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 지산동 대가야 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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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 지산동 고분군의 전경. 가장 멀리 44호분이 보인다. 사진에 보이는 돌계단은 2018년에 정비 목적으로 잠시 철거하고 발굴조사를 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계단 있던 자리에서도 숱한 고분들이 나왔다.
[image] '''대한민국의 사적''' '''제79호'''
'''고령 지산동 고분군'''
高靈 池山洞 古墳群
Jisandong Tumul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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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지산리 일원
'''분류'''
고분군
'''면적'''
814\,816㎡
'''지정연도'''
1963년 1월 21일
'''제작시기'''
가야
'''위치'''


1. 개요
2. 특징
3. 역사
4. 무덤의 내부구조
5. 순장
6. 수난의 역사
7. 유명한 무덤들
8.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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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왕릉로 55(지산리)에 위치한 대가야 시대에 축조된 무덤군을 의미하며 폭넓게는 이후 신라, 고려, 조선 시대에 추가로 축조된 고분군까지 모두 포함하여 지산동 고분군이라고 불린다. 1963년에 사적 제79호로 지정되었고 고분은 총 704기가 확인되었다.
행정구역 명칭이 '지산동(洞)'이 아닌 '지산리(里)'이지만 '지산동 고분군'이라 불리는 것은 지정 당시의 명칭을 따랐기 때문으로, 경상북도에서는 1988년까지 읍면의 하위 행정구역 단위로 '동'을 쓰는 곳이 많았다.
가야시대의 유명한 금관리움미술관 소장 금관(국보 제138호)이 출토된 곳이 바로 여기이다. 물론 정확히는 도굴로 세상에 나온 것을 이병철 회장이 구매한 것인데, 그 때문에 이 고분군에서 나왔음은 확실하지만 정확히 어느 고분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45호분에서 도굴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2013년 12월에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 되었으며 2015년 3월에는 우선등재 추진대상으로 선정되었다. 10월에는 공동추진 MOU가 체결까지 갔다.

2. 특징


고분군 가운데로 도로가 관통하며 그 부근에 '대가야 박물관'이 있다. 고분군은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무덤을 백제나 신라처럼 산중턱 혹은 평평한 곳에 만들지 않고 산정상 능선 부근을 따라 축조했다. 이는 높은 곳이 하늘과 맞닿은 신성한 장소라는 당시 가야인들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지산동고분군이 자리잡은 능선 쪽은 나무가 없어서 시야가 탁 트였기 때문에 올라가면 고령군을 전부 내려다 볼 수 있다. 특히나 안개 낀 날도 사진이 잘나온다. 고분군 사이에 안개가 낀 장면을 밑에서 보면 나름대로 좋은 구도가 나오기 때문이다. 게다가 산도 너무 높지 않고 계단도 잘 갖추어 주민들에게는 좋은 등산로이자 공원이며 산책로라고...
대가야 박물관[1]은 이 곳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할 뿐만 아니라 이 고분군의 경비(?) 업무도 겸한다. 지산동고분군은 인구가 바글바글한 곳이 아닌 고령군 내에서도 약간 외진 곳에 있어서 잘못하다가는 도굴꾼의 타겟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고분군 위에는 조명시설이 일부 있고 가끔 순찰을 다닌다고 한다. 2015년 11월 현재 서남쪽 고분군 일대가 정비 중이다.
또한 워낙 무덤이 많아서 그런지 파괴되거나 유실된 고분도 은근히 많이 보인다. 예를 들면 당연히 무덤이 있었을 자리에 무덤이 없거나[2] 야트막한 언덕 아니면 웅덩이 같은 흔적으로만 남아 있고(...) 무덤의 권역를 표시하기 위해 쌓은 돌들이 노출되어 있기도 하다. 결국은 가야시대에 쌓은 돌들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는 이야기... 결국 위의 사진의 평평한 지대가 원래는 모두 무덤 자리였다는것이다. 평지가 된 건 유실된 봉분의 위치가 제대로 파악이 안 되어서 복원을 못한 듯하다.

3. 역사


기록이 없기 때문에 처음으로 축조된 시기는 알 수 없다. 일단은 대가야(반파국) 1대왕인 이진아시왕 때부터 이곳에 무덤을 만들었다고 추측할 뿐이다.
현재처럼 대규모로 무덤을 축조한 시기는 대가야가 고대국가로 성장한 5세기 초부터 6세기 중엽까지인 듯하다. 이 고분군이 유명한 이유는 문헌으로만 전하던 순장이라는 매장풍습의 실체를 확인했다는 것이다. 그 이전에는 '에이 설마 이런게 있었겠어?' 하는 생각이었는데 파헤쳐보니 순장된 시신이 어마어마하게 나와 놀랐다고 한다. 자세한 것은 후술
규모가 크다 보니 대가야 멸망 이후에도 존재가 잊히지지 않았다. 조선시대 학자 남명 조식이 1560년 지산동 고분군을 보고 "산 위에 저게 뭐냐" 하며 놀랐다는 일화가 있다. 현대적 연구는 구한말 시절인 1906년에 일본인 세키노 타다시가 시작했다.

4. 무덤의 내부구조


전체적으로는 거의 구덩식돌덧널무덤인데 신라에 병합된 이후에는 굴식돌방무덤으로 바뀐다. 하지만 이곳 지산동에는 확인된 건 모두 구덩식돌덧널무덤이고 굴식돌방무덤은 약간 떨어진 고아리에 벽화고분 형태로 1기가 있다.[3] 신라에 병합되기 전에는 부장품 토기도 가야토기였으나, 신라에 병합된 6세기 이후에는 신라토기들이 출토된다.
무덤의 내부구조는 신라의 무덤과 백제의 무덤과는 확연히 형태가 다르다..
우선 왕이 묻힌 으뜸돌방(이하 주곽)이 한가운데에 있고, 왕이 저승에 가서 쓸 물건들을 매장한 딸림돌방(이하 부곽)이 1~2개 근처에 있으며 그 주위로 순장자들을 묻은 순장 덧널이 많게는 20개 이상까지도 있다.
또한 왕이 안치된 주곽에도 순장자가 2명 있었는데 왕을 호위하던 최측근 무사나 신하인 듯하다. 부곽에는 장물들을 보관하는 장물지기를 한 명씩 순장했다고 한다.
주곽의 높이는 최대크기 2 m, 길이는 9 m로 어마어마한 크기라, 그만큼 엄청 많은 유물을 부장했으리라 추정한다. 부곽도 크기서 비슷하다. 반면 순장 덧널은 길이가 1.6 m 남짓에 커봤자 2 m정도인데, 당시 사람들의 신체가 작았기 때문인 듯하다.

5. 순장


지금까지 밝혀지기로는 한국사에서 가장 많은 인원을 순장했다고 확인된 고분군이 바로 지산동 고분군이다. 고구려신라에서도 순장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고구려적석총이라는 무덤 특징상 몇 명까지인지는 특정이 되지 않고, 신라 무덤은 많아야 2~3명 정도로 비교적 인도적(?)인 수준이었다.
하지만 유독 흔히 가야권이라 부르는 삼국시대 경남 일대의 제 가야 각국의 고분군에서는 순장의 사례[4]가 많으며 그 인원도 많으면 3~5명가량이다. 그 중에서 지산동 고분군의 대형분들은 수십 명씩 순장하였고, 가장 큰 44호분에는 대략 40여 명이 순장되었다고 추정한다.
지금의 기준에서야 인권적 측면에서 가혹한 측면이 없지 않으나, 인권이라는 것이 없던 시절임을 고려해보면 순장된 사람들(이하 순장자)은 일종의 위세품과도 같은 개념으로 이해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무수한 토기, 화려한 부장품들의 존재는 계세사상(繼世思想)이라는, 즉 죽어서도 현세의 삶이 이어진다고 보는 관점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순장 또한 그러한 계세사상의 일환으로써 이루어진 것으로 피장자의 위계에 따라서 그 수량이 정해졌었다. 지산동 고분군 중에서도 왕묘 급의 지름 20 m 이상 대형분들은 순장자가 20명을 상회하거나 그 수준인 반면, 왕릉급 바로 아래의 무덤들에서는 3~5명 정도로 순장자 인원 수가 줄어듦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위계(位階)에 따라 순장자 수가 줄어드는 것은 일반적으로 무덤에서 확인되는 부장품의 화려함의 정도, 수량적 측면이 상위 위계의 인물일수록 많고, 위계가 낮아지면서 그 급이 낮아지는 맥락과 동일한, 즉 순장자=부장품의 개념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가야권의 역사는 문헌이 영성한 관계로 상세하게 알 수는 없거니와 일반 民에 대한 기록은 고대의 문헌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 바, 순장자의 입장이 어떠하였는 가는 알길이 없다. 하지만 2018년 지산동 고분군 남쪽 권역의 발굴조사에서 순장곽과 순장자의 인골이 확인되었다. 그 중 동쪽 순장곽의 순장자의 발치에 화살촉이 꽂힌 상태로 인골이 출토된 사례가 처음으로 확인되었다. 법의학적인 측면에서 다각적 검토가 필요하지만, 정황으로만 미루어볼 때 순장 예정자를 살아는 있으되 저항은 하지 못하도록 발치에 자상을 가했다고 볼 여지가 많다.
이러한 많은 인원을 순장하였던 관계로 대가야 권역의 고분군, 다시 말해 대가야에 의해서 축조된 고분군의 대형분들은 인골이 확인되지 않더라도 피장자가 묻힌 주곽(主槨)을 주변으로 빙 둘러져 순장곽(旬葬槨)을 배치한 양상이 현격하게 나타난다. 이는 대가야 고분군, 특히 수장층, 왕족급의 위계의 표상이기도 하기 때문에 가야권 영역을 규명하고 판별하는 여러 기준 중의 하나로 기능한다.

6. 수난의 역사


1910년부터 일제강점기에 일본은 임나일본부설을 증명할 증거를 찾으려 가야시대 고분을 발굴이라는 명목으로 마구 파헤쳤다. 이후 금림왕릉으로도 전하는 구 39호분, 현재는 '''47호분'''으로 불리는 왕릉급 무덤을 마구잡이로 파헤쳐놓고 허름한 보고서조차도 남기지 않았다.[5][6] 이 때문에 우리 손으로 발굴하기 전까지는 무슨 유물이 출토되었는지, 고분 내부는 어떠한 구조인지 알 길이 없었다.
이후에도 외진 곳에 위치한 이 고분들은 도굴꾼들의 집중적인 표적이 되어 어지간한 큰 무덤엔 도굴갱이 1~2개는 꼭 뚫려 있었다고 한다. 그것도 뚫기 귀찮아서 수많은 도굴꾼들이 선대 도굴꾼이 뚫었던 도굴갱으로 계속 드나들며 무덤을 도굴했고 결국엔 왕이 안치되었던 주곽(主槨)과 왕의 유품들과 저승에 가서 쓸 물건들을 보관하는 창고 역할을 하던 부곽(副槨)은 모두 도굴되었다. 70년대에 들어서 '''44호분'''과 '''45호분'''을 발굴했을 때에는 토기 조각과 화살통, 환두대도[7] 일부, 관장식조각들을 일부 수습하는 정도일 만큼 도굴의 피해가 극심했다.
참고로 현재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가야 유물들 중 주곽에서 출토된 것은 별로 많지 않다. 도굴꾼들도 바보가 아니라 무덤을 파헤칠 때 중요한 유물이 부장되었을 만한 큰 석실 위주로 탐색하는데, 긴 막대기를 무덤에 꽃아 톡톡 두들기며 소리를 내어 크게 울리는 쪽만 파서 가져간다.[8] 즉 도굴꾼들은 주곽 중심으로 도굴했고 부곽이나 순장덧널은 도굴하지 않았다. 이유는 파는데 드는 힘은 똑같은데 유물은 별로 없기 때문에... 그래서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유물들은 순장덧널, 즉 순장곽에서 출토된 것이 많다.
그래도 90~00년대에 들면서 대대적인 사적 관리 및 체계적인 발굴이 시작되자 도굴 피해를 입지 않은 유물을 비롯하여 여러 대형분, 중요 고분들이 학술적으로 발굴조사가 되었다. 일련의 발굴조사 과정에서 금동제 귀걸이나 금동관, 환두대도 등의 여러 위세품들을 비교적 온전히 보전한 고분들이 발견되어 지산동 고분군의 위계적 위치를 조명하게 해주었다.

7. 유명한 무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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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산동 44호분 발굴조사 당시 전경, 바닥에 돌들이 깔린 것이 여러 순장묘들의 뚜껑돌이다.
  • 지산동 44호분
1977년 경북대학교 박물관이 발굴 조사하였으며 현존 국내 최대 순장묘이다. 고분의 크기는 동서 27 m 남북 25 m로 대형 봉분이며 고분의 주인과 측근 호위무사가 안치된 대형의 주곽에 부장품들을 보관한 부곽 2기가 있었고 발굴된 주변에 있는 순장곽만 32기가 넘으며 순장자는 37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대규모의 순장묘이다. 이곳에서는 한번쯤은 들어봤을 야광조개국자[9]가 출토되었고 등잔과 금동합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가야가 백제와 교류를 했다는 중요한 증거가 된다. 그외에도 전형적인 가야유물인 곡옥목걸이, 철제 마구류, 철제갑옷, 대도등이 출토 되었다. 특히 순장곽은 금귀걸이, 팔찌가 출토된 것과 그냥 단순한 토기 4개가 출토된 것, 갑옷이 출토된 것도 있었는데 이것은 당시 순장자들의 신분을 알려주는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이를테면 금,은 장신구가 출토된 곳의 주인공은 왕의시녀, 단순히 토기만 출토된 것은 일반백성, 갑옷은 무사인 것이다.
  • 지산동 45호분
1977년 계명대학교 박물관이 발굴 조사하였고 44호분과 마찬가지로 순장묘이다. 순장자는 최소11명 이상으로 44호분과 함께 국내 순장풍습를 증명하였다. 크기는 지름이 대략 23.5 m에서 22 m정도 되고 타원형 모양이며 44호분만큼이나 큰 무덤이다. 현재 2.85 m정도 높이지만 원래는 4 m정도였다고 한다. 44호분과 약간 다른점을 꼽자면 주곽과 부곽이 남벽을 공유한 상태로 붙어있었다는 점이다.
출토유물은 매우 다양한데 금동제 관형 장식, 금은제 귀걸이, 갑옷조각, 구슬 목걸이, 재갈, 등자, 관을 고정시켰을 꺾쇠와 못도 출토되었다. 토기는 주로 작은사이즈의 토기들의 출토되었다.
  • 지산동 47호분
지산동 고분군 가운데 가장 큰 고분으로 일제강점기인 1939년에 첫 발굴 되었다. 봉분의 직경은 49 m로 어떤 고분보다도 크다. 대가야 3(?)대 4(?)대 왕이었던 금림왕의 무덤으로 전하나 8(?)대,9(?)대 이뇌왕의 무덤이라는 추측도 있다. 알려진 출토 유물로는 금동제 호록, 황어뼈, 금장환두대도, 이형금동제품, 철촉 등이 있고 유물 6500여 점이 출토되었다.
  • 지산동 32호분
1978년 계명대학교 박물관이 33호분 35호분과 함께 발굴 조사를 하였으며, 대형 주곽과 순장곽 1기가 같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봉분의 규모는 대략 13.1~12.6 m정도이다. 현재 봉분의 높이는 1.5 m정도이지만 원래는 3 m급 중형 봉분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무덤이 유명한 이유는 이곳에서 가야시대무덤에선 드물게 금동관이 출토되었고, 보기 드문 방배형 관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금동관에 새겨진 무늬는 황금 비율이라고 한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참고로 이 금동관과 비슷한 것이 일본 니혼쯔야마(二本松山) 고분과 사쿠라오카 고분(桜ヶ丘)에서 출토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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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산동 30호분
대가야 박물관 입구에 도착해서 왼쪽의 언덕길을 조금 걸어올라가다보면 바로 나오는 무덤이다. 1994~1995년에 영남매장문화재연구원[10]이 대가야 박물관 부지를 선정하면서 부지에 위치한 이 무덤을 발굴조사하였다. 이 무덤 또한 순장묘[11]이고 도굴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유물이 특히 이른 편이고 같은 능선에 목곽묘인 73, 75호분이 축조되어 있는 점을 통해 볼 때 비교적 일찍 축조되었다고 추정된다. 봉분의 규모는 동서 18 m, 남북 15 m가량 된다. 석실은 길이 6.45 m, 너비 1.26 m, 높이 3 m 정도다. 특이하게도 석실 덮개돌에 이전 청동기시대에 새겨놓은 암각화를 그대로 뜯어와 사용하였다.[12][13]
또 유명한 이유는 이곳에서도 금동관이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크기는 매우 작아서 아기의 머리에 맞을 정도이다. 아마도 어린 왕자의 금동관이었는데, 주인인 왕자가 유아사망하여 이 무덤에 묻혔으리라 추정한다. 실제로도 발굴 때 작은 덧널에서 유아로 보이는 유해과 함께 출토되었다. 현재는 이 금동관은 대가야박물관에서 소장, 전시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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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같이보기



[1] 대가야 박물관은 이 곳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할 뿐만 아니라 무덤 축조과정도 자세히 보여기 때문에 들려보기를 추천한다. 그 옆에는 지산동44호분을 발굴 당시 그대로 재현해 놓은 모형전시관이 있는데, 지산동 고분군의 역사도 자세히 보여주기 때문에 입장료가 아깝지 않다. 입장료는 청소년과 어린이는 1500원, 어른은 2000원. 고분군 입장료는 무료이다. 다만 정해진 루트로만 다녀야한다. 고분군 안에 길이 잘 정비되었기 때문에 그 길로만 다니면 된다. 특별한 고분 앞에는 설명문이 있기 때문에 참고하면 좋다. 월요일은 휴무. 하지만 고분군은 출입이가능하다.[2] 기준이 애매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가보면 능선과 경사면 경계에도 무덤이 있다. 즉 완벽한 봉분이 아닌 기울어진 형태의 봉분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잘 보면 정작 위 능선의 평평한 땅에 무덤이 없다. 그런 불안한 자리에 무덤을 만들었다는 것은 이미 쓸만한 땅이 꽉차서 그랬다는 건데 자리가 있는 데도 일부러 불안한 자리에 만들었을 리는 없지 않는가?[3] 한반도 남부(대한민국)에 위치한 벽화고분은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인데, 그 중에서도 가야에서는 이곳 한 기뿐이다. 발굴 당시엔 모두 도굴된 상태였고 벽화도 매우 심하게 훼손되어 간신히 연꽃 무늬 하나만 확인할 수 있었다. 전체적으로 아치형 구조라 무령왕릉과 형태가 유사하고, 벽화가 있다는 점에서 백제묘제와 유사성이 있다.(신라에 굴식돌방무덤이 도입된 시기는 이보다 훨씬 이 후로 추정한다.) 그 때문에 백제와 가야의 교류를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자료. 호암미술관 소장금관이 이 고분에서 나왔다는 말이 있지만 확실한 건 아니다.[4] 함안 아라가야(안라국)의 말이산 고분군에서도 적게는 1~2인, 많게는 4~6인가량 순장된 수장급 무덤이 확인되었고, 김해금관가야(금관국) 대성동 고분군에서도 순장의 흔적이 확인된다.[5] 혹시나 해서 말해두지만 '''임나일본부의 증거 따위는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연히 거짓말이니까.'''[6] 지금도 도쿄국립박물관에 가야토기들이 있다. 일본은 이 토기들이 스에키 토기라고 거짓말을 하거나 도굴한 적 없다고 잡아떼지만, 제작방식으로 볼때 한반도에서 건너간 토기들이 확실하고 도굴범들은 빼도박도 못하는 일본이 맞다.[7] 환두대도는 왕족급의 인물들옆 에 신분과시용으로 매장하던 것이며 이것이 발굴된 고분은 고분의 주인이 최소 왕족 또는 왕임을 의미한다. 삼국시대의 무덤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형태라, 환두대도 발굴이 그래서 중요하다.[8] 박물관에 전시된 토기들 중에서 막대기에 찔려서 깨진 부분이 보이는 토기들도 종종 있다. 비단 지산동 고분군에만 해당하는 건 아니다. 다 비슷하다.[9] 야광조개국자의 재료로 쓰인 조개 종류는 오키나와 근처에 서식하고 있으며 이는 가야가 오키나와와 직접 무역을 했거나 아니면 백제로부터 이 물건을 들여왔을 것으로 추측하게 해주는 중요한 유물이다.[10] 현 영남문홪재연구원[11] 순장곽은 5개 정도가 나왔다.[12] 때문에 오히려 역설적으로 암각화는 보존될 수 있었다... 바깥에 있었다면 사라졌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13] 의외로 이런 현상이 삼국시대 유적에서 쉽게 확인된다. 같은 가야 고분군인 말이산 고분군에서도 아에 이름이 암각화 고분이라는 무덤이 있다. 뚜겅돌이 바로 이처럼 암각화를 잘라서 사용한 것이기 때문에 이름이 그렇게 붙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