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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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남이(南怡)
'''본관'''
의령 남씨
'''출생'''
1441년 조선 한성부
'''사망'''
1468년 10월 27일 (향년 28세) 조선 한성부
'''국적'''
조선
'''시호'''
충무(忠武)
'''사인'''
거열형
1. 개요
2. 일생
2.1. 왕가의 외증손
2.2. 소년 등과
2.3. 건주위 토벌, 이시애의 난 그리고 용장 남이. 화려한 1467년
2.4. 최연소 병조판서
2.5. 예종과 훈구대신과의 불화 그리고 반역자로 몰락
2.6. 최후
2.7. 사후
3. 기타
4. 현대 창작물에서
4.1. 조선왕조실톡에서의 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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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세조 때의 무신.

2. 일생



2.1. 왕가의 외증손


1441년[1] 서울 낙산 아래(당시 지명 연화방)에서 태어났다.
'''5대조는 개국공신이자 영의정부사인 충경공 남재''', 큰 할아버지는 문종의 고명대신이자 좌의정을 역임한 '''충간공 남지''', 둘째할아버지는 세종의 총애를 받은 '''예문관 직제학(증 대사헌) 남간''', 할아버지는 부마도위 '''의산군(宜山君) 남휘(南暉)''', '''할머니는 태종의 딸'''인 정선공주(貞善公主)이고 아버지는 군수 남빈(南份), 어머니는 현감 홍여공(洪汝恭)의 딸이다.
즉 남이는 '''조선 초기 개국공신 집안 출신'''으로 '''태종의 외증손'''이 된다. 아버지까지는 왕족 대우를 받았다.

2.2. 소년 등과


세조 6년인 1460년[2]에 무과에 급제해 관직에 진출한다. 우리 나이로 18세에 등과한 셈인데 조선 전기 문과에 급제하는 평균 나이가 30세 전후였고 무과도 그보다 약간 어리거나 거의 비슷했던 사실을 감안하면 18세의 무과 급제는 이것은 놀라운 성취였다.
당시 세조는 한명회 등 훈구 공신들의 공이 너무 커지는 것을 경계해 왕실 종친들과 젊은 인재들을 통해 견제하려 했다. 단종을 죽인 명분 자체가 왕권의 확립이었다. 게다가 세자인 예종은 사사건건 아버지 성에 안 찼고 이런저런 이유로 발영시(拔英試), 그러니까 요즘 말로 하면 엘리트 선발 대회를 열어 인재를 뽑았다. 세조 12년인 1466년 치러진 이 시험에선 새로 인재를 뽑는 게 아니라 이미 문과, 무과에 합격했던 젊은이들 중 젊은 엘리트 관료들을 재발굴하는 거였다. 문과는 40명을 뽑은 반면 무과는 단 4명이었는데 남이는 바늘 구멍 같은 관문도 보기 좋게 뚫어냈다. 장원은 아니었다.[3]
조선왕조실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그의 나이 21세[4]인 1463년인데 1466년까지 '''선전관'''[5]의 직을 수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상략) 임금이 명하여 허종을 체찰사(體察使) 한명회(韓明澮)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삼고, 또 행 호군(行護軍) 조계종(趙繼宗)·'''선전관(宣傳官) 남이(南怡)'''·겸사복(兼司僕) 조영달(趙穎達) 등을 군관(軍官)으로 삼아서 보내었다. (하략)

세조실록 31권, 세조 9년 (1463년) 10월 22일 정미 1번째기사 <'''신숙주·구치관·윤찬 등을 불러 북방의 일에 대해 논의하고 대책을 정하다'''>

새벽에 대가(大駕)가 움직이었는데, 중로(中路)에 왕세자가 길가에서 말에서 내리자 선전관(宣傳官) 권필(權佖)·조맹춘(曹孟春)·하복산(河福山)·남이(南怡)가 모두 말에서 내리니, 임금이 곧 의금부(義禁府)에 내리기를 명하였다.(하략)

세조실록 38권, 세조 12년 (1466년) 3월 23일 갑자 2번째기사 <'''세자에 대해 예우할 것을 전지하다'''>

헌납(獻納) 조간(曹幹)이 아뢰기를,

"판서(判書) 남이(南怡)는 경진년(庚辰年) [6]

에 처음 무거(武擧)에 등제(登第)하고, 병술년(丙戌年) [7] 에 재차 발영시(拔英試) [8] 에 등제하였는데, 이제 또 초시(初試)에 나아가기를 청하니, 다른 예(例)와 같지 않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 "내가 중시(重試)에 나아가려는 것으로 잘못 알고허락하였으니, 시험에 나아가지 말게 하라."

하고, 이어서 남이에게 하교하기를,

"경(卿)의 재망(才望)은 본시 나타났으니, 만약 장원(壯元)하지 못하면, 재주를 상(傷)하고 희망을 덜게 되니, 시험에 나아가지 말라."

하니, 남이가 나와서 뭇사람에게 선언(宣言)하기를,

"성상께서 신에게 명하시기를, ‘너의 이름을 천하에 들렸으니, 용이하게 시험에 나아감은 불가하다.’고 하셨다." 하였다.

사신(史臣)이 말하기를, "남이가 초시(初試)에 나아가기를 청한 것은, 전일에 장원[魁]하지 못함을 한(恨)하여, 이제 다시 과거에 나아가면 장원할 것으로 여겨서이다. 그러나 지난해 겨울에 성상께서 서교(西郊)에 거둥하여 노상(路上)에 말을 세우고, 남이에게 묻기를, ‘네가 등제(登第)하려 하느냐?’ 하니, 남이가 대답하기를, ‘신(臣)은 나이가 젊고 지위가 높아 상덕(上德)이 심중(深重)한 까닭으로 하려 하지 않습니다.’ 하여, 성상께서 가상히 여겼는데, 이 말이 어찌 속마음에서 나왔겠는가?" 하였다.

세조실록 45권, 세조 14년(1468년) 3월 27일 정해 1번째기사 <'''남이를 중시에 나가지 말게 하다'''>


2.3. 건주위 토벌, 이시애의 난 그리고 용장 남이. 화려한 1467년


'''북정가'''

白頭山石磨刀盡 (백두산석마도진)

豆滿江水飮馬無 (두만강수음마무)

男兒二十未平國 (남아이십미평국)

後世誰稱大丈夫 (후세수칭대장부)

백두의 돌 칼 갈아 다하고

두만강의 물 말 먹여 없애리.

사나이 스물에 나라 평정치 못하면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칭하리오

(전략) 이시애(李施愛)·이시합(李施合)·이명효(李明孝) 등이 독전(督戰)함이 매우 급하였다. 물러나 배반하는 자 두 사람을 참수(斬首)하여 머리를 창대 위에 걸어서 군중에게 보이니, 군중이 다리를 떨며 모두 창을 안고 진격하여 모두 10여 합(合)을 싸웠다. 김교(金嶠)는 울타리 남쪽 모퉁이를 감당하여 방어하였다. 적이 김교의 거느린 군사를 엿보니 모두 나약(懦弱)하여 매우 쉬운 것을 알고는 정예한 병사가 다 한데 모여들어 공격하니, 화살이 비와 같으므로 우리 군사도 분발하여 다투고 쏘아서 적이 감히 당해내지 못하였다. 사상(死傷)함이 셀 수가 없었으나, '''이숙기(李淑琦)·남이(南怡)가 살상한 것이 가장 많았다.''' (하략)

세조실록 42권, 세조 13년(1467년) 6월 24일 정사 2번째기사 <'''진북 장군 강순이 북청에 진입할 때 절도사 허종과 의논하다''' >

무송군(茂松君) 윤자운(尹子雲)을 좌참찬(左參贊)으로, 김질(金礩)을 겸 의금부 판사(兼義禁府判事)로, 이서(李墅)를 겸 오위장(兼五衛將)으로, 이숙기(李淑琦)를 행 사직(行司直)으로, 남이(南怡)를 행 부호군(行副護軍)으로 삼았다. 북청(北靑)의 싸움에서 '''남이가 진(陣) 앞에 출몰(出沒)하면서 사력(死力)을 다하여 싸우니, 향하는 곳마다 적이 마구 쓰러졌고 몸에 4, 5개의 화살을 맞았으나 용색(容色)이 태연자약하였다''' [9]

이숙기도 또 힘써 싸워서 공(功)이 많았기 때문에 아울러 당상관(堂上官)으로 제수(除授)하여서 이들을 상 주었던 것이다.

세조실록 43권, 세조 13년(1467년) 7월 14일 정축 2번째기사 <'''윤자운·김질·이서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전략) 하고, 또 유시(諭示)하기를,

" '''남이(南怡)가 가장 용감(勇敢)함을 나타낸다는 말을 듣고, 이제 당상관(堂上官)에 임명'''하고 표리(表裏) 1벌을 주어서 여러 장수(將帥)들을 격려한다. 이숙기(李淑琦)도 또 적을 쏘는 데 능하다고 하니, 당상관(堂上官)에 임명한다. 그 나머지 장사(將士)들도 유능한 자가 반드시 많을 것이니, 그대가 그 등급을 매겨서 계달(啓達)하는 대로 즉시 상(賞)을 주겠다."

하였다.

세조실록 43권, 세조 13년(1467년) 7월 14일 정축 3번째기사 <'''유자광이 임금의 뜻을 맞추니 관직을 더하고 서찰로 이준을 유시하다'''>

이날 밤 3고(鼓)에 진북 장군(鎭北將軍) 강순(康純)이 먼저 산개령(山介嶺)을 넘으니, 대장 어유소(魚有沼)가 다음으로 종개령(鍾介嶺)을 넘고, 도총사(都摠使) 이준(李浚)이 잇달아 평포(平浦)에 이르렀다. 강순(康純)이 준(浚)에게 보고하기를,

"내가 사자 위장(獅子衛將) 남이(南怡)·맹패장(猛牌將) 이숙기(李淑琦)를 전봉(前鋒)으로 삼아 종개동(鍾介洞)에 이르니, 적(賊)이 목채(木寨)를 설치하고, 북청(北靑) 사람 장봉(張奉)으로 하여금 1백여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지키게 하였는데, '''남이(南怡)가 먼저 목채(木寨)를 부수고 돌격(突擊)하여 2급(級)을 참수(斬首)하고 20여 인을 사로잡고 치중(輜重) 10여 바리[駄]를 빼앗으니, 나머지 잔당(殘黨)이 도주하였습니다'''. 위협받아 따른 자들은 다스리지 않겠다는 뜻을 가지고 타이르고, 사로잡은 자들을 놓아서 돌려보냈습니다. 산개령(山介嶺) 위에 이르니, 적(賊)이 또 목채(木寨)를 설치하고 관군(官軍)이 이르는 것을 망(望)보다가, 요새(要塞)를 막기를 더욱 튼튼히 하였는데, 이숙기(李淑琦)가 돌격하여 목채(木寨)의 문을 쳐부수고 고개를 넘을 수가 있었습니다."

하였다. (하략)

세조실록 43권, 세조 13년(1467년) 7월 25일 무자 4번째기사 <'''이준이 강순·어유소와 함께 적을 무찌르고 연달아 진을 치다'''>

우찬성(右贊成) 김국광(金國光)·우참찬(右參贊) 윤필상(尹弼商)·행 호군(行護軍) 남이(南怡) 등이 도총부(都摠府)에 모여서 군공(軍功)의 등급을 의논하여 1등을 정충 출기 포의 적개 공신(精忠出氣布義敵愾功臣)으로 하고, 2등을 정충 포의 적개 공신(精忠布義敵愾功臣)으로 하고, 3등을 정충 적개 공신(精忠敵愾功臣)으로 하였다.

세조실록 43권, 세조 13년(1467년) 8월 26일 기미 1번째기사 <'''김국광·윤필상·남이 등이 군공의 등급을 의논하여 정하다'''>

대사헌(大司憲) 양성지(梁誠之)가 《평삭방송(平朔方頌)》을 바치면서 말하기를,

"공경히 생각하건대, 우리 성상(聖上) 13년 여름 5월에 적신(賊臣) 이시애(李施愛)가 길주(吉州)에서 반역(叛逆)하니, 성상께서 진노(震怒)하여 도총사(都摠使) 신(臣) 이준(李浚)과 부사(副使) 신(臣) 조석문(曹錫文)에게 명하여 서울의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가서 정벌(征伐)하게 하였습니다. (중략) '''비장(裨將) 남이(南怡) 등이 돌격하여 싸워서 적의 기치(旗幟)를 빼앗고, 적 수백 명을 목베었습니다'''. (하략)

세조실록 43권, 세조 13년(1467년) 9월 6일 무진 3번째기사 <'''이시애 난 평정을 기리는 대사헌 양성지의 평삭방송(平朔方頌)'''>

승정원(承政院)에서 교지(敎旨)를 받들어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 오백창(吳伯昌)과 원접사(遠接使) 김길통(金吉通)에게 치서(馳書)하기를,

"명(明)나라 사신이 만약 장수(將帥)의 성명(姓名)을 묻거든, 대답하기를, ‘대장(大將) 강순(康純)·어유소(魚有沼)·남이(南怡)이라.’고 하고, 만약 군사 숫자를 묻거든, 대답하기를, ‘1만 명이라.’ 하여, 모두 사실대로 대답하라."

하였다.

세조실록 43권, 세조 13년 (1467년) 9월 20일 임오 4번째기사 <'''평안도 관찰사 오백창 등에게 명 사신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치서하다'''>

주장(主將) 강순(康純)이 승정원(承政院)에 봉서(奉書)하여 아뢰기를,

"신(臣)이 군사를 거느리고 9월 26일에 '''우상 대장(右廂大將) 남이(南怡)와 더불어 만포(滿浦)에서부터 파저강(婆猪江)으로 들어가 공격하고 이만주(李滿住)와 이고납합(李古納哈)·이두리(李豆里)의 아들 이보라충(李甫羅充) 등 24명을 참(斬)하고, 이만주와 이고납합 등의 처자(妻子)와 부녀(婦女) 24구(口)를 사로잡고, 활로 사살(射殺)하고서 머리를 참(斬)하지 않은 것이 1백75명이고, 중국인 남자 1명, 여자 5구(口)와 아울러 병장(兵仗)·기계(器械)·우마(牛馬)를 얻었고 가사(家舍)와 쌓인 곡식(穀食)은 불태우고 진(陣)을 물려서 요동(遼東)의 군사를 기다렸으나, 여러 날 동안 성식(聲食)이 없기 때문에 이달 초2일에 군사를 돌이켜 초3일에 강을 건넜습니다.''' 좌상 대장(左廂大將) 어유소(魚有沼)는 고사리(高沙里)로부터 올미부(兀彌府)로 들어가 공격하여 21급(級)을 참(斬)하고, 활로 사살하고 머리를 참(斬)하지 못한 것이 50명이고, 중국 여자 1구(口)와 아울러 병장(兵仗)·기계(器械)·우마(牛馬)를 얻고 가사(家舍) 97채를 불태우고, 또한 요동(遼東)의 군사를 기다렸으나 만나지 못하고, 이달 초4일에 그 잡은 중국 사람 등을 여러 고을에 나누어 붙이고 옷과 양식을 급여(給與)하였고, 그 얻은 병장(兵仗)·기계(器械)·우마(牛馬)의 수는 따로 기록하여 계문(啓聞)합니다." (후략)

세조실록 44권, 세조 13년(1467년) 10월 10일 임인 1번째기사 <'''강순이 승전의 봉서를 올리다. 중국 군대와 접촉시의 태도 등을 사목으로 유시하다'''>

(전략), 강옥[10]

등이 앞에 나와서 머리를 조아려 사례하였다. 김보가 말하기를,

"원컨대 남재상(南宰相)이 쏘는 강궁(强弓)을 보았으면 합니다."

하니, 명하여 상현 강궁(上弦强弓)을 취하여 주게 하였다. 김보가 청하여 남이(南怡)로 하여금 쏘게 하매, 남이가 즉시 띠고 있는 대전(大箭)을 뽑아서 한껏 당겨서 쏘았더니, 강옥(姜玉)이 하례하기를,

"이와 같은 양장(良將)은 세상에서 얻기 어려운데, 이 같은 사람이 좌우를 모시었으니 전하는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하고, 김보[11]

가 말하기를,

"저들에게 쏘았던 궁시(弓矢)를 원컨대 제도(帝都)로 가지고 돌아가 뭇 사람들에게 과시(誇示)하기를,''' ‘이것은 우리 조선이 건주(建州)를 정벌할 때의 비장(裨將) 남이(南怡)의 활이다.’라고 하겠습니다." '''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남이(南怡)뿐만이 아니라, 오늘 정중(庭中)의 장수와 군사들의 궁력(弓力)은 이보다 강한 자가 또한 많으니, 이것을 어찌 중원(中原)에 족히 보이겠는가?"

하니, 강옥 등이 말하기를,

"' 이와 같은 경궁(勁弓)은 천하(天下)에서 얻기 어려우니, 보이게 하여도 해롭지 않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친히 잔(盞)을 잡아 두목(頭目)에게 내려 주니, 두목 등이 앞에 나와서 무릎을 꿇고 받아 마시기를 마치고는 머리를 조아려 물러났다.

세조실록 46권, 세조 14년(1468년) 5월 18일 정축 1번째기사 <'''김보가 활을 청하다. 진상하는 물건에 얘기하다'''>

선전관으로 재직 중에 경복궁으로 뛰어든 호랑이를 단숨에 처치했다는 야사가 있으며 일찍이 세조의 총애를 받아 선전관으로 봉직하던 중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 전공을 세워 행 부호군이 되고 뒤이어 당상관에 계자되었다.[12] 이시애의 난이 진압된 후 행 호군이 되었으며 적개공신 1등[13]이 된다.
이시애의 난이 끝나자마자 우상대장으로 강순, 어유소 등과 더불어 요동의 건주 여진 토벌[14]에 출전해 공을 세운다. 특히 추장 이만주를 현 평북 만포시에서 주살하여 그 이름을 알렸다. 이 공으로 중추부동지사를 거쳐 불과 25세의 나이에 자헌대부(정2품), 공조판서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 의산군이라는 어마어마한 직위에 오른다.

이준(李浚)을 귀성군(龜城君) 겸 오위 도총부 도총관(兼五衛都摠府都摠管)으로, 심회(沈澮)를 중추부 영사(中樞府領事)로, 최항(崔恒)을 영의정(領議政)으로, 조석문(曹錫文)을 좌의정(左議政)으로, 강순(康純)을 우의정(右議政) 산양군(山陽君)으로, 홍윤성(洪允成)을 인산군(仁山君)으로, 심결(沈決)을 중추부 판사(中樞府判事)로, 김국광(金國光)을 좌찬성(左贊成) 광산군(光山君)으로, 김수온(金守溫)을 중추부 지사(中樞府知事)로, 한계미(韓繼美)를 우찬성(右贊成)으로, 이호(李灝)를 사산군(蛇山君)으로, 윤필상(尹弼商)을 우참찬(右參贊) 파평군(坡平君)으로, 민발(閔發)을 여산군(驪山君)으로, 오자경(吳子慶)을 보산군(寶山君)으로, 우공(禹貢)을 단성군(丹城君)으로, '''남이(南怡)를 의산군(宜山君)으로''', 김겸광(金謙光)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박중선(朴仲善)을 병조 판서(兵曹判書) 평양군(平陽君)으로, 허유례(許惟禮)를 길성군(吉城君)으로, 허형손(許亨孫)을 전라도 병마 절도사(全羅道兵馬節度使)로, 이운로(李雲露)를 종성군(鍾城君)으로, 최유림(崔有臨)을 수성군(隋城君) 겸 오위 장(兼五衛將)으로, 정종(鄭種)을 칠산군(漆山君)으로, 배맹달(裵孟達)을 서강군(西江君)으로, 이종생(李從生)을 함성군(咸城君)으로, 정준(鄭俊)을 풍성군(豊城君)으로, 이숙기(李淑琦)를 이조 참판(吏曹參判) 연안군(延安君)으로, 이서장(李恕長)을 형조 참판(刑曹參判) 전성군(全城君)으로, 이종(李徖)을 함길 남도 병마 절도사(咸吉南道兵馬節度使) 율원군(栗元君)으로, 어유소(魚有沼)를 평안도 병마 수군 절도사(平安道兵馬水軍節度使) 예성군(芮城君)으로, 허종(許琮)을 함길 북도 병마 절도사(咸吉北道兵馬節度使) 양천군(陽川君)으로, 선형(宣炯)을 황해도 병마 수군 절도사(黃海道兵馬水軍節度使) 유성군(楡城君)으로, 윤말손(尹末孫)을 형조 참의(刑曹參議)로, 박식(朴埴)을 공조 참의(工曹參議)로, 어세공(魚世恭)을 함길 북도 관찰사(咸吉北道觀察使) 아성군(牙城君)으로, 이형손(李亨孫)을 전라도 병마 절도 부사(全羅道兵馬節度副使) 연산군(連山君)으로, 김교(金嶠)를 행 경원 도호부사(行慶源都護府使) 오림군(烏林君)으로, 이덕량(李德良)을 회령 도호부사(會寧都護府使) 전의군(全義君)으로, 김백겸(金伯謙)·이봉(李封)·구겸(具謙)을 중추부 첨지사(中樞府僉知事)로, 최한공(崔漢公)을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으로 삼았다.

세조실록 43권, 세조 13년(1467년) 9월 20일 임오 5번째기사 <'''귀성군·이준·심회·최항·조석문 등의 관직을 제수하다'''>

(전략) '''정충 출기 포의 적개 공신(精忠出氣布義敵愾功臣) 자헌 대부(資憲大夫) 공조 판서(工曹判書)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兼五衛都摠府都摠管) 의산군(宜山君) 남이(南怡)'''에게 하교(下敎)하기를,

"왕은 이르노라. 적(賊)을 토벌하고 적개(敵愾)하는데 반드시 훌륭한 장수의 재주에 힘입는 것이다. 충성을 정표(旌表)하여 책훈(策勳)하는데 마땅히 성대한 상(賞)을 주는 전례(典禮)를 거행해야 하는데, 이것은 공의(公義)에서 나오는 것이요, 사사로운 은혜를 따르는 것이 아니다. 생각건대 경은 지식이 육도(六韜)를 갖추었고 기운이 만인의 무리를 제압하였다. 어려서부터 효건(驍健)한 재예(才藝)를 자부(自負)하였고, 일찍이 금위(禁衛)의 행렬에 끼였었다. 전번에 적신(賊臣) 이시애(李施愛)가 역적(逆賊)의 모계(謀計)를 부려서 간사하게 속이고 흉악한 기염(氣焰)을 선동하여 부엉이가 날개를 벌리듯이 하였다. 곧 원융(元戎)에게 명하여 가서 천토(天討)를 이루게 하였다. 경으로 하여금 따라가서 병졸(兵卒)에 앞장서서 바로 나가게 하니, 오직 진군(進軍)하여 죽는 것이 영화(榮華)인 것을 알고 항상 전장(戰帳)에 나가는 것이 남에게 뒤질까 두려워하였다. 소매를 걷어 올리며 남 먼저 오르는 용기를 떨치고 몸을 빼쳐서 홀로 당하려는 마음을 일으켰다. 친히 시석(矢石)의 교차(交叉)되는 것을 무릅쓰고 시호(豺虎)의 소굴을 바로 쳤도다. 흉도(兇徒)를 세 화살로 죽였고 요기(妖氣)를 한번 호령하는 사이에 쓸어버렸다. 공(功)을 갚으려 하니, 마땅히 총명(寵命)을 더하여야 하겠다. 이에 경을 책훈(策勳)하여……하니, 이르거든 수령할지어다. 아아! 황하(黃河)가 띠[帶]와 같이 되고 태산(泰山)이 숫돌[礪]같이 되도록 금일의 아름다움을 잊을 수가 있겠는가? 가물 때는 장마가 되고 내[川]에는 배[舟]가 되어, 더욱 뒷날 공효(功効)에 힘쓰기를 바란다."

하였다. (하략)

세조실록 44권, 세조 13년(1467년) 11월 2일 갑자 1번째기사 <'''공신연을 베풀다. 적개 공신 귀성군 이준 등이 치사하니, 교서를 반사하다'''>

상락군(上洛君) 김질(金礩)·좌찬성(左贊成) 김국광(金國光)·호조 판서(戶曹判書) 노사신(盧思愼)·'''공조 판서(工曹判書) 남이(南怡)''' 및 여러 종친(宗親)을 불러 안에 들게 하여 술자리를 베풀고 담론(談論)하였는데, 혹은 병서(兵書)를 강하기도 하고, 혹은 치융 방략(治戎方略)을 말하기도 하였다. 남이가 아뢰기를, "신(臣)이 젊어서부터 뜻이 오랑캐를 평정하는 데 있었습니다. 근자(近者)에 편벽되게 성상(聖上)의 은덕을 입었으되, 보답하기를 도모할 길이 없었는데, 다만 융추(戎醜)를 소청(掃淸)하기를 원합니다. 요즘에 들으니 북변(北邊)이 점점 소요스럽다고 하여 신은 밤에 편히 잠을 자지 못하고, 칼을 어루만지면서 한 번에 쳐부수고자 생각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융적(戎狄)이 근심거리가 된 것은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느냐? 비록 당(唐)·우(虞)에 있어서도 또한 묘민(苗民) 이 있었는데, 다만 무비(武備)로 화평(和平)하였을 뿐이다. 경(卿)이 지난번에 진(鎭)을 설치할 것을 의논하였으나, 나는 생각하건대 삼가서 그 옛 것을 지키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여긴다." 하였다. '''남이가 또 아뢰기를, "만약 성상의 계책을 받들어 20만의 무리를 얻는다고 한다면 천하(天下)를 횡행(橫行)할 수 있을 것입니다." '''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너무 지나치다."

ㅡ 《조선 왕조 실록》 세조 14년(1468년) 7월 15일

남이(南怡)를 겸 오위 도총부 도총관(兼五衛都摠府都摠管)으로 삼았다 [15]

ㅡ 《조선 왕조 실록》 세조 14년(1468년) 7월 17일

실록상에 남아 있는 남이의 전공은 매우 화려한데 무예가 절륜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시애의 난에서는 사자위장 또는 비장의 직분으로 참전하여 화살을 4~5대를 맞아도 용색이 태연자약 했다는 기록과 더불어 진 앞에 나서 사력을 다해 싸웠다는 기록, 이숙기와 더불어 살상한 것이 제일이었다는 기록, 목책을 부수고 돌격하여 적의 수급을 베었다는 등의 무용을 자랑하는 기록이 전하며 건주위 정벌에서는 우상대장으로 참전하여 이만주 부자를 참살하는 데 공을 세웠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또한 명나라 사신이 남이의 명성을 듣고 그가 쏘는 활을 보고 싶다하는 기록과 참관 후 감탄하는 기록 등이 남아 있다.
우리 나이로 불과 25세의 젊은 나이에 선봉장 겸 지휘관으로 참전하여 무공을 세운 기록이 당대에도 유별난 것도 사실이며 남이와 함께 했던 강순(1390년생), 어유소(1434년생), 박중선(1435년생), 이숙기(1429년생) 등은 연배가 남이보다 7~15세까지 높았던 것을 감안하면 더욱 그러했을 것으로 보인다.
보통 최연소 병조판서라는 타이틀로 남이를 수식하지만 실제로 남이의 커리어 정점은 25세인 1467년으로 1년 동안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고 건주위를 정벌함으로써 선전관에서 부호군, 호군, 중추부동지사를 거쳐 의산군에 책봉되고 자헌대부 오위도총부 도총관, 공조판서가 되는 엄청난 승진을 거듭한다. 적개공신 1등, 건주위 정벌 군공 2등은 덤. 조선왕조실록에서 1467년 남이의 기사는 화려한데 개국공신의 자손으로 명문 대가에서 태어나 왕가의 방계 혈족으로서 20살 전후에 등과하여 입직하고 25세에 엄청난 군공을 세워 공조판서,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이르렀던 커리어를 보았을 때 남이의 젊은 혈기가 훈구 대신들이나 비슷한 커리어를 쌓은 선배 장수들의 시선에는 자만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2.4. 최연소 병조판서


윤자운(尹子雲)을 팔도 군적사(八道軍籍使)로, 남이(南怡)를 병조 판서(兵曹判書) [16]

로, 김예몽(金禮蒙)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이서장(李恕長)을 함길북도 관찰사(咸吉北道觀察使)로 조성산(趙誠山)을 함흥 부윤(咸興府尹)으로, 허종(許琮)을 오위 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으로, 박중선(朴仲善)을 평안중도 절도사(平安中道節度使)로, 어세공(魚世恭)을 중추부 동지사(中樞府同知事)로 삼았다.

ㅡ 《조선 왕조 실록》 세조 14년(1468년) 8월 23일

주변의 시기와 만류에도 불구하고 세조의 총애 속에 세조의 재위 끝무렵이자 예종의 즉위년이었던 1468년 26세라는 이례적으로 젊은 나이에 병조판서에 임명되는 초고속 승진을 이룬다. 공조판서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이어 남이의 관직 경력절정에 이른 것이었다. 이는 조선 최연소 공조판서병조판서 기록이다. 물론 최연소 영의정 기록은 같은 종친 계열인 구성군 이준.
세조는 훈구대신들의 발호를 신진 종친을 등용함으로서 견제하려 했고 구성군 이준과 의산군 남이가 이에 해당했다고 볼 수 있다.

2.5. 예종과 훈구대신과의 불화 그리고 반역자로 몰락


처음에 병조 판서 박중선(朴仲善)을 평안중도 절도사(平安中道節度使)로 삼고, 의산군(宜山君) 남이(南怡)를 병조 판서로 삼으니, 형조 판서 강희맹(姜希孟)이 일찍이 중추부 지사(中樞府知事) 한계희(韓繼禧)에게 말하기를, "남이의 사람됨이 병사(兵事)를 맡기기에는 마땅치 못하다." 하였었는데, 이에 이르러 한계희가 임금에게 아뢰어, 박중선을 다시 병조 판서로 삼고 남이를 의산군(宜山君) 겸사복장(兼司僕將)으로 삼고, 오자경(吳子慶)을 평안중도 절도사로 삼았다.

- 조선왕조실록 예종즉위년 (1468년) 9월 7일

그러나 남이의 병조판서 생활은 오래 못 갔는데 세조가 양위하고 예종이 즉위하자마자 세조의 측근 중 1명이었던 남이를 병조판서에서 해임한다.[17] 다만 물러난 직위가 국왕의 호위를 맡은 친위대인 종2품 겸사복장임을 볼 때 실각으로까지 해석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는 의문이다.(현재로 보면 국방부 장관에서 경호실장으로 물러난 셈.)[18]
예종 즉위년 실록 기록으로는 지중추부사였던 한계희가 "예전에 강희맹이 남이의 사람 됨됨이가 병사(兵事)를 맡길만 하지 않다라고 말한 바 있다"라고 말을 보태 병조판서를 박중선으로 갈았다고 돼있다. 한계희는 한명회의 6촌 동생이며 예종의 세자 시절 스승으로 세자시강원을 거쳤고 남이를 찍어낸 공으로 익대공신 3등에 오른다. 양소공(襄昭公) 박중선은 순천 박씨로 남이와 같이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적개공신이었다. 얼마 뒤 남이가 처형될 때 익대공신에 올라 경기도 관찰사, 도총관, 이조판서에 이른다.[19]
이는 남이 사후의 기록이니만큼 해석하기에 따라 다르나 젊은 나이에 오만함으로 병사를 맡길만 하지 않다라고 해석을 할 수도 있고 반면에 훈구 대신들이 젊은 신진 대신들을 견제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남이를 비판한 한계희가 원상 세력의 중심이었음을 볼 때 남이의 오만함으로 해석하기보다는 당시의 훈구 세력과 원상 세력이 신진 세력을 견제했던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적합하며 오히려 이준과 남이 간의 반목으로 말미암아 신진 세력이 원상 세력에 대해 적극적인 대처를 못하고 몰락한 것으로 보고 있다. 남이 사후 비슷한 신진 세력인 영의정 이준이 몰락하는 과정도 같기 때문이다.[20]
이러한 상황에 병조 참지였던 유자광이 예종 즉위 전인 1468년 9월 2일에 출현한 혜성[21]을 보고 남이가 자신에게 한 말을 왕에게 전하며[22] 역모를 고변했다.[23]
조선 후기에는 남이의 북정가 중 미평국을 미득국으로 고쳐 유자광이 고변함으로써 예종의 분노를 샀다는 것으로 해석한다.

오늘(10월 24일) 저녁에 남이가 저에게 찾아와 "오늘 혜성이 나타나서 지금까지 사라지지 않고 있는데 너는 보았느냐"라고 하길래 보지 못했다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남이가 "이제 은하수 한가운데에 밝은 빛의 혜성이 있어서 주위의 별이 안보인다."라고 했고 제가《강목(綱目)》이란 책을 펼쳐 혜성이 나타난 때를 찾아보니 그 책에 달린 주석에 "혜성이 희면 장군이 반역을 하고, 2년안에 큰 반란이 있다."라고 적혀있어 이를 남이에게 말하니 남이가 탄식하며 "그 일은 일어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ㅡ 《조선 왕조 실록》예종 즉위년 10월 24일

"강순(康純)과 남이(南怡)가 죽은 지 3백 년이 넘도록 이름이 죄인의 명부에 남아 있고 자손들이 쇠잔하고 또 오래되도록 아직까지 신설(伸雪)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원통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강순과 남이는 모두 유자광(柳子光)의 무고로 인하여 죄도 없이 화를 당하였습니다. 더욱이 남이는 효용(驍勇)이 여느 사람보다 뛰어나서 여러 번 기공(奇功)을 세웠으나 '''유자광이 심히 시기를 하고 시어(詩語)로 죄를 꾸며 법망에 끌어 넣어 죽였는데, 야사(野史)에 그 사실이 대부분 기재되어 있습니다'''. 전에 선조 때에 연신(筵臣)이 그의 억울함을 말하였는데, 하교하기를, ‘이런 일은 후일을 기다려서 적선(積善)하는 호사(好事)로 삼으면 매우 좋겠다.’ 하였습니다. 성명(聖明)께서 임금의 자리에 계시면 억울한 자로서 신설(伸雪)되지 않은 자가 없었으니, 아직까지 못하고 있는 조처가 오늘을 기다린 것 같습니다. 청컨대 고 영의정인 강순과 병조 판서 남이에 대해 모두 그 억울함을 신설(伸雪)하고 그 관작을 회복시켜 주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24]

- 조선왕조실록 순조 18년 3월 10일


2.6. 최후


1468년 10월 24일 병조참지 유자광(柳子光)은 남이가 궁궐에서 숙직하고 있다가 혜성이 나타나자 “묵은 것을 없애고 새 것을 나타나게 하려는 징조”라고 말했다고 고변했다. 남이는 즉시 체포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모반의 혐의를 강력히 부인했지만 혹독한 국문을 받으면서 결국 시인했고, 사흘 뒤 강순ㆍ조경치ㆍ변영수ㆍ변자의ㆍ문효량ㆍ고복로ㆍ오치권ㆍ박자하 등과 함께 저자에서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졌다(10월 27일).
실록의 기사를 면밀히 살펴볼 때 남이가 일정한 정치적 불만을 갖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과연 국왕을 겨냥한 역모로까지 발전했는지는 분명치 않다고 판단된다. 그런 측면 때문에 조선 후기의 여러 야사는 남이가 유자광의 음모로 죽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런 억울한 사연 때문에 무속에서는 그를 신령으로 모시고 있다. #

임금이 창덕궁(昌德宮)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갔다. 밀성군 이침(李琛)·영순군 이부(李溥)·영의정 이준(李浚)·하성군 정현조(鄭顯祖)·고령군 신숙주(申叔舟)·상당군 한명회(韓明澮)·중추부 영사 심회(沈澮)·좌의정 박원형(朴元亨)·창녕군 조석문(曹錫文) 등과 도총관(都摠管)·승지(承旨)·대간(臺諫)·사관(史官) 등이 입시하였다. 교위(校尉)로 하여금 남이를 뜰에 나치하게 하고, 도총관 홍응(洪應)·도승지 권감(權瑊)에게 명하여 묻게 하니, 남이가 대답하기를,

"신이 어려서부터 궁마(弓馬)를 업(業)으로 삼아, 만일 변경에 일이 있으면 먼저 공을 세워 국가를 돕는 것이 신의 뜻입니다. 신은 본래 충의지사(忠義之士)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네가 ‘충의지사’라고 일컬으면서 어찌하여 성복(成服) 전에 고기를 먹었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병이 들었기 때문에 먹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반역(反逆)한 이유를 묻게 하니, 남이가 사실대로 대답하지 아니하므로, 이에 곤장을 때렸더니 남이가 큰 소리로 말하기를,

"원컨대 우선 천천히 하소서. 신의 꾀한 일을 말하자면 깁니다. 원컨대 한 잔 술을 주시고 또 묶은 끈을 늦추어 주면 하나하나 진달하겠습니다."

하므로, 명하여 술을 내려 주고 묶은 끈을 늦추게 하니, 남이가 말하기를,

"신이 과연 반역을 꾀하고자 하였습니다. 유자광(柳子光)과 더불어 이야기한 말이 모두 옳습니다."

하고, 강순(康純)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저 이는 바로 신의 당류입니다. 지난해 9월에 세조께서 승하한 뒤에 마침 성변(星變)이 있었고 강순이 밀성군(密城君)과 더불어 도총부(都摠府)에 입직하였는데, 신이 가서 보았더니 곧 밀성군은 안으로 들어가고 강순이 신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바야흐로 이제 어린 임금이 왕위를 이었는데 성변이 이와 같으니 간신이 반드시 때를 타서 난을 일으킬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되면 우리들은 세조의 은혜를 받아 장군이라 이름하였으므로 반드시 먼저 화(禍)를 입을 것이니,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 하기에, 신이 응답하기를, ‘약한 자가 선수(先手)함이 가하겠는가?’ 하니, 강순이 옳게 여겼습니다. 다른 날에 강순과 더불어 같은 날 입직(入直)하였는데, 강순이 신의 숙직하는 곳에 이르러 서로 더불어 《고려사(高麗史)》를 열람(閱覽)하다가 인하여 강조(康兆)162) 가 그 임금 송(誦)163) 을 시해(弑害)하고 순(詢)164) 을 세운 것을 논하기를, ‘그때는 잘못이라고 하였으나 후세에서는 잘했다고 하니, 지금으로 보면 형세는 달라도 일은 같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계책이 이제 이미 정하여졌다. 장차 우리가 임금으로 삼을 이는 누구일까?’ 하고, 인하여 영순군(永順君)을 들자, 강순이 말하기를, ‘영순군과 귀성군(龜城君)은 한 몸뿐이고 그 후사(後嗣)가 미소(微少)하다. 내가 일찍이 보성군(寶城君)과 더불어 국가의 일을 말하였는데 보성군이 탄식하지 아니함이 없었고, 그 아들 춘양군(春陽君)이 세 번 우리 집에 왔다가 갔으므로 이도 또한 마음에 없는 것이 아니니, 우리들의 계책으로는 이만한 것이 없다. 그 뒤에 우리들이 공을 이루고 물러가 쉬면 사람들 가운데 누가 옳지 못하다고 하겠는가?’ 하였습니다. 다른 날에 강순이 다시 말하기를, ‘성상께서 일찍이 여러 재상을 인견하고 산릉(山陵)의 길흉(吉凶)을 물었는데, 내가 천어(天語)165) 의 정녕(丁寧)함을 들으니 참으로 명철(明哲)한 임금이다. 어떤 간신이 있어 그 사이에 틈을 내겠는가? 우리 무리는 마땅히 마음을 달리하지 말고 힘써 도울 뿐이다.’ 하였습니다. 또 먼젓날 성상께서 풍양(豊壤)에 거둥하여 산릉 터를 보고 종친·재추들과 더불어 길흉을 논할 때에 강순이 신에게 눈짓하여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말하지 아니하던가? 너도 천어(天語)를 들었느냐?’라고 하였습니다."

하고, 장차 또 말을 하려는 듯하더니 유자광이 뒤에 있는 것을 보고 마침내 다시 말을 하지 아니하였다. 강순에게 물으니, 강순이 숨기므로, 곤장을 때렸더니 강순이 말하기를,

"신이 어려서부터 곤장을 맞지 아니하였는데, 어찌 참을 수 있겠습니까? 남이의 말과 같습니다."

하였다. 취초(取招)하도록 명하니, 강순이 붓을 당겨 즉시 이름을 쓰지 아니하고 남이를 돌아보며 꾸짖기를,

"내가 어찌 너와 더불어 모의하였느냐?"

하니, 남이가 말하기를,

"영공(令公)이 말하지 아니하였다고 하는가? 나와 같이 죽는 것이 옳다. 또 영공은 이미 정승이 되었고 나이도 늙었으니 죽어도 후회가 없을 것이나, 나 같은 것은 나이가 겨우 '''스물 여섯'''인데 진실로 애석하다." 하고, 한탄하기를, "영웅의 재주를 잘못 썼구나!"

하였다. 강순이 곧 복초(服招)하였고, 또 당여(黨與)를 물으니 강순이 없다고 말하였다. 장신(杖訊)하기를 명하자 강순이 말하기를,

"신이 어찌 매질을 참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좌우의 신하를 다 들어서 당여라고 하여도 믿겠습니까?"

하므로, 남이에게 강순의 당여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신도 알지 못합니다. 다만 강순이 일찍이 말하기를, ‘홍윤성(洪允成)은 기개(氣槪)가 활달하여 더불어 일을 의논할 만한 자라.’ 하고는 말을 하려고 하다가 말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강순이 또 말하기를, ‘본향(本鄕) 보령(保寧)의 군사 가운데 당번(當番)으로 서울에 있는 자가 1백여 인(人)인데, 만약 때에 임하여 말하면 반드시 따를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또 남이에게 난을 일으킬 계획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창덕궁·수강궁 두 궁은 얕아서 겉으로 드러나 거사(擧事)할 때에 바깥 사람이 알기가 쉽기 때문에 산릉에 나아갈 때에 사람을 시켜 두 궁을 불지르게 하고 성상이 경복궁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려서, 12월 사이에 신이 강순과 더불어 일시에 입직(入直)하기를 약속하여, 신은 입직하는 겸사복(兼司僕)을 거느리고, 강순은 입직하는 군사를 거느리고 거사하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또 당여를 물으니, 남이가 민서(閔敍)·변영수(卞永壽)·변자의(卞自義)·문효량(文孝良)·고복로(高福老)·오치권(吳致權)·박자하(朴自河)·조경치(曹敬治) 등을 하나하나 들어서 헤아리고, 모의에 참여시키려고 하다가 미처 말하지 못한 자가 20여 인이라고 하였다. 조경치를 나치(拿致)하도록 명하여 곤장 30여 대를 내려 고신(栲訊)하여도 불복하였다. 다시 남이에게 물으니, 남이가 말하기를,

"신이 만약 말을 하고 조경치가 다만 ‘저 말이 옳다.’고 하면 믿을 것이 못되고, 조경치가 스스로 말하여 신의 말과 같은 뒤에야 믿을 수가 있습니다."

하므로, 다시 조경치를 매질하니, 그 말하는 바가 과연 남이의 말과 같았다. 남이가 말하기를,

"주상께서 성명(聖明)하신데 신이 복(福)이 적어서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또 신과 강순은 모두 일등 공신(一等功臣)이니, 원컨대 원방(遠方)에 유배(流配)하든지 아니면 죽음을 내리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네가 이와 같을 것을 알지 못하고 모반(謀反)하였느냐?"

하고, 곧 백관을 모으도록 명하여, 강순·남이·조경치·변영수·변자의·문효량·고복로·오치권·박자하를 저자에서 환열(轘裂) 하고 7일 동안 효수(梟首)하게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예종즉위년 (1468년) 10월 27일


2.7. 사후


"남이의 어미는 국상 성복(成服) 전에 고기를 먹었고 그 아들이 대역(大逆)을 범하였으며, 또 천지간(天地間)에 용납할 수 없는 죄가 있으니, 청컨대 극형에 처하소서."

하니, 명하여 저자에서 환열(轘裂)하게 하고, 3일 동안 효수(梟首)하게 하였으니, 남이가 증() 한 때문이다.

- 조선왕조실록 예종즉위년 (1468년) 10월 28일

남이의 모친은 남이와 근친상간 혐의가 씌워져서 처형당했는데, 조선시대 당시에는 이처럼 역적이나 그에 준하는 미움을 받았던 인물들에게 강상을 범하는 혐의를 씌워 사회적으로 매장하는 전례가 몇몇 보인다. 연산군과 그의 큰어머니 승평 대부인 박씨(월산대군의 처이자 박원종의 누나)도 그렇고, 만고의 매국노 이완용과 그의 큰 며느리 임건구를 불륜으로 엮어 장남이 자살했다는 매천야록(야사 모음집)의 기록 등이 그렇다.
승평 대부인 박씨는 1등 정공신 박중선의 딸이며 월산 대군의 처로서 높은 신분이었지만 불심이 강해서 남편의 요절 후 절을 짓는 등 당시 유생들에게 미운 털이 단단히 박히는 바람에 50줄 가까운 나이에 조카와 함께 가짜 스캔들의 주인공이 됐고, 이완용의 장남 이승구는 병약해 미국 유학을 다녀오고 몇 년 안돼 자연사한게 팩트다. 늘 강상의 법도를 주장하며 고결함을 뽐냈던 유생들에게도 불륜이란 소재는 꽤 자극적이고 선정적이었던 모양이다.

"강순(康純)과 남이(南怡)가 죽은 지 3백 년이 넘도록 이름이 죄인의 명부에 남아 있고 자손들이 쇠잔하고 또 오래되도록 아직까지 신설(伸雪)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원통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강순과 남이는 모두 유자광(柳子光)의 무고로 인하여 죄도 없이 화를 당하였습니다. 더욱이 남이는 효용(驍勇)이 여느 사람보다 뛰어나서 여러 번 기공(奇功)을 세웠으나 유자광이 심히 시기를 하고 시어(詩語)로 죄를 꾸며 법망에 끌어 넣어 죽였는데, 야사(野史)에 그 사실이 대부분 기재되어 있습니다. 전에 선조 때에 연신(筵臣)이 그의 억울함을 말하였는데, 하교하기를, ‘이런 일은 후일을 기다려서 적선(積善)하는 호사(好事)로 삼으면 매우 좋겠다.’ 하였습니다. 성명(聖明)께서 임금의 자리에 계시면 억울한 자로서 신설(伸雪)되지 않은 자가 없었으니, 아직까지 못하고 있는 조처가 오늘을 기다린 것 같습니다. 청컨대 고 영의정인 강순과 병조 판서 남이에 대해 모두 그 억울함을 신설(伸雪)하고 그 관작을 회복시켜 주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조선왕조실록 순조18년 (1818년) 3월 10일

어쨌든 사후 350년인 순조 때(1818년) 방계후손[25] 우의정 남공철의 상소로 자신이 끌어들여서 같이 죽도록 만들었던 강순과 함께 신원됐다. 그리고 대한제국이 멸망하기 9일 전인 융희 4년(1910년) 8월 20일 충무(忠武)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3. 기타


  • 과거 서적에서는 정선공주의 손자가 아닌 아들, 즉 태종의 외손자라 잘못 전해졌으나 현재는 많이 바로 잡혔다.
  • 족보상으로 1443년 계해생으로 되어 있으나 아직 1441년 생으로 역사서에 잘못 기술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최후에 본인이 26이라 탄식하는 기록이나 아우 남소의 유서, 이조판서 허전이 찬한 행장에 1443년 세종25년 계해생으로 壽 26으로 되어 있으니 향후 수정이 되어야 한다.
  • 무용을 떨쳤던 장군이지만 한 많은 장수라는 이미지 + 비극적으로 죽은 인물로서 민간에서 인식돼 무속인들이 신으로 모시기도 한다. 무속인들에게는 관우와 더불어 '영험한 분' 순위 1, 2를 다퉜다고 한다.

  • 젊은 청년이 거열형으로 세상을 떠났으니 억울하게 죽었다는 당시 세간의 여론과 함께 신으로 모셔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 그의 아내가 세조 대의 공신 권람의 딸이었는데, 그와 결혼하게 된 사연을 전하는 야사로 전해지고 있다,

남이가 하루는 길가에서 채반을 이고 지나가는 계집종을 봤는데 악귀가 채반을 올라타고 있었다. 악귀가 무슨 해코지를 할까 싶어 쫓아가니 계집종이 어느 저택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잠시 그 앞에서 기다리니 집에서 난리가 나는데, 계집종이 이고 온 채반에 든 감을 이 집 아가씨가 먹고서는 숨이 멈췄다는 것이다. 남이가 곧바로 방에 뛰어들어 아가씨에게 들린 귀신을 쫓아냈고 권람이 딸을 구한 그를 사위삼고자 점쟁이를 불러다 혼인 여부를 점치게 했는데, 남이의 사주가 흉하지만 '''딸의 수명이 짧아''' 남이의 불운을 보지는 않고 복만 누리다 갈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대로 혼인시켰다. 그 뒤 이 쫓겨난 귀신이 남이의 돌에 새겨진 시를 조작해서 처형되는데 이바지 했다고한다.

  • 실제로 권람의 딸이자 남이의 정실은 권람이 세상을 떠난 그해에 같이 세상을 떠났으며 이때 남이의 처가 원래 권람의 딸이고, 공신에 권람의 친구인 한명회가 있다는 것을 재미있게 여긴 소설가들의 글에서는 권람의 딸이 한명회 집에서 노비 생활하는 장면이 등장하기도 하는 건 물론 역사적 오류. 실제로는 아래 실록 기사처럼 남이의 딸, 즉 권람의 외손녀가 한명회 집에서 노비 생활을 했다.
  • 남이의 딸은 남이의 옥 1년 후 노비에서 벗어난다. 의령 남씨 족보에 따르면 참판 오백옹에게 출가한 것으로 되어 있다.

임금이 승정원(承政院)에 묻기를,

"남이(南怡)의 딸은 권남(權擥)의 외손녀인데, 권남이 공이 크니 놓아 주는 것이 어떠한가?"

하니, 원상(院相)·승지(承旨) 등이 대답하기를,

"남이의 딸은 이미 상당군(上黨君) 한명회(韓明澮)의 집에 계집종[婢]이 되었습니다. 권남의 공은 진실로 크나 남이의 죄악이 지극히 중대하니, 경솔히 사면하여서는 안됩니다."

하고, 또 이의(李嶷)·이해(李垓)·신승민(申承閔) 등이 범한 죄를 물으니, 승지 등이 대답하기를,

"이의는 국휼(國恤)을 무릅쓰고 첩을 얻었고, 이해는 정처(正妻)를 소박하였고, 신승민은 관기(官妓)를 간음하여, 종에게 고소당하였습니다."

하니, 명하여 남이의 딸을 놓아 주고 이해·이의·신승민 등을 추핵(推劾)하지 말게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예종1년 9월 15일

  • 그가 태어난 생가는 조선 초기 행정 구역으로는 연화방이었으나 조선 말기에는 '남이탑골' 혹은 '남미탑동(南彌塔洞)'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의 생가는 그의 귀신이 나온다는 둥 터가 세다는 미신과 함께 역적의 생가로서 버려져 빈터로 있었고, 심지어 풀도 나지 않았었다는 설화가 있었을 정도. 근처 주민 꿈에 나타나 억울함을 호소하자, 그 주민이 몰래 향을 터에 꽂아 임시방편을 삼았던 것이, 순조 때 남씨 집안의 영의정인 남공철의 노력으로 1818년에 사면복권이 되자, 정식으로 사당을 세워 그의 넋을 달랬다고 한다. 일제 시대 때 연화방과 건덕방을 합쳐 연건동이 됐고 현재의 행정구역 역시 그렇다. 물론 대학로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사실 이 때문에 조선 말기까지도 빈 터와 사당으로 남아있었고 거기에 대한의원이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이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이 연건캠퍼스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는 유래.
  • 비극적 삶을 살은 안타까운 무인이라는 이미지 때문인지 구전 설화도 상당히 많이 남아있다. 대표적인 설화는 서울특별시 성동구 사근동에는 호랑이를 잡아서 바위에 던져 때려잡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 그의 이름을 따온 지명으로 남이섬이 있다.
  • 무덤은 경기도 화성에 있다. (경기도 기념물 제 13호).[26] 현재 남이섬의 묘는 허묘. 1965년 수재라는 호를 쓰는 민병도라는 사람이 새로 조성한 것이다.# 비석은 노산 이은상이 쓰고 글씨는 일중 김충현의 것.

4. 현대 창작물에서



4.1. 조선왕조실톡에서의 왜곡


웹툰 조선왕조실톡에서는 단편적으로 인물을 평가하여 역사적 인물을 왜곡하고 있다.
가령 무예가 형편없어서 세조가 웃었다고 서술하고 있는데 실록에는 그러한 기록이 전혀 없다. 회식 중 사후를 하여 그날따라 맞히지 못하자 웃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바로 직전의 명 사신과의 기록에는 그의 무예를 명의 사신이 극찬하는 기사가 있다. 조선실록의 이 정도의 기사가 실린 무장은 없다. 단편적인 기사 하나만으로 무예가 형편없어서 세조가 웃었다고 하는 것은 비약이다.
조선왕조실톡은 더 나아가 무예가 형편없음에도 금수저라 등용되었다는 식의 해석을 하고 있어 실제와 다른 작가의 주관적인 해석으로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또한 정사에 나와 있지 않는 모친의 내용을 사실인 양 서술하였고, '모든 것을 자기 위주로 생각하고 자기 잘난 맛에 살도록 코딩되어 있다' 고 서술하는 등 단편적인 기사를 바탕으로 서술자의 사견을 서술한 오류를 범하여 글을 쉽게 접하는 일반 대중에게 잘못된 인식을 심어줄 위험이 있다. 이 부분은 차후 수정이 필요하다.

[1] 의령 남씨 족보에는 1443년 계해생으로 되어 있다. 남이 동생의 유서나 당대의 행장에 서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과거 정선공주의 아들로 전해져 한국사 대사전 등에 수록되었듯이 이 부분도 향후 수정되어야 할 부분이다. 한국사데이터 베이스 기록을 존중하자는 뜻에서 별도 수정하지는 않는다.[2]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1457년이 아닌 1460년 합격으로 확인됐다. 17세에 출사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1441년생 설을 따르다보니 1457년 무과 등제로 추정한 오류였던 것이다. 족보에 따르면 실제로는 1443년생으로 1460년에 무과 등제한 것이 맞다.[3] 장원은 나중에 좌우위 대장군에 오르는 금휘(琴徽)였고 문맹손(文孟孫), 그리고 나중에 충청 병마 절도사에 오르는 박형무(朴衡武)가 발영시 무과 동기다. 재밌는 게 문맹손은 원래 한명회 연줄이었는데 발영시에 합격하며 세조에게 발탁되자 한명회가 제거한다. 발영시 합격 발표 직전, 한명회가 맹득미란 하급 관리가 관마 유용을 했다는 스캔들을 터뜨리면서 수사 책임을 맡았는데 여기에 문맹손을 엮어 넣었다. 문맹손은 장형 80대를 맞았고 그것도 모자라 자자형(얼굴에 죄인 tattoo)까지 받을 뻔했다. 세조는 그럼에도 문맹손을 내치지 않고 끝내 발영시 합격자 명단에 넣는다. 한명회 쪽의 상소가 빗발쳤지만 씹고 중용한다. 결국 세조 사후 한명회 손에 떨려난다.[4] 우리 나이 기준[5] 형명(形名)·계라(啓螺)·시위(侍衛)·전명(傳命) 및 부신(符信)의 출납을 맡았던 관직으로 1457년(세조 3) 어가(御駕) 앞에서 훈도(訓導)하는 임무를 맡은 무관을 선전관이라고 일컫게 됨에서 시작되었다. 근시(近侍)의 직임을 가지므로 서반승지(西班承旨)로 지목되어 청요직(淸要職)으로 간주되었으며 장차 무반의 중추적 존재로 성장할 인재들이라는 점에서 무재(武才)가 있고 효용(驍勇 : 굳세고 용맹함)한 사람을 뽑아 임명하고 끊임없이 무예와 병법을 연마시키기로 되어 있었다. 특히 당상관·당하관을 막론하고 4인을 승전기(承傳岐)로 정하여 전명을 전담시켰는데 그들은 6개월 만에 전직되도록 되어 있었지만 가장 핵심적 존재였다. 처음 만들어졌을 때에는 15명이 3교대로 5명씩 입직 근무를 하였지만 경국대전에는 체아(遞兒) 수록(受祿)하는 8인의 선전관만 규정되었고 이후에 선전관청(宣傳官廳)이 설치되면서 선전관은 정직(正職)으로 20인 남짓한 원수를 유지하는데 이들 전임(專任)의 선전관 이외에 문관과 무관이 겸직하는 겸선전관이 50인 남짓 있었다. 소속 관원 품계는 정3품 당상관에서 9품관까지 다양하였다.[6] 1460년[7] 1466년[8] 세조(世祖) 때 임시로 베푼 과거를 말함. 세조 12년(1466) 5월 5일 단오절에 종친(宗親)과 문무 백관을 모아 술을 내려 주고 친히 글을 지으며 베풀었음.[9] 참고로 이때 남이는 화살을 더 많이 맞았으나 화살로 인해 상처를 입은 것이 4발 ~ 5발의 화살이었다는 뜻이라고 한다.[10] 명나라 사신[11] 명나라 사신. 조선 출신 환관이어서 '우리 조선'이라고 말하고 있다.[12] 행 부호군은 종4품, 당상관은 정3품 이상으로 관등이 관직보다 높은 경우 관직명 앞에 '행'을 붙인다.[13] 정충출기포의 적개공신[14] 당시 명나라가 북원을 공략하느라 정신없는 틈을 타서 건주 여진의 추장 이만주가 요동을 공격했고 이에 명나라의 요청으로 조선과 명군이 협공을 한 것을 말한다.[15] 이미 1467년 11월 에 공조판서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으로 제수되어 있었다. [16] 이전에는 공조판서. 오위도총부 도총관. 우리나이 26세[17] 세조는 예종이 즉위한 다음날에 숨을 거두었다. 아무리 병에 걸렸다지만 부왕의 인사를 살아있을 때 뒤집은 것.[18] 사실 오래 갈 인사는 아니었기는 했다. 남이의 배경이었던 세조가 승하하였고 세조가 구상했던 왕족 및 신진 세력에 의한 원상 세력 견제라는 측면에서 등용되었던 인사가 이준과 남이였기 때문이다. 원상 세력에 힘으로 밀릴 수밖에 없는 예종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19] 중종반정 1등 공신 박원종의 아버지이자 성종의 사돈이다.[20] 이준은 역모로 참형을 당하지 않았을뿐. 이준도 2년 후인 1470년에 어린 성종을 몰아내고 왕이 되려 한다는 누명을 쓰고 위리안치되어 배소에서 1479년에 39세로 죽는다.[21] 이 혜성이 묘한게 혜성 6일 이후인 9월 7일에 예종이 즉위했고 9월 8일에 세조가 사망한다.[22] 조선 후기 연려실기술에서는 남이가 혜성을 보고 '묵은 것이 가고 새 것이 온다'고 한 혼잣말을 유자광이 일러바쳤다고 나온다 [23] 조선 후기에는 유자광에 의한 참소로 해석을 하고 있다.[24] 남이의 먼 후손(직계는 아닐테고, 의령남씨로 본관이 같았다.)이며 정조, 순조대의 문신 남공철의 발언이다. 정식 역사도 아니고 야사를 들먹이며 신원을 주청하는 남공철의 모습이 필사적이다.[25] 남이, 남공철 모두 충경공 남재의 후손으로 손자대에서 충간공, 직제학공, 소간공파로 나뉘어진다. [26] 외가인 남양홍씨들이 시신을 수습하여 화성에 묻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