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경세자

 



조선 추존 국왕
德宗 | 덕종

세조조 조선 왕세자
의경세자 | 懿敬世子

[image]
덕종의 능 경릉(敬陵)
덕종회간선숙공현온문의경대왕
德宗懷簡宣肅恭顯溫文懿敬大王

<colbgcolor=#1b0e64><colcolor=#ffd400> 묘호
덕종(德宗)
시호
조선
선숙공현온문의경대왕
(宣肅恭顯溫文懿敬大王)[1]

회간(懷簡)
출생
1438년 10월 3일 (음력 9월 15일)
조선 한성부 명례궁
사망
1457년 9월 20일 (음력 9월 2일)
(18년 11개월 17일 / 6,910일)

조선 한성부 경복궁 정실
능호
경릉(敬陵)
재위
조선 왕세자
1455년 9월 7일 ~ 1457년 9월 20일
(음력 1455년 7월 26일 ~ 1457년 9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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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全州)

현동(賢同) → 숭(崇) → 장(暲)[9]

원명(原明)
부왕
세조
모후
정희왕후 윤씨
왕비
소혜왕후 한씨
자녀
월산대군, 명숙공주, 성종

1. 개요
2. 상세
3. 덕종 추존
4. 야사
5. 창작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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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세조의 적장자이다. 묘호는 덕종(德宗). 생전 군호(작위)는 도원군(桃源君).
인수대비의 남편, 월산대군과 명숙공주 성종의 아버지이자 공혜왕후 한씨, 폐비 윤씨, 정현왕후 윤씨의 시아버지이고, 예종의 친형이다. 또한 단종의 사촌형이며[2] 연산군중종의 할아버지. 조선 최초의 왕세자 출신 추존왕이기도 하다.
자식복이 있어서 슬하에 두 아들인 월산대군과 성종은 학식과 덕망이 깊고 인품이 훌륭한 수재들이었고 두 형제의 우애가 매우 돈독했다고 한다. 사후에 차남인 성종의 강력한 의지로 왕으로 추존된다.

2. 상세


1438년(세종 20) 9월 15일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옛 사례에 왕자의 부인으로서 장차 분만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대궐 밖 저택으로 나갔는데, 정희왕후는 특히 양궁(세종과 소헌왕후)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의경세자를 금중(禁中)에서 낳았다. 할아버지 세종의 첫 손자이며 친히 현동(賢同)이라는 아명을 하사받았고 어릴 때 이름은 숭(崇)이었는데 후에 장(暲)으로 고쳤으며 자는 원명(原明)이다. 1445년 도원군(桃源君)[3]에 봉해졌고, 1455년 아버지 수양대군(세조)이 왕으로 즉위하자 세자가 되었다. 그는 체격이 준수하면서 숙성하고 용모가 단아했으며 의표(儀表)가 아름답고 온량(溫良) 공경(恭敬)하여 학문을 좋아했으며 특히 해서(楷書)를 잘썼다. 성품은 어려서부터 예의가 바르고 착했다고 전해진다.
의경세자는 학업을 즐기고 게으름이 없었으며 하루 세 번씩 서연관을 불러 강론하였다. 일찍이 서경(書經)을 읽다가 순전(舜典) 기형주(璣衡註)에 이르러 그 제도가 문자만으로는 해득하기 어려운 것이 있으니 즉시 서연관과 더불어 간의대(簡儀臺)에 올라가 혼천의(渾天儀)를 관찰하고 서경에 실린 바와 더불어 참고하고 증험(證驗)하여 애체(礙滯)함이 없었다. 다른 모든 글을 읽을 때에도 다 그러하였으니 의심이 나면 반드시 묻고 물으면 반드시 살피었다. 세조가 직접 사부(師傅) · 빈객(賓客)과 서연관을 선임하여 교양하는 법을 다하였고 세조가 일찍이 ‘병진(兵陣)은 우리 가업이니 알지 않으면 안 된다.’ 하고, 친히 황석공(黃石公) 등의 서적을 주니 성훈(聖訓: 부왕의 가르침)을 가슴 속에 간직해 조금도 이를 어기지 않았기 때문에 학업이 날로 진취하여 고명(高明)한 경지에 이르렀다. 세조가 일찍이 제릉(齊陵)을 알현하고 인하여 대수(大蒐: 봄철에 크게 수렵(狩獵)을 행함)를 하였는데 세자에게 명하여 도성에 남아 지키게 하고 부절(符節)을 주어 일을 전결(專決)하게 하였더니 일이 모두 합당하였다.
병자년(1456) 여름에 명나라 전 황제가 태감(太監) 윤봉(尹鳳) 등을 보내어 세조에게 고명(誥命)을 주었고, 정축년(1457) 여름에는 지금의 황제가 한림 수찬(翰林修撰) 진감(陳鑑) 등을 보내어 즉위 조서(卽位詔書)를 반포하였는데 두 사신이 의경세자의 의관(儀觀)의 훌륭함과 예법의 자상함을 보고 다 칭찬하여 마지않았다.
매일 닭이 울면 양궁(兩宮)을 찾아 침소를 문안하고 시선(視膳)하며 화열(和悅)에 찬 효도를 다하였고 여러 숙부(叔父)를 공경히 섬기고 형제간에는 신의 있는 우애를 행하였으며 좌우의 사람에 대해서는 어질면서 위엄이 있었고 사대부를 접대함에는 공손하면서 예절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비방(非謗)하는 말이 없었다. 또 세조께서 일찍이 검약(儉約)해야 한다고 가르치시니 무릇 여마(輿馬)·의복의 차림을 질박(質朴)하고 검소하도록 힘쓰고 사치스럽지 않았기 때문에 원량(元良: 세자)으로서 덕을 극진히 갖추어 민심이 귀의(歸依)하는 바를 얻었다고 한다.
하지만 병약하여 잔병치레를 자주 했고 1457년(세조3) 병이 크게 들어 세조의 명으로 21명의 승려가 경회루(慶會樓)에 공작재(孔雀齋)를 베풀고 병의 치유를 빌었으며 의정부 당상관, 육조판서와 좌찬성 신숙주(申叔舟), 도승지 한명회(韓明澮) 등도 함께 참여하여 속한 쾌유를 기원하였다.
서예를 잘했던 병이 든 의경세자는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예견하였던지 지필(紙筆)을 찾아 고시(古詩)를 쓰기를....

비바람 무정하여 모란꽃이 떨어지고, 섬돌에 펄럭이는 붉은 작약이 주란(朱欄·붉은 칠을 한 난간)에 가득 찼네. 명황(明皇)촉(蜀) 땅에 가서 양귀비를 잃고 나니, 빈장(嬪·임금의 수청을 들던 궁녀)이야 있었건만 반겨보지 않았네.

라는 시를 썼다. 세자를 간호하던 사람들이 이 시를 보고 상서롭지 못하다며 걱정했다. 아버지의 왕위찬탈 과정을 지켜본 세자의 중압감을 표현한 글이라고 했으니.. 조선시대에 시를 잘 짓기로 유명한 월산대군(月山大君)과 성종(成宗) 형제의 아버지 답게 의경세자도 시문에 능했던 것 같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1457년 19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 세는나이로 계산하면 겨우 20대에 들어설 시기에 사망한 셈이다. 시호 '의경'은 아버지 세조가 직접 내린 것으로, 온화하고 성스럽고 착한 것이 의(懿)요,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경계하는 것을 경(敬)이라 한다’는 의미이다.
의경세자는 아버지 세조와는 다르게 성품이 바르고 온화해서인지, 생전에 가족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고 평판이 좋았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인 세종이 현동(賢同)이라는 아명을 하사하고 친히 안고 데리고 다니면서 끊임없이 사랑을 쏟아 다른 왕손과 달리했다고 한다. JTBC에서 방영된 드라마 인수대비에선 아버지인 세조와 대립하는 관계로 나오지만, 실제로 두 부자는 공적인 자리와 사적인 자리 가리지 않고 늘 함께 다닐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그 예시로 의경세자가 병이 들었을 때 세조는 자신이 임금이 되기 전의 집, 즉 사가에 세자를 보내 치료하도록 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세조 스스로도 거처를 옮겨 의약품을 챙기는 등, 친히 의경세자의 병구완을 했다. 10여일 뒤 병세에 잠깐 차도를 보이자 세조는 세자를 돌본 측근들에게 후한 상급까지 내렸다. 하지만 얼마 뒤 결국 의경세자는 20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되고 세조는 맏아들을 위해 친히 여러 차례 묘자리를 찾아 다니기까지 했다.[4] 세조가 얼마나 의경세자를 끔찍히 아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어머니인 정희왕후는 의경세자의 병이 깊어지자 화원에게 초상화를 그리라고 명했는데, 의경세자가 세상을 떠나고 난 뒤에야 전에 그려두었던 장남의 초상화를 보면서 하늘을 원망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추후에 성종이 친아버지인 의경세자를 덕종으로 추존하고 종묘에 봉안 하려고 할 때 반대파에 맞서서 성종의 편이 되어주고 추존이 성사될수 있도록 큰 도움을 준다.
그의 정실부인이 바로 사극에서 자주 등장하는 여걸 소혜왕후, 즉 인수대비 한씨이다. 또 의경세자의 1살 연상의 정실부인이였던 소혜왕후와는 5년간의 짧은 결혼생활 동안 3명의 자녀들을 둘 만큼 금슬이 좋았다고 한다. 슬하에 월산대군, 명숙공주, 성종 등 2남 1녀를 두었다. 이외에 세자 시절 아버지 세조의 명으로 정식으로 간택한 귀인 권씨, 귀인 윤씨, 숙의 신씨 등 3명의 후궁을 두었으나 슬하에 자녀는 없다. 능은 경릉(敬陵)으로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西五陵, 사적 제198호)에 있다.

3. 덕종 추존


사후 아버지 세조로부터 의경세자(懿敬世子)라는 시호를 받았는데, 차남 자을산군의 즉위 이후인 성종 1년(1470) 왕으로 추존되어 의경왕(懿敬王)이 되었다가 5년 뒤 대왕으로 추숭되고 명나라로부터 정식 시호를 받았으며, 같은 해 덕종(德宗)이라는 묘호를 받았다. 조선에서 임금이 되지 못하고 죽은 왕세자가 임금으로 추존된 최초의 사례이다.
차남인 성종은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아버지 의경세자를 여의여서 얼굴을 본 적 없었지만 평소에 아버지를 굉장히 그리워하고 사모했다고 한다. 성종은 왕위에 오르고 나서야 의경세자의 초상화를 처음 봤는데, 이때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고 초상화를 그린 화원 최경에게 벼슬을 제수하라고 명할 정도로 자신의 친아버지를 그리워했다. 성종은 법적으로는 작은아버지 예종의 양자로 입적해 즉위하였지만 친아버지인 의경세자를 위해서 왕으로 추존하고 결국 종묘에 봉안까지 하게된다. 이 과정은 7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고 신하들의 반대 상소도 빗발쳤으나 성종의 확고한 의지로 밀어붙여서 일을 성사시킨다. 의경세자의 묘호를 정할 때 의정부와 육조의 참판(오늘날 차관급) 이상의 모든 고관들이 모여 장종(章宗)·효종(孝宗)·안종(安宗)으로 묘호를 올렸지만 아버지를 그리는 성종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시 덕종(德宗)·순종(順宗)·헌종(獻宗)으로 올리니 생전에 덕망과 인덕이 높았던 것을 고려해서 비로소 덕종(德宗)으로 정하고 왕으로 추존된다.

4. 야사


단종몰아낸 것도 모자라서 살해한 것에 대한 업보로 세조의 형수(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의 원혼이 저주를 내려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야사에서는 이에 더해 현덕왕후의 원혼이 세조를 향해 침을 뱉었고, 그 때문에 세조가 피부병이 발병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의경세자 뿐만 아니라 아우 예종도 19세에 죽어 세조의 적자는 모두 같은 나이에 요절했다.[5] 또한 세조의 손자녀들인 월산대군(35세)과 성종(38세), 명숙공주(28세)도 그다지 오래 살지 못했다. 제안대군만이 오래 살며 부인과 해로했으나 대신 슬하에 후사를 남기지 못했다(제안대군은 육순에 도달한 나이에 사망). 이 때문인지 성종~연산군 시대에는 왕실에 유난히 '젊은 과부'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실제로 의경세자는 단종이 죽기 1달 전에 죽었다. 신숙주의 아내가 사육신을 배반한 신숙주를 부끄러이 여겨서 자결했다는 야사와 더불어 가장 많이 퍼진 야사. 신숙주의 아내도 사육신 사건이 터지기 전에 죽었다. 정사에 따르면 신숙주가 명나라 사절로 떠났을 때 수양대군이 "그대의 공로에 깊은 감사를 표하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대의 부인이 병으로 작고했소."란 편지를 보냈다 한다.

5. 창작물


  • 한명회 - 윤다훈
  • 왕과 비 - 이광기[6]
  • 공주의 남자 - 권현상
  • 인수대비 - 백성현[7]
  • 조선왕조 오백년 설중매 - 박병훈
  • 임금님의 사건수첩 - 박정민
  • 세조대왕(1970년) - 이순재[8]

[1] 밑줄 표시는 1475년 성종이 추가로 올린 시호[2] 덕종의 아버지 세조는 단종의 아버지 문종보다 3살 어리지만, 덕종이 단종보다 3살이 많다.[3] 군호는 강원도 정선의 옛 지명인 도원군(桃源郡)에서 따왔다.[4] 이럴 수 있던 이유 중 하나는 세조 본인부터가 풍수지리에 있어 일가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세조는 이미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어머니인 소헌왕후의 묫자리를 알아보는데도 관여한 바 있었다.[5] 단, 서자들인 덕원군창원군은 무난히 20대를 넘기며 오래 살았다. 특히 덕원군은 세조의 적·서자를 포함한 4남 1녀들 중에서 유일하게 50세까지 살면서 가장 장수했다.[6] 재미있게도 훗날 같은 작가가 집필한 드라마 인수대비에서는 의경세자의 숙부인 안평대군 역할을 맡았다.[7] 덕종의 아들인 성종도 맡았다. 이후 화정에서 소현세자 역을 맡아 두 번이나 왕이 되지 못하고 죽은 세자를 맡게 되었다. [8] 훗날 이순재는 파천무와 공주의 남자에서 두 번이나 김종서 역할을 맡으면서 유동근의 얼굴을 한 수양대군에게도 당하고 김영철의 얼굴을 한 수양대군에게도 당하는 두 번이나 의경세자의 아버지 수양대군에게 죽임당하는 역할을 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