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켄슈타인
프랑켄슈타인: 또는 현대의 프로메테우스
Frankenstein: Or the Modern Prometheus
놀랍게도 이 소설을 쓸 당시인 1815년 메리 셸리는 '''18살'''이었다. 비오는 여름 어느 날 조지 고든 바이런과 함께 무서운 이야기를 하던 중 영감이 떠올라 썼다고 한다. 1816년, 19살의 메리는 의붓자매 클레어 클레어몬트, 당시 미래의 남편이 될 퍼시 비시 셸리,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윌리엄과 함께 스위스를 여행 중이었다. 클레어는 메리에게 제니바 호수 근방에서 살고 있는 시인 바이런을 만나러 가자고 제안했다. 클레어는 얼마 전 바이런과 짧은 사랑을 했었는데[2] 그 때 기억을 잊지 못해 그를 다시 찾아가고자 했던 것이었다. 그렇게 세 사람은 제네바로 여행을 가게 되었다.[3] 당시 바이런은 스무 살의 의사이자 작가 지망생이었던 존 폴리도리(1795~1821)와 함께 지내고 있었다. 메리 일행과 바이런, 폴리도리는 금세 친구가 되었다.
폭풍우가 몰아치던 어느 날 밤, 다섯 사람은 바이런의 별장 안에 모였다. 다섯 사람은 무료함을 견디지 못해 따분해하고 있었는데 그 때 바이런이 재밌는 제안을 하나 한다. 각자 자기만의 무서운 이야기를 하나씩 써보자는 것이었다. 메리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바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퍼시는 어린 시절의 경험담을 토대로 이야기를 만들었고, 바이런은 흡혈귀를 소재로 하는 단편을 만들었다. 그리고 폴리도리는 열쇠구멍으로 훔쳐본 죄로 처벌당한 해골 아가씨 이야기를 했다.[4]#
메리는 모두의 등골이 오싹해질 만한 소설을 쓰고 싶었다. 그러나 괜찮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고민하던 어느 날, 메리는 퍼시와 바이런의 대화를 우연히 엿듣게 된다. 바로 '갈바니즘'(galvanism)에 관한 대화였다. 갈바니즘은 죽은 개구리 뒷다리가 전기 자극을 받고 꿈틀거리는 것을 발견한 의사 갈바니의 실험에서 유래한 용어였다. 이 대화를 들은 메리는 꿈 속에서 창백한 얼굴의 학자가 자신의 연구를 집대성한 괴물 옆에 무릎을 꿇은 모습을 보게 된다.[5] 후에 이것을 토대로 《프랑켄슈타인》을 집필해 대성공을 거둔다.
프랑켄슈타인[6] 이 오랜 연구 끝에 발견한 생명의 불꽃을 만드는 법을 시험하겠다는 욕망에 괴물을 만들지만, 막상 탄생한 괴물을 보고 놀라서 비명을 지르고 괴물은 사라져버렸는데, 여차여차 일이 심하게 꼬여서 괴물에게 자신의 동생과 아내, 친구를 잃게 되자 북극으로 괴물을 추적해 나섰다가 죽는다는 이야기.
《걸리버 여행기》, 《유토피아》, 요하네스 케플러의 《꿈》, 《지킬 박사와 하이드》 등과 함께 '''최초의 SF 소설'''로 거론되며, 특히 이 작품이 최초의 SF라는 데 무게를 실어주는 사람이 많다. 1970년대 영국에서 최초의 SF를 《프랑켄슈타인》이라고 한 논문에 의해 시작되었으나, 신화나 설화에 있는 과학적인 이야기의 흔적을 외면하거나 다른 국가에 있는 과학적인 이야기의 흔적을 싸그리 무시한다 하여 까였다. 현대인의 시각에서는 전기로 죽은 사람을 부활시킨다는 개념이 과학과 연관성이 없는 허구맹랑한 환상문학으로 느껴질 수 있으나 당시는 갈바니가 그 유명한 전기로 죽은 개구리 다리를 움직이게 하는 실험으로 인해서 시작된 갈바니즘[7] 이 한참 활발하게 연구되던 시절이기 때문에 그 당시 과학지식을 배경으로 쓰여졌다는 면에서는 완벽하게 공상과학소설로 분류될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프랑켄슈타인》은 최소한 '''영문학 SF의 효시'''가 맞다. SF(과학소설)을 환상문학의 갈래에 포함시킨다면 환상문학의 기원이야 선사시대의 신화나 설화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환상문학의 정의는 실제세계와는 다른 초자연성에 있다. 이러한 초자연성의 생경함에 독자는 기괴함이나 경이로움을 느끼고, 독자의 감상은 공포로 연결된다. 이같은 공포를 이용해 설화나 신화에 지배 이데올로기를 삽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과학소설은 근대 이전의 신화, 로망스 문학과는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그것은 과학과 역사주의가 19세기를 지배하면서 사실주의가 등장했고, 과학소설은 이러한 사실주의 문예사조 안에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근대의 과학적, 합리주의적 세계관으로 쓰인 과학소설은 원시시대의 신화, 설화와는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에서부터 다르다.[8]
《걸리버 여행기》나 《유토피아》와 비교해도 마찬가지다. 과학소설의 정의를 '합리적인 가상소설'로 볼 경우, SF의 뿌리를 유토피아 문학에서 찾을 수도 있다. 이럴 경우, 앞서 언급한 《유토피아》가 과학소설의 효시가 될 수 있다.[9] 그러나 유토피아 문학의 본질은 과학기술 자체가 아니라 정치, 사회 풍자에 있다. 과학기술은 사회풍자를 위한 도구 역할에 그친다. 그래서 《유토피아》에서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국가 '유토피아'가, 《걸리버 여행기》에서 결핍을 모르는 풍요의 섬 '벤살렘 왕국'이 나오더라도, 이들 소설들은 SF로 부를 수 없다. 과학기술이 사회 및 인간과의 관계에 던지는 질문과 답이 없기 때문에 '원형적' 과학소설 또는 '선구적' 과학소설이라 해야 보다 적절할 것이다. 그러므로 SF는 '''과학적 지식에 근거해 과학을 주제로 쓴 공상소설'''이라 다시 정의할 수 있다.[10] 따라서 갈바니즘에 근거한 생명창조 실험을 모티브로, 과학적 세계관에 대한 불길한 예감과 이에 대한 문학적 저항이 드러나는 《프랑켄슈타인》에 이르러서야 과학소설로서 명확한 정체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11]
또한 의외로 프랑켄슈타인 관련 논문을 보면서 많이 파고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프랑켄슈타인》보다 많은 것을 알려주는 작품이 《프랑켄슈타인》 이전에는 없다는 것에 놀라게 된다. 인조인간에 대한 경계 외에도 특히 완벽하리라고 생각되었던 과학의 실패, 사회화된 여성에 대한 부정적인 결말 등 의외로 지금까지도 연구하면 캐낼 수 있는 것들이 많다고 한다.
《프랑켄슈타인》 출간 당시에는 지금처럼 평론가들에게 큰 주목을 받진 못했다. 익명으로 발표된 당시에는 문학적 가치에 대한 담론보다는 작가가 누구냐는 것이 더 큰 관심사였다. 많은 이들이 남성일거라 추측했던 작가가 여자로 밝혀졌을 때 "스무 살이 채 안된 여성의 병적인 상상력이 만들어 낸 기이한 산물"이라는 악평이 이어졌다. 물론 여자라서 까인 건 아니고 당시에는 원래 호러물에 대한 폄하가 심했다. 당대의 유명한 소설가였던 월터 스코트(Walter Scott. 아이반호의 작가)는 "이 소설은 보통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상상력의 결과이며 불경스러울 정도로 자연과 인간에 대해 암울하고 어두운 시각을 지니고 있다’’고 평했다.[12] 《프랑켄슈타인》은 당시 유행하던 괴기소설의 한 부류 정도로 취급받았고[13] 오랫동안 문학사의 주류에서 잊혀져 왔다.[14] 단, 이건 어디까지나 문학사에서 주요한 담론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는 말이지 '''책이 안팔렸다는 말은 아니다.''' 상업적으로는 성공한 작품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1910년, 1931년에 프랑켄슈타인 영화가 나온 것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후대에 모티브를 받아 창작된 여러 작품의 이미지로 인해, 본 소설이 공포 또는 가벼운 내용으로 치부되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 원작은 생각할 거리를 많이 담고 있는 편. 작품 후반부에 프랑켄슈타인이 괴물과 조우했을 때, 괴물이 내뱉는 대사가 매우 인상적이다.
일단 분량은 《드라큘라》보다 적은 데다가, 테마를 이해하는 것이 《드라큘라》보다 쉽고, 괴물 또한 동시대의 고딕소설에 비하면 불쌍하게 묘사되기 때문에 현대인들이 읽어도 쉽게 감명 받을 수 있다.고딕소설[15] '죽은 자를 살린다'는 이야기는 현대에 와서도 수많은 오마주나 영감을 받은 작품들을 만들었다. 꼭 '죽은 자를 살린다'는 것이 아니라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과학자의 이미지'는 프랑켄슈타인에게서 나왔다고 봐도 좋다. 다시 말해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원조. 그리고 인간과 다르다는 이유로 인간에게 괴롭힘 당하는 캐릭터들도 모두 이 소설의 괴물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원작의 기괴하고 "자연과 인간에 대한 암울하고 어두운 시각"은 그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 탓이기도 했다. 처음 작품이 잉태된 1816년은 그 전 해에 인도네시아에서 탐보라 화산이 대분화를 해서 세계적으로 "여름이 사라진 해"로 유명하다. 이 화산 분화는 역사에 기록된 가장 큰 화산폭발로 여겨진다. 한여름에도 서리가 내리고 폭설이 내리는 세계적 이상기후와 냉해로 큰 흉년이 든 해라 세계적으로 큰 기근이 들어 200만 명이 죽는 등 심판의 날이 가까운 종말론적 흉흉한 분위기가 사회에 감돌았고 작가도 당연히 이에 영향받은 것.
2007년에 데뷔한 작가 최제훈은 《괴물을 위한 변명》이라는 자신의 작품에서 프랑켄슈타인을 비틀어 놓았는데,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사실 자신의 친구에게 사랑을 느꼈던 동성애자였으며 이를 괴로워한 나머지 자신의 신체를 여성으로 변화 시키기 위해 괴물을 만드는 실험을 했던 것으로 묘사했다.
영미권 인터넷에서는 여기저기서 소스를 가져와 합쳐서 재창조하는 것을 뜻하는 슬랭으로 쓰이기도 한다. 즉 별개의 존재나 작품, 사상들을 여기저기서 일부씩 떼어내어와서 다시 조합하거나 억지로 엮어서 상상을 초월하는 기괴한 "괴물"스런 물건이나 작품이나 사상을 만들어 내는 것을 말한다. 한국 인터넷에서는 쓰이는 "혼종"이라는 단어와 유사하다. 이 뜻으로는 "키메라"라나 하이브리드는 단어가 쓰였지만 프랑켄쉬타인의 기괴하고 흉물스런 이미지가 어울려 더 널리 쓰이고 있다.
프랑켄슈타인/창작물 참조.
Frankenstein: Or the Modern Prometheus
1. 상세
"많은 것이 이미 이루어졌으나, 나는 그 이상을 이룰 것이다. 앞서 찍혀진 발자국을 따라 새 길을 개척하리라. 미지의 힘을 발굴하고, 창조의 가장 심오한 신비를 세상에 밝히리라!"
- 빅터 프랑켄슈타인 (창조자)
초판이 1818년 익명으로 영국에서 출간되었으며, 1831년에 작가의 본명을 밝혀 개정판이 출간되었다.[1] 두 판본의 줄거리는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사상이나 경향면에서 차이가 나는데, 1818본이 좀더 철학적으로 심오하게 주제를 파헤치는데 비해, 1831본에서는 그러한 부분을 줄이고 문학성을 가미했다."내가 이토록 잔인해진 것은 억지로 내게 정해진 이 진저리치도록 고독한 삶 때문이오!"
- 피조물(The Creature)
놀랍게도 이 소설을 쓸 당시인 1815년 메리 셸리는 '''18살'''이었다. 비오는 여름 어느 날 조지 고든 바이런과 함께 무서운 이야기를 하던 중 영감이 떠올라 썼다고 한다. 1816년, 19살의 메리는 의붓자매 클레어 클레어몬트, 당시 미래의 남편이 될 퍼시 비시 셸리,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윌리엄과 함께 스위스를 여행 중이었다. 클레어는 메리에게 제니바 호수 근방에서 살고 있는 시인 바이런을 만나러 가자고 제안했다. 클레어는 얼마 전 바이런과 짧은 사랑을 했었는데[2] 그 때 기억을 잊지 못해 그를 다시 찾아가고자 했던 것이었다. 그렇게 세 사람은 제네바로 여행을 가게 되었다.[3] 당시 바이런은 스무 살의 의사이자 작가 지망생이었던 존 폴리도리(1795~1821)와 함께 지내고 있었다. 메리 일행과 바이런, 폴리도리는 금세 친구가 되었다.
폭풍우가 몰아치던 어느 날 밤, 다섯 사람은 바이런의 별장 안에 모였다. 다섯 사람은 무료함을 견디지 못해 따분해하고 있었는데 그 때 바이런이 재밌는 제안을 하나 한다. 각자 자기만의 무서운 이야기를 하나씩 써보자는 것이었다. 메리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바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퍼시는 어린 시절의 경험담을 토대로 이야기를 만들었고, 바이런은 흡혈귀를 소재로 하는 단편을 만들었다. 그리고 폴리도리는 열쇠구멍으로 훔쳐본 죄로 처벌당한 해골 아가씨 이야기를 했다.[4]#
메리는 모두의 등골이 오싹해질 만한 소설을 쓰고 싶었다. 그러나 괜찮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고민하던 어느 날, 메리는 퍼시와 바이런의 대화를 우연히 엿듣게 된다. 바로 '갈바니즘'(galvanism)에 관한 대화였다. 갈바니즘은 죽은 개구리 뒷다리가 전기 자극을 받고 꿈틀거리는 것을 발견한 의사 갈바니의 실험에서 유래한 용어였다. 이 대화를 들은 메리는 꿈 속에서 창백한 얼굴의 학자가 자신의 연구를 집대성한 괴물 옆에 무릎을 꿇은 모습을 보게 된다.[5] 후에 이것을 토대로 《프랑켄슈타인》을 집필해 대성공을 거둔다.
2. 줄거리
프랑켄슈타인[6] 이 오랜 연구 끝에 발견한 생명의 불꽃을 만드는 법을 시험하겠다는 욕망에 괴물을 만들지만, 막상 탄생한 괴물을 보고 놀라서 비명을 지르고 괴물은 사라져버렸는데, 여차여차 일이 심하게 꼬여서 괴물에게 자신의 동생과 아내, 친구를 잃게 되자 북극으로 괴물을 추적해 나섰다가 죽는다는 이야기.
3. 《프랑켄슈타인》의 가치
《걸리버 여행기》, 《유토피아》, 요하네스 케플러의 《꿈》, 《지킬 박사와 하이드》 등과 함께 '''최초의 SF 소설'''로 거론되며, 특히 이 작품이 최초의 SF라는 데 무게를 실어주는 사람이 많다. 1970년대 영국에서 최초의 SF를 《프랑켄슈타인》이라고 한 논문에 의해 시작되었으나, 신화나 설화에 있는 과학적인 이야기의 흔적을 외면하거나 다른 국가에 있는 과학적인 이야기의 흔적을 싸그리 무시한다 하여 까였다. 현대인의 시각에서는 전기로 죽은 사람을 부활시킨다는 개념이 과학과 연관성이 없는 허구맹랑한 환상문학으로 느껴질 수 있으나 당시는 갈바니가 그 유명한 전기로 죽은 개구리 다리를 움직이게 하는 실험으로 인해서 시작된 갈바니즘[7] 이 한참 활발하게 연구되던 시절이기 때문에 그 당시 과학지식을 배경으로 쓰여졌다는 면에서는 완벽하게 공상과학소설로 분류될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프랑켄슈타인》은 최소한 '''영문학 SF의 효시'''가 맞다. SF(과학소설)을 환상문학의 갈래에 포함시킨다면 환상문학의 기원이야 선사시대의 신화나 설화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환상문학의 정의는 실제세계와는 다른 초자연성에 있다. 이러한 초자연성의 생경함에 독자는 기괴함이나 경이로움을 느끼고, 독자의 감상은 공포로 연결된다. 이같은 공포를 이용해 설화나 신화에 지배 이데올로기를 삽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과학소설은 근대 이전의 신화, 로망스 문학과는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그것은 과학과 역사주의가 19세기를 지배하면서 사실주의가 등장했고, 과학소설은 이러한 사실주의 문예사조 안에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근대의 과학적, 합리주의적 세계관으로 쓰인 과학소설은 원시시대의 신화, 설화와는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에서부터 다르다.[8]
《걸리버 여행기》나 《유토피아》와 비교해도 마찬가지다. 과학소설의 정의를 '합리적인 가상소설'로 볼 경우, SF의 뿌리를 유토피아 문학에서 찾을 수도 있다. 이럴 경우, 앞서 언급한 《유토피아》가 과학소설의 효시가 될 수 있다.[9] 그러나 유토피아 문학의 본질은 과학기술 자체가 아니라 정치, 사회 풍자에 있다. 과학기술은 사회풍자를 위한 도구 역할에 그친다. 그래서 《유토피아》에서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국가 '유토피아'가, 《걸리버 여행기》에서 결핍을 모르는 풍요의 섬 '벤살렘 왕국'이 나오더라도, 이들 소설들은 SF로 부를 수 없다. 과학기술이 사회 및 인간과의 관계에 던지는 질문과 답이 없기 때문에 '원형적' 과학소설 또는 '선구적' 과학소설이라 해야 보다 적절할 것이다. 그러므로 SF는 '''과학적 지식에 근거해 과학을 주제로 쓴 공상소설'''이라 다시 정의할 수 있다.[10] 따라서 갈바니즘에 근거한 생명창조 실험을 모티브로, 과학적 세계관에 대한 불길한 예감과 이에 대한 문학적 저항이 드러나는 《프랑켄슈타인》에 이르러서야 과학소설로서 명확한 정체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11]
또한 의외로 프랑켄슈타인 관련 논문을 보면서 많이 파고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프랑켄슈타인》보다 많은 것을 알려주는 작품이 《프랑켄슈타인》 이전에는 없다는 것에 놀라게 된다. 인조인간에 대한 경계 외에도 특히 완벽하리라고 생각되었던 과학의 실패, 사회화된 여성에 대한 부정적인 결말 등 의외로 지금까지도 연구하면 캐낼 수 있는 것들이 많다고 한다.
《프랑켄슈타인》 출간 당시에는 지금처럼 평론가들에게 큰 주목을 받진 못했다. 익명으로 발표된 당시에는 문학적 가치에 대한 담론보다는 작가가 누구냐는 것이 더 큰 관심사였다. 많은 이들이 남성일거라 추측했던 작가가 여자로 밝혀졌을 때 "스무 살이 채 안된 여성의 병적인 상상력이 만들어 낸 기이한 산물"이라는 악평이 이어졌다. 물론 여자라서 까인 건 아니고 당시에는 원래 호러물에 대한 폄하가 심했다. 당대의 유명한 소설가였던 월터 스코트(Walter Scott. 아이반호의 작가)는 "이 소설은 보통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상상력의 결과이며 불경스러울 정도로 자연과 인간에 대해 암울하고 어두운 시각을 지니고 있다’’고 평했다.[12] 《프랑켄슈타인》은 당시 유행하던 괴기소설의 한 부류 정도로 취급받았고[13] 오랫동안 문학사의 주류에서 잊혀져 왔다.[14] 단, 이건 어디까지나 문학사에서 주요한 담론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는 말이지 '''책이 안팔렸다는 말은 아니다.''' 상업적으로는 성공한 작품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1910년, 1931년에 프랑켄슈타인 영화가 나온 것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4. 기타
후대에 모티브를 받아 창작된 여러 작품의 이미지로 인해, 본 소설이 공포 또는 가벼운 내용으로 치부되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 원작은 생각할 거리를 많이 담고 있는 편. 작품 후반부에 프랑켄슈타인이 괴물과 조우했을 때, 괴물이 내뱉는 대사가 매우 인상적이다.
일단 분량은 《드라큘라》보다 적은 데다가, 테마를 이해하는 것이 《드라큘라》보다 쉽고, 괴물 또한 동시대의 고딕소설에 비하면 불쌍하게 묘사되기 때문에 현대인들이 읽어도 쉽게 감명 받을 수 있다.고딕소설[15] '죽은 자를 살린다'는 이야기는 현대에 와서도 수많은 오마주나 영감을 받은 작품들을 만들었다. 꼭 '죽은 자를 살린다'는 것이 아니라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과학자의 이미지'는 프랑켄슈타인에게서 나왔다고 봐도 좋다. 다시 말해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원조. 그리고 인간과 다르다는 이유로 인간에게 괴롭힘 당하는 캐릭터들도 모두 이 소설의 괴물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원작의 기괴하고 "자연과 인간에 대한 암울하고 어두운 시각"은 그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 탓이기도 했다. 처음 작품이 잉태된 1816년은 그 전 해에 인도네시아에서 탐보라 화산이 대분화를 해서 세계적으로 "여름이 사라진 해"로 유명하다. 이 화산 분화는 역사에 기록된 가장 큰 화산폭발로 여겨진다. 한여름에도 서리가 내리고 폭설이 내리는 세계적 이상기후와 냉해로 큰 흉년이 든 해라 세계적으로 큰 기근이 들어 200만 명이 죽는 등 심판의 날이 가까운 종말론적 흉흉한 분위기가 사회에 감돌았고 작가도 당연히 이에 영향받은 것.
2007년에 데뷔한 작가 최제훈은 《괴물을 위한 변명》이라는 자신의 작품에서 프랑켄슈타인을 비틀어 놓았는데,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사실 자신의 친구에게 사랑을 느꼈던 동성애자였으며 이를 괴로워한 나머지 자신의 신체를 여성으로 변화 시키기 위해 괴물을 만드는 실험을 했던 것으로 묘사했다.
영미권 인터넷에서는 여기저기서 소스를 가져와 합쳐서 재창조하는 것을 뜻하는 슬랭으로 쓰이기도 한다. 즉 별개의 존재나 작품, 사상들을 여기저기서 일부씩 떼어내어와서 다시 조합하거나 억지로 엮어서 상상을 초월하는 기괴한 "괴물"스런 물건이나 작품이나 사상을 만들어 내는 것을 말한다. 한국 인터넷에서는 쓰이는 "혼종"이라는 단어와 유사하다. 이 뜻으로는 "키메라"라나 하이브리드는 단어가 쓰였지만 프랑켄쉬타인의 기괴하고 흉물스런 이미지가 어울려 더 널리 쓰이고 있다.
5. 등장인물
- 빅터 프랑켄슈타인
- 크리처(프랑켄슈타인)
- 엘리자베스 라벤자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의붓여동생 겸 약혼녀. 5세 때 프랑켄슈타인 가로 입양되어 빅터와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지만, 결국 크리처에게 목숨을 잃고 만다.
- 앙리 클레르발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친구. 항상 헌신적인 우정으로 빅터를 돕는다. 크리처의 반려를 만들겠다는 빅터의 계획을 모른 채 같이 여행을 떠나지만 빅터에게 고통을 주려는 목적을 가진 크리처에게 살해당한다. 이름은 프랑스인 이름이지만 배경이 스위스라 프랑스어가 많이 쓰이고 프랑스계도 있는 만큼 이상한 이름이 아니다. 하지만, 프랑켄슈타인이 영국 작가가 써서 그런지, 앙리의 영어 발음인 헨리로 아는 경우도 있다. 이토 준지의 프랑켄슈타인 한국어판에서도 이름이 헨리로 번역됐다.
- 유스틴 모리츠
프랑켄슈타인 가의 하녀. 주로 빅터의 어린 동생 윌리암의 양육을 돕고 있었다. 윌리암이 크리처에 의해 살해당한 후 크리처에 의해 살인범으로 몰렸다. 프랑켄슈타인 가족들은 그녀의 무고를 믿었지만 너무도 확고한 증거 때문에 결국 형장의 이슬이 되었다. 이름이 저스틴으로 번역된 판본도 존재한다.
- 로버트 월튼
이야기의 화자. 북극을 탐험중인 탐험대의 단장. 배를 타고 북극을 향하다가 크리처를 쫓던 프랑켄슈타인을 만나 그에게 이 기괴한 이야기의 전말을 듣고, 그의 최후를 지켜본다. 이 소설은 로버트가 쓴 편지의 형식을 빌린, 일종의 극중극이다.
- 알폰세 프랑켄슈타인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아버지. 제네바의 명문가 출신이며, 공직에 있는 동안 그 유능함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인물. 빅터의 연인이었던 엘리자베스가 크리쳐에게 살해되자 그 충격으로 곧 사망한다.
6. 미디어
프랑켄슈타인/창작물 참조.
[1] 여성작가들이 중성적이거나 남성적인 필명으로 출판하는 일은 흔했다. 제인 오스틴이나 브론테 자매도 마찬가지였다. 비교적 현대적인 인물인 얼슬러 르 귄이나 조앤 롤링조차 이런 일을 겪었다. 그래서 1818년에 영국에서 초판이 나온 《프랑켄슈타인》도 익명으로 발표됐다. 하지만 1822년 남편 퍼시 비시 셸리가 사망한 후 생활고 때문에 작가로 왕성한 활동을 추구했기 때문에 개정판은 본인의 이름으로 출간하였다.고원. 「연구 논문: 프랑켄슈타인과 19세기 영국 여성문학 - "모호한 정체성"의 문제를 중심으로 -」, 『영국연구』 제12권 (2004): p. 220.[2] 이 일로 바이런의 딸 중 하나인 알레그라가 태어났다. 하지만 이 아이는 10살까지 살고 요절.[3] 바이런은 당시에도 엄청난 유명 인사였기 때문에 관광객들은 모두 잠깐씩이라도 바이런을 만나고 싶어했다. 그래서 바이런 집 근처의 호텔에서는 투숙객들에게 바이런을 훔쳐볼 수 있는 망원경을 대여해주기도 했다(…)관련 위키 참조[4] 훗날 폴리도리는 바이런이 버린 흡혈귀 단편을 소재로 《뱀파이어》를 집필한다. 《뱀파이어》는 영어로 출간된 최초의 흡혈귀 소설이 된다. 그러나 폴리도리는 빚에 시달리며 겨우 26살 나이로 음독 자살하여 요절했다.관련 위키 참고[5] Mary Shelly, "Author’s Introduction in 1831," Frankenstein (1818; New York: Penguin Books, 2000), p. xxiii.[6] 많은 사람들이 프랑켄슈타인이 괴물의 이름이라고 알고 있는데,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을 만들어낸 청년의 이름이고 괴물에겐 이름이 없다. 부모라고 할 수 있는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이름조차 지어주지 않았던 것. 단지 The Creature라고만 불릴 뿐이다. 또 프랑켄슈타인 '박사'라고 흔히 알고 있지만, 괴물의 창조자는 화학과 생물학 등 과학 전반을 두루 연구한 대학생일 뿐이지 박사학위를 갖고 있지는 않다. 굳이 따지자면 학사 정도. 물론 여기서 말하는 박사는 박사학위 소유자를 말하는 것은 아니므로 별 상관은 없지만. 특히 서브컬쳐에서 학위는커녕 대학도 안 나와도 박사라고 부르는 경우도 아주 없지는 않다.[7] 당시는 소설처럼 진짜 인간의 시체를 대상으로 전기적으로 부활시킬려는 시도가 실제로 이루어지던 시대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8] 고영일. 「환상문학의 이론적 고찰」, 『이베로아메리카硏究』 제11권 (2000): pp. 243-249.[9] 고장원. 『세계과학소설사』, 서울: 채륜, 2008: p. 114[10] 박경서. 「Si-Fi와 『프랑켄슈타인』: 과학과 과학자의 반생명윤리의식」, 『신영어영문학』 제55권 (2013): pp. 53-54.[11] 고영일. 「환상문학의 이론적 고찰」, 『이베로아메리카硏究』 제11권 (2000): p. 250.[12] Johanna M. Smith, "A Critical History," in Mary Shelley’s Frankenstein (Bedford Books of St. Martin’s Press, 1992), pp. 191-92.[13] "Review of Frankenstein or the Modern Prometheus," The British Critic (April 9, 1818): pp. 432-38.[14] 고원. 「연구 논문: 프랑켄슈타인과 19세기 영국 여성문학 - "모호한 정체성"의 문제를 중심으로 -」, 『영국연구』 제12권 (2004): pp. 217-218.[15] 《드라큘라》 같은 경우는 "흡혈귀가 악당으로 나와서 마음에 안 든다"라는 평론을 많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