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테레즈 샤를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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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 드 프랑스
(Marie Thérèse Charlotte de France)
'''출생'''
1778년 12월 19일
프랑스 왕국 베르사유 궁전
'''사망'''
1851년 10월 19일 (72세)
오스트리아 제국 란첸키르셴 프로스도르프 궁전
'''배우자'''
앙굴렘 공작 루이 앙투안 (1799년 결혼 / 1844년 사망)
'''아버지'''
루이 16세
'''어머니'''
마리 앙투아네트
'''형제자매'''
루이 조제프
루이 17세
소피 엘렌 베아트리스
1. 개요
2. 일생
2.1. 출생
2.2. 어린 시절
2.3. 프랑스 혁명 시대: 탕플 탑의 고아
2.4. 망명 시대
2.4.1. 오스트리아
2.4.3. 바르샤바
2.5. 부르봉 왕정 복고
2.6. 백일천하
2.7. 부르봉 왕정 재복고
2.8. 불행한 말년
3. 이것저것
4. 대중매체에서
5. 검은 백작 부인(Dunkelgrafen): 마리 테레즈 가짜설


1. 개요


마담 루아얄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
Madame Royale Marie Thérèse Charlotte
1778년 12월 19일 ~ 1851년 10월 19일
피유 드 프랑스,[1] 마담 루아얄,[2] 마담 라 도핀,[3] 앙굴렘 공작부인
Fille de France, Madame Royale, Madame la Dauphine, Duchesse de Angouleme.
마리 앙투아네트루이 16세맏딸. 프랑스왕녀이자 마지막 왕세자빈. 그리고 그의 남편 루이 앙투안이 20분 동안 프랑스의 국왕 '루이 19세'로 즉위하면서 그녀 역시 20분 동안 프랑스의 왕후였었다. 별칭은 마담 루아얄.
이름은 각각 마리 앙투아네트의 모친인 신성 로마 제국 황후이자 오스트리아의 여대공 마리아 테레지아[4]와 가장 사이가 좋았던 언니인 나폴리 왕비 마리아 카롤리나에서 따왔다.

2. 일생



2.1. 출생


"불쌍한 어린 것, 너는 그들이 바라던 아이는 아니야.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가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야. 아들이었다면 국가의 것이 되었겠지만, 너는 나의 것이고 내 모든 보살핌을 받게 될 거야. 너는 나와 기쁨을 함께 하고 슬픔을 나눌 거야." - 마리 앙투아네트

1778년 베르사유에서 태어났다. 루이 16세마리 앙투아네트는 1770년 결혼하여 7년 간이나 아이가 들어서지 않았기 때문에 임신은 대단한 경사였으나, 낳고 보니 딸이라서 주변에서는 매우 실망하였다. 그래도 그 동안 의심받던(...) 루이 16세의 생식능력이 입증되었기 때문에 아무튼 프랑스 왕실로서는 경사스러운 일이었다.
여담으로 프랑스 왕실은 왕비출산시에 아무나 공공연하게 입회하도록 하는 관행(...)이 있었는데[5], 이 때 창문을 닫은 방에 너무 많은 구경꾼이 몰려들어 마리 앙투아네트는 거의 질식해서 죽을 뻔 했다고 한다. 루이 16세는 산모의 안전을 고려하여 이후의 출산은 허가받은 소수만 참관할 수 있도록 관행을 바꾸었다.
의사가 산후처리를 잘못하는 바람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많은 출혈을 했고, 그래서 딸을 낳은 후 기절했다. 그 후에는 출산으로 인한 치질로 고통스러워했다고 한다.

2.2. 어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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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나의 것'이라는 말 그대로 마리 앙투아네트는 마리 테레즈의 교육에 관심을 많이 쏟았다. 이는 시고모들, 즉 루이 15세의 딸들인 마담 아델라이드, 빅투아르, 소피가 거만하고 제멋대로 행동하여 사람들에게 경원시당하는 것이 프랑스 왕실의 엄격하지 못한 교육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왕족의 아이들은 유모에게 젖을 물리는 당시의 관행을 깨고 마리 테레즈에게 직접 젖을 물리기도 하였다. 또한 공주의 교육에도 신경을 썼는데, 마리 테레즈의 첫 가정교사는 프랑스의 명문가인 로앙-게메네 가문의 게메네 공비였으나 게메네 가문이 파산하자 가정교사로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폴리냑 백작 부인 욜랑드 드 폴라스트롱을 들였다.[6]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신의 딸에게 엄한 교육을 했는데 동정심을 가르치기 위해서인지 빈민 계급이 사는 곳을 방문하거나, 빈민 계급의 아이들을 초대하여 그들에게 장난감을 선물하게 하는 등 인성 교육도 빠뜨리지 않았다. 1784년에는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불을 피울 장작도 없는 불행한 사람들이 너무 많은 탓에" 그들을 돕기 위해 돈을 다 써버려 딸에게 신년 선물을 주지 못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아직 어린 그녀에게는 이런 것들이 불만스러웠던 모양이다. 어머니가 말에서 떨어져 다쳤다는 이야기를 듣고 무덤덤하게 반응하자 어머니가 죽었을 수도 있다는 말에 "나는 어머니를 영원히 보고 싶지 않아요"라고 대답했을 정도. 그렇지만 이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 감옥에 갇히게 되었을때 어머니와 헤어지게 되어 울면서 그녀는 '너무나 좋으신 어머니, 죽지 마세요'라는 글을 남긴다. 물론 어머니를 보고 싶지 않다고 말한 건 어린아이가 삐쳐서 양가감정으로 '엄마 미워'라고 하는 정도의 심리였을 테니, 어머니가 감옥에서 죽지 않기를 바라는 게 당연한 일이지만.
반대로 루이 16세는 자식들에게 지나칠 정도로 너그러웠기 때문에, 마리 테레즈는 아버지를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2.3. 프랑스 혁명 시대: 탕플 탑의 고아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고 10월 튈르리 궁전에 격리. 그리고 다른 왕족들과 같이 탕플 탑의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겨우 11살에 아버지 루이 16세, 어머니 마리 앙투아네트, 고모 엘리자베트 필리핀 마리 엘렌 공주가 차례로 처형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그리고 남동생 루이 17세는 병으로 죽어서 루이 16세의 직계 가족 가운데 마지막 생존자가 된다.
그녀가 어린 여자 아이인데다가, 딸이라 살리카법에 따라 왕위를 계승할 수 없어 정치적으로 그다지 위험하지도 않기에, 혁명정부에서도 그녀를 죽이는 것을 망설였기 때문에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7]
하지만 누구도 제대로 돌봐주지 않았기 때문에 대우는 매우 열악했다. 간수들은 마리 테레즈에게 누더기를 입게 하였으며 편의도구를 빼앗아 거칠고 더러운 담요를 주어 덮게했고 시종, 시녀들의 출입을 금지해 직접 감방을 청소하고 정리하게 했다. 게다가 감시와 통제를 심하게 하는것은 물론 날마다 감방을 수색하여 그녀가 소지한 돈과 귀중품을 빼앗아가기도 했다. 이렇게 마리 테레즈는 학대에 가까운 감옥 생활을 몇년 간이나 보내게 된다. 특히 마리 테레즈 자신도 고집이 강해 공화 혁명 정부의 심문에도 협조하지 않았기에 열악한 대우를 계속 받게 되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남동생 루이 17세의 병을 걱정하여 국민공회에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감옥의 창문으로 가끔 루이 17세가 얻어맞으며 지른 비명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감옥에서는 고모 엘리자베트 필리핀 마리 엘렌 공주의 유품인 실로 뜨개질을 하고 가톨릭 영성 서적인 <준주성범(The Imitation of Jesus Christ)>[8]과 <Voyages by La Harpe>라는 책을 읽었다. 다른 책을 달라고 혁명 정부에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1793년 5월 11일에는 로베스피에르가 감옥을 방문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대화 기록은 없다.
옥중에서 마리 테레즈는 가족에 대해서 어떠한 소식도 들을 수 없었고 간수들도 가족들 얘기를 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가족들의 사망소식을 몰랐다. 다만, 아버지인 루이 16세가 처형당했다는 소식만 접할 수 있었다. 그녀의 감방 벽에 새겨진 글귀를 통해 당시 그녀의 심정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Marie-Thérèse-Charlotte est la plus malheureuse personne du monde. Elle ne peut obtenir de savoir des nouvelles de sa mère, pas même d'être réunie à elle quoiqu'elle l'ait demandé mille fois. Vive ma bonne mère que j'aime bien et dont je ne peux savoir des nouvelles. Ô mon père, veillez sur moi du haut du Ciel. Ô mon Dieu, pardonnez à ceux qui ont fait souffrir mes parents.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랍니다. 수천 번을 부탁해 보았지만 어머니를 만날 수도 없고, 소식조차 들을 수 없죠. 내가 가장 사랑하는, 그렇지만 소식조차 알 수 없는 내 어머니, 꼭 살아 남으시길! 아, 나의 아버지! 하늘에서 저를 지켜봐 주세요. 아, 하느님! 부모님을 고통받게 한 저들을 용서하소서.

이렇게 거의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고 무려 2년 이상을 지내면서 마리 테레즈는 발성 이상 장애를 가지게 되었고, 이는 이후 평생 동안 낫지 않았다.
1795년 7월 쯤에 공포 정치가 해소되면서 대우가 비교적 좋아졌다. 알자스 출신의 30세 여성 르네 샹테렌느(Renée de Chanterenne) 부인이 신변을 돌봐주도록 고용되었고, 르네 샹테렌느는 마리 테레즈에게 의류, 필기 도구, 책 등을 제공했으며 정원을 산책하도록 허가를 받기도 했다.
1795년 8월 말, 르네 샹테렌느는 가족 소식을 모르는 마리 테레즈를 가엾다고 생각한 나머지, 마침내 마리 앙투아네트, 루이 17세 등 다른 가족들의 최후를 알려주었다. 이때 진실을 알게 된 마리 테레즈는 비탄에 빠져 비명을 지르고 미친 듯이 울었다고 한다.
1795년, 혁명 정부는 오스트리아와 포로 교환 협상을 하면서 몇 명의 포로를 돌려받고 대신 마리 테레즈를 석방해서 오스트리아로 보낸다. 마리 테레즈가 풀려난 것은 17세 생일의 전날인 1795년 12월 18일이었다.
마리 테레즈는 르네 샹테렌느와 친해졌으며, 감옥에서 풀려난 뒤에도 편지로 연락을 주고 받았다. 나중에 르네가 아들을 낳자 르네는 이름을 지어달라고 부탁했고, 마리 테레즈는 자신의 이름 '샤를로트'를 따서 '샤를'이라고 지어주었다.[9] 왕정 복고 시기에는 샤를의 일자리를 알선해 주기도 했다.

2.4. 망명 시대



2.4.1. 오스트리아


하지만 외가인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황실에서는 그녀를 썩 반갑게 여기지 않았다. 마리 앙투아네트를 죽게 내버려두었다는 죄책감을 상기시키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물론 오스트리아가 손을 썼다고 해도 혁명정부는 오히려 더 분노했겠지만 그래도 특별히 한 일도 없다 보니...
그녀의 어머니의 애인이었다는 소문이 있는(확실한 증거는 없다) 악셀 폰 페르젠 백작은 마리 테레즈를 위해서 마리 앙투아네트가 남겨둔 돈과 보석 등을 상속할 수 있도록 노력을 했다고 한다.
그녀의 외사촌인 프란츠 2세는 고모를 죽게 했다는 죄책감 탓인지 마리 테레즈에게 잘 대해주었다고 하며, 그녀를 자신의 동생 카를 루트비히와 결혼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어머니를 버린 외가가 아니라 친가인 부르봉 가문을 택했다. 만약 이 때 합스부르크 가문을 선택했다면 이후 그녀의 삶도 좀 더 편안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부르봉 가로 돌아간 것을 보면 어머니를 버린 외가에 대한 분노가 아주 컸던 듯.

2.4.2. 러시아


마리 테레즈는 오스트리아를 떠나 숙부들인 프로방스 백작아르투아 백작이 도피해 있던 러시아의 미타우로 간다.(당시 러시아 영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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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9년 봄, 작은삼촌 아르투아 백작의 장남이자 3살 연상인 루이 앙투안(Louis Antoine)과 결혼했다. 루이 앙투안은 성격이 소심하고 병약했음에도 불구하고 부부끼리 사이는 좋았다고 한다.병약하긴 해도 1844년 69살로 그가 죽을 때까지 마리는 마지막까지 그의 곁에 있었는데 사이가 좋았던 이유가 루이 앙투안의 성격이 루이 16세와 비슷해서였다고(...) 러시아의 파벨 1세는 얼마 동안 프랑스 망명 왕실을 후원해주었다.
하지만 1801년, 러시아령에서 퇴거 명령을 받자 마리 테레즈는 다른 망명 왕실과 함께 영국으로 망명한다.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프랑스 왕실은 가구를 팔아야 했다.

2.4.3. 바르샤바


1801년, 프랑스 왕실은 바르샤바(당시 프로이센령)에 도착한다. 1805년 까지 바르샤바에서 망명 궁정을 유지하며 지냈으나,[10] 나폴레옹군의 프로이센과 러시아 공격이 시작되자 다시 러시아령 미타우로 옮겨간다. 마리 테레즈는 미타우에서 부상병을 간호하였다고 한다.
유럽 대륙에서 프랑스 왕실이 안주할 땅은 없어졌기 때문에 스웨덴 왕 구스타프 3세의 도움을 받아 스웨덴을 거쳐 영국으로 망명한다.

2.4.4. 영국


영국에서 버킹엄셔 주(Buckinghamshire)에 재정착한다. 조지 3세에게 치매가 발발하여 섭정을 맡고 있던 영국 왕세자 조지 4세는 프랑스 왕실을 환영했고 마리 테레즈와도 양호한 사이였다.
1813년 1월, 결혼 13년 만에 임신해서 왕실이 기쁨에 휩싸였다. 하지만 유산하고 말았고, 이후 다시는 임신하지 못하면서 결국 마리 앙투아네트루이 16세의 혈통은 끊어지게 되었다.

2.5. 부르봉 왕정 복고


나폴레옹이 패배하고 루이 18세가 즉위하여 부르봉 왕가프랑스로 복귀하자 마리 테레즈는 고국으로 돌아왔다. 귀환한 프랑스 왕실은 일단 부르봉 왕가의 권위를 살리기 위해 1815년에 루이 16세마리 앙투아네트, 엘리자베트 필리핀 마리 엘렌 공주의 시신을 찾아내 왕실 묘소가 있는 생 드니 대성당에 안치시켰다.

2.6. 백일천하


나폴레옹이 엘바 섬을 탈출하고 수백 남짓한 병력으로 파리를 향해온다는 소식을 들은 즉시 루이 18세를 포함한 전 부르봉 왕가가 공황상태에 빠져 외국으로 도피했다. 하지만 마리 테레즈는 머물고 있던 보르도에서 왕당파와 병사들을 끌어모아 맞서려고 했다.
하지만 모여든 병사들도 "마담을 경호해드리겠지만 나폴레옹과 싸우기는 무리입니다."라며 탈출을 권했고 결국 그들의 권유에 따랐다. 그녀의 용기에 감탄한 나폴레옹은 ''' "그 가문(부르봉)에 사내라고는 저 여자밖에 없다(only man in her family)."'''는 말을 남겼다. 마리 테레즈에 대한 칭찬인 동시에 부르봉 왕가의 구성원들을 '''"싸우지도 않고 도망치는 겁쟁이들, 남자도 아니다"'''라고 대놓고 깐 거다. 아무튼 그녀를 추적해서 붙잡지는 않았다.

2.7. 부르봉 왕정 재복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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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8세 사망 후 아르투아 백작이 샤를 10세로 즉위하면서 앙굴렘 공작부인이자 왕세자빈이 되었다. 마리 테레즈는 루이 16세의 살아남은 하나뿐인 자식이며, 마담 루아얄에 세자빈이라는 왕정 프랑스 전무후무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왕실에서 남녀를 불문하고 가장 높은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살리카법이 아니었다면 당장에라도 프랑스 국왕으로 즉위해도 지나칠 것이 없을 정도였으니.
어린 시절에는 밝은 성격의 여자아이였던 것으로 전해지지만 혁명 기간 동안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있는 고생 없는 고생을 다 하고 외국을 떠돌면서도 가증스러운 꼴만 보아서 그런지, 매우 메마르고 냉혹한 성격으로 자라났다. 온화하고 품위 있게 속삭이던 어머니와는 달리 샤를로트는 거만하며 찢어지는 듯한 소리로 자주 화를 냈다고 한다.
민중들의 여론은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낸 공주에게 비교적 동정적이었다. 하지만 마리 테레즈의 입장에서 혁명 세력과 민중은 자신을 학대하고 , 고모, 형제를 모두 죽인 '''불구대천원수'''였기 때문에 민중들에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녀는 평생 극렬한 왕당파 보수주의자로 살았으며, 혁명을 증오하고[11] 백색테러도 자주 일으켰기에 민중들에게서 미움을 받았다.[12]
민중 혁명으로 타도되었다가 외국의 도움으로 겨우 돌아왔기 때문에 혁명 세력과도 어느 정도 타협할 수 밖에 없는 부르봉 왕가의 입장에서 마리 테레즈의 복수는 결코 득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앞서 설명했다시피 프랑스 왕가에 있어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고귀한 신분이었기 때문에 국왕이자 숙부인 루이 18세조차도 마리 테레즈를 통제하기가 어려웠다.

2.8. 불행한 말년


나폴레옹이 축출된 뒤에 부르봉 왕가의 재건을 위하여 노력했지만 그 와중에 벌인 백색 테러로 인망이 좋지 않았고 민심을 잃었기에 결국 1830년 7월 혁명으로 샤를 10세, 그리고 남편인 루이 앙투안, 샤를 10세의 손자 샹보르 백작 앙리와 같이 프랑스에서 쫓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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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보르 백작 앙리는 샤를 10세의 차남이자 시동생 베리 공작 샤를 페르디낭의 하나 뿐인 아들이다. 그가 태어나던 1820년, 아버지 베리 공작이 공화파에게 암살되었으며, 자신에게 자식이 없었던 것 때문인지 마리 테레즈는 앙리를 친아들처럼 돌봤다. 7월 혁명으로 인해 샤를 10세가 퇴위하자 계승권 순서상 마리의 남편 루이 앙투안이 20분 간 형식적으로 즉위식을 수행한 뒤(...)에 루이 19세로서 앙리에게 자리를 넘겨줬다. 그래서 샹보르 백작 앙리는 앙리 5세라고도 하지만, 정식 대관식을 치루지 않은 상태에서 얼마 후 루이필리프 1세가 자신의 지지자들의 도움으로 즉위했기 때문에 실제 재위했던 기간은 며칠 밖에 안 되고, 앙리 5세라고 잘 불리지도 않는다.
마리는 그 후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영국을 떠돌면서 살아야 했고 남편인 루이가 1844년 죽은 뒤, 결국 오스트리아에서 폐렴에 걸려 부르봉 왕가에 유일하게 남은 친척 앙리 곁에서 숨을 거둔다.[13]
마리가 사망한 후, 부르봉 왕가의 마지막 후예인 샹보르 백작 앙리는 더 비참하게 홀로 여러 유럽을 떠돌면서 눈칫밥을 얻어 먹어야 했다. 1870년 나폴레옹 3세가 퇴위하고 파리 코뮌이 들어섰지만 이를 루이 아돌프 티에르가 진압했다. 앙리는 이 때 프랑스로 돌아가 왕위 계승권을 요구하지만 티에르를 초대 대통령으로 한 제3공화국[14]이 들어서면서 된 프랑스에서 내쫓긴다. 이후 프랑스 내각은 입헌군주제를 생각하면서 그를 국왕으로 받아들일 것을 염두에 두기도 했으나 앙리는 마리 테레즈의 영향 때문인지 전제군주제의 옹호자였고, 과거의 절대왕정 체제와 선을 긋긴 했으나 그와 동시에 '부르봉 백기를 국기로 재지정하지 않으면 왕위에 오르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그 기회를 스스로 내쳤다. 앙리는 이후 평생 프랑스 입국을 금지당했다.[15]
이 시기에 이르게 되면 왕당파를 확고하게 지지하던 방데 지방조차 공화국의 삼색기를 지지하기에 이른다. 그 이전엔 왕가의 백기만이 이 지방에서 인정받았다. 이미 세월이 너무 지났고 혁명의 성과물이 프랑스라는 근대 국가에 모두 반영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모두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앙리는 이 때문에 프랑스의 공화주의자들에게 프랑스의 조지 워싱턴, 공화국 개국공신이라는 비아냥성 찬사를 받기도 했다.
결국 앙리는 떠돌이로 지내다가 1883년 프라하에서 병으로 쓸쓸하게 죽는다. 그가 후사를 얻지 못하면서 부르봉 왕가의 혈통은 완전히 끊기게 된다.
프랑스 부르봉 왕가 직계는 이렇게 단절되었고 방계 혈통을 추적하면 스페인 부르봉의 루이스 알폰소 데 보르본[16]이 명목상의 프랑스 국왕 루이 20세이다. 루이스는 알폰소 13세의 차남 세고비아 공작 하이메의 손자로 현재 스페인 국왕인 펠리페 6세의 육촌이다 . 물론 아무런 특권도 없거니와 프랑스에서도 그런 사람이 있는 줄은 알지만 큰 관심은 없는 듯하다. 거기다 제2왕족인 부르봉-오를레앙 가의 후예 장 도를레앙(장 4세)[17]과 서로 프랑스 부르봉의 정통이라고 서로 논쟁 중인 데다가, 보나파르트 가문의 장 크리스토프 나폴레옹(나폴레옹 7세)[18]까지 합세해서 세 가문이 서로 정통성을 주장하고 있다. 부르봉-파르마 가문[19]의 식스토 엔리케, 카를로스 하비에르까지 끼어들지 않는 것이 그나마 다행.[20]

3. 이것저것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신의 시누이이자 마리 테레즈의 고모인 엘리자베트 필리핀 마리 엘렌 공주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내 딸이 누나로서 남동생을 도와줬으면 좋겠고, 아들은 누나에게 보살핌을 받아줬으면 좋겠다"라고 썼다. 죽음을 앞둔 마리 앙투아네트는 두 자녀가 살아남아 서로 의지하길 바란듯 하지만…
그러나 마리 테레즈는 프랑스 혁명 당시 혁명 인사들에게 세뇌당해 '''어머니가 자신을 겁탈'''했다고 증언한 남동생 루이 17세를 매우 증오했다. 당시 루이 17세는 아직 성에 대한 걸 잘 모르는 어린 나이였고 혁명세력에게 일종의 세뇌를 받아 정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마리 테레즈로서는, 자신의 어머니가 보고 있는 법정에서 남동생이 당당하게 어머니에게 성폭행당했다는 말을 한 것에 매우 큰 충격을 받았다. 이 때문에 마리 테레즈는 평생 루이 17세의 사칭자들을 만나지 않았으며, 루이 17세가 살아 있다는 루머에 대해서도 정말 살아 있다면 부모를 죽인 죄로 총살시켜야 한다고 대답했다. 물론 마리 테레즈 본인도 남동생이 왜 그랬는지를 알곤 있었지만 (형식적으로는) 그 증언으로 어머니가 죽음을 당했기에 미운 감정을 지울수가 없는것에 가깝다.
왕가의 친척으로서 왕위를 노리고 혁명에 가담한 부르봉-오를레앙 가문도 원수처럼 증오하였으며, 그 일원인 루이 필리프 1세와는 망명지에서도 만나주지 않을 정도였다.[21]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역시 찬탈자이자 반역자로 취급했으며 아주 싫어했다. 나폴레옹 시대에 작위를 받은 귀족들을 귀족으로 취급하지 않아 작위를 부르지 않고 평민처럼 불렀다고 한다. 당연한 게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에게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자기 아버지의 제위를 가로챈 장본인이자 자기 가문을 무너뜨린 장본인이었으므로 대인관계 분류상 '''불구대천'''이 되는 것이 필연적이었다.

4. 대중매체에서


마리 앙투아네트에 동정적인 창작물에서는 비교적 아주 대우가 좋다. 베르사유의 장미라든가, 세느강의 별이라든가 말이다.

만화/애니메이션 베르사유의 장미에 나왔을 때 EBS판 성우는 전해리. 만화 원작에서는 어렸을 때 오스칼에게 안기면서 ‘오'''시'''칼 '''오빠'''’라고 불렀다.
영화 마리 앙투아네트에서도 나온다.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에서는 문은수와, 윤시영[22]이 맡는다.
일본의 1인 게임 제작자 Tamadenki가 만든 도트게임들 중 하나인 쿠루퐁 어벤져(くるぽん アベンジャー)의 말 없는 주인공인 공주가 바로 이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이다. 이 게임은 구글 플레이 스토어에서 찾을 수 있다.
중반 스토리에 사형 집행인의 말 중 주인공 공주를 지목하는 '''오스트리아 여자의 공주'''가 언급되고, 엔딩과 크레딧이 나올 때 나오는 장면 중 주인공 공주와 닮은 백금발의 여자가 단두대를 향해 걸어가다가 사형집행자의 발을 밟고 '''"미안해요, 악의로 그런 건 아니었어요."'''라는 말을 하는 것으로 보아 그녀의 어머니인 마리 앙투아네트라는 것이 드러난다.

만화 배고픈 마리에서 주연급으로 등장한다. 역사와 마찬가지로 마리 앙투아네트의 딸이며 왠지 모르게 항상 배가 고프다. 주인공 비죠기 타이가와 신체를 공유하고 있는데 특이하게도 비죠기 타이가의 모습일 때는 영혼은 마리 테레즈이고 마리 테레즈의 모습일 때는 영혼이 비죠기 타이가이다.
성녀전기에서는 바깥 세상을 잘 몰라서 폴린 일행을 자신을 호위하는 기사로 착각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중반에 왕당파가 숙청되자 혼자 도망쳐서 폴린의 군에 의탁한다. 이후에는 신분을 숨기고 폴린의 부대원으로 살아간다.

5. 검은 백작 부인(Dunkelgrafen): 마리 테레즈 가짜설


사실 오스트리아로 보내진 것은 '가짜' 마리 테레즈라는 음모론이 있다.
음모론의 대상으로, '진짜' 마리 테레즈라는 주장이 있는 검은 백작 부인은 1807년 2월 튀링겐 주(Thuringia) Hildburghausen에 정착해서 아이자우젠(Eishausen)에서 살다가 1837년 11월 28일 사망한 신원불명의 여성이다. 그들은 철저하게 비밀스럽게 살았으며, 백작 부인은 늘 얼굴을 베일로 덮고 있었다고 한다. 백작 부인이 죽은 뒤 그 '백작'은 1845년 4월 8일까지 살다가 죽었다.
그러면 이후로 활동한 마리 테레즈는 누구냐? 음모론에 따르면 마리 테레즈와 바꿔치기 한 것은 에르네스틴 랑브리케(Ernestine Lambriquet)이다. 본명, 마리 필리피느 드 랑브리케로 마리 필리피느라는 베르사유 궁전시녀가 낳은 그녀는 1788년 4월 30일, 어머니가 사망하자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입양되었고 이 때 에르네스틴으로 개명되었다. 1778년 7월 31일 에르네스틴은 10살이던 마리 테레즈의 놀이 친구가 되었는데, 기록에 따르면 이 두 소녀의 외모가 매우 닮았다고 한다.
에르네스틴의 출생 법률 문서에 어머니 마리 필리피느의 이름은 있지만 필리피느의 남편인 '잭'의 이름은 존재하지 않았다. 출생이 불분명한 데다가, 별다른 이유도 없이 입양되었고 얼굴도 닮았고, 게다가 루이 16세가 에르네스틴에게 비싼 드레스나 피아노를 사주는 등 매우 잘 대해주었기 때문에 사실 이 소녀는 '루이 16세의 서녀'가 아닌가 하는 가설이 생겨나게 된다.
또 1792년 8월 9일, 마리 앙투아네트로부터 에르네스틴의 안전을 지키도록 명령받은 드 스시 부인은 튈르리 궁전이 민중들에게 습격당했을 때 에르네스틴을 데리고 도망쳤다.
아무튼 이 가설에 따르면 마리 테레즈는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강간을 당해 임신을 했고 그로 인하여 세상에 나서기를 거부했다. 그래서 1795년, 이복누이(?)인 에르네스틴을 대신 '마리 테레즈'로 세상에 내보내고 자신은 평생 은둔하며 살았다.
다만 이 음모론의 결정적인 문제는 에르네스틴은 나폴레옹 시대에 빠리에서 살았고, 1810년 12월 7일, 쟝 샤를 브라팡이라는 남자와 결혼하여 1813년 12월 30일 빠리 교외에서 사망했다는 서류가 있다는 것이다.(...)
이 전설이 퍼진 탓에 2013년 독일에서 무덤 파서 유전자 검사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검사 결과 그녀는 마리 테레즈가 아니었다.
2015년 12월 6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이 음모설에 대해 다뤘다. 처음엔 검은 백작부인이 마리 테레즈로 알려졌던 것처럼 나와 음모론과 사실이 매우 뒤섞여 제작진이 자료 조사를 잘못한 지 착각이 들게 했지만, 방송에 따르면 2013년 독일에서 유전자 검사를 한 결과 검은 백작부인은 마리 테레즈가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니 오스트리아로 도망친 마리 테레즈가 진짜 마리 테레즈가 맞다는 말이다. 덧붙여 외국인 배우들이 계속 "마리 테레즈"라고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자막에는 '''샬럿'''이라고 나왔다.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가 풀네임이니 잘못된 건 없지만, 굳이 샬럿이라고 불러야 했다면 프랑스인이니 샤를로트라고 불렀어야 한다.
[1] 프랑스의 아이들. 왕자를 포함한 왕녀, 도팽(왕세자)의 자녀들에게 주어지는 칭호.[2] 국왕의 장녀에게 주어지는 칭호. 결혼하면 소멸되었다. 영국프린세스 로열이 이 칭호를 본따 만들어졌다. 프랑스/역사에서 이 칭호를 받은 왕녀는 마리 테레즈 외에도 앙리 4세의 장녀 이사벨, 루이 15세의 장녀 루이즈 엘리자베트가 있으나 마리 테레즈의 높은 인지도 탓에 보통 마담 루아얄 하면 마리 테레즈를 일컫는다. 참고로 이사벨은 스페인펠리페 4세에게 시집을 가서 8명의 자녀를 낳았지만 그 중에서 발타사르 카를로스 왕자와 루이 14세의 왕비가 되는 스페인의 마리 테레즈 공주만 살아남았고, 심지어 살아남은 장남 발타사르 카를로스는 16세에 천연두로 죽는다. 딸인 마리 테레즈는 사촌인 루이 14세에게 시집간다.[3] 프랑스 왕세자비.[4] 이 이름을 물려받게 된 이유는, 마리아 테레지아가 자식들에게 결혼하여 첫 딸을 낳으면 자신의 이름을 붙이라고 명했기 때문이다. 마리 테레즈의 외사촌이나 이종사촌 자매들도 장녀인 경우 마찬가지로 마리아 테레지아에게서 따온 이름을 가지고 있다. 요제프 2세의 장녀 마리아 테레사, 마리아 카롤리나의 장녀 마리아 테레지아, 레오폴드 2세의 장녀 마리아 테레사 등이 있다.[5] 이는 아이를 바꿔치기 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이기도 했다. 완전히 '아무나'는 아니고 왕실의 계서제에 따라 입회 권한이 정해져 있었다. 옷을 입을 때도 이러한 계서제에 따라 하녀는 왕비에게 옷을 바로 줄 수 없었고 의전을 맡은 백작 부인에게 건넨 뒤 왕비에게 가야 했다. 도중에 그 백작 부인보다 더 높은 사람이 들어오면 다시 또 옷을 건네는 식. 이렇게 옷이 건네 지는 동안 속옷차림으로 있어야 했기 때문에 앙투아네트는 이를 무척 괴로워했다.[6] 원래 왕손의 가정교사는 대귀족이 맡는 것이 관례였으나,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기 또래의 친구인 폴리냑을 가정교사로 임명하였다.[7] 공포정치 시절은 왕족들과 귀족들은 이른바 '태어난 것이 죄'라는 말이 나올 만큼 갓난 아기조차 귀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죽였던 무참한 살육의 현장이었다. 결국 루이 16세의 여동생 엘리자베트 필리핀 마리 엘렌 공주는 국외로 도피한 오빠 아르투아 백작과 서신 교환을 한 것이 적발되어 반혁명 혐의로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사실 그 전부터 엘리자베트 필리핀 마리 엘렌 공주는 형제들과의 근친상간 루머로 손위올케 마리 앙투아네트처럼 고통받았으며, 특히 탕플에 투옥된 이후에는 엉뚱하게도 로베스 피에르와의 염문에 시달렸다(...). 이는 로베스 피에르가 공안위원회를 장악하고 공포정치를 시행하던 시점에 돌던 소문으로 로베스 피에르가 엘리자베트 필리핀 마리 엘렌 공주와 결혼하여 결국 왕이 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그의 정적들이 비난하는 분위기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런 상황이라 단순히 여자라서 왕위와 관계 없다고 살아남을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으며, 마리 테레즈가 살아남은 것이 기적이었다. 다만,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는 왕족이라서 위태로웠지만 같은 왕족이라도 여자라서 반드시 처형당할 남자보다는 확실히 살 확률이 훨씬 높았다.[8] 한국어판은 한국 가톨릭 최초의 박사 신부천주교 서울대교구 윤을수 라우렌시오(1907-1971) 신부가 번역했다. 윤 신부는 가톨릭대학교/성신교정 제2대 학장이자, 인보성체수녀회의 설립자이기도 하다.[9] 샤를은 샤를로트의 남성형이다.[10] 이 때 이들을 받아들여주고 손님으로 대접해줬던 건 분할당해 멸망한 폴란드의 옛 왕족이었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왕족은 이후 마리 테레즈가 원수와 같이 생각한 나폴레옹의 휘하에서 장군으로 복무하며 26인의 프랑스 제국 원수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는 바로 폴란드의 애국자, 폴란드의 독립을 위하여 일평생을 바친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였다.[11] 특히 그녀가 프랑스 혁명 동안 프랑스에서 있었던 일을 적은 일기에서도 혁명 세력을 전부 악당으로 묘사했다.[12] 정작 부모인 루이 16세마리 앙투아네트 모두 처형 직전에 남긴 서신이나 유언을 보면, 자신들의 처형으로 인해서 더 이상의 희생과 폭력이 벌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또한 이러한 유지를 살아남은 자신들의 자녀에게도 남기려고 했다.[13] 향년 72세. 당시로서는 상당히 장수했다.[14] 제1공화국은 1792년 프랑스 대혁명으로 들어선 공화국, 제2공화국은 1848년 10월 혁명으로 루이필리프 1세가 퇴위하고 들어선 공화국이다.[15] '''이 때가 프랑스에서 자발적으로 왕정을 복고할 마지막 기회였다.''' 부르봉 왕가 내에서 정통파와 오를레앙파 간의 다툼이 앙리를 우두머리로 하고 그 후계를 오를레앙파인 파리 백작 필리프로 정하게 되면서 해소된 데다, 당시 '''제3공화국의 의회 구도가 왕당파 의원들이 과반수를 훨씬 넘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앙리가 오를레앙 왕가를 굉장히 증오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이 왕당파의 패착이었다.[16] 프랑스식으로는 루이 드 부르봉[17] 루이 필리프 1세의 7대손이다.[18] 나폴레옹 1세의 동생 제롬 보나파르트의 현손[19] 사실은 이들은 앙리 5세의 누나 루이즈 다르투아의 자손이라, 혈통상 제일 정통성이 있고 더욱이 오스트리아 황제 카를 1세의 빽까지 있어서, 1차세계대전이 다르게 갔다면 어떻게 되었을 지 모른다.[20] 타임라인 191 시리즈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프랑스에서 앙리 가문의 부르봉 왕조가 부활한 설정이 나온다. [21]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루이 필리프는 마리 테레즈도 인정한, 어머니 마리 앙투아네트가 사랑한 친언니의 딸이자 그녀의 사촌동생인 마리아 아말리아와 연애결혼을 했다.[22] 겨울왕국에서 한스 웨스터가드의 노래 파트를 담당한 윤승욱의 딸이다. 보이스 키즈 코리아에 출연한 적이 있으며 더빙판 안나의 노래를 맡으면서 놀라운 대회 스타킹이나 불후의 명곡에도 나오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