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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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롤랑 가로스 우승트로피를 들어올린 모습
1. 개요
2. 통산 기록
3. 선수 소개
4. 참고 링크


1. 개요


미국의 前 테니스 선수.
Michael Chang(풀 네임은 마이클 터페이 창 Michael Te-Pei Chang, 중국어로는 張德培, )
출생 : 1972년 2월 22일
국적 : 미국
신장 : 175cm
체중 : 73kg

2. 통산 기록


  • 개인전 통산 성적 : 662승 312패
  • 단식 통산 타이틀 획득 : 34개
  • 복식 통산 성적 : 11승 33패
  • 복식 타이틀 획득 : 0회
  • 통산 상금 획득 : 19,145,632 달러
'''그랜드슬램 대회''' : '''우승 1회''' / '''준우승 3회'''
  • 호주 오픈 : 준우승 1회 - 1996
  • 프랑스 오픈 : 우승 1회(1989) / 준우승 1회(1995)
  • 윔블던 : X
  • US 오픈 : 준우승 1회 - 1996
'''기타 대회'''
  • 마스터스 컵[1] : 준우승 1회 - 1995
  • 마스터스 시리즈[2] : 우승 7회 / 준우승 2회

3. 선수 소개


대만계 미국인 테니스 선수로서 1988년에 프로에 데뷔하여 2003년을 끝으로 은퇴했다. 비록 국적은 미국이었지만 1990년대에 10대를 보낸 아시아 테니스 선수들에게는 우상 겸 롤모델 같은 존재였으며, 아시아계 선수로는 최초로 그랜드슬램 대회 남자 단식 우승[3]을 달성한 선수다.
175cm의 작은 신체 조건에서 알 수 있듯 마이클 창은 고전적인 카운터펀처로 계속 방어, 방어, 방어를 반복하면서 상대의 멘탈을 흔든 뒤 카운터로 끝내는 끈질긴 진흙탕 승부에 강한 스타일이었다. 아래 언급된 명경기가 레전드로 손꼽히는 것도 이런 이유.
미국의 유명한 테니스 선수 육성 기관인 닉 볼리티에리 테니스 아카데미 출신으로 앤드리 애거시의 자서전에 따르면 애거시가 주니어 테니스 선수로 볼리티에리 아카데미에서 훈련받을 때 비슷한 나이대의 짐 쿠리어와 마이클 창도 주니어 테니스 선수로 볼리티에리 아카데미에서 훈련받고 있었다고 한다. 애거시의 자서전에 따르면 마이클 창은 당시 또래 선수들보다 키도 작고 말도 없는 모습이었다고.[4] 하지만 마이클 창은 주니어 선수 시절부터 수많은 최연소 기록을 세우면서 이름을 알린 유망주였는데 만 15세 6개월의 나이로 당시 세계 랭킹 순위가 겨우 920위에 불과한 상태에서 출전한 첫 그랜드슬램 대회 남자 단식이었던 1987년 US 오픈 남자 단식 본선 1회전에서 승리하면서 US 오픈 남자 단식 본선 경기 최연소 승리 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1987년 US 오픈 남자 단식 한달 후엔 ATP 투어 남자 단식에서도 4강에 진출하였고 1988년 US 오픈 남자 단식에선 만 16세 6개월의 나이로 16강 진출을 기록하더니 1988년 US 오픈 남자 단식 2주 후엔 만 16세 7개월의 나이로 ATP 투어 남자 단식 첫 결승 진출 겸 우승까지 달성하였다.
하지만 마이클 창이 일약 센세이션을 일으킨 것은 1989년 프랑스 오픈 남자 단식 우승 때였다. 당시 만 17세 3개월의 나이로 1989년 프랑스 오픈 남자 단식에 출전한 마이클 창은 16강전에서 우승 후보이던 세계 랭킹 1위 이반 렌들(체코)을 상대로 3-2(4-6, 4-6, 6-3, 6-3, 6-3)의 역전승을 거두고 결승전에서도 세계 랭킹 3위인 스테판 에드베리(스웨덴)를 3-2(6-1, 3-6, 4-6, 6-4, 6-2)로 물리치면서 '''만 17세 3개월의 나이로 역대 최연소 그랜드슬램 대회 남자 단식 우승 겸 역대 최연소 프랑스 오픈 남자 단식 우승 기록'''[5]을 수립하였다.
이 우승이 더욱 후세에 회자된 것은 당시 세계 랭킹 1위이던 우승 후보 이반 렌들과의 16강전이 워낙 극적인 승부였기 때문이다. 1세트와 2세트를 먼저 내주며 탈락할 것처럼 보였던 마이클 창은 3세트와 4세트를 끈질기게 따냈고 마지막 5세트에서 기습적으로 변칙적인 언더 서브(영어로는 the underarm/underhand serve)를 넣으면서 우승 후보 이반 렌들의 페이스를 흐트러지게 만들었다. 마이클 창이 기습적으로 사용한 변칙적인 언더 서브에 포인트를 잃은 이반 렌들은 경기에 대한 집중력을 잃고 흐트러진 페이스를 회복하지 못하면서 그대로 마이클 창에게 마지막 5세트를 내주며 마이클 창은 극적으로 프랑스 오픈 남자 단식 8강전에 진출하게 되고 결국 프랑스 오픈 남자 단식 우승까지 차지하는 이변을 일으키는데 성공하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완전히 무명이던 마이클 창이 우승한 것이어서 더욱 센세이션이 컸던 것으로 착각하기 쉽지만, 사실 당시 1989년 프랑스 오픈 남자 단식에 출전할 때의 마이클 창은 만 17세 3개월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미 세계 랭킹 19위에 올라있었고 프랑스 오픈 남자 단식에서도 15번 시드를 받을 정도였다. 완전 무명 선수까지는 아니었다는 이야기. 하지만 세계 랭킹이 이미 20위 안에 들어가서 시드를 받았다고 한들 만 17세 3개월의 나이인 애송이였던 것도 사실이고 그런 애송이가 세계 랭킹 10위 안에 들어가는 이미 그랜드슬램 대회 남자 단식 우승을 여러번 달성한 쟁쟁한 선배 선수들을 연파하고 우승한 것도 사실이었으므로 전혀 이 우승이 폄하될 성질의 것은 아니다.
2003년 US 오픈 남자 단식 출전을 끝으로 은퇴할 때까지의 마이클 창의 커리어 통산 성적은 1989년 프랑스 오픈 남자 단식 우승, 그랜드슬램 대회 남자 단식 준우승 3회, 4강 진출 4회, 8강 진출 5회, 1995년 마스터스 컵 남자 단식 준우승, 테니스 마스터스[6]시리즈 남자 단식은 우승 7회, 준우승 2회, 4강 진출 7회, ATP 투어 남자 단식에선 우승 26회, 준우승 16회를 기록하였고 이는 아시아계 테니스 선수가 달성한 것으로는 역대 최고의 성적이었다. 아시아계라는 것을 제외하고 보아도 엄청난 커리어 통산 성적임을 알수 있다.
마이클 창의 전성기는 1992년부터 1997년까지인데 재미있는 점은, 마이클 창의 유일한 그랜드슬램 대회 남자 단식 우승인 프랑스 오픈 남자 단식 우승은 전성기 이전인 1989년에 달성했다는 점이다. 사실 마이클 창이 첫 ATP 투어 남자 단식 우승을 달성한 1988년부터 전성기 직전인 1991년까지는 비록 1989년에 첫 그랜드슬램 대회 남자 단식 우승인 프랑스 오픈 남자 단식 우승을 달성하고 그랜드슬램 대회 남자 단식 8강 진출 2회, 1990년 마스터스 캐나다 마스터스 남자 단식 우승, 1991년 마스터스 파리 오픈 남자 단식 4강 진출, ATP 투어 남자 단식 우승 3회, 준우승 3회를 기록하기는 했으나 전성기만큼 꾸준하게 성적을 올리지는 못하는 기복이 심하던 시기였다.
전성기에 접어들어서 훨씬 꾸준하게 좋은 성적을 올렸는데 전성기의 절정기는 1995년 9월 중순부터 1996년 9월 중순까지로 이 시기에 그랜드슬램 대회 남자 단식에서 준우승 2회, 1995년 마스터스 컵 남자 단식 준우승, 1996년 마스터스 인디언 웰스 오픈 남자 단식 우승, 1996년 마스터스 신시내티 오픈 남자 단식 준우승, ATP 투어 남자 단식에서 우승 4회, 준우승 1회를 기록하여 1996년 9월에는 세계 랭킹 최고 순위인 2위까지 기록하였다.
하지만 마이클 창의 전성기는 공교롭게도 같은 미국 국적의 선수로서 1990년대를 지배한 양강인 피트 샘프라스앤드리 애거시와 겹쳤고, 여기에 더해서 짐 쿠리어와도 전성기가 겹쳐서 그 빛이 가려질 수 밖에 없었다. 안드레 애거시와 짐 쿠리어가 70년생이고 피트 샘프라스가 71년생, 마이클 창이 72년생으로 하필 네명의 세계 랭킹 1위를 다투던 미국 선수가 비슷한 나이대로 전성기도 비슷한 시기일 수 밖에 없었기 때문. 통산 커리어로 볼 경우 이 네명의 선수 중에 1인자가 피트 샘프라스, 2인자가 앤드리 애거시, 짐 쿠리어가 3인자이고 마이클 창은 가장 통산 커리어 성적이 밀리는 4인자이다. 다만 그렇다고 해도 빅4 시대에 치인 다비드 페레르 만큼은 아니라는 평이지만 스페인 내부에서도 페레르와 비교할때 '''빈집털이''' 식으로 등판되는 카를로스 모야나 후안 카를로스 페레로만큼 운이 좋았던 선수도 아닌 정도.
게다가 피트 샘프라스와 안드레 애거시, 짐 쿠리어 같은 마이클 창의 미국 라이벌 선수들을 제외하더라도 유럽에서도 토마스 무스터[7]나 보리스 베커[8] 같은 그 시대의 강자들도 존재하였기에 마이클 창은 전성기인 1992년부터 1997년 사이에 그랜드슬램 대회 남자 단식에서 4강 이상 진출을 7회, 그 중에서 3번은 결승까지 진출하였으나 결국 우승에는 실패하였고 세계 랭킹 1위 달성도 실패하였다.
그래서 재미있게도 마이클 창은 유일한 그랜드슬램 대회 남자 단식 우승을 프로에 데뷔한 애송이 시절인 1989년 프랑스 오픈 남자 단식 우승으로 달성한 선수가 되었다. 그래도 마이클 창은 커리어 내내 꾸준하게 좋은 성적을 올린 탓에, 깜짝 그랜드슬램 대회 남자 단식 우승을 한 반짝 스타로 남지 않을 수 있었다. 어찌되었든 마이클 창은 아시아계 선수도 세계적인 테니스 선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증명한 선수였다.
2008년에 마이클 창은 겹경사를 맞았는데 테니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 여기다 같은 테니스 선수인 앰버 리우 [9]와 결혼하였다. 그리고 현재 아내인 리우와의 사이에 두 딸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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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후계자인 니시코리 케이와 함께.
2014년부터 일본의 테니스 선수인 니시코리 게이의 코치가 되었는데, 마이클 창이 코치를 맡은 후 니시코리 게이의 성적이 한층 상승세를 탄 것을 보면 마이클 창의 코칭이 분명 좋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에너자이저 광고에도 출연한 적이 있다. 마스코트인 백만돌이가 테니스로 그를 발라버리고 지쳐서 쓰러진 마이클 창이 넌 대체 지치지도 않니??? 라고 말하자 "마이클 창, 지금 뭐하는 거야!"라면서 자신은 여전히 힘이 남아돈다고 오래 쓰는 건전지로 홍보하던 광고였다.

4. 참고 링크



[1] 현재는 ATP 파이널스로 명칭 변경.[2] 현재는 ATP 투어 마스터스 1000 시리즈로 명칭 변경.[3] 아시아 국가 최초로 그랜드슬램 대회서 우승을 기록한 선수는 리나로, 2011년 프랑스 오픈 / 2014년 호주 오픈에서 우승컵을 들어올린적이 있다.[4] 80년대 중반 즈음에 거의 백인만 있던 곳에 마이클 창은 아마 유일한 동양계였을테고 여기에 신체조건도 또래 선수들보다 작았으니 외향적으로 행동하기 어려웠을 것이다.[5] 이 기록은 현재도 깨지지 않고 있다.[6] 현재의 ATP 투어 마스터스 1000 시리즈 대회의 2000~2004년 사이의 명칭.[7] 1996년에는 세계 랭킹 1위까지 기록한 오스트리아 출신의 테니스 선수로 전성기는 1990년부터 1997년이며 통산 주요 성적은 1995년 프랑스 오픈 남자 단식 우승, 그랜드슬램 대회 남자 단식 4강 진출 3회, 8강 진출 5회, 마스터스 시리즈 남자 단식은 우승 8회, 준우승 2회, 4강 진출 3회를 기록하였고 ATP 투어 남자 단식의 경우 우승 35회, 준우승 9회를 달성한 세계적인 선수였다. 별명이 '클레이코트의 황제'로 구스타보 쿠에르텐라파엘 나달 이전의 흙신이라고 할 수 있는 선수.[8] 무려 만 17세 7개월의 나이로 1985년 윔블던 남자 단식에서 우승하여 최연소 윔블던 남자 단식 우승 기록을 가지고 있는 독일 출신의 테니스 선수로 1985년 윔블던 남자 단식 우승은 베커의 첫 그랜드슬램 대회 남자 단식 우승이기도 했다. 1991년에는 세계 랭킹 1위까지 기록하였으며 전성기 기간이 무려 1985년부터 1996년까지이기도 하다. 1999년 은퇴할 때까지 그랜드슬램 대회 남자 단식에서만 우승 6회, 준우승 4회, 4강 진출 8회를 기록했고, 통산 투어 타이틀 획득 49회를 기록할 정도로 세계적인 선수였다.[9] 여담으로 엠버도 대만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