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저 코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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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모습.
Roger William Corman 로저 윌리엄 코먼 1926.04.05-
헐리우드 최고령 영화감독이자 '''현직''' 영화제작자.[1][2]
코먼은 1954년에 1만 2천 달러의 극저예산 영화 《대양저의 괴물》(Monster From Ocean Floor)로 제작자로 먼저 데뷔한 이후 이 작품에서 3만 달러의 제작비로 85만 달러의 흥행을 올리며 큰 성공을 하고, 《분노의 질주》(The Fast and The Furious)를 제작해 5만 달러의 제작비로 25만 달러의 흥행을 올리며 역시 성공했고, 1955년에 컬러 영화인 《서부의 용자》(Five Guns West)로 감독 데뷔했다. 그 이후 제작비 10만 달러 이내의 다양한 장르의 컬러, 흑백영화들을 만들면서 감독이자 제작자로서 이름을 자주 올렸다. 이 시절 감독한 영화들도 한국에서 80년대에 비디오로 종종 나오곤 했다. 1956년작인 여자 보안관 로즈(Gunslinger)도 코먼이 나이 서른에 감독한 컬러 서부영화로 한국에서 1988년 비디오로 나온 제목인데 이 영화는 1960년에 한국에서 텍사스 무뢰한이란 제목으로 극장 개봉도 했다!
60년대에는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들을 기반으로 한 컬러 시네마스코프(2.35:1) 영화들을 만들면서 장인으로서의 인정도 받았다. 그 와중에 62년에 자비를 털어 만든 흑백영화 《침입자》(The Intruder)로 국제 영화제까지 진출하는 쾌거를 이루었으나, 영화가 흥행에 망하면서 이후 그는 흥행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 이후 그는 다양한 장르의 컬러 영화를 만들면서 상당한 수작들을 남겼다.
1971년에 《폰 리히트호펜과 브라운》을 만들고 감독으로서의 휴식을 선언하고, 새로운 길을 나아가고자 자기 자신의 제작배급회사인 뉴 월드 픽처스를 세워 다양한 장르의 저렴한 영화들을 만들어서 인기를 끌었다. 이후 뉴 월드 픽처스를 팔고[3] 배급에서 손을 떼려했으나 회사를 구입한 이들의 삽질로 다시 콘코드라는 제작배급사를 만들어서 돌아오게 된다. 그 이후 90년도에 《돌아온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작품으로 잠시 감독을 하기도 하면서 또한 뉴 호라이즌, 뉴 콘코드 등의 회사를 만들면서 여러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만들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현재는 사이파이체널과 손을 잡고 저예산 괴수물을 만드는 중이다.
그가 영화를 만들면서 거의 손해를 보지 않고 돈을 벌 수 있었던 것은 저예산인 것 뿐 아니라 팔릴만한 소재가 있다면 무조건 손을 대고 보는 과감성[4][5] , 그리고 그가 여러 편의 영화를 만들면서 장인이라 불리는 감독들 특유의 본능적인 연출력 등에 기인한다. 제작자로 변화한 뒤에도 과감성과 저예산은 할리우드에서 이름을 날리는 수 많은 영화를 만드는 이들의 시작점으로서의 역할도 했다. 그 업적은 결국 인정받아서 2010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공로상을 받았다.
그의 문제는 돈이 되면 뭐든 손대다 보니 영화가 만들어질때 마다 좀 완성도가 심하게 왔다갔다했고[6] , 흥행에 있어서 여러가지를 손대면서 이래저래 베끼기는 것도 많았다. 게다가 자기 자신이 그때까지 만든 영화들도 100만 달러가 최대 예산이었던 덕택에[7] 제작에 매진하던 시기에도 그 생각을 다른 이들에게도 투입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러다 보니 욕을 먹는 것도 당연히 있는데 그와 같이 영화를 만들던 지미 테루 무라카미[8] 는 "다들 한정된 예산 가지고 영화 만들려고 끙끙거릴때, 그는 계산기만 쥐고 돈계산만 하더라."라며 그를 비아냥거렸다. 95년에 우리나라에 나온 그의 자서전을 봐도 좀 이해가 간다. 바로 그 책 제목이 ''' 나는 어떻게 할리우드에서 100편의 영화를 만들고 한푼도 잃지 않았는가.'''(…)[9]
워낙에 영화 제작 활동을 많이 해서 그런지 그의 밑에서 실력을 쌓은 사람들도 꽤나 많은데, 대표적으로 《지옥의 묵시록》과 《대부》를 찍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10] 와 《양들의 침묵》의 감독 조너선 데미, 《싸인》의 촬영감독 탁 후지모토, 실베스터 스탤론[11] , 《차이나타운》의 촬영 감독 존 알론조, 《분노의 역류》, 《뷰티풀 마인드》로 유명한 론 하워드, 대배우 잭 니콜슨[12] , 마틴 스코세이지[13] 그리고 '''제임스 카메론''' 등이 있다. 여담이지만 카메론은 로저 코먼이 만든 영화 피라냐의 후속작 피라냐 2의 감독으로 데뷔했는데 결과는 말 그대로 폭망했고 그 때 어째서 망했는지 코먼에게 물었더니 코먼이 피라냐를 날아 다니게 하지 말고, 물속에서 안 보이게 하는 편이 훨씬 돈도 적게 들고 관객들도 더 무섭게 만든다는 조언을 했다고.[14]
마찬가지로 싸고 빠르게 많이 찍어대던 남기남과 달리, 이 사람들은 지금도 코먼과 '''친하고''' 자서전의 서평이나 추천평까지 써주었다. 그의 제작사는 코먼 영화학교로 불릴 정도로 굉장히 유명했다. 상술했듯 좀 지지리 궁상을 떨어서 그렇지(...) 일단 감독으로서의 기질은 충분한 사람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
로저 코먼 사단의 특기는 낭비가 없는 촬영이다. 그리고 허가받지 않고 영화를 촬영하는 게릴라 촬영은 툭하면 일어나곤 했다. 1963년에는 《더 레이븐》(The Raven)을 만들고 나서 그 세트가 아깝다고 영화의 절반인 40분 분량을 이틀 만에 찍은 《더 테러》(The Terror) 같은 예도 있고[15] , 흡혈식물 대소동의 경우도 다른 작품에서 쓴 세트가 근사하다는 이유와 당분간 그 세트장의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1주일을 본인이 대여 후 3일 리허설과 2일 촬영으로 만든 영화다. 그 외의 경우도 20일이 채 안 되는 기간동안 빠르게 영화를 찍어내기도 했다.[16] 자세한 것은 로저 코먼이 영화 제작에 일으킨 변화 10가지도 참고.
《풀 메탈 패닉》의 외전 '의외로 한가한 전대장의 하루'에서 테레사 테스타롯사가 지브리 비디오에 장난을 친 쿠르츠 웨버에게 자신이라면 그런 악질적인 영상 대신 로저 코먼의 코미디를 덮어씌웠을거라고 하면서 애둘러 까는 장면이 잠깐 나온다. 정작 로저 코먼의 감독작이나 제작작 중에서 정통적인 코미디 장르는 없다. 코미디 장르와 결합한 다른 장르의 영화는 많지만 코미디가 무조건 주가 되지는 않는다. 게다가 코미디와 결합한 영화들의 대부분은 '''리메이크'''됐거나 '''리메이크 예정'''이다.
한국에서는 이 사람 감독으로 친 연합군 이태리 장성을 구하는 특공대의 활약을 그린 《특급탈출》[17] 이라는 제목의 특공대 영화가 개봉된바 있다. 당연히 저가 영화(…)지만 마지막 반전의 아이디어와 일부 설정[18] 이 한국 반공물에서 물리도록 사용되었다.
IMDb에 따르면 조상이 유대인이라고 한다.
뭐 이 사람 영화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알고 싶다면 여길 참조하자. 해외 영화 사이트에서 선정한 로저 코먼의 작품 베스트 10.[19] 물론 사이트 및 작성자에 따라 순위는 달라지기도 한다.
매드맨, 워킹 데드, 헬 온 휠즈 등으로 유명한 AMCTV에선 실제로 로저 코먼의 영화들 중 최고를 정하는 공개투표를 열었는데 특이하게도 베스트 10 작품이 아닌 11 작품을 공개했다. 공개 투표에서의 결과는 11위. 침입자 (1962), 10위. 판타스틱 4 (1994, 파일럿)[20] , 9위. X-레이 눈을 가진 사나이 (1963), 8위. 세계가 멸망한 날 (1955), 7위. 버켓 오브 블러드 (1959), 6위. 로큰롤 고등학교 (1979), 5위. 죽음의 가면 (1964), 4위. 피라나 (1978), 3위. 흡혈 식물 대소동 (1960), 2위. 함정과 진자 (1961), 1위. 죽음의 경주 (1975).
그리고 국내의 블로거가 선정한 그의 졸작 50, 그리고 그의 명작 50. 물론 이 순위는 위에 베스트로 선정된 작품도 개인 감상에선 졸작에 넣는 등, 감상자 개인의 리스트이니 참고로만 보고 진정한 로저 코먼의 영화 세계는 직접 체험해보자.
2016년 모습.
Roger William Corman 로저 윌리엄 코먼 1926.04.05-
1. 개요
헐리우드 최고령 영화감독이자 '''현직''' 영화제작자.[1][2]
코먼은 1954년에 1만 2천 달러의 극저예산 영화 《대양저의 괴물》(Monster From Ocean Floor)로 제작자로 먼저 데뷔한 이후 이 작품에서 3만 달러의 제작비로 85만 달러의 흥행을 올리며 큰 성공을 하고, 《분노의 질주》(The Fast and The Furious)를 제작해 5만 달러의 제작비로 25만 달러의 흥행을 올리며 역시 성공했고, 1955년에 컬러 영화인 《서부의 용자》(Five Guns West)로 감독 데뷔했다. 그 이후 제작비 10만 달러 이내의 다양한 장르의 컬러, 흑백영화들을 만들면서 감독이자 제작자로서 이름을 자주 올렸다. 이 시절 감독한 영화들도 한국에서 80년대에 비디오로 종종 나오곤 했다. 1956년작인 여자 보안관 로즈(Gunslinger)도 코먼이 나이 서른에 감독한 컬러 서부영화로 한국에서 1988년 비디오로 나온 제목인데 이 영화는 1960년에 한국에서 텍사스 무뢰한이란 제목으로 극장 개봉도 했다!
60년대에는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들을 기반으로 한 컬러 시네마스코프(2.35:1) 영화들을 만들면서 장인으로서의 인정도 받았다. 그 와중에 62년에 자비를 털어 만든 흑백영화 《침입자》(The Intruder)로 국제 영화제까지 진출하는 쾌거를 이루었으나, 영화가 흥행에 망하면서 이후 그는 흥행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 이후 그는 다양한 장르의 컬러 영화를 만들면서 상당한 수작들을 남겼다.
1971년에 《폰 리히트호펜과 브라운》을 만들고 감독으로서의 휴식을 선언하고, 새로운 길을 나아가고자 자기 자신의 제작배급회사인 뉴 월드 픽처스를 세워 다양한 장르의 저렴한 영화들을 만들어서 인기를 끌었다. 이후 뉴 월드 픽처스를 팔고[3] 배급에서 손을 떼려했으나 회사를 구입한 이들의 삽질로 다시 콘코드라는 제작배급사를 만들어서 돌아오게 된다. 그 이후 90년도에 《돌아온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작품으로 잠시 감독을 하기도 하면서 또한 뉴 호라이즌, 뉴 콘코드 등의 회사를 만들면서 여러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만들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현재는 사이파이체널과 손을 잡고 저예산 괴수물을 만드는 중이다.
그가 영화를 만들면서 거의 손해를 보지 않고 돈을 벌 수 있었던 것은 저예산인 것 뿐 아니라 팔릴만한 소재가 있다면 무조건 손을 대고 보는 과감성[4][5] , 그리고 그가 여러 편의 영화를 만들면서 장인이라 불리는 감독들 특유의 본능적인 연출력 등에 기인한다. 제작자로 변화한 뒤에도 과감성과 저예산은 할리우드에서 이름을 날리는 수 많은 영화를 만드는 이들의 시작점으로서의 역할도 했다. 그 업적은 결국 인정받아서 2010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공로상을 받았다.
그의 문제는 돈이 되면 뭐든 손대다 보니 영화가 만들어질때 마다 좀 완성도가 심하게 왔다갔다했고[6] , 흥행에 있어서 여러가지를 손대면서 이래저래 베끼기는 것도 많았다. 게다가 자기 자신이 그때까지 만든 영화들도 100만 달러가 최대 예산이었던 덕택에[7] 제작에 매진하던 시기에도 그 생각을 다른 이들에게도 투입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러다 보니 욕을 먹는 것도 당연히 있는데 그와 같이 영화를 만들던 지미 테루 무라카미[8] 는 "다들 한정된 예산 가지고 영화 만들려고 끙끙거릴때, 그는 계산기만 쥐고 돈계산만 하더라."라며 그를 비아냥거렸다. 95년에 우리나라에 나온 그의 자서전을 봐도 좀 이해가 간다. 바로 그 책 제목이 ''' 나는 어떻게 할리우드에서 100편의 영화를 만들고 한푼도 잃지 않았는가.'''(…)[9]
워낙에 영화 제작 활동을 많이 해서 그런지 그의 밑에서 실력을 쌓은 사람들도 꽤나 많은데, 대표적으로 《지옥의 묵시록》과 《대부》를 찍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10] 와 《양들의 침묵》의 감독 조너선 데미, 《싸인》의 촬영감독 탁 후지모토, 실베스터 스탤론[11] , 《차이나타운》의 촬영 감독 존 알론조, 《분노의 역류》, 《뷰티풀 마인드》로 유명한 론 하워드, 대배우 잭 니콜슨[12] , 마틴 스코세이지[13] 그리고 '''제임스 카메론''' 등이 있다. 여담이지만 카메론은 로저 코먼이 만든 영화 피라냐의 후속작 피라냐 2의 감독으로 데뷔했는데 결과는 말 그대로 폭망했고 그 때 어째서 망했는지 코먼에게 물었더니 코먼이 피라냐를 날아 다니게 하지 말고, 물속에서 안 보이게 하는 편이 훨씬 돈도 적게 들고 관객들도 더 무섭게 만든다는 조언을 했다고.[14]
마찬가지로 싸고 빠르게 많이 찍어대던 남기남과 달리, 이 사람들은 지금도 코먼과 '''친하고''' 자서전의 서평이나 추천평까지 써주었다. 그의 제작사는 코먼 영화학교로 불릴 정도로 굉장히 유명했다. 상술했듯 좀 지지리 궁상을 떨어서 그렇지(...) 일단 감독으로서의 기질은 충분한 사람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
로저 코먼 사단의 특기는 낭비가 없는 촬영이다. 그리고 허가받지 않고 영화를 촬영하는 게릴라 촬영은 툭하면 일어나곤 했다. 1963년에는 《더 레이븐》(The Raven)을 만들고 나서 그 세트가 아깝다고 영화의 절반인 40분 분량을 이틀 만에 찍은 《더 테러》(The Terror) 같은 예도 있고[15] , 흡혈식물 대소동의 경우도 다른 작품에서 쓴 세트가 근사하다는 이유와 당분간 그 세트장의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1주일을 본인이 대여 후 3일 리허설과 2일 촬영으로 만든 영화다. 그 외의 경우도 20일이 채 안 되는 기간동안 빠르게 영화를 찍어내기도 했다.[16] 자세한 것은 로저 코먼이 영화 제작에 일으킨 변화 10가지도 참고.
《풀 메탈 패닉》의 외전 '의외로 한가한 전대장의 하루'에서 테레사 테스타롯사가 지브리 비디오에 장난을 친 쿠르츠 웨버에게 자신이라면 그런 악질적인 영상 대신 로저 코먼의 코미디를 덮어씌웠을거라고 하면서 애둘러 까는 장면이 잠깐 나온다. 정작 로저 코먼의 감독작이나 제작작 중에서 정통적인 코미디 장르는 없다. 코미디 장르와 결합한 다른 장르의 영화는 많지만 코미디가 무조건 주가 되지는 않는다. 게다가 코미디와 결합한 영화들의 대부분은 '''리메이크'''됐거나 '''리메이크 예정'''이다.
한국에서는 이 사람 감독으로 친 연합군 이태리 장성을 구하는 특공대의 활약을 그린 《특급탈출》[17] 이라는 제목의 특공대 영화가 개봉된바 있다. 당연히 저가 영화(…)지만 마지막 반전의 아이디어와 일부 설정[18] 이 한국 반공물에서 물리도록 사용되었다.
IMDb에 따르면 조상이 유대인이라고 한다.
뭐 이 사람 영화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알고 싶다면 여길 참조하자. 해외 영화 사이트에서 선정한 로저 코먼의 작품 베스트 10.[19] 물론 사이트 및 작성자에 따라 순위는 달라지기도 한다.
매드맨, 워킹 데드, 헬 온 휠즈 등으로 유명한 AMCTV에선 실제로 로저 코먼의 영화들 중 최고를 정하는 공개투표를 열었는데 특이하게도 베스트 10 작품이 아닌 11 작품을 공개했다. 공개 투표에서의 결과는 11위. 침입자 (1962), 10위. 판타스틱 4 (1994, 파일럿)[20] , 9위. X-레이 눈을 가진 사나이 (1963), 8위. 세계가 멸망한 날 (1955), 7위. 버켓 오브 블러드 (1959), 6위. 로큰롤 고등학교 (1979), 5위. 죽음의 가면 (1964), 4위. 피라나 (1978), 3위. 흡혈 식물 대소동 (1960), 2위. 함정과 진자 (1961), 1위. 죽음의 경주 (1975).
그리고 국내의 블로거가 선정한 그의 졸작 50, 그리고 그의 명작 50. 물론 이 순위는 위에 베스트로 선정된 작품도 개인 감상에선 졸작에 넣는 등, 감상자 개인의 리스트이니 참고로만 보고 진정한 로저 코먼의 영화 세계는 직접 체험해보자.
2. 필모그래피
[1] 다만 영화감독으로서의 활동은 1990년이 마지막이며 현재는 제작자로서만 활동중이다. 세계 최고령 현역 감독은 포르투갈 영화 거장인 '''마노엘 드 올리베이라''' 옹이 계셨으나 2015년 4월 2일, 만 106세로 세상을 떠났다. 현재는 실험 다큐멘터리계의 거장 요나스 메카스(1922.12.24~. 리투아니아 출신 미국 감독)가 공식 석상에서 활동을 유지하고 있는 (비공식)최고령 영화 감독이다. 참고로 올리베이라 감독 첫 데뷔가 1931년으로 2012년에도 신작을 감독했고 2014년에도 단편이긴 해도 신작을 찍고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83년 경력'''을 가졌던, 앞으로도 있기 힘든 영화계의 전설이었다. 오랜 경력과 비교했을때 감독한 영화 수는 좀 적은 편(?)인데 제법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취미로 영화를 감독하다가 아버지가 사망하자 광산업 운영같은 사업에 매달리느라 영화감독 일을 좀 떠났다가 나중에 돌아와 왕성하게 활동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이 분보다 현역 경력이나 나이가 오래된 영화계 종사자는 손에 꼽을 정도다.[2] 참고로 코먼에 이어 2번째 고령으로 할리우드에서 활동중인 감독이 바로 클린트 이스트우드. 2018년 만 88살이다! 더불어 감독이 아닌 영화인으로서 최고령은 2018년 7월에 만 102살이 된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멜라니로 나온 여배우)와 2018년 12월이면 만 102살이 되는 배우인 커크 더글러스였으나... 커크 더글라스옹이 2020년 2월에 작고했다.[3] 이때 본인도 다행이라 여기는 건 회사를 팔기 전까지 제작한 영화들의 판권을 지켰다는 것이다. 만약 이때 그가 판권까지 팔았으면 이 사람의 수 많은 영화들은 DVD는 커녕 비디오도 구경하기 힘들었을 듯.[4] 한때 이 과감성으로 외국의 예술 영화들을 수입하기도 했다. 잉마르 베리만의 《외침과 속삭임》을 비롯한 몇 편이나, 프랑수아 트뤼포의 《아델H의 이야기》, 구로사와 아키라의 《데루스 우잘라》, 르네 랄루의 《판타스틱 플래닛》 등등. 그러면서 흥행을 위한 장난(?)도 많이 쳤는데 대표적인 예로 《일본침몰》과 《분노의 늑대》, 그리고 장철 감독의 《수호전》의 미국판을 들 수 있다.[5]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한 다큐멘터리 〈로저 코먼의 세계〉에서 코먼 본인은 잉마르 베리만 같은 감독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그들이 만든 영화는 흥행성만을 중시한 것이 아니라, 꼭 여러 사람들이 볼 가치있는 영화라 생각해 수입, 배급했다고 밝혔다.[6] 단적으로 1960년에 만든 《스키 트룹 공격》(Ski Troop Attack)의 경우는 몇몇 방송에서 그냥 깠다.[7] 90년도의 《돌아온 프랑켄슈타인》은 이례적으로 제작비가 900만 달러였는데, 그건 그가 제작을 한 영화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물가를 고려하고 출연진을 봐도 당시 기준으로도 저예산이다.[8] 1933~2014. 미국의 일본계 애니메이터 겸 영화감독. 1986년에 만든 《바람이 불 때에》가 유명하다. 한때 코먼의 회사에서 저예산 영화들로 여러 감독 및 제작에 참여하면서 그와 같이 일했었다.[9] 이 책을 읽고 할리우드에 진출했던 유명인(?)으로 워쇼스키 자매가 있다![10] 이 사람이 《지옥의 묵시록》을 말아먹을 때 날씨 관련으로 조언했다고 한다. 문제는 코폴라 본인은 그 조언을 무시했다는 거지만.[11] 그가 조연으로 출연하고 코먼이 제작한 죽음의 경기(데스 레이스 원작)가 국내에 출시되어 있는데, DVD표지에는 그가 주인공인양 얼굴이 박혀있다.[12] 코먼의 영화 《크라이 베이비 킬러》에서 첫 주연을 맡아서 《이지 라이더》를 찍기 전까지 약 10여 년 간 같이 작업했으며, 《환각특급》에선 각본까지 써주었다. <로저 코만의 세계>라는 다큐를 보면 마지막 인터뷰에서 니콜슨이 코먼의 이야기를 하다가 울음을 터뜨리기까지 한다. 그만큼 둘은 돈독한 사이라 할 수 있다.[13] 로저 코먼은 스코세이지의 《대공황 시대》란 영화의 제작을 맡았다. 이 때 스코세이지에게 "뭘 찍어도 좋아. 그러나 10만 달러의 예산을 초과하면 안돼. 그리고 시나리오 15쪽마다 나체가 나와야 돼. 그 두 가지 조건만 지키면 얼마든지 자네 마음대로 찍어도 좋아"라고 한다.[14] 다만 피라냐 2가 망한 진짜 이유는 그런 이유가 아니라 해당 영화를 둘러싼 수많은 알력들 때문이였다. 이 영화는 본디 이탈리아 업체에서 만든 영화였는데 피라냐 2를 만들기 위해 미국 배급사와 걸었던 조건이 '미국인 감독을 쓰라'는 것이였고 당시 쌩 신인이라 몸값이 쌌던 카메론이 여기에 걸린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대충 앉혀진 감독직에서 카메론은 말도 안 통하는 제작진들(감독'만' 미국인이면 되니 나머지는 죄다 이탈리아인...)을 이끄는데 시시때때로 애로사항을 빚었고 설상가상 높으신 분들이 틈만 나면 각본에 수시로 끼어들다보니 카메론 자신이 원래 원했던 일정과 시나리오와는 할리우드와 베네치아 사이 만큼이나 멀어져버렸다... (때문에 카메론은 피라냐 2를 흑역사로 여기지만, 정작 지금 와서 관련업계는 피라냐 2를 카메론의 데뷔작이라며 띄우기 바쁘니...) 참고로 이 시기에 마음 고생이 심했던 카메론은 결국 한번은 어느 이름없는 싸구려 여관방 침대에 앓아눕게 되는데 이 때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일어나는 기계인간'''의 꿈을 꾼 뒤 이것을 나중에 영화로 만들기로 결심했고 그 결과가...[15] 이 영화의 아이러니는 나머지 40분 분량을 찍기 위해서 소모된 시간이 무려 9개월에 달했다는 것. 일정 문제와 감독들의 다양한 교체, 그 외의 복잡한 사정이 이런 결과를 낳았다. 계약기간이 조금 남은 감독과 배우들을 번갈아 데리고 찍었으며, 결국 끝까지 현장에 남은 사람이 잭 니콜슨이라고 한다. 잭 니콜슨도 연출을 하겠다고 코먼에게 말하니 코먼의 반응은 "그럼 자네가 해. 단, 말은 되게 해"였다.[16] 이 사람에게 배웠는지…는 몰라도 할리우드에서 이런식의 세트 사용은 많은 편이다. 아예 국유지에서 빌리는.. 바람에 철거가 필요한 경우는 "마지막 폭파 장면"을 넣어주는 센스가 필요하지만 세트가 유명해서 관광지가 되는 경우는 다시 한번 다른 영화로 사용되는 경우가 돈벌이도 되는 1석 2조의 역할이다. 한국에서는 "머나먼 정글"로 알려진 Tour of Duty 2시즌의 세트장이 드라마 M*A*S*H의 세트장이었고 TV 시리즈 호건의 영웅들의 포로 수용소 세트장이 유명한 영화 '''나치 일사'''의 세트장으로 바뀌었다….[17] 프랭크 시나트라 주연의 《탈주특급》(Von Ryan's Express)과는 다른 영화이다.[18] 적에게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서 우는 갓난아기 입을 막았는데 그만 아기가 숨이 막혀 죽어버렸다더라… 하는[19] 제목만 요약하면 10위. 크랩 몬스터의 공격(1957), 9위. 중단된 매장 (1962), 8위. 기관총 엄마 (1970), 7위. 흡혈 식물 대소동 (1960), 6위. 버켓 오브 블러드 (1959), 5위. 와일드 엔젤 (1966), 4위. 기관총 켈리 (1958), 3위. X-레이 눈을 가진 사나이 (1963), 2위. 환각특급 (1967), 1위. 침입자 (1962) 순이다.[20] 1990년대에 판권 유지 차원에서 초저예산 및 단기간에 제작해낸 비공개용 견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