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산 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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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산 고분군의 전경. 왼쪽의 가장 큰 무덤이 구 34호, 현재는 4호분으로 불리는 무덤이고 그 오른쪽 능선으로 8, 6, 6-1호가 위치한다.
1. 개요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도항리와 말산리에 소재하는 말이산에 형성된 아라가야의 왕릉군. 사적 제515호.
아라가야 지배층들의 묘역으로 과거에는 도항리 고분군과 말산리 고분군이라고 불렸고 각각 사적 제84호, 제85호로 지정되었었다. 행정구역상으로만 나뉘었을 뿐 같은 능선에 순차적으로 형성된 아라가야의 유적임에도 도항리와 말산리로 구분되어 다소 혼란이 있었다. 2011년에 들어서 각 고분군을 기존의 사적에서 해제하고 사적 제515호 말이산 고분군으로 재등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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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군은 안라국 · 아라가야의 중심지로 이 말이산 고분군을 비롯하여 남문외 고분군과 같은 대형의 고분군들이 자리잡았다. 더불어 傳 아라가야 궁성지가 이 고분군의 서쪽편에 있으며 이 중심지를 방어하는 산성들이 가야읍의 주변으로 분포한다.
특히 말이산 고분군을 비롯한 아라가야의 영역 또는 영향력 아래의 지역이었던 곳의 유적에서는 아라가야 특유의 화염문투창고배로 대표되는 아라가야 양식의 토기들이 확인되고 있다. 이 말이산 고분군 또한 많은 화염문투창고배가 출토되었다.[1] 그뿐만 아니라 아라가야 특유의 오리나 새 모양 장식이 있는 유자이기(有刺利器)[2] 가 출토되는 것이 특징이며 말이산 고분군의 대형분들을 비롯한 일대의 상위 신분의 무덤에서만 출토되고 있다. 이 일대의 지명을 비롯해 왕릉급의 고분, 왕성의 존재[3] , 양식화된 토기들, 정체성을 표상하는 유물들의 존재로 말미암아 아라가야의 중심지로 보는 데에 이견이 없고, 그 중심에 말이산 고분군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각 가야를 대표하는 왕들의 무덤군으로는 고령의 대가야 지산동 고분군, 합천 다라국 옥전 고분군, 김해 금관가야의 대성동 고분군 등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 추진 중(#출처)에 있긴 하지만.... 지자체장들의 업적과 관련하여 얽힌 문제가 많아 순항이라곤 할 수 없어도 아무튼 진행 중이다.
2. 대표적 무덤
- 마갑총 - 말이산 고분군의 최북단이지만 지금은 개발 때문에 지형이 바뀌었다. 아파트 단지 속에 마갑총 자리라는 표지석이 있다. 말이산 고분군의 고분들 가운데서 비교적 빠른 4세기 후엽에 해당한다. 무덤에서 말갑옷(馬甲)이 나와 '마갑총'이란 이름이 붙었다.
- 말이산 4호(구 34호)[4] - 말이산 고분군의 최대형분.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조사했기 때문에 '말이산 4호'라는 명칭보다 '구 34호'라는 명칭이 익숙하기도 하다. 이때 처음으로 아라가야 고분에서 확인되는 감실(龕室)[5] 이라는 시설이 확인되었다.
- 말이산 6호[6] - 말이산 4호에서 서쪽으로 나온 구릉에 위치한다. 5세기 왕릉이라고 추정한다.
- 말이산 8호[7] - 말이산 4호에서 서쪽으로 나온 구릉 상에 위치한다. 5세기 왕릉이라고 추정한다.
- 말이산 13호 - 말이산 구릉의 남단에 위치하며, 2018년 말 무덤의 덮개석 중 하나에서 별자리판이 발견되며 언론에 알려졌다.
- 말이산 100호 - 말이산 구릉의 남단에 위치한 5세기 후반 왕릉급 대형분
- 말이산 101호 - 말이산 구릉의 남단에 위치한 5세기 후반 왕릉급 대형분
- 암각화고분 - 암각화가 새겨진 돌을 석곽의 뚜껑돌[蓋石]으로 사용하여 '암각화 고분'으로 명명했다.
3. 여담
고분 번호가 아주 주옥같다. 지금은 이러한 문제점이 인지되어 통일된 호칭 체계를 부여했지만, 불과 2000년대까지만 해도 말이산 고분군과 관련된 고분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고분 번호부터 먼저 암기(...)해야 했다. 그 순서는 대략 아래와 같다.
- 일제강점기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처음 조사하면서 말이산 고분군의 대형분에 처음으로 호수를 지정하였다. 舊 0호로 부른다.
- 해방 이후 1981년에 함안군이 이마니시 류가 정한 번호의 역순으로 대형분에 새롭게 호수를 지정하였다. 現 0호로 부른다.
- 1984·1986년 창원대학교 박물관이 말이산 북쪽 능선의 일부를 조사하고 새로운 고분이 일부 추가되어 昌 0호[8] 로 부른다.
- 90년대 들어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이 대형분들이 발굴조사했다. 이 때의 고분들을 지칭할 때 文 0호[9] 라고 불렀다. 물론 '現'의 명칭과 혼용되었다.
- 위의 거론된 시간들 사이사이에 주변의 필지 개발 및 정비사업이 이루어지면서 크고 작은 발굴들이 있었다. 경남고고학연구소, 경남발전연구원, 경상문화재연구원,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등이 현재까지 말이산 고분군 일대의 발굴에 참여하였다. 물론 대부분 각 기관의 발굴범위 안에서 나온 중소형분들은 1호부터 번호를 매겼으므로 구분이 필요했다. 경남고고학연구소는 慶, 경남발전연구원은 경발연,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은 동[10] 등으로 구분했다.
- 물론 현 6호분이 발굴되는 시점까지도 도항리와 말산리로 나뉘었기 때문에 도항리 0호와 말산리 0호는 다른 개념이었고 관련 분야의 사람들도 사용하는 명칭이 갈렸다. 느낌적으로 알아듣는 수밖에 없었다.(...)
4. 관련 문서
[1] 사실 화염문투창고배보다 다른 아라가야 양식 토기들이 훨씬 많이 출토되었다. 다만 화염문투창고배 그 자체만으로도 아라가야의 정체성을 나타낸다고 할 만큼 대표성이 있다.[2] 정확한 기능을 몰라서 '찌르기 용이한 철기'라는 뜻으로 한자를 조합해 명칭을 만들었지만, 지금은 한자의 의미를 무시하고 관용적으로 이러한 유물들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순우리말 용어로는 '미늘쇠'라고 하는데, 아마 태극기의 국기봉 같은 기능을 했으리라 추정한다. 참고로 옥전 고분군에도 특유의 유자이기가 출토된다.[3] 실제로 왕성인지는 다소 재론의 여지가 있다. 토성을 조사했던 바 있으나 결과는 일제시대 제방이었다.[4] 가장 위의 사진의 왼쪽의 대형분이다.[5] 원래 '감실'은 유교에서 위패를 모셔두는 작은 나무장을 말한다. 한국 천주교도 성체를 모시는 작은 시설을 감실이라고 부른다. 여기서는 정말로 위패는 아니겠지만, 뭔가 작은 것을 올려놓거나 보관하기 딱 좋은 어떤 공간을 임의로 감실이라 부르는 것이다. 실제로는 개석을 받치는 시설을 위한 공간이라는 견해가 많다.[6] 가장 위의 사진의 4호분 오른쪽 능선의 가운데에 있는 고분이다.[7] 가장 위 사진의 4호분의 오른쪽 능선의 좌측 고분이다.[8] 창원대의 昌[9] 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했다는 의미[10] 現 6호분은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에서 조사했는데 대형분이므로 굳이 동 6호로 부르진 않았다. 다만 현 6호분 앞에 또 작은 무덤들(...)이 있는데 그런 고분을 말할 때 동 0호라는 식으로 부른다.[11] 어쩌다 보니 말이산 고분군의 발굴조사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순차적으로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