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오 바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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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o Bava
(1914.07.31.~1980.04.25.)
출신 : 이탈리아 산레모, 리구리아
부모 : 유제니오 바바 (아버지)
이탈리아 공포영화의 대부이자 지알로의 알파이자 오메가로 평가 받는 이탈리아의 영화 감독.
실질적으로 지알로를 탄생시킨 감독으로,[1] 파란 조명을 귀신의 턱 밑에서 쏴서 무섭게 보이는 마리오 바바 특유의 효과는 이후 한국 공포 영화들에도 영향을 끼쳤다. 아들은 데몬스로 유명한 람베르토 바바. 람베르토는 자기 아버지의 그늘을 좋아하지 않는다. 마리오 바바가 이탈리아 영화계에 영향력이 컸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코폴라 집안의 후광을 싫어한 니콜라스 케이지같은 경우다.
팀 버튼은 가장 진실된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라며 그를 숭배했지만 사실 마리오 바바는 장르를 가리지 않고 영화를 찍는 다작 감독이었다.[2]
마리오 바바의 아버지 에우게니오 바바는 조각가로 활동하다가 무성영화 시절 특수효과 담당으로 영화판에 들어가서 촬영감독으로 일하는 등 업계 인물이었다. 마리오 바바는 원래 화가가 되려고 했지만 화가 자체가 워낙 힘들고 생계를 잇기도 어려워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특수효과 담당으로 영화 업계에 들어갔다. 업계에 본격적으로 몸담기 전에도 이미 아버지의 특수효과를 조금씩 도왔다고 한다.
1939년, 카메라맨이 된 마리오 바바는 로베르토 로셀리니와 함께 단편영화 2개를 찍고 1940년대 초반부터는 장편영화의 촬영감독으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1960년, 그는 감독 데뷔작인 블랙선데이(La Maschera del demonio)을 만들면서 본격적으로 영화 감독 커리어를 쌓게된다.
1970년대 후반, 감독하는 영화들마다 줄줄히 흥행참패하고 아버지까지 사망하여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상당히 피폐해진 마리오 바바는 아들인 람베르토 바바가 쓴 각본으로 쇼크(1977년작)의 제작 및 공동감독으로 참여한 것을 마지막으로[3] 1980년 4월 25일 65세의 나이로 별세한다. 그리고 4일뒤 앨프리드 히치콕도 사망한다.
아들 람베르토 바바의 인터뷰
영화평론가 듀나가 마리오 바바에 대해 쓴 글.
전반적으로 영화 만드는 실력은 아르젠토나 루시오 풀치보다 넘사벽으로 평가받는다. 아르젠토도 한 수 접고 존경하는 감독으로 뽑을 정도. 바바의 영화는 공포 영화에 그치지 않고 예술 영화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4] 각본 퀄리티도 격차는 있어도 서사를 연출하고 통솔하는 실력은 확실히 뛰어나다고 평가받는다.
괴담 시베리아 지하의 지옥 비명의 진짜 정체는 그의 1972년작 Baron Blood라는 영화의 사운드트랙이다. 한국에 괴담이 널리 퍼질 수 있던 이유로는 영화가 흥행에 실패한 탓에 사람들이 영화에 대해 잘 알지 못했고 괴담이 처음 퍼졌을 때가 아직 대중들에게 컴퓨터가 그다지 많이 보급되어있지 않던 1997년 즈음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이 음성이 처음 조작되어 세상에 퍼진 것은 1989년 개신교 방송국인 Trinity Broadcasting Network(TBN)에 의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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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도 본인의 저서에서 걸작이라며 극찬한 호러 무비계의 마스터피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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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텔리 사바라스는 코작에서 롤리팝이라는 사탕을 먹는 장면으로 유명해졌는데 그 이미지의 효시가 바로 이 영화였다. 리사와 악마를 촬영할 때 해당 장면을 마음에 들어한 텔리 사바라스가 훗날 코작을 찍을 때 롤리팝을 소품으로 사용한 것.
1. 개요
Mario Bava
(1914.07.31.~1980.04.25.)
출신 : 이탈리아 산레모, 리구리아
부모 : 유제니오 바바 (아버지)
이탈리아 공포영화의 대부이자 지알로의 알파이자 오메가로 평가 받는 이탈리아의 영화 감독.
실질적으로 지알로를 탄생시킨 감독으로,[1] 파란 조명을 귀신의 턱 밑에서 쏴서 무섭게 보이는 마리오 바바 특유의 효과는 이후 한국 공포 영화들에도 영향을 끼쳤다. 아들은 데몬스로 유명한 람베르토 바바. 람베르토는 자기 아버지의 그늘을 좋아하지 않는다. 마리오 바바가 이탈리아 영화계에 영향력이 컸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코폴라 집안의 후광을 싫어한 니콜라스 케이지같은 경우다.
팀 버튼은 가장 진실된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라며 그를 숭배했지만 사실 마리오 바바는 장르를 가리지 않고 영화를 찍는 다작 감독이었다.[2]
2. 경력
마리오 바바의 아버지 에우게니오 바바는 조각가로 활동하다가 무성영화 시절 특수효과 담당으로 영화판에 들어가서 촬영감독으로 일하는 등 업계 인물이었다. 마리오 바바는 원래 화가가 되려고 했지만 화가 자체가 워낙 힘들고 생계를 잇기도 어려워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특수효과 담당으로 영화 업계에 들어갔다. 업계에 본격적으로 몸담기 전에도 이미 아버지의 특수효과를 조금씩 도왔다고 한다.
1939년, 카메라맨이 된 마리오 바바는 로베르토 로셀리니와 함께 단편영화 2개를 찍고 1940년대 초반부터는 장편영화의 촬영감독으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1960년, 그는 감독 데뷔작인 블랙선데이(La Maschera del demonio)을 만들면서 본격적으로 영화 감독 커리어를 쌓게된다.
1970년대 후반, 감독하는 영화들마다 줄줄히 흥행참패하고 아버지까지 사망하여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상당히 피폐해진 마리오 바바는 아들인 람베르토 바바가 쓴 각본으로 쇼크(1977년작)의 제작 및 공동감독으로 참여한 것을 마지막으로[3] 1980년 4월 25일 65세의 나이로 별세한다. 그리고 4일뒤 앨프리드 히치콕도 사망한다.
3. 평가
아들 람베르토 바바의 인터뷰
영화평론가 듀나가 마리오 바바에 대해 쓴 글.
전반적으로 영화 만드는 실력은 아르젠토나 루시오 풀치보다 넘사벽으로 평가받는다. 아르젠토도 한 수 접고 존경하는 감독으로 뽑을 정도. 바바의 영화는 공포 영화에 그치지 않고 예술 영화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4] 각본 퀄리티도 격차는 있어도 서사를 연출하고 통솔하는 실력은 확실히 뛰어나다고 평가받는다.
4. 기타
괴담 시베리아 지하의 지옥 비명의 진짜 정체는 그의 1972년작 Baron Blood라는 영화의 사운드트랙이다. 한국에 괴담이 널리 퍼질 수 있던 이유로는 영화가 흥행에 실패한 탓에 사람들이 영화에 대해 잘 알지 못했고 괴담이 처음 퍼졌을 때가 아직 대중들에게 컴퓨터가 그다지 많이 보급되어있지 않던 1997년 즈음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이 음성이 처음 조작되어 세상에 퍼진 것은 1989년 개신교 방송국인 Trinity Broadcasting Network(TBN)에 의해서였다.)
5. 주요 작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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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 Vampiri(1957)와 Caltiki - il mostro immortale(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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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랙선데이(La Maschera del demonio) 1960년.
박찬욱도 본인의 저서에서 걸작이라며 극찬한 호러 무비계의 마스터피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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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 많이 알아버린 소녀(La Ragazza che sapeva troppo) 196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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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랙 사바스 1963년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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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찍과 시체(La Frusta e il corpo) 196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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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킬... 베이비 킬! (1966년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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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사와 악마 Lisa and the Devil (1973)
배우 텔리 사바라스는 코작에서 롤리팝이라는 사탕을 먹는 장면으로 유명해졌는데 그 이미지의 효시가 바로 이 영화였다. 리사와 악마를 촬영할 때 해당 장면을 마음에 들어한 텔리 사바라스가 훗날 코작을 찍을 때 롤리팝을 소품으로 사용한 것.
[1] 지알로는 이후 다리오 아르젠토를 비롯하여 마리오 바바의 영향을 받은 감독들의 활약으로 영화계의 한 축으로 완전히 자리잡게 된다.[2] 참고로 마리오 바바는 다른 장르의 영화를 감독 할 때면 존 M. 올드라는 가명을 썼다.[3] 실질적인 영화의 감독은 람베르토 바바.[4] 킬 베이비 킬 같은 경우, 루키노 비스콘티부터 마틴 스콜세지가 격찬했던걸로 유명하다. 심지어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얘기도 있다.[스포일러] 영화의 시작부터 영화의 클라이막스 직전까지 마녀의 희생자로 생각되던 여자아이가 사실은 마녀였고 마녀로 지목되는 여주인공이 사실은 무고한 사람이었다는 반전으로도 유명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