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례궁
1. 개요
조선 중기의 행궁이자 월산대군의 저택. 임진왜란 이후 왕실 소용의 내탕을 마련하고 관리하였던 곳이었다.
현재 덕수궁 영역의 일부에 있었다. 조선시대 당시 행정 구역은 한성부(漢城府) 남서(南署) 명례방(明禮坊)이었다.
2. 변천 및 현황
명례궁이 있었던 자리는 원래 1469년(예종 1년) 남이의 역모사건에 연루되었던 조영달(趙穎達)의 집 터였다. 조영달의 집을 몰수했다가 1470년(성종 1년) 세종의 막내 왕자였던 영응대군의 부인 송씨(宋氏)에게 하사하였다. 1년 뒤 송씨가 이 집을 다시 왕실에 바치자 연경궁으로 이름짓고 '''왕실의 별궁으로 삼았다.'''[4]
1472년(성종 3년)에는 의경세자의 사우인 의묘를 연경궁 후원에 세우기로 하였다. 제사를 맡은 의경세자의 장남인 월산대군은 이곳을 하사 받았고, 이후 왕자의 저택이면서 사묘가 있는 제사궁이 되었다. 이후 1475년 의묘의 위판(位版)을 경복궁 내 연은전(延恩殿)에 옮겨 모시면서 연경궁은 월산대군의 저택으로만 기능하였다.
1486년(성종 17)에는 잠시 옹주의 저택으로 하사되었다가, 1593년(선조 26) 10월 임진왜란으로 한양 내 모든 궁궐이 소실되자 이곳을 행궁으로 사용하였다. 정릉동 행궁으로 불리던 이곳은 1611년(광해군 3) 10월에 경운궁이라는 궁호를 받게 되면서 정식 궁궐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광해군의 창덕궁 이어 이후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고, 인조반정 이후에는 행궁 대부분의 건물과 토지를 원래 소유자에게 돌려주어 더 이상 행궁의 역할과 기능을 하지 않았다.
이곳에 왕실 소용의 내탕을 마련하고 관리하는 명례궁이 설치된 것은 임진왜란 직후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중 극심한 재정난 속에서 선조가 23명의 왕자와 옹주에게 어전(漁箭)·염분(鹽盆)·시지(柴地) 등을 임시로 변통해 나누어 주었고, 뒤에 이 선례에 따라 궁방전(宮房田)을 나누어 주었기 때문이다.
명례궁에 관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광해군의 즉위기였던 1623년 1월 11일의 기사이다. 이후 고종 연간까지 꾸준히 자전(慈殿, 인조 연간), 중전(中殿, 현종 연간), 대비전(大妃殿, 숙종 연간), 대왕대비전(大王大妃殿, 숙종 연간), 양자전(兩慈殿, 숙종 연간), 동궁(東宮, 영·정조 연간)들의 내탕 마련과 궁가에서 발생한 문제들에 관여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1897년(광무 원년) 고종이 대한제국의 법궁으로 사용할 경운궁을 확대 영건하면서 기능이 축소되었다. '''하지만 이후로도 명례궁의 건물들은 잘 남아있었다. 그러나 덕수궁 대화재로 모조리 사라져 남아있지 않다.''' 그리고 1907년(융희 원년) 통감부의 황실 재산 정리 과정에서 명례궁 제도가 완전히 폐지되어 현재 명례궁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현재는 조선 초기와 중기의 명례궁을 연구한 자료를 통해서 명례궁을 찾아볼 수 있다.
[1] 행랑이 서로 얽혀있고 사진위의 덕수궁 즉조당과 우측 아래의 석어당의 모습도 지금과는 많이 다르다. 가운데 빨강색 원 안의 건물이 명례궁의 정전이었던 즉조당이다.[2] 덕수궁 대화재 직전까지 남아있던 명례궁 석어당의 모습. 현재의 석어당과는 모습이 다르다는것에 주목하자. 또한 위 사진의 원래 재목도 '월산대군방' 이라는 이름이다.[3] 임진왜란 직후 정릉동 행궁시절에 선조가 정사를 보았던 곳 이었고, 조선 후기 고종때도 이곳을 초창기에는 편전으로 사용하였다.[4] 이는 성종실록 성종 2년 7월 24일의 기사에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