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경궁
1. 개요
고려 왕조 제8대 현종 원문대왕 대에 만들어진 궁궐. 위치는 북한 개성특별시 송악산 부근이었다.
2. 역사
2.1. 연경원
본디 현종의 세번째 아내 원성태후 김씨를 위해 만든 관저였으며 명복궁처럼 원(院)에서 시작했다. 처음 명칭은 연경원(延慶院)이었으며 원성태후는 연경원주(延慶院主), 즉 연경원의 주인으로 봉해졌다.
원성태후가 첫 아들 덕종 경강왕을 낳자 현종은 연경원에 금접시와 은접시, 비단을 하사했고 논과 밭, 노예, 소금 밭, 생선을 잡을 호수까지 딸려 주었다. 둘째 아들 정종 용혜왕을 낳았을 땐 드디어 연경궁(延慶宮)으로 승격됐고 하사품을 보냈다.
현종은 재위 11년에 아들 덕종을 연경궁의 가신, 연경군(延慶君)으로 삼았고 재위 18년에 원성태후에게 옛 집을 하사해 장경궁으로 봉했다.
2.2. 본궐 흡수
이렇게 대충 연경궁의 역사가 끝나는 듯 했지만 고려 중기에 가 이자겸의 난 때 척준경이 본궐을 불태우면서 인종은 연경궁에 거처한다.[1] 인종 대에 잠시 인덕궁(仁德宮)으로 명칭이 바뀐 적이 있다. 인종은 이자겸의 난 이후 연경궁에 추가 공사를 했는데, 연경궁은 본궐 동쪽에 위치했으며 공사 후 연경궁은 100여 칸의 궁궐이었다고 한다.[2]
본궐이 다시 지어지는 동안 인종은 연경궁에 계속 거주하는데 이 때부터 연경궁의 지위가 점점 상승한다. 그러면서 연경궁은 점차 본궐을 흡수해 연경궁이 본궐과 같은 의미로 쓰이게 된다. 본궐 > 연경궁인데 연경궁 > 본궐이 되버려 별궁의 범위가 부숴진 정궁의 범위까지 흡수한 셈. 그래서 그런지 본궐의 건축이 연경궁의 건축으로 소개되고 있기도 하고 아예 고려 본궐의 이름이 연경궁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연경궁은 어디까지나 별궁에서 시작해 고려 후기에 본궐을 흡수한 것이기에 완전히 맞다고는 할 수 없다.
2.3. 최후
현재는 전해져 오고 있지 않다. 홍건적의 난 이후 연경궁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공민왕, 우왕은 수창궁을 재건해 정궁으로 사용했다. 연경궁은 제1편전 강안전과 광장인 구정만 재건되어 부분적으로 사용되었다.
3. 주요 건축
- 천복전문(天福殿門)
- 천복전(天福殿)
동문선 108권에 연경궁 정전을 지을 때 쓴 '연경궁 정전 상량문'이 남아있다. 이 상량문에 정전이 무너지지 않길 바라는 마음을 썼고 '숭악응호만세삼(嵩嶽應呼萬歲三)[4] '라 하여 군주를 찬양했다. 상량문은 인종 대 지어진 듯 한데 이궁(離宮)임을 밝히고[5] 반정(反正)을 언급하는 걸 보면 두번의 난을 겪은 인종이 맞다. 이 상량문은 정전을 확장하며 쓴 것이고 백만(百蠻)[6] 이 조천하러 온다며 고려를 찬양했다.
- 중화전(中和殿)
- 연강전(延康殿)
- 본궐의 모든 건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