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노 비스콘티

 

'''Luchino Visconti di Modr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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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루키노 비스콘티 디 모드로네[1]
Luchino Visconti di Modrone
'''국적'''
이탈리아 [image]
'''출생'''
1906년 11월 2일, 이탈리아 롬바르디아주 밀라노
'''사망'''
1976년 3월 17일, 이탈리아 라치오주 로마
1. 개요
2. 필모그래피


1. 개요


'''Luchino Visconti di Modrone'''
(1906~1976)
이탈리아영화감독, 연극 연출가, 극작가. 밀라노에서 태어나 로마에서 사망.
비토리오 데 시카, 로베르토 로셀리니와 더불어 소위 이탈리아 네오 리얼리즘 3대 작가 중 한 사람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고 있지만 이상하게도 국내에서는 매우 인지도가 떨어진다. 그의 작품중 국내개봉된 것이 거의 없는데 아마도 데카당스적인 내용과 그의 공산당 활동 경력 때문이 아닌가 추정된다.
화려하면서도 서정적인 작풍으로 알려져 있고 독특한 미적 심미안은 당대 감독들 중 최고로 평가받는다. 그의 영화의 스태프롤이 흐를때는 보통 극장에서도 관객들이 박수갈채를 보내는 일이 종종 있었다고.
그는 13세기에서 15세기까지 밀라노 공국을 지배하며 르네상스 문화를 연 명문 '비스콘티' 백작위를 가진 명문귀족이었다.[2] 때문에 다른 이탈리아 감독들이 국제적 명성을 얻고도 영어를 못해 쩔쩔맨 것과는 달리 영어는 물론 프랑스어, 독일어 등 수개국어에 능했고 파시스트 정권에 반발해 이탈리아 공산당에 입당했으면서도 절대로 귀족 취미를 버리려고도 하지 않았다. 젊은 시절부터 사교계의 총아에다 뛰어난 미적감각으로 이름이 높아 루이뷔통듣보잡이던 시절부터 뷔통의 가방만 들고다녔으며[3] 30살 무렵 장 르누아르의 연출 보조로 영화계에 발을 딛었는데 그를 르느와르에게 소개시킨 사람은 샤넬의 창립자인 디자이너 코코 샤넬이다.
1942년, 《강박관념》[4]으로 데뷔. 그런데 한창 전쟁중이라 판권 허락도 안 받고 그냥 찍어 버렸고 개봉 며칠만에 상영 금지의 된서리를 맞기도 했다.[5] 때문에 해외 정식 공개는 본인의 사후 미국 76년 뉴욕 필름 페스티벌에서 겨우 이루어 졌다고. 본작을 가지고 최초의 네오 리얼리즘영화고도 하는데 흔히 최초는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45년작, 《무방비도시》라고 하지만 반파시즘적 내용이나 야외촬영, 아마추어 배우 기용은 본작이 최초라고 '''감독이 주장'''하고 있다.
이후 한동안은 연극 무대 연출, 오페라 연출에 전념했는데 전후 48년 공산당의 자금 지원으로 네오 리얼리즘의 걸작《흔들리는 대지》(La terra trema: episodio del mare)로 영화연출에 복귀했으나 영화를 치졸한 이념선전물로 만들려는 공산당의 참견에 반발하여 바로 탈당한다.
1950년대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 오케스트라에서 담당했던 무대 연출들은 현재까지도 회자되는 연출들이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최고였다고 평가되는 공연이 1955년 라 트라비아타 공연이었는데 마리아 칼라스의 혼신의 연기는 라 스칼라 극장 관객들의 기립 박수까지 이끌어냈다. 그 연출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는 자료가 적기는 하지만 남아있는 녹음을 통해 그의 뛰어난 연출력을 알아낼 수 있다.
양성애자로 당당하게 커밍아웃 했는데 사실 부친도 양성애자였다고... 때문에 영화를 찍을 때에는 여배우는 물론이고 남자배우와도 종종 염문설이 돌곤 했는데 그중에는 심지어 알랭 들롱도 포함되어 있다. 공개적인 연인은 오스트리아 출신 배우 헬무트 베르거였다.
2회 이상 기용한 배우로는 버트 랭카스터,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 알랭 들롱, 더크 보가드, 그리고 헬무트 베르거 등.

2. 필모그래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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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박관념''' ''Ossessione'' (1943)

네오리얼리즘의 효시로 꼽히는 비스콘티의 첫 작품. 제임스 케인팜 파탈 소설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를 허락도 없이 각색했다. 유로 크라임의 효시격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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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대지''' ''La terra trema'' (1948)

이탈리아 베리스모의 대표 작가 조반니 베르가의 소설 『말라볼리아 가의 사람들』을 바탕으로 했다고 하며, 시칠리아의 가난한 어부들의 삶을 극히 사실적으로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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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리시마''' ''Bellissima'' (1951)

딸을 아역 스타로 만들기 위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는 어머니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리면서 영화 산업에 대해 비판하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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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모 돈''' ''Siamo donne''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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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소''' ''Senso'' (1954)

오페라적 장중함이 돋보이는 영화로 리얼리즘을 탈피해 탐미주의적 연출이 돋보인다. 감독은 잉그리드 버그만말론 브란도를 캐스팅하고 싶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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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 ''Le notti bianche'' (1957)

순수한 사랑의 본질과 이중성을 서정적으로 담아낸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백야』를 바탕으로 한 작품. 비스콘티가 네오리얼리즘적 시각에서 다소 벗어나 사랑과 절망을 백일몽과 같은 환상 속에서 아름답게 그려냈다. 명배우 마르첼로 마스트로야니가 처음으로 주연을 맡은 작품. 베니스 영화제 은사자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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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코와 그의 형제들''' ''Rocco e i suoi fratelli'' (1960)

마지막 리얼리즘 영화. 알랭 들롱이 주연이다. 아니 지라르도의 명연기가 돋보인다. 이탈리아에서 천만 관객을 동원한 대표작 중 하나. 베니스 영화제 특별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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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카치오 70''' ''Boccaccio '70'' (1962)

페데리코 펠리니비토리아 데시카마리오 모니첼리와의 옴니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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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파드''' ''Il gattopardo'' (1963)

<흔들리는 대지> <로코와 그의 형제들>에 이은 ‘시칠리아 3부작’의 마지막 작품.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쇠락해가는 귀족의 삶을 담은 시대극. 미국 배우 버트 랭카스터가 주연으로 기용되었다. 이탈리아에서 천만 관객을 동원한 대표작.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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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미한 곰별자리''' ''Vaghe stelle dell'Orsa...'' (1965)

아버지를 배신한 어머니와 어머니의 정부에게 복수를 한다는 그리스신화의 엘렉트라 이야기를 비스콘티가 현대로 가져와 재해석했다.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의 매력이 돋보인다.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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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Lo straniero'' (1967)

알베르 카뮈이방인 영화화 작품. 장 뤽 고다르의 뮤즈인 안나 카리나가 주연으로 등장한다. 비평과 흥행 모두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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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받은 자들''' ''La caduta degli dei'' (1969)

헬무트 베르거 주연작. 잉마르 베리만 영화 단골 출연자인 잉리드 툴린과 젊은 시절의 샬롯 램플링이 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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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에서의 죽음''' ''Morte a Venezia'' (1971)

토마스 만의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 비에른 안드레센이 맡은, 주인공이 좋아하는 소년 타지오가 엄청난 미소년이라 일본 등지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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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드비히: 신들의 황혼''' ''Ludwig'' (1973)

헬무트 베르거 주연작. 바이에른의 왕 루드비히 2세 전기 영화로 4시간이라는 엄청난 러닝타임을 자랑한다. 로미 슈나이더가 엘리자베트 역으로 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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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과 열정''' ''Gruppo di famiglia in un interno'' (1974)

헬무트 베르거와 버트 랭카스터 출연작. 국제적으로 성공한 영화는 아니지만 자국인 이탈리아에서는 좋은 성과를 거두었고 비스콘티 열풍이 불었던 당시 일본에서도 흥행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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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한 사람들''' ''L'innocente'' (1976)

데카당스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가브리엘레 단눈치오의 작품을 각색한 비스콘티의 마지막 작품


[1] Luchino를 국내에선 영어식으로 루치노라고 번역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탈리아식인 루키노로 읽는 게 맞다[2] 한니발 렉터가 상당한 귀족 취미를 가진 것으로 묘사되는데 원작 소설에서는 그가 비스콘티가의 피를 이어 받은 것으로 묘사된다. 그래서 그가 렉터의 모델이라는 풍문도 있다.[3] 모두들 뷔통의 로고가 비스콘티의 이니셜을 박아넣은 것으로 알았다고 한다. 루이 뷔통('''L'''ouis '''V'''uitton)이나 루키노 비스콘티('''L'''uchino '''V'''isconti)나 둘 다 이니셜이 '''LV'''다. 비스콘티 정도의 재력이면 개인 이니셜을 박은 가방 정도야 아무 것도 아니기도 했고.[4]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가 원작[5] 판권 탓이 아닌 반 파시즘 내용 탓이란 주장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