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데리코 펠리니
[image]
'''Federico Fellini'''
(1920년 1월 20일 ~ 1993년 10월 31일)
[image]
1940년 로마에서
[clearfix]
이탈리아의 영화 감독으로, 이탈리아 영화사 제일의 거장으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일생동안 그가 감독한 작품 가운데 무려 네 편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받았으며, 이는 2020년 지금까지도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부문에서는 최다 수상 기록으로 유지되고 있다.
초기에는 네오 리얼리즘 계열의 영화를 주로 감독하며 명성을 날렸으나, 작품활동을 이어나가면서 점차 네오 리얼리즘에서 탈피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펠리니 사티리콘 》이나 《8과 1/2》과 같은 영화들은 리얼리즘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초현실주의적 색채를 띤다.
페데리코 펠리니는 1920년 1월 20일, 이탈리아 북부에 위치한 아드리아 해 연안의 리미니 [1] 라는 도시에서 식료품 판매상의 아들로 태어났다.[2] 피서지로 유명했던 리미니에는 영화관과 서커스 공연장도 제법 많았는데, 어린 시절의 펠리니는 주로 이 곳에서 시간을 떼우곤 했으며 좀 더 자란 후에는 친구들과 함께 잡다한 장난을 치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이런 성장환경이 그의 작품세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으리라 보인다. 펠리니는 이 유년기를 아마코드라는 영화에서 다루기도 했다.
1938년, 회화에 소질이 있었던 펠리니는 리미니를 떠나 피렌체로 옮겨가서 풍자주간지나 SF연재소설을 위한 삽화를 그리는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였다. 1939년에는 로마로 상경해서 레스트랑을 돌아다니며 자신이 그린 풍자만화를 팔며 언론인이 되고자 하였고, 1940년에는 풍자주간지 《마르크아우렐리오(Marc'Aurelio)》의 편집자가 되었다. 1943년에는 배우 줄리에타 마시나가 출연하던 라디오 연속극의 각본을 집필하게 되었다가 그것이 인연이 되어 마시나와 결혼하게 되었다.
펠리니는 이처럼 언론계에서 쌓은 경력을 바탕으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이후로는 영화계에도 발을 담그기 시작했는데, 특히 네오 리얼리즘의 거장 중 한 사람이었던 영화감독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영화제작에 참여했던 일은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펠리니는 로셀리니의 대표작 중 하나인 《무방비도시》(1945)와 《파이사》(1946)의 제작에 참여하여 조감독으로 활동하였으며, 로셀리니의 《기적》(1948) 제작 당시에는 자신이 직접 각본을 집필하기도 하였다.
1950년에는 영화감독 알베르토 라투아다와 공동 감독을 맡아 감독 데뷔작인 《청춘군상》(1950)[3] 을 제작하였다. 이후에도 《백인추장》(1952), 《도시의 사랑》(1953), 《비텔로니》(1953) 등을 비롯한 몇몇 작품들을 제작하였으나 비평과 흥행 모두 눈에 띄는 성공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펠리니는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나름대로의 노하우를 쌓아갔고, 이는 훗날 그의 영화인생에서 적지 않은 자산이 되었다.
1954년, 펠리니는 자신의 초기 네오리얼리즘 대표작 중 하나인 《길》를 감독하게 된다. 배우 앤소니 퀸과 펠리니의 아내였던 줄리에타 마시나가 각기 거친 성격의 떠돌이 차력사 "잠파노"와 악기를 연주하는 순진한 처녀 "젤소미나"를 열연한 이 명작은 해외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펠리니가 감독한 작품 중에서는 처음으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오스카상을 수상했다.[4] 이는 1957년에 아카데미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5] 이 경쟁 부문으로 개설되면서 최초로 수상한 것이다.[6]
이후에는 《사기꾼들》(1955)과 《카비리아의 밤》(1956) 등을 감독하였으며 이 역시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펠리니의 아내 마시나가 다시 주연을 맡은 《카비리아의 밤》은 또다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을 받으면서 그가 감독한 작품 중 두 번째로 오스카상을 받았다. 이후 《달콤한 인생》(1960)을 감독하여 또다시 성공을 거두었으며 이 작품으로 펠리니는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이후 펠리니는 네오 리얼리즘에서 탈피하여, 시각적인 강렬함과 환상적인 분위기를 가미한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한기 시작한다. 그 첫번째 시도가 이루어진 작품이 바로 《8과 1/2》 (1963)이었으며, 이 영화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을 받으면서 펠리니의 작품 중 세 번째로 오스카상을 수상한 작품이 된다. 이후 펠리니는 《영혼의 줄리에타》(1965)를 감독했다. 이는 펠리니 최초의 컬러영화였으나 흥행에서는 그다지 재미를 보지 못하였고, 이 일로 인하여 펠리니는 《달콤한 인생》 제작 때부터 7여년을 함께 일해온 제작자 안젤로 리촐리와 결별하게 된다.
《펠리니 사티리콘》(1969)는 그의 영화인생의 절정기를 장식한 작품으로, 고대 로마의 문장가 페트로니우스가 남겼다고 전해지는 소설 《사티리콘》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이다. 이 작품은 제작자들로부터 주어진 전폭적인 지원에 따라 지금까지 펠리니 자신이 감독했던 그 어떤 영화들보다도 거대한 세트와 화려한 색감의 화면을 자랑했고, 흥행과 비평 모두 괜찮은 성공을 거두었다.
펠리니는 이후 《광대들》(1970), 《로마》(1972) 등을 감독하였다. 또한 《아마코드》(1974)[7] 를 감독하였고, 이 작품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하면서 펠리니의 작품 중 무려 네 번째 오스카상 수상작이 되면서 그는 전성기의 커리어를 화려하게 마무리지었다.
이후 펠리니는 70년대 중반~90년대에 걸쳐 작품활동을 이어나갔으나, 펠리니는 전성기는 1970년대 전반에 막을 내린 상태였고, 당시에는 영화인으로서의 쇠퇴기가 찾아오기 시작했던 시점이었다. 후반기 커리어의 펠리니는 과거의 경력과 견주어 볼 때에 호평을 받을만한 걸작은 만들지 못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펠리니는 1993년 10월 31일, 다발성 뇌출혈 합병증으로 로마의 한 병원에서 향년 73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펠리니의 평생의 배우자이자 페르소나였던 아내 줄리에타 마시나 또한 남편이 세상을 떠난지 채 1년이 되지 못한 1994년 3월 23일, 로마에서 숨을 거두었다.[8]
영화 《대부》의 OST를 담당한 것으로 유명한 작곡가 니노 로타와는 매우 각별한 사이였다. 니노 로타는 《백인 추장》을 시작으로, 이후 수십년의 세월동안 펠리니가 감독한 수많은 영화의 OST를 작곡했다.
본래 풍자적인 만평을 그리던 만화가 출신이었던 만큼 그림솜씨도 좋은 편이었다. 훗날 그가 영화를 제작할 당시에 사용했던 구상용 노트들을 보면 만평 스타일의 재미있는 스케치들을 볼 수 있다.
특이하게도 그는 미신을 숭배했으며, 피누스라는 점쟁이를 데리고 다니기도 하였다. 언젠가는 펠리니가 자신의 영매 친구들에게 자신이 새로 감독한 영화의 흥행성적을 물어봤는데, 두 편이 흥행에서 참패한다는 답변을 들었다고 한다. 그 예언은 결국 적중하였는데, 정확히는 점쟁이의 예언이 연예계를 떠돌아 다니면서 불안감을 조성했기 때문이다.
"파파라치"라는 낱말은 바로 펠리니가 감독한 영화 《달콤한 인생》에서 유래한 신조어였다. 이후로 파파라치는 유명인사들를 끈질기게 쫓아다니며 사진을 찍어대는 사람들을 일컫는 고유명사로 자리잡게 된다. 그래서인지 1993년 10월 31일[10] 로마의 한 병원에서 펠리니가 다발성 뇌출혈 합병증으로 죽어가던 중, 어느 파파라치가 죽기 직전의 펠리니의 모습을 촬영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이탈리아 언론의 결정에 따라 신문사나 잡지사들은 그 사진을 싣지 않기로 하였다.[11]
또한 그는 의료팀의 감시 아래 환각제 LSD를 복용하는 실험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끝내주는 환상을 경험하지 못해서 실망했다고 전해진다.
여담으로 죽기 직전에는 병문안을 온 데이비드 린치와 만나기도 했다. 데이비드 린치의 자서전 에세이인 《데이빗 린치의 빨간 방》에서도 이 일화가 언급된다.
[image]
여러 면에서 펠리니의 인생은 만화 같았다. 그러므로 그가 만화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니다.
60년대 중반, 펠리니는 마블 코믹스의 열렬한 팬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스파이더맨과 헐크를 좋아했는데, 그 계기가 1965년 11월 뉴욕에 방문했을 때, 바이러스에 감염돼서 하게된 입원이다. 병상에 누워 있던 펠리니에게 누가 만화책을 권해 주었는데, 거기에 재미들린 펠리니는 마블 사에 전화를 해 스탠 리를 만났다고 한다.
리와의 인연은 오랜 세월 동안 계속되었는데, 리가 로마에 들를 때는 펠리니의 별장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출처:로버트 쉬네이큰버그의 "위대한 영화감독들의 기상천외한 인생 이야기")
펠리니는 상습적으로 과장이 심한 편이었다. 특히나 영화 역사에 기록을 남길 욕심으로 그의 창의적인 공적을 과장되게 꾸미는 경향이 있었다. 그중 수십년동안 계속되어온 허풍 일화가 하나 있다. 1930년대 말 펠리니가 미국 만화 《플래시 고든》의 이탈리아어판을 그렸다는것이다. 그러나 진실을 속일 수는 없었다. 인터뷰에서 펠리니는 1938년 베니토 무솔리니가 모든 미국 만화를 금지했을 때 만화 《플래시 고든》을 지켜낸 것이 자신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무솔리니는 그런 금지령을 내린 적이 없었다.
펠리니는 앨릭스 레이먼드의 액션이 넘치는 우주모험극 《플래시 고든》의 열렬한 팬이었다. 그런데 펠리니가 주장하기를 주인공 플래시 고든이 포버스 행성에서 납치되어 호크맨 행성으로 이송되는 그 유명한 스토리 라인을 제안한 사람이 자신이라고 했는데 이 역시도 터무니 없는 허풍이었다. 그 줄거리는 레이먼드가 창작한 것으로, 1936년 영화 《플래시 고든》과 1980년 리메이크의 기본이 되었다.
물론 미국판 만화가 잠시 중단되었을 때 펠리니가 이탈리아어 판 플래시 고든의 일부를 직접 그리기는 했지만 그가 작업한 부분은 출간된적이 없었다. 한 이탈리아 기자가 증거를 내세워 펠리니의 '플래시 고든' 일화는 거짓이었다고 다그치자 펠리니는 순순히 "아마 그럴걸요."라고 시인했다. 그러나 제작자 디노 드 로렌티스가 엄청난 예산의 1980년 영화 플래시 고든의 감독으로 펠리니를 1순위로 선택했다는 것만은 진실이었다. 하지만 그 계약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Federico Fellini'''
(1920년 1월 20일 ~ 1993년 10월 31일)
[image]
1940년 로마에서
[clearfix]
1. 개요
이탈리아의 영화 감독으로, 이탈리아 영화사 제일의 거장으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일생동안 그가 감독한 작품 가운데 무려 네 편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받았으며, 이는 2020년 지금까지도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부문에서는 최다 수상 기록으로 유지되고 있다.
초기에는 네오 리얼리즘 계열의 영화를 주로 감독하며 명성을 날렸으나, 작품활동을 이어나가면서 점차 네오 리얼리즘에서 탈피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펠리니 사티리콘 》이나 《8과 1/2》과 같은 영화들은 리얼리즘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초현실주의적 색채를 띤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페데리코 펠리니는 1920년 1월 20일, 이탈리아 북부에 위치한 아드리아 해 연안의 리미니 [1] 라는 도시에서 식료품 판매상의 아들로 태어났다.[2] 피서지로 유명했던 리미니에는 영화관과 서커스 공연장도 제법 많았는데, 어린 시절의 펠리니는 주로 이 곳에서 시간을 떼우곤 했으며 좀 더 자란 후에는 친구들과 함께 잡다한 장난을 치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이런 성장환경이 그의 작품세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으리라 보인다. 펠리니는 이 유년기를 아마코드라는 영화에서 다루기도 했다.
1938년, 회화에 소질이 있었던 펠리니는 리미니를 떠나 피렌체로 옮겨가서 풍자주간지나 SF연재소설을 위한 삽화를 그리는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였다. 1939년에는 로마로 상경해서 레스트랑을 돌아다니며 자신이 그린 풍자만화를 팔며 언론인이 되고자 하였고, 1940년에는 풍자주간지 《마르크아우렐리오(Marc'Aurelio)》의 편집자가 되었다. 1943년에는 배우 줄리에타 마시나가 출연하던 라디오 연속극의 각본을 집필하게 되었다가 그것이 인연이 되어 마시나와 결혼하게 되었다.
2.2. 영화계 데뷔
펠리니는 이처럼 언론계에서 쌓은 경력을 바탕으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이후로는 영화계에도 발을 담그기 시작했는데, 특히 네오 리얼리즘의 거장 중 한 사람이었던 영화감독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영화제작에 참여했던 일은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펠리니는 로셀리니의 대표작 중 하나인 《무방비도시》(1945)와 《파이사》(1946)의 제작에 참여하여 조감독으로 활동하였으며, 로셀리니의 《기적》(1948) 제작 당시에는 자신이 직접 각본을 집필하기도 하였다.
1950년에는 영화감독 알베르토 라투아다와 공동 감독을 맡아 감독 데뷔작인 《청춘군상》(1950)[3] 을 제작하였다. 이후에도 《백인추장》(1952), 《도시의 사랑》(1953), 《비텔로니》(1953) 등을 비롯한 몇몇 작품들을 제작하였으나 비평과 흥행 모두 눈에 띄는 성공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펠리니는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나름대로의 노하우를 쌓아갔고, 이는 훗날 그의 영화인생에서 적지 않은 자산이 되었다.
2.3. 전성기
1954년, 펠리니는 자신의 초기 네오리얼리즘 대표작 중 하나인 《길》를 감독하게 된다. 배우 앤소니 퀸과 펠리니의 아내였던 줄리에타 마시나가 각기 거친 성격의 떠돌이 차력사 "잠파노"와 악기를 연주하는 순진한 처녀 "젤소미나"를 열연한 이 명작은 해외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펠리니가 감독한 작품 중에서는 처음으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오스카상을 수상했다.[4] 이는 1957년에 아카데미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5] 이 경쟁 부문으로 개설되면서 최초로 수상한 것이다.[6]
이후에는 《사기꾼들》(1955)과 《카비리아의 밤》(1956) 등을 감독하였으며 이 역시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펠리니의 아내 마시나가 다시 주연을 맡은 《카비리아의 밤》은 또다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을 받으면서 그가 감독한 작품 중 두 번째로 오스카상을 받았다. 이후 《달콤한 인생》(1960)을 감독하여 또다시 성공을 거두었으며 이 작품으로 펠리니는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이후 펠리니는 네오 리얼리즘에서 탈피하여, 시각적인 강렬함과 환상적인 분위기를 가미한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한기 시작한다. 그 첫번째 시도가 이루어진 작품이 바로 《8과 1/2》 (1963)이었으며, 이 영화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을 받으면서 펠리니의 작품 중 세 번째로 오스카상을 수상한 작품이 된다. 이후 펠리니는 《영혼의 줄리에타》(1965)를 감독했다. 이는 펠리니 최초의 컬러영화였으나 흥행에서는 그다지 재미를 보지 못하였고, 이 일로 인하여 펠리니는 《달콤한 인생》 제작 때부터 7여년을 함께 일해온 제작자 안젤로 리촐리와 결별하게 된다.
《펠리니 사티리콘》(1969)는 그의 영화인생의 절정기를 장식한 작품으로, 고대 로마의 문장가 페트로니우스가 남겼다고 전해지는 소설 《사티리콘》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이다. 이 작품은 제작자들로부터 주어진 전폭적인 지원에 따라 지금까지 펠리니 자신이 감독했던 그 어떤 영화들보다도 거대한 세트와 화려한 색감의 화면을 자랑했고, 흥행과 비평 모두 괜찮은 성공을 거두었다.
펠리니는 이후 《광대들》(1970), 《로마》(1972) 등을 감독하였다. 또한 《아마코드》(1974)[7] 를 감독하였고, 이 작품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하면서 펠리니의 작품 중 무려 네 번째 오스카상 수상작이 되면서 그는 전성기의 커리어를 화려하게 마무리지었다.
2.4. 후반기
이후 펠리니는 70년대 중반~90년대에 걸쳐 작품활동을 이어나갔으나, 펠리니는 전성기는 1970년대 전반에 막을 내린 상태였고, 당시에는 영화인으로서의 쇠퇴기가 찾아오기 시작했던 시점이었다. 후반기 커리어의 펠리니는 과거의 경력과 견주어 볼 때에 호평을 받을만한 걸작은 만들지 못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펠리니는 1993년 10월 31일, 다발성 뇌출혈 합병증으로 로마의 한 병원에서 향년 73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펠리니의 평생의 배우자이자 페르소나였던 아내 줄리에타 마시나 또한 남편이 세상을 떠난지 채 1년이 되지 못한 1994년 3월 23일, 로마에서 숨을 거두었다.[8]
3. 필모그래피
- 《청춘군상》 (1950)[9]
- 《백인추장》 (1952)
- 《도시의 사랑》 (1953)
- 《비텔로니》 (1953)
- 《길》 (1954)
- 《사기꾼들》 (1955)
- 《카비리아의 밤》 (1956)
- 《달콤한 인생》 (1960)
- 《보카치오》 (1962)
- 《8과 1/2》 (1963)
- 《영혼의 줄리에타》 (1965)
- 《죽음의 영혼》 (1968)
- 《펠리니 사티리콘》 (1969)
- 《광대들》 (1970)
- 《로마》 (1972)
- 《아마코드》 (1974)
- 《카사노바》 (1976)
- 《오케스트라 리허설》 (1978)
- 《여성의 도시》(1980)
- 《그리고 배는 항해한다》 (1983)
- 《진저와 프레드》 (1986)
- 《인터뷰》 (1987)
- 《달의 목소리》 (1990)
4. 그 외에
영화 《대부》의 OST를 담당한 것으로 유명한 작곡가 니노 로타와는 매우 각별한 사이였다. 니노 로타는 《백인 추장》을 시작으로, 이후 수십년의 세월동안 펠리니가 감독한 수많은 영화의 OST를 작곡했다.
본래 풍자적인 만평을 그리던 만화가 출신이었던 만큼 그림솜씨도 좋은 편이었다. 훗날 그가 영화를 제작할 당시에 사용했던 구상용 노트들을 보면 만평 스타일의 재미있는 스케치들을 볼 수 있다.
특이하게도 그는 미신을 숭배했으며, 피누스라는 점쟁이를 데리고 다니기도 하였다. 언젠가는 펠리니가 자신의 영매 친구들에게 자신이 새로 감독한 영화의 흥행성적을 물어봤는데, 두 편이 흥행에서 참패한다는 답변을 들었다고 한다. 그 예언은 결국 적중하였는데, 정확히는 점쟁이의 예언이 연예계를 떠돌아 다니면서 불안감을 조성했기 때문이다.
"파파라치"라는 낱말은 바로 펠리니가 감독한 영화 《달콤한 인생》에서 유래한 신조어였다. 이후로 파파라치는 유명인사들를 끈질기게 쫓아다니며 사진을 찍어대는 사람들을 일컫는 고유명사로 자리잡게 된다. 그래서인지 1993년 10월 31일[10] 로마의 한 병원에서 펠리니가 다발성 뇌출혈 합병증으로 죽어가던 중, 어느 파파라치가 죽기 직전의 펠리니의 모습을 촬영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이탈리아 언론의 결정에 따라 신문사나 잡지사들은 그 사진을 싣지 않기로 하였다.[11]
또한 그는 의료팀의 감시 아래 환각제 LSD를 복용하는 실험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끝내주는 환상을 경험하지 못해서 실망했다고 전해진다.
여담으로 죽기 직전에는 병문안을 온 데이비드 린치와 만나기도 했다. 데이비드 린치의 자서전 에세이인 《데이빗 린치의 빨간 방》에서도 이 일화가 언급된다.
4.1. 스탠 리와의 인연
[image]
여러 면에서 펠리니의 인생은 만화 같았다. 그러므로 그가 만화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니다.
60년대 중반, 펠리니는 마블 코믹스의 열렬한 팬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스파이더맨과 헐크를 좋아했는데, 그 계기가 1965년 11월 뉴욕에 방문했을 때, 바이러스에 감염돼서 하게된 입원이다. 병상에 누워 있던 펠리니에게 누가 만화책을 권해 주었는데, 거기에 재미들린 펠리니는 마블 사에 전화를 해 스탠 리를 만났다고 한다.
리와의 인연은 오랜 세월 동안 계속되었는데, 리가 로마에 들를 때는 펠리니의 별장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출처:로버트 쉬네이큰버그의 "위대한 영화감독들의 기상천외한 인생 이야기")
4.2. 플래시 고든이 뭐기에
펠리니는 상습적으로 과장이 심한 편이었다. 특히나 영화 역사에 기록을 남길 욕심으로 그의 창의적인 공적을 과장되게 꾸미는 경향이 있었다. 그중 수십년동안 계속되어온 허풍 일화가 하나 있다. 1930년대 말 펠리니가 미국 만화 《플래시 고든》의 이탈리아어판을 그렸다는것이다. 그러나 진실을 속일 수는 없었다. 인터뷰에서 펠리니는 1938년 베니토 무솔리니가 모든 미국 만화를 금지했을 때 만화 《플래시 고든》을 지켜낸 것이 자신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무솔리니는 그런 금지령을 내린 적이 없었다.
펠리니는 앨릭스 레이먼드의 액션이 넘치는 우주모험극 《플래시 고든》의 열렬한 팬이었다. 그런데 펠리니가 주장하기를 주인공 플래시 고든이 포버스 행성에서 납치되어 호크맨 행성으로 이송되는 그 유명한 스토리 라인을 제안한 사람이 자신이라고 했는데 이 역시도 터무니 없는 허풍이었다. 그 줄거리는 레이먼드가 창작한 것으로, 1936년 영화 《플래시 고든》과 1980년 리메이크의 기본이 되었다.
물론 미국판 만화가 잠시 중단되었을 때 펠리니가 이탈리아어 판 플래시 고든의 일부를 직접 그리기는 했지만 그가 작업한 부분은 출간된적이 없었다. 한 이탈리아 기자가 증거를 내세워 펠리니의 '플래시 고든' 일화는 거짓이었다고 다그치자 펠리니는 순순히 "아마 그럴걸요."라고 시인했다. 그러나 제작자 디노 드 로렌티스가 엄청난 예산의 1980년 영화 플래시 고든의 감독으로 펠리니를 1순위로 선택했다는 것만은 진실이었다. 하지만 그 계약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 근처에 산마리노 공화국이 있다.[2] 펠리니의 아버지는 1956년에 사망한다.[3] 원제는 Luci del varieta[4] 아카데미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은 감독에게 수여되는 상이 아니다. 부문 개설 첫 해에는 작품상처럼 제작자에게 수여되는 형식이었다가, 그나마도 바로 그 다음해부터 현재까지 계속 아예 '''출품 국가에 수여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페데리코 펠리니는 경쟁 부문에서는 단 한 번도 오스카상을 받은 적이 없다. 그가 받은 오스카상은 오로지 비경쟁 부문인 공로상을 받은 것이 유일하다.[5] 2020년 현재는 아카데미 국제영화상으로 시상 부문 명칭이 변경되었다.[6] 작품은 1954년에 완성됐는데 1957년에서야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한 것은, 당시 시대가 시대인지라 제작 후 2년이 지난 1956년에서야 미국에서 개봉했었기 때문이다.[7] 《나는 기억한다》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다.[8] 공교롭게도 줄리에타 마시나 또한 작고할 당시에 73세였다.[9] 감독 데뷔작이다.[10] 공교롭게도 같은 날 미국에선 젊은 배우 리버 피닉스가 죽었다. 덕분에 유럽에선 펠리니 죽음에 묻혀 별로 알려지지도 못했다.[11] 다만, 1993년 12월호 국내 영화지 로드쇼에서 누운 자리에서 숨을 거두기 전 그의 사진을 실은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