이 될 정도로 명망있었다. 이후 다뉴브 강 전선에 참여하여 스키타이 족과 전투를 벌였는데 스키타이 족의 족장과 일기토(!)를 벌여 승리를 거둔 전적을 얻었다. 이 전공으로 로마 역사상 단 세 번 밖에 없었던 스폴리마 오피마라는 훈장을 요구했지만 아우구스투스의 견제로 얻지 못한다. 그에게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칼푸르니우스 피소 가문으로부터 양자를 얻었다.
그 양자인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4세는 집정관을 거쳐 히스파니아 총독을 역임했다.
4세의 아들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5세였다. 그는 티베리우스 시대에 집정관을 맡고 마우레타니아 총독을 역임했고, 클라우디우스 시대에는 브리타니아 원정에 참가하여 개선식 때 클라우디우스와 함께 설 정도의 전공을 얻어냈다. 4세의 딸은 리키니아로 그녀의 아들이 세네카와 함께 네로 암살을 시도하다 실패한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였다.
5세의 장남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로 이는 그가 모계로 폼페이우스 가문의 피를 이어받으면서 입적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클라우디우스의 부마가 되었으나 메살리나 발레리아의 명령으로 아버지와 함께 살해당했다. 차남인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6세는 네로 시대에 집정관을 지냈으나 네로에게 처형당했다. 삼남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스크리보니아누스도 정계에서 활동했다. 사남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리키아누스는 전술된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의 양자로 입적되었다가 사건 후 로마에서 추방되었다. 복귀 후 갈바의 양자로 입적되어 후계자로 공인되었으나 오토의 반란으로 함께 살해당했다.
6세의 장남은 리보 루필리우스 프루기로 그의 딸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외조모이다. 그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베스파시아누스 시대에 들어 밀고자를 찾아내 원수를 갚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1] 본 문서의 크라수스의 아들 이름 역시 푸블리우스다. 이 당시 로마인의 이름은 개인 이름 + 씨족 이름 + 가문 이름의 3단계로 구성돼 있는데 씨족명과 가문명은 거의 고정됐고 개인명만 바뀌는 식으로 이름을 지었다. 문제는 이 개인명의 종류가 그다지 많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이 당시 로마 역사를 살펴보면 사람들의 이름이 거의 거기서 거기인 수준. 아버지-아들 이름이 같았던 건 예사고 수백 년 뒤의 후손 이름도 똑같아서 후대 사람들을 골아프게 하는 경우가 많다.[2] 물론 이게 크라수스만 욕먹을 일은 아니다. 술라 휘하의 무장이라면 이때 다들 많이도 챙겨먹었다. 크라수스는 좀 지나치긴 했던 모양인데, 어느 무고한 백만장자를 고소하자 술라가 격분하여 크라수스와 언쟁을 벌였고, 그와의 관계를 끊어버렸다고 한다. 다만 크라수스가 너무 커졌기 때문에, 혹은 지나친 약탈 행각을 막기 위해 본보기로 삼은 것뿐이라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딱히 대단한 처벌을 받은 것도 아니기 때문.[3] 이후 반술라파의 명예 회복이 이뤄지면서 크라수스를 포함해 반술라파의 재산을 챙겼던 사람들은 원래 소유주에게 대가를 지불해야 계속 그 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다.[4] 어린이용 학습만화인 중 하나인 계몽사의 '학습만화 세계사'에서는 한술 더 떠서 상대가 거래를 거절하자 불을 안 끄고 가려고 하고, 집주인이 뒤늦게 거래에 응하자 '흥정하는 동안 집이 더 탔다'라며 처음 제시한 돈의 반만 주는 내용도 나온다.[5] 이는 고리대금업을 한다는 악평을 얻지 않으면서도, 동료 원로원 의원들에게 금전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된다.[6] 참고로 2016년도 대한민국 1년 예산이 대략 387조 정도. 아이언맨의 경우 123조 원, 배트맨은 91조 원.[7] 전해지기론 BC 67년 당시 로마의 1년 예산이 2억 세스테리우스(이것도 폼페이우스가 시작한 동방 원정 이후 급격히 불어난 예산이다)였는데 크라수스의 개인 재산은 1억 7천만 세스테리우스였다고 한다.[8] 폼페이우스 문서에도 나오듯이 폼페이우스도 스페인 정벌을 끝내고 스파르타쿠스 반란 진압에 참가하길 원했다. 하지만 폼페이우스 도착 전에 반란 진압이 끝나버리자 폼페이우스는 도주하던 반란군 패잔병을 토벌하곤 자신이 반란을 진압한 것처럼 로마에 보고서를 보낸다. 처음부터 이 반란을 부끄럽게 여기던 원로원은 스파르타쿠스가 일으킨 반란이 가지는 비중을 낮춤과 동시에 크라수스를 견제할 목적으로 그 보고서를 인정하고 폼페이우스의 개선식 명분에 스파르타쿠스 반란 진압을 곁다리로 덧붙여버린다. 이후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의 관계가 험악해진 건 당연한 수순.[9] 파르티아가 포로로 잡힌 크라수스의 탐욕을 조롱하는 의미에서, 목구멍에 녹인 황금을 부어서 죽였다는 일설이 전해지지만 어디까지나 전해지는 이야기. 기록상으로는 파르티아군 지휘관인 수레나스가 제안한 사실상의 항복권고에 가까운 회담을 병사들의 강압에 마지못해 받아들여 만났다가 자신을 잡으려는 수레나스의 계략을 확인하고 저항을 시도하다 지휘관이 포로로 잡히는 걸 막으려는 측근의 손에 현장에서 죽었다. 이후 파르티아가 크라수스와 닮은 뚱뚱한 로마군 포로를 데려다 크라수스처럼 꾸미고 모욕을 줬다는 기록을 봤을 때 만약 실제로 생포당했다면 험한 꼴을 봤을 가능성이 높다.[10] 이때 끌려갔던 크라수스 휘하의 로마군 포로들은 파르티아 동쪽 변방의 국경선을 지키는 강제 노역에 처해졌는데 이때 전한중앙아시아로 세력을 넓히면서 유배 온 로마군들과 접촉했다는 설이 있다. 상세한 내용은 카르헤 전투 참고.[11] 군단기 자체는 아우구스투스가 파르티아 왕 프라아테스 4세에게 애첩을 선사하는 것으로 돌려받았다.[12] 로마는 세금 징수권을 경매에 붙였다. 높은 징세액을 적은 사람이 징세권을 얻는 방식. 당시의 동방 속주는 혼란이 계속되면서 처음 약속한 세금을 납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13] 특히 정치적 능력. 폼페이우스의 상승세를 이용하여 그와 정치적 동맹을 결성하거나 카이사르의 능력을 알아보고 그에게 투자를 하는 등 정치적 감각은 상당히 뛰어난 편이다.[14] 키케로가 괜히 유명한 장군 출신이 아님에도 집정관이 됐음을 자랑한 게 아니다. 그런 키케로도 본인이 짬밥이 안 맞는다고 금방 때려치웠지만 참전 경력도 있고, 군사 호민관을 지냈던 군필자였다. 거기에 당시 로마 공화정이 겪던 극심한 대내외적 혼란 덕에 유력 정치인의 군사적 공적이나 능력이 더더욱 중시되고 또 필요해진 상태이기도 했다.[15] 이걸 못 해서 망한 대표적 케이스가 마리우스 사후 로마를 통치했던 킨나다. 술라 사후 술라 체제에 반기를 들었던 여러 마리우스파들도 폼페이우스를 비롯한 술라파 장군들을 이기지 못해 끝장이 났다. 카이사르 - 폼페이우스의 분쟁만으로 이 시기의 로마를 내전기라고 부르는 게 아니다.[16] 이런 로마인들의 인물 평가의 가장 확실한 사례가 바로 小 카토이다. 생전에는 일반 로마 시민과 반대 노선인 옵티무스파의 거물로 활약하는 바람에 로마 민중의 지지를 거의 받지 못했다. 하지만 카이사르에게 반기를 들고 싸우다 패배한 후, 의관을 정제한 뒤 플라톤의 저서를 읽다 배를 가르는 극도로 강렬한 방식의 자살을 선택하면서 당대 로마 시민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많은 로마 시민들은 小 카토의 자살을 '''장렬한 죽음'''으로 여기고 생전과 달리 동정과 지지를 보냈는데 그 수준은 카이사르가 직접 小 카토의 주장과 자살 선택을 반박하는 글을 대중에게 발표했어야 할 정도로 강렬했다.[17] 거기다 크라수스는 원로원과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다. 이유는 물론 스파르타쿠스 토벌전의 공을 원로원이 씹어버렸기 때문. 더구나 원로원파는 크라수스 본인의 라이벌인 폼페이우스 편을 들었으므로 더더욱 원로원파보다는 카이사르를 지지할 가능성이 높아진다.[18] 더군다나 역사에 보기 드문 소수 병력으로 다수가 농성한 성을 포위 공격하는 공성전을 벌이기도 했다.[19] 마지막 전투에서 스파르타쿠스가 이끈 군대의 규모에 대해선 정확한 숫자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크라수스의 진압군보단 훨씬 적은 규모였음은 분명하다.[20] 10분의 1형. 부대 단위로 10명 중 1명을 묻지마로 때려죽이는 무시무시한 형벌이어서 적전도주 같은 죄를 지어도 가능하면 집행하지 않는 형벌이었고, 법전에도 사령관에 대한 집단항명 같은 적극적인 중대한 군율위반에만 적용한다고 적혀 있었다. 그런데 크라수스는 이걸 도망친 병사들에게 적용한 것이다. 차라리 적극적으로 도망간 병사 몇명을 처형한다면 모르겠는데 도망가지 않았어도 10분의 1형에 걸려 죽는 자들도 나왔으니 억울할 만도 하다.[21] 폰토스 왕국의 왕으로 로마의 영향력으로 약해진 폰토스 왕국을 부흥시키기 위해 평생에 걸쳐 로마와 싸웠다. 한때는 폰토스 왕국의 영역을 크게 넓히기도 했지만 술라루쿨루스, 그리고 폼페이우스에게 탈탈 털려버리면서 결국 아들의 반란에 직면해 자살했다. 잦은 패배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로마군과 맞섰지만 술라-루쿨루스-폼페이우스로 이어지는 로마 명장 라인에 무참히 털리면서 후대엔 로마군용 전투력 측정기 취급을 당하는 안습한 인물. 그래도 아퀼리우스, 카시우스, 오피우스, 무레나, 코타 같은 평범한 수준의 장군들은 간간이 무찔렀다.[22] 심지어 해적들도 당시 로마와 대립하던 미트리다테스 6세의 지원을 받아 사실상 정규군에 가까울 정도였다.[23] 마리우스파의 장군으로 술라가 로마를 장악하자 스페인으로 가서 반기를 들었다. 스페인 전 지역을 장악하곤 1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로마의 술라 정부에 대항했고 폼페이우스를 상대로도 5년이나 버텼던데다 2번씩이나 패배를 안겼을 정도로 유능했던 장군. 폼페이우스도 궁지에 몰아넣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세르토리우스를 직접 해치우진 못했다. 나중에 세르토리우스는 결국 부하에게 암살된다.[24] 세르토리우스가 이끄는 스페인 반란의 진압. 당시 원로원이 꺼낼 수 있는 카드는 모두 실패한 상황이었다. 물론 그렇게 투입된 폼페이우스도 전쟁을 쉽게 끝내진 못했다.[25] 술라가 원로원 강화를 위해 세밀하게 정해놓은 연공서열에 따른 진급 규정. 이 규정에 따르면 폼페이우스는 나이가 너무 어려 스페인 원정군 같은 대규모 군대를 이끌 직위에 오를 수가 없었다.[26] 영어로는 'The Great'로 ''' '위대한 자' '''라는 뜻으로 당시로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이미 사망한 지 오래인 알렉산더 대왕이야 그의 업적을 칭송하는 의미에서 그런 어마어마한 칭호를 붙여 부를수 있을지언정 여전히 살아있는 인물에게 붙기는 사실상 요원한 칭호다. 그럼에도 폼페이우스는 자신의 군사적 능력이 알렉산더 대왕에 비견된다는 자부심으로 애용했다. 시작은 술라가 반 장난으로 붙였지만 본인이 능력으로 이를 인증한 셈.[27] 당시 파르티아는 로마와 적대하지도 않았고 외려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28] 기병을 위주로 한 파르티아와 전쟁을 벌이면서 평탄한 사막지대를 가로질러 수도를 직접 공격하려 했다.[29] 아르메니아의 왕이 파르티아의 기병을 피하기 위한 산악지대 우회 진격을 조언했다. 다만, 후대에 크라수스와는 비교 자체가 성립하지 않을 정도로 군사적 재능이 뛰어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크라수스의 전철을 피하려 산악지대로 진격했다가 동맹국 통수+보급로 털림으로 실패한 걸 보면 크라수스가 조언을 따랐더라도 성공하긴 힘들었을 것이다.[30] 폼페이우스의 동방 원정 때 협력을 했던 사람을 매우 신뢰하여 현지 안내인으로 썼는데 이 사람은 이미 파르티아의 사주를 받은 상태였다.[31] 사막지대 횡단 대신 강을 따라 진격할 것을 조언했다. 그리고 수레나스가 이끄는 파르티아 군과 마주쳤을 때 충분한 휴식 후 전투를 하자고 조언했지만 이 역시 무시당했다.[32] 로마군은 총 병력 4만에 육박했고 파르티아군은 1만에 미치지 못했다.[33] 이 점은 좀 보충설명이 필요한 게, 이 당시의 파르티아는 과장을 보태면 거의 당대 로마와 비스무리한 강대국이었다. 제정 시대로 가면 로마가 국력에서 압도하긴 하지만.[34] 카이사르 사후 파르티아가 로마를 침공한 적이 있는데 안토니우스 휘하의 노장 푸블리우스 벤티디우스에게 역으로 탈탈 털리고 패주했다. 또한, 제정 시대라 직접적 비교는 어렵지만 파르티아는 트라야누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에게 연속으로 수도 크테시폰까지 털리며 참혹하게 패배했다.[35] 카르헤 전투 이전까지 로마와 파르티아 사이는 결코 나쁘지는 않았다. 파르티아도 크라수스가 쳐들어 왔다는 소식을 듣고도 "'''로마 원로원에서 보낸 군대라면 우리가 조져버리겠지만, 크라수스의 탐욕 때문에 온 군대라면 자비를 베풀 테니까 그냥 돌아가라'''"는 취지의 서한을 보내며 나름 외교적으로 풀어보려고 시도했을 정도.[36]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안토니우스는 2만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플루타르코스의 전투 피해 기록이 종종 정확하지 않은 걸 감안해도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하긴 어렵다. 2만여 명이면 무려 4개 군단과 맞먹는 머릿수이다! 물론 사상자에 동맹국 군사들과 기병들이 포함되어 있긴 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