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드리 애거시
1. 개요
Andre Agassi(풀네임은 앤드리 커크 애거시 Andre Kirk Agassi)[2][3]
미국의 은퇴한 테니스 선수
출생 : 1970년 4월 29일, 네바다 주 라스베이거스
국적 : 미국
신장 : 180cm
체중 : 77kg
배우자 : 슈테피 그라프
2. 통산 주요 기록
- 개인전 통산 성적 : 870승 274패
- 단식 통산 타이틀 획득 : 60회
- 복식 통산 성적 : 40승 42패
- 복식 타이틀 획득 : 1회
- 통산 상금 획득 : 31,152.975 달러
- 호주 오픈 : 우승 4회(1995, 2000, 2001, 2003)
- 프랑스 오픈 : 우승 1회(1999) / 준우승 2회(1990, 1991)
- 윔블던 : 우승 1회(1992) / 준우승 1회(1999)
- US 오픈 : 우승 2회(1994, 1999) / 준우승 4회(1990, 1995, 2002, 2005)
- 마스터스 컵[4] : 우승 1회(1990) / 준우승 3회(1999, 2000, 2003)
- 마스터스 시리즈[5] : 우승 17회[6] / 준우승 5회
- 올림픽 메달 : 1996 애틀랜타 올림픽 남자 단식 금메달
3. 선수 소개
테니스 황제 로저 페더러 이전의 테니스 황제로 불렸던 피트 샘프러스의 라이벌로 기억되는 미국 선수. 미남에 야성적인 스타일, 그리고 튀는 패션으로 젊은 시절에는 [7] 여자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끄는 청춘스타이기도 했다.
사실 플레이 스타일로 치면 샘프라스나 애거시 둘다 토털 패키지에 가깝지만 공격적이고 파워풀한 서브가 강점이었던 샘프러스에 비해 애거시가 좀더 방어적이고 침착한 운영을 한다. 사이즈가 작아서 파워가 떨어진다는 약점을 정교한 테크닉과 냉철한 운영으로 커버하는 올라운드 스타일, 특히 베이스라인에서의 질긴 수비가 강점에, 탑스핀, 슬라이스 같은 스핀을 주는 스트로크보다 그냥 칼같이 받아치는 플랫볼 히터라 수비적 게임을 한다고 해도 게임 속도가 굉장히 빠른 타입에 속했다.[8] 거기다 애거시 본인의 승부근성과 투지가 실로 대단했으며 20대때 화려한 외모와 터프함이 시너지를 일으켜서 경기내내 냉정하고 차가운 스타일로 경기를 이끄는 라이벌 피트 샘프러스보다 훨씬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그의 자서전에 따르면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아동 학대에 가까운 폭력적인 테니스 영재 교육을 받고 자랐으며 이런 아버지의 조기교육은 빠르게 애거시의 테니스 재능을 개화하는 데 도움을 주었지만 아동 학대에 가까운 이런 행위가 커다란 마음의 상처가 되었고 그의 마음에 커다란 분노의 상처를 남겼다고 한다. 젊은 시절 보여주던 면모는 이런 분노를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으려는 방패였던 것이다.
주니어 선수 시절에 미국의 유명한 테니스 선수 육성 기관인 릭 볼리티에리 테니스 아카데미에서 훈련받았는데 당시 볼리티에리 아카데미에서 훈련을 받던 비슷한 나이대의 선수들 중엔 짐 쿠리어와 마이클 창이 있었다.[9] 애거시의 자서전에 따르면 당시 애거시는 자신이 볼리티에리 아카데미에 있던 또래 선수들 중에 가장 재능이 뛰어난 선수라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실제로 당시 볼리티에리 아카데미 내부의 선수에 대한 재능 평가도 애거시가 가장 높았던 것 같다. 은퇴 후의 통산 커리어 성적도 애거시가 중간에 멘탈붕괴로 방황했음에도 쿠리어나 마이클 창을 압도하는 것을 보면 애거시가 라이벌들에 가진 재능의 차이가 상당했던 듯.
애거시는 1986년 프로에 데뷔하여 1987년에 만 17세의 나이로 ATP 투어 남자 단식 첫 우승을 달성했으며 1988년에는 겨우 만 18세의 나이로 ATP 투어 남자 단식에서 6번이나 우승함과 동시에 프랑스 오픈 남자 단식과 US 오픈 남자 단식에서 처음으로 4강에 진출하였다. 1990년에는 만 20세의 나이로 프랑스 오픈 남자 단식과 US 오픈 남자 단식에서는 결승전까지 진출하였으며 1990년 11월에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마스터스 컵 남자 단식에 출전하여선 4강전에서 당시 세계 랭킹 2위이던 보리스 베커[10] (독일)를 2-0(6-2, 6-4)으로 꺾고 처음으로 결승전에 진출하였다. 결승전에선 세계 랭킹 1위이던 스테판 에드베리(스웨덴)에게 3-1(5-7, 7-6, 7-5, 6-2)의 역전승을 거두고 '''커리어 처음이자 마지막 마스터스 컵 남자 단식 우승'''을 달성하였다.
그리고 1992년에는 만 22세의 나이로 윔블던 남자 단식에서 우승 후보이던 세계 랭킹 5위인 보리스 베커(독일)에게 8강전에서 3-2(4-6, 6-2, 6-2, 4-6, 6-3)의 역전승을 거두고 결승전에서도 세계 랭킹 5위인 고란 이바니세비치[11] (크로아티아)에게 3-2(6-7<8-10>, 6-4, 6-4, 1-6, 6-4)의 역전승을 거두면서 우승을 따내어 '''첫 그랜드슬램 대회 남자 단식 우승 겸 첫 윔블던 남자 단식 우승'''을 해내는 등 성공가도를 달렸지만 이런 우승들도 그의 어린시절 당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주기는커녕 악화시켰으며 1996년부터 멘탈 붕괴가 심해져갔다.
1996년 내내 멘탈 악화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심기일전해서 애거시는 1996 애틀랜타 올림픽 테니스 남자 단식에선 세르지 부르게라[12] (스페인)를 3-0(6-2, 6-3, 6-1)으로 누르고 금메달까지 따냈고 1996년 중반까지 출전한 다른 대회들에서도 성적이 좋았다. 하지만 결국 1996년 US 오픈 남자 단식에서 4강에 진출한 이후엔 어릴 때의 정신적인 상처를 억지로 누르던 것이 터지면서 1997년에 들어서자 애거시는 완전히 멘탈이 붕괴되고 만다.
당시 마음의 상처를 감당하지 못한 애거시는 마약에까지 손댔고 ATP의 약물검사에 마약 복용이 걸릴 정도였다. 마약 복용에 대해서는 ATP에 우연히 들른 클럽에서 다른 사람이 먹다가 남긴 음료수잔의 음료를 마셨는데 그 잔의 음료 속에 마약이 들어있었던 것 같다고 해명했고 이 해명이 ATP에 받아들여져 당시에는 큰 징계는 받지 않았으나 은퇴 후 발간한 자서전에서 실제로는 그 해명은 거짓이었고 스스로 마약을 복용했다는 것을 고백하여 비난을 받기도 했다.
결국 애거시는 어릴 때의 심리적인 상처로 인한 정신적인 문제가 극대화된 1997년에 최악의 경기력 부진에 빠지면서 상당수 대회에 불참하고 출전한 대회에서도 조기탈락을 반복하면서 무관에 그치고 만다. 애거시는 1997년에 세계 랭킹 8위로 시작하였는데 110위로 추락하였고 이런 애거시의 몰락은 당시 애거시의 어린 시절의 마음의 상처로 기인한 정신적인 문제를 모르던 대중들에겐 방탕한 생활을 하던 선수의 자업자득으로 생각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이 애거시의 테니스 커리어는 끝났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렇게 애거시가 몰락할 즈음 할리우드 스타인 브룩 실즈와 만남을 가지게 되고 연애를 하게 되었다. 당시 실즈는 애거시가 유명한 테니스 선수라는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사실 테니스 쪽에 대해서는 완전 문외한이었기 때문에 도리어 당시 극도로 정신 상태가 좋지 못하던 애거시에게는 실즈가 좋은 마음의 보금자리가 되어주었다고 한다. 이렇게 브룩 실즈와의 사랑이 깊어지면서 애거시는 멘탈이 회복되고 성실한 선수가 되어 재기하게 된다.
애거시는 열심히 훈련하였고 애거시의 자서전에 따르면 심기일전을 위해 체면 따위는 버리고 아예 처음 시니어 선수로 나설 때처럼 갓 프로 선수가 된 선수들이나 출전하는 챌린저 투어 대회에 출전하면서 다시 테니스에 도전하기 시작한다. 자기자신을 채찍질하기 위해서 일부러 창피한 이런 선택을 했던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1997년 11월에 연달아 출전한 챌린저 투어 남자 단식에서 연속으로 우승을 거두면서 애거시는 자신감을 회복했고 1998년 2월에 미국 캘리포니아 주 산호세에서 열린 ATP 투어 산호세 오픈 남자 단식에선 라이벌 피트 샘프러스를 2-0(6-2, 6-4)으로 꺾고 앤드리 애거시가 재기했음을 세상에 알리게 된다. 애거시는 1998년에만 마스터스 마이애미 오픈 남자 단식 준우승, 마스터스 캐나다 마스터스 남자 단식 4강 진출, ATP 투어 남자 단식에서 우승 5회, 준우승 3회를 기록하여 1998년 초에 110위로 추락해 있던 세계 랭킹이 1998년이 끝날 때는 6위로 복귀함으로써 완벽히 부활했음을 사람들에게 보여준다.
성실한 테니스 선수로 부활한 후 1999년 프랑스 오픈 남자 단식에 출전한 애거시는 결승전에서 안드레이 메드베데프[13] (우크라이나)에게 3-2(1-6, 2-6, 6-4, 6-3, 6-4)의 역전승을 거두고 우승함으로서 대망의 '''커리어 골든슬램을 달성'''하였는데 이는 오픈 시대[14] 이후 남자 테니스 선수로는 최초의 달성이었다. 커리어 그랜드슬램으로도 1969년에 로드 레이버가 달성한 이후 남자 테니스 선수로는 두 번째 달성한 대기록이었다.
앤드리 애거시의 여덟번째 그랜드슬램 대회 남자 단식 우승 겸 마지막 그랜드슬램 대회 남자 단식 우승도 회자될만한데 선수로서 황혼기인 만 32세 9개월의 나이에 출전한 2003년 호주 오픈 남자 단식 결승전에서 라이너 슈틀러[15] (독일)를 3-0(6-2, 6-2, 6-1)로 격파하고 우승을 달성한 것이다. 안드레 애거시의 이 우승은 무려 '''역대 세번째 최고령 그랜드슬램 대회 남자 단식 우승 겸 역대 (그때 당시) 두번째 최고령 호주 오픈 남자 단식 우승 기록'''[16][17] 으로 애거시의 명성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었다.
여기다 크게 회자되지는 않지만 애거시가 2004년에는 마스터스 신시내티 오픈 남자 단식에서도 만 34세 3개월의 나이로 우승하면서 '''역대 최고령 테니스 마스터스 시리즈 남자 단식 우승 기록'''[18] 도 애거시가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2005년에 애거시는 테니스 선수로는 환갑의 나이로 평가되는 무려 만 35세 4개월의 나이로 US 오픈 남자 단식에 출전하여 16강전, 8강전, 4강전을 모두 5세트까지 가는 풀세트 접전 끝에 상대 선수들을 모두 3-2로 누르고 마지막 그랜드슬램 대회 남자 단식 결승 진출 겸 마지막 US 오픈 남자 단식 결승 진출을 이루는 데 성공했다. 라이벌이었던 샘프라스처럼 고국의 팬들 앞에서 테니스 대회 중 최고 권위를 갖는 그랜드슬램 대회 남자 단식 우승으로 은퇴를 장식할 찬스를 잡은 것이다.
하지만 결승전 상대는 세계 랭킹 1위로 이미 전성기에 접어들어 말 그대로 거의 무적의 포스를 내뿜던 테니스 황제 로저 페더러였고 결승전에서 백전노장 애거시는 10살 이상 어린 테니스 황제 페더러를 상대로 엄청나게 분전하면서 2세트를 따내고 3세트도 중반까지 게임 스코어 4-2로 앞설 정도로 투지 있는 플레이를 펼쳤다. 그리고 이런 애거시의 투지에 테니스 황제 페더러도 약간은 질렸다는 느낌을 관중에게 줄 정도였다.
하지만 애거시는 이미 30대 중반의 나이였고 결승 진출 전의 3경기를 연속으로 5세트까지 가는 풀세트 접전을 펼쳤던 탓에 결국 3세트 중반부터 애거시의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애거시는 3세트를 타이 브레이크까지 가면서 패하게 되었다. 이어진 4세트에서도 체력저하를 극복하지 못한 애거시가 무기력하게 무너지면서 세트 스코어 1-3(3-6, 6-2, 6-7<1-7>, 1-6)으로 애거시는 패배하고 말았다. 애거시의 커리어 마지막 그랜드슬램 대회 남자 단식 및 US 오픈 남자 단식 결승 진출은 이렇게 준우승으로 끝마치게 된다.
그래도 애거시는 은퇴하게 되는 2006년에 또하나의 기록을 마지막으로 달성했는데 마스터스 인디언 웰스 오픈 남자 단식에 출전하여 64강전(2회전)에서 ATP 마스터스[19] 시리즈 대회 남자 단식으로는 마지막 승리를 따내며 '''통산 마스터스 시리즈 남자 단식 본선 251승'''을 달성하며 '''마스터스 시리즈 남자 단식 본선 역대 최다승 기록'''[20] 을 세웠다.
애거시는 2006년 US 오픈 남자 단식을 마지막으로 은퇴하였는데 은퇴시의 통산 주요 성적은 그랜드슬램 대회 남자 단식은 우승 8회, 준우승 7회, 4강 진출 11회, 8강 진출 10회, 마스터스컵 남자 단식은 우승 1회, 준우승 3회, 4강 진출 2회, ATP 마스터스 시리즈 남자 단식은 우승 17회, 준우승 5회, 4강 진출 10회,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테니스 남자 단식 금메달, ATP 투어 남자 단식은 우승 33회, 준우승 14회를 기록했다.
앤드리 애거시와 피트 샘프러스와의 비교에서 커리어로 보면 그랜드슬램 대회 남자 단식 우승 8회로 라이벌 피트 샘프라스의 14회 우승보다 6회나 그랜드슬램 대회 남자 단식 우승이 적지만 통산 타이틀 획득은 비슷한데다 마스터스 시리즈 남자 단식에선 애거시가 17회 우승으로 피트 샘프러스의 11회 우승보다 많다.
게다가 멘탈 문제로 애거시가 전성기 중에 2~3년간 성적이 극도로 부진했고 결정적으로 재기한 이후 프랑스 오픈 남자 단식 우승을 달성하며 애거시가 남자 테니스 선수로는 역대 처음으로 '''커리어 골든슬램을 달성'''[21] 했으며 선수로서 황혼기인 만 32세 9개월의 나이에도 노익장을 과시하며 호주 오픈 남자 단식을 우승하여 '''역대 세번째 최고령 그랜드슬램 대회 남자 단식 우승 겸 역대 두번째 최고령 호주 오픈 남자 단식 우승 기록'''도 세웠고 '''만 33세 4개월의 나이로 최연장자 세계 랭킹 1위 기록'''도 세우는 등 충분히 높이 평가될 업적을 세웠다.
게다가 애거시보다 1년 4개월이 어린 샘프러스가 차지한 마지막 그랜드슬램 대회 우승이 만 31세 1개월의 나이로 우승한 2002년 US 오픈 남자 단식인 것과 비교하면 애거시는 샘프라스보다 1살 이상 많은 나이인 만 32세 9개월의 나이로 마지막 그랜드슬램 대회 우승을 따낸데다 여기에 다시 한번 선수 생활의 마지막 불꽃을 태우며 만 35세 4개월의 나이로 그랜드슬램 대회인 2005년 US 오픈 남자 단식 결승에까지 올랐기 때문에 선수 평가에서 라이벌 샘프러스와 어느정도 비슷한 평가까지 받는 수준으로 올라가게 된다.
애거시는 2011년에 테니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 2017년엔 프랑스 오픈 남자 단식에 출전하는 노박 조코비치의 코치를 맡았다.[22] 그러다 2018년 말쯤 그리고르 디미트로프의 코치를 하게 되었다.
4. 이모저모
젊은 시절에는 헤어밴드에 매력적인 장발로 어필하는 미남선수 이미지가 강했다. 실제로는 이미 탈모가 심한 상황이었지만 1980년대 패션 트렌드 탓에 가발로 감춘 것이다.[23] 결국 1990년[24] 프랑스 오픈에서 그랜드 슬램에 실패한 직후부터 과감히 민머리를 드러냈다. 대표적인 외모 역변 사례 중 하나로 꼽힌다. 2000년대 초에는 쉬크 면도기 광고에 출연하기도 했다.
애거시는 할리우드 스타인 브룩 실즈와 결혼까지 했었지만, 서로의 직장이라고 할수 있는 테니스계와 할리우드 연예계에 대해 결혼할 때까지도 서로 잘 몰랐다고 한다. 결혼한 후에도 애거시와 실즈는 서로의 직업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했고, 끝내 서로의 직업의 차이점에 적응하지 못해 결국 부부 간의 거리가 멀어지면서 이혼했다. 1999년에 애거시는 프랑스 오픈 남자 단식을 우승하면서 커리어 골든슬램을 달성하였고, 이즈음부터 독일의 여자 테니스 선수 슈테피 그라프와 사귀기 시작했다. 이후 그라프와 결혼에 골인하며 커리어 골든 슬래머 커플이 된다.
애거시의 자서전에 따르면 애거시가 1990년대 초에 슈테피 그라프에게 사귀자고 프러포즈했지만 당시 애거시는 겉으로 보기에 막나가는 바람둥이여서인지 그라프한테서 아예 응답이 없었다고 한다. 애거시가 1990년대 말 멘탈을 다잡고 성실한 테니스 선수로 거듭난 후(이미 브룩 실즈하고는 이혼)인 1999년 프랑스 오픈에서 애거시가 남자 단식을, 그라프가 여자 단식을 우승하게 되는데 프랑스 오픈은 대회가 종료된 후 우승자들이 참가하는 파티를 연다고 한다. 이 파티에서 남녀 단식 우승자가 댄스를 추는 것이 관례인데 애거시가 이 댄스를 그라프와 추면서 다시 한번 자신과 사귀어 보자고 프러포즈했고 그라프가 받아들이면서 애거시와 그라프가 사귀기 시작한다.
애거시와 그라프는 연애를 시작하면서 정말 쉽게 가까워졌는데 애거시의 자서전에 따르면 그 이유는 의외로 두 사람이 비슷한 인생을 살아서 공통점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두 사람 모두 아직 테니스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도 모르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인 어린 나이에 극성 아버지의 좋게 말하면 열성, 나쁘게 말하면 강요에 의해 테니스를 시작했다고 한다.
이런 애거시와 그라프의 아버지가 극성 아버지라는 공통점으로 애거시와 그라프는 비슷한 인생을 살아왔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둘은 쉽게 가까워졌고 애거시의 자서전에 따르면 애거시가 프러포즈하고 그라프가 받아들여서 결혼하기로 한 후 그라프 부모님을 애거시가 초청해서 애거시 커플과 애거시 부모님, 그라프 부모님이 애거시의 저택에서 만남을 가졌는데 이때 애거시는 화이트칼라인 그라프 아버지가 블루칼라인 자신의 무식한 아버지를 보고 결혼을 반대할까봐 걱정했다고 한다.
하지만, 극성 아버지들답게 두 사람의 아버지들은 만난 직후부터 열을 내며 서로 자기자식이 더 테니스 선수로서 뛰어나다고 불같은 논쟁을 벌이다 심지어 주먹다짐까지 벌어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런데, 그결과는 황당하게도 주먹다짐을 벌인 후에는 서로 주먹다짐을 벌인 상대를 인정하고, 그런 상대의 자식이니까 결혼 상대로 인정해버린 것이다. 결국 애거시와 그라프의 결혼는 두 열혈 아버지의 무사하게(?) 허락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애거시와 그라프 부부는 커리어 골든 슬래머 커플[25] 임에도 자택에 테니스장이 아예 없다고 하는데 이것도 두 사람의 아버지 때문이라고. 두 사람 모두 아직 테니스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도 모르는 어린 나이에 극성 아버지의 좋게 말하면 열성, 나쁘게 말하면 강요에 의해 테니스를 시작했던 것이 상처로 남아서 애거시와 그라프는 자식들에겐 절대 테니스를 시킬 생각이 없어서 자택에도 테니스장을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프로에 갓 데뷔했을 때부터 나이키에서 밀어 줬던 스타였다. 애거시가 데뷔할 당시 나이키에서 지원했던 선수가 존 매켄로, 매켄로가 슬슬 은퇴할 시점에 나이키에서 애거시를 밀어줬던 것. 나이키 모델로서 가장 유명한 광고는 버추얼 앤드리 편. 1992년 광고 이 광고는 펑크락 밴드 레드 핫 칠리 페퍼스와 함께했다.
그가 ATP 투어 대회에서 처음으로 결승전에 오른 대회가 바로 우리나라의 대한항공에서 후원했던 KAL 컵 코리아 오픈 창설(1987년) 대회로, 결승전에서는 짐 그랩이라는 선수에게 패해 준우승을 했다. 이때 첫 ATP 투어 대회 결승 진출 및 열렬하게 응원해준 한국 관중들에게 감동을 받아 다음 대회에도 참가하기로 약속했고, 이후 그의 랭킹이 급등해 상금 10만 달러 규모의 KAL 컵은 건너뛸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참가해 약속을 지켰다.
5. 참고 링크
- (한국어 위키백과) 앤드리 애거시
- (영문 위키백과) Andre Agassi
- (영문 위키백과) Andre Agassi career statistics
- (ATP 홈페이지) Andre Agassi Overview
[1] 노란 머리색은 염색이 아니라 가발이다. 원래 그의 머리색은 눈썹처럼 짙은 갈색이다.[2] 성씨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이탈리아계 미국인으로 오인하나 아니다. 아버지는 아르메니아-아시리아계 이란인이고, 어머니는 아일랜드계 미국인이다. 본인은 자신을 아르메니아계로 보는 듯하다.[3] 아버지인 에마뉴엘 아가시에 따르면 원래는 Agassian이었다고 한다. 어느 나라건 소수민족인 아르메니아계이기 때문에 박해를 피하기 위해 조상대에서 아르메니아인임을 나타내는 ~an을 이름에서 빼 버린 것.링크[4] ATP 월드 투어 파이널의 과거 명칭.[5] 마스터스 1000 시리즈의 과거 명칭.[6] 라파엘 나달이 마스터스 1000 시리즈 최다 우승 기록을 경신하기 이전에는 앤드리 애거시가 마스터스 시리즈 남자 단식 우승 17회로 최다 우승 기록을 가진 선수였다.[7] 현재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애거시라고 표기하는 게 맞겠지만, 애거시가 현역으로 활동했을 당시 언론에서는 '''아가시'''로 표기하는 바람에 아가씨와 동음이의어 개그가 성립된 적이 있었다. 본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방한했었을때 농담삼아 "한국에서는 젊은 여자를 '아가씨'라고 한다면서요?" 라고 말하기도.[8] 보통 선수들보다 반박자 정도 빨리 받아친다고 보면 된다[9] 애거시와 쿠리어가 1970년생, 마이클 창이 1972년생이다.[10] 1984년에 프로에 데뷔하여 겨우 만 17세 7개월의 나이로 1985년 윔블던 남자 단식에서 우승을 달성하면서 최연소 윔블던 남자 단식 우승 기록을 세운 독일 출신 선수로 1985년 윔블던 남자 단식 우승은 베커의 첫 그랜드슬램 대회 남자 단식 우승이기도 했다. 1991년에는 세계 랭킹 1위까지 기록하였으며 전성기 기간이 무려 1985년부터 1996년까지이기도 하다. 1999년 은퇴할 때까지 그랜드슬램 대회 남자 단식에서만 우승 6회, 준우승 4회, 4강 진출 8회를 기록했고, 마스터스 컵 남자 단식에서도 우승 3회, 준우승 5회를 달성하였으며 통산 타이틀 획득 49회를 기록할 정도로 세계적인 선수였다.[11] 1988년에 프로에 뛰어들어 1992년에는 세계 랭킹 최고 순위 2위를 기록하기도 했던 크로아티아 출신 선수로 193cm의 큰 키에서 뿜어져나오는 상당수 선수들은 알고도 못막는 초강력 서브가 주무기였던 선수였다. 선수로서의 전성기는 1990년부터 1998년까지였는데 전성기엔 윔블던 남자 단식에서 세번이나 준우승에 그쳤으나 도리어 선수로서의 전성기가 지났다고 평가받던 2001년에 윔블던 남자 단식에서 우승하였다. 2004년에 은퇴할 때까지 2001년 윔블던 남자 단식 우승, 그랜드슬램 대회 준우승 3회, 4강 진출 3회, 8강 진출 7회, 마스터스 컵 남자 단식 4강 진출 3회, 마스터스 시리즈 남자 단식에선 우승 2회, 준우승 5회, 4강 진출 9회,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테니스 남자 단식 동메달, ATP 투어 남자 단식은 우승 18회, 준우승 18회를 기록한 세계적인 선수라고 볼 수 있는데 강력한 서브 위력에만 의존하던 선수치고는 성적이 굉장히 좋은 편이었다. 비록 초강력 서브가 톱클래스급 선수들에겐 잘 안 통하였지만 서브가 빠를수록 유리한 코트에선 톱클래스 선수들과도 어느 정도 경기를 해볼만 했고 이바니세비치의 컨디션이 좋은 경우에는 톱클래스 선수도 이바니세비치의 초강력 서브를 잘 못막아서 고전하였기 때문이다.[12] 1988년에 프로에 데뷔하였고 1994년에는 세계 랭킹 최고 순위 3위까지 기록했었던 스페인 출신 선수로 2002년 은퇴할 때까지 거둔 통산 주요 성적은 1993년과 1994년 프랑스 오픈 남자 단식 우승, 1997년 프랑스 오픈 남자 단식 준우승, 1995년 프랑스 오픈 남자 단식 4강 등 4강 이상의 성적을 거둔 그랜드슬램 대회 남자 단식은 전부 프랑스 오픈 남자 단식에서 달성하였는데 다른 그랜드슬램 대회 남자 단식에선 8강조차 진출해본 적이 없는 선수였다. 극단적으로 클레이 코트에서만 강한 선수였는데 ATP 투어 이상급 남자 단식 결승 진출 35회 중 29회가 클레이 코트 대회였고 타이틀을 획득한 14회 중 13회가 클레이 코트에서 열린 대회였다. 그래도 1994년 마스터스 컵 남자 단식 4강 진출, 마스터스 시리즈 남자 단식에서 우승 2회, 준우승 3회, 4강 진출 4회를 기록하였으며 1996 애틀랜타 올림픽 테니스 남자 단식 은메달, ATP 투어 남자 단식에선 우승 10회, 준우승 16회를 기록한 선수였다.[13] 1991년에 프로에 뛰어들었고 1994년에는 세계 랭킹 최고 순위 4위까지 기록하였던 우크라이나 출신 선수로 전성기는 1993년부터 1997년까지이다. 하지만 1999년 프랑스 오픈 남자 단식에선 테니스 선수로서 마지막 불꽃을 태우며 결승전에 진출하였는데 이 결승 진출이 현역 마지막 ATP 투어 이상급 남자 단식 결승 진출이었다. 2001년 은퇴할 때까지 통산 주요 성적은 1999년 프랑스 오픈 남자 단식 준우승, 1993년 프랑스 오픈 남자 단식 4강 진출, 그랜드슬램 대회 8강 진출 3회, 마스터스 시리즈 남자 단식에서 우승 4회, 준우승 1회, ATP 투어 남자 단식은 우승 7회, 준우승 5회를 기록한 선수이다.[14] 4대 그랜드슬램 대회에 프로 선수의 참여가 전면 허용된 1969년 이후를 말함.[15] 1995년에 프로에 데뷔하였고 2004년에 세계 랭킹 5위까지 기록하였던 독일 출신 선수로 전성기는 2002년부터 2004년 사이였다. 2012년 은퇴할 때까지의 통산 주요 성적은 2003년 호주 오픈 남자 단식 준우승, 2008년 윔블던 남자 단식 4강 진출, 2003년 마스터스 컵 남자 단식 4강 진출, 2004년 마스터스 몬테카를로 오픈 남자 단식 준우승, 마스터스 시리즈 남자 단식 4강 진출 3회, ATP 투어 남자 단식에서 우승 3회, 준우승 6회를 기록한 선수이다.[16] 역대 최고령 그랜드슬램 대회 남자 단식 우승은 1972년에 켄 로즈웰이 만 37세 2개월의 나이로 호주 오픈 남자 단식에서 기록한 것인데, 1970년대 초반의 오픈 시대 초창기는 프로 테니스 선수로서의 경쟁이 2000년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낮은 수준이었고 여기에 더해서 70년대같은 경우에는 호주가 너무 멀다고 그랜드슬램 대회임에도 호주 오픈에 출전조차 하지 않는 타대륙 선수가 상당수 있어서 상대적으로 다른 그랜드슬램 대회에 비해 호주 오픈의 우승이 더 손쉬웠던 것까지 더해져서 2003년 호주 오픈 남자 단식에서 안드레 애거시가 만 32세 9개월의 나이로 우승한 기록의 평가가 높게 된 것이다.[17] 참고로 14년 후인 2017년 호주 오픈에서 로저 페더러가 만 35세 5개월의 나이로 호주 오픈에서 우승하면서 안드레 애거시의 기록을 경신했다. 페더러는 애거시의 우승 기록에서 무려 세살 가까이 더 많은 나이에 우승한 것이다.[18] 안드레 애거시가 가지고 있던 역대 최고령 마스터스 시리즈 남자 단식 우승 기록은 2017년에 마스터스 1000 인디언 웰스 오픈 남자 단식에서 페더러가 만 35세 7개월의 나이로 우승하면서 페더러에게 넘어갔다.[19] 현재의 ATP 월드 투어 마스터스 1000 시리즈 대회의 2004~2008년 사이의 명칭.[20] 안드레 애거시가 가지고 있던 마스터스 시리즈 남자 단식 본선 역대 최다승 기록도 페더러가 2012년에 마스터스 1000 인디언 웰스 오픈 남자 단식에서 통산 252승째를 기록하면서 페더러에게 넘어갔다.[21] 커리어 골든슬램은 테니스 황제 로저 페더러마저 달성하지 못한 기록으로 잔디 코트와 하드 코트, 클레이 코트에서 모두 강해야만 각각의 그랜드슬램 대회를 우승할 수 있는데다 올림픽은 4년마다 열려서 한번 우승 기회를 놓치면 더욱 우승하기 힘들기 때문에 정말로 달성하기 힘든 기록이다. 물론 프로 테니스 선수의 올림픽 출전이 1988년부터야 허용된 것도 커리어 골든슬램 달성자가 거의 없게 만든 이유 중에 하나일 것이다. 커리어 골든슬램은 애거시의 최초 달성 이후 남자 테니스 선수로는 라파엘 나달만이 달성하였다. 애거시의 라이벌이었던 샘프러스는 극강의 서브 앤 발리 스타일로 강력하고 빠른 서브를 넣는 선수가 가장 유리한 윔블던 남자 단식에서만 7번이나 우승할 정도로 잔디 코트에서 강했지만 반대로 서브 속도가 느려지는 클레이 코트에서 열리는 프랑스 오픈(심지어 프랑스 오픈이 열리는 클레이 코트인 롤랑 가로스는 다른 대회가 열리는 클레이 코트와 비교해서도 가장 서브 속도가 느려지는 클레이 코트로 평가된다.) 남자 단식에선 너무도 약해서 커리어 통산 프랑스 오픈 남자 단식은 4강 진출도 1번 밖에 못했다. 당연히 커리어 그랜드슬램은 달성하는 것이 불가능했다.[22] 애거시가 조코비치의 풀타임 코치가 된 것은 아니고 일단 프랑스 오픈 남자 단식만 조코비치와 같이 해보고 나서, 애거시가 조코비치의 풀타임 코치를 할지는 애거시와 조코비치가 협의해서 결정한다고 한다.[23] 중앙일보 2009년 10월 31일 《테니스 황제 안드레아 애거시 “80년대 금발 머리는 가발” 충격 고백》[24] 절묘하게 타이밍이 좋았던 게, 1990년대부터는 서구권에서도 장발을 멋지게 보는 트렌드가 사그러들었기 때문이다.[25] 그라프는 남녀 통틀어 전무후무의 유일한 캘린더 골든 슬래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