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틴 벤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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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5]
1.1. 축구 선수
1.1.1. 클럽
1924년부터 RCD 에스파뇰에서 뛰기 시작한 벤톨라는 1929년, 에스파뇰에서의 커리어 중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바로 코파 델 레이 첫 우승을 차지한 것. 벤톨라는 1930년부터 1933년까지 당시 세군다 디비시온 소속의 세비야 FC에서 뛰었고 세비야는 코파 안달루시아 3연패를 달성했다.
1933년부터 벤톨라는 FC 바르셀로나로 이적했고 바르셀로나에 이적한 첫 해 14골을 넣으며 리그 득점 4위에 올랐다. 그리고 1934-35 시즌에는 엘 클라시코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5대0 대승을 이끌었다.
당시 바르셀로나는 우승권에는 좀 거리가 있었지만 1936년에 코파 델 레이 준우승을 차지했다. 다시 스쿼드의 경쟁력을 갖춘 바르셀로나는 1929년 이후 못했던 라리가 우승을 정조준했지만 스페인 내전이 터지고 말았다. 1937년 여름, 바르셀로나 보드진은 선수들을 멕시코, 미국 등지로 투어를 보냈지만 투어가 끝나고도 상당수 선수들은 스페인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벤톨라는 바르셀로나에서 3시즌 동안 58경기 출전, 31골로 아웃사이드 포워드로는 상당한 기록을 남겼고 멕시코에 남아 1939년부터 레알 클루브 아메리카의 선수가 되었다.
벤톨라는 1940년, 아틀란테 FC로 유니폼을 갈아입었고 팀에서 가장 득점력이 좋은 선수로 자리매김했다. 그의 활약으로 아틀란테는 40년대 멕시코 리그의 강팀으로 자리매김했고 리그 우승 2회, 컵 대회 우승 1회 등의 좋은 성적을 남겼다.
벤톨라는 1949년에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1.1.2. 국가대표
1930년 6월 22일, 벤톨라는 이탈리아를 상대로 첫 국가대표팀 경기를 치렀다. 볼로냐에서 열린 이 경기에서 스페인은 루이스 레게이로의 2골과 벤톨라의 결승골로 이탈리아를 3대2로 물리쳤다.
벤톨라는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대표팀 명단에 들었고 지역예선 2경기와 8강전 재경기에 출전했다.
벤톨라는 1936년까지 스페인 대표팀에서 12경기 출전, 3골의 기록을 남겼다.
2. 플레이 스타일 & 평가
빠르고 득점력이 좋은 라이트 윙어였다.
3. 뒷이야기
- 벤톨라는 축구 경기를 치를 때 종종 헤드 스카프를 착용했다고 한다.
- 그의 아들 호세는 1970년 월드컵에 멕시코 대표팀으로 참가했다. 이는 루이스 레게이로 부자와 단 둘만이 갖고 있는 부자가 각각 다른 국적으로 FIFA 월드컵에 참가한 사례이다.
4. 수상
4.1. 클럽
- 리가 MX 우승 3회: 1939-40(레알 클루브 에스파냐), 1940-41, 1946-47(이상 아틀란테 FC)
- 코파 델 레이 우승 1회: 1928-29(RCD 에스파뇰)
- 코파 MX 우승 1회: 1941–42(아틀란테 FC)
- 캄페온 데 캄페오네스 우승 1회: 1941–42(아틀란테 FC)
- 리가 MX 준우승 1회: 1945–46(아틀란테 FC)
- 코파 델 레이 준우승 1회: 1935-36(FC 바르셀로나)
- 코파 MX 준우승 3회: 1943–44, 1945–46, 1948–49(아틀란테 FC)
- 카탈로니아 지역 리그 우승 3회: 1928–29(RCD 에스파뇰), 1934–35, 1935–36(이상 FC 바르셀로나)
- 코파 안달루시아 우승 3회: 1930–31, 1931–32, 1932–33(세비야 FC)
4.2. 개인
- 프리메라 푸에르사 득점왕 1회: 1940-41(아틀란테 FC)
[1] 위키피디아에는 마르티 벤톨라로 항목이 기재되어 있지만 피파 홈페이지에서는 마르틴 벤톨라로 소개되어 있다. 이 항목은 피파 홈페이지를 기준으로 만들었다.[2] Vantolrà로 표기되기도 한다.[3]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4] 출처: 위키피디아, 11v11[5] 출처: 위키피디아, 11v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