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산대군

 




'''조선 덕종의 왕자'''
'''월산대군
月山大君'''

'''군호'''
월산대군(月山大君)[1]
'''시호'''
효문(孝文)[2]
'''본관'''
전주(全州)[3]
''''''
정(婷)[4]
''''''
자미(子美)[5]

''''''
풍월정(風月亭)[6]
'''부왕'''
덕종(의경세자)
'''모후'''
소혜왕후 한씨(인수대비)
'''형제'''
명숙공주(明淑公主)[7], 성종(成宗)
'''부인'''
승평부대부인 박씨(昇平府大夫人 朴氏)[8]
'''자녀'''
덕풍군 이이(德豊君 李恞)[9]
'''묘소'''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 산16-35[10]
'''생몰
장소
'''
'''출생'''
조선 한성부 수양대군(세조) 사저
'''사망'''
조선 한성부 정릉동 연경궁 사저
'''생몰
기간
'''
'''음력'''
1454년 12월 18일 ~ 1488년 12월 21일
'''양력'''
1455년 1월 5일 ~ 1489년 1월 22일
1. 개요
2. 소개
3. 생애
4. 사후
5. 가계도
6. 가족과 후손
7. 월산대군 신도비명
8. 친동생인 성종과의 우애
9. 월산대군의 시(詩)
10. 평가
11. 관련 작품
12. 관련 사진
13.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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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월산대군(月山大君)은 지위가 태백(泰伯)이나 중옹(仲雍)보다도 존귀하고 연릉계자(延陵季子)나 사어(史魚)보다도 높고 고귀한 뜻을 지녔는데 성묘(成廟)[11]

로부터 유난히 깊고 형제간의 우애로운 보살핌을 듬뿍 받았었다. 그리고 주옥같은 시문(詩文)과 필체(筆體)가 강호(江湖)의 풍월(風月) 사이에 고상한 운치가 애연히 넘쳐흘렀는데 아조(我朝)[12]에 물론 훌륭한 종친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월산대군이 가장 으뜸이었다고 할 것이다."

정조 일성록, 정조 22년 8월 29일 경신 기사中

조선 전기의 왕족이자 시인. 세조의 장손이자 추존왕 덕종(의경세자)과 소혜왕후 한씨(인수대비)의 장남이며 성종의 친형이다.[13]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해 종학에 들어가서 배웠고 경사자집을 두루 섭렵하였으며 성품은 침착 결백하고 술을 즐기며 산수를 좋아했다고 한다.
'월산(月山)'이란 군호와 '풍월정(風月亭)'이라는 호 답게 일생을 자연 속에 파묻혀 부드럽고 율격이 높은 시를 쓰면서 풍류객으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진 대군이었으며 지극한 효우 정신과 시문학적 소양을 인정받아 효문(孝文)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월산대군은 성종에 대한 충성과 우애가 매우 깊었으며 동생에게 부담이 갈만한 교우 관계나 정치적 행동을 극도로 조심했다. 특히 시와 문장이 뛰어나 명나라에까지 애송 되어서 시인으로 명성이 높았다고 하며 후대에 종친들의 모범으로 받들어지는 인물이다.
전주이씨 월산대군파의 파시조로 묘소와 사당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에 있다.

2. 소개


월산대군은 세조의 장손으로 조부의 사랑을 받으며 궁중에서 자랐다. 1460년(세조 6) 7살에 월산군(月山君), 1468년(예종 1) 현록대부(顯祿大夫)에 책록됐다. 1471년(성종 2) 월산대군(月山大君)으로 진봉되었으며 순성명량경제좌리공신(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 2등이 가자됐다.
월산대군은 권력을 탐하지 않았고 동생을 택한 할머니의 결정을 원망하지 않았다. 일찍 요절한 아버지 의경세자의 적장자이자 봉사손으로서 자신의 삶을 받아 들였다. 그래서 사가(史家)들이 중국의 태백(泰伯)·중옹(仲雍) 형제에 버금간다고 칭송하였다. 태백[14]은 주나라 황위 계승 서열의 제일 위에 있었지만 황제 자리를 조카에게 넘기고 오의 제후로서 나라를 떠받쳤다.
그는 서책을 가까이 하고 문장에 뛰어났으며, 교우 관계를 함부로 맺지 않고 합정동 망원정이나 고양 북촌에 별장을 두고 야심없이 풍류를 즐겼다. 친동생 성종과 시와 편지도 자주 주고 받았다.
월산대군의 요절 직후 성종의 명으로 풍월정집의 서문을 쓰게 된 성현과 신종호는 월산대군의 품성과 시적 재능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15]
문효공(文孝公)이 세상을 떠난 이듬해에 임금께서 그가 남긴 시를 모아서 시집을 만들게 하고, 신(臣)으로 하여금 서문을 지어 그 첫머리에 얹게 하였다. 신은 생각하건대 진기한 나무를 기르는 사람은 한 치 정도의 뿌리를 얻어가지고 반드시 거기에 흙을 북돋아 주며 물을 뿌려 주며 햇볕으로 따뜻하게 쬐어준다. 그렇게 해야만 살아나서 무성할 수 있으니, 이것은 그 뿌리가 붙어 있는 곳이 얕기 때문에 반드시 인력(人力)으로 이를 보호하고 가꾸어 주어야 된다. 그러나 깊은 산 큰 골짜기 속에서 난 것은 북돋우거나 물을 주거나 볕을 쪼여주지 아니하여도 저절로 가지와 잎이 피어나서 마침내 위로 푸른 구름을 건드리며 그 끝을 볼 수 없을 만큼 자란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그 뿌리가 깊게 박히고 원기가 충실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재주도 이와 마찬가지다. 일반 사람들은 공부를 하는데 부지런히 정신을 쓰며 걱정을 거듭하여 실컷 고생을 해가면서 공부에 힘을 드린다. 그렇게 한 뒤에 문장을 짓게 되는데, 수식을 가하며 기묘하게 되기를 힘써도 그의 기상은 어딘지 천근(淺近)한 병을 면하기가 어렵다. 왕공과 귀인은 그렇지 아니하여 그의 거처하는 지위가 기운을 나게 하여 몸을 기르는 것이 저절로 틀을 크게 한다. 있는 곳이 높으므로 보는 것이 커서 학문에 힘을 들이지 아니하여도 제대로 여유가 생기며, 공부를 힘쓰지 아니하여도 저절로 순수해져서 넉넉히 남는 힘을 갖고 있으므로 그 공부가 성취하기가 쉽다. 그러나 문장의 이름이 곤궁한 사람에게서 많이 나오며 부귀한 사람에게서는 나오지 않는 것은 , 곤궁한 사람만이 홀로 공교하고, 부귀한 사람은 홀로 능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부귀와 번화의 향략에 빠져서 미처 공부할 겨를이 없는 것이다.
한(漢)이 일어날 적에 하간헌왕(河間獻王)이 덕을 닦고 옛것을 좋아하여 사방에서 학문이 있는 학자를 맞아 들여서 그들과 더불어 학술을 강론하였으며, 또한 삼옹(三雍)의 궁(宮)에 대책(對策)을 바쳤고, 동평왕 창(東平王蒼)은 어릴 적부터 경전을 좋아하여 문장을 지은 것이 전중(典重)하고 고상하여 그가 지은 서(書)ㆍ기(記)ㆍ부(賦)ㆍ송(頌)ㆍ가(歌)ㆍ시(詩)가 당시 학자들의 수록한 바가 되었으니, 그들의 문장과 사업은 모두 양한(兩漢)의 으뜸이 되었다. 그러나 이름을 좋아하고 자기를 선전한 결점은 아는 사람들이 이를 비난하였다.
공은 왕실의 아들이며 골육의 지친이다. 예의로 몸을 단속하며 행동을 예법에 맞추었고, 복잡하며 사치스러운 것을 버리고 검약한 생활을 하려고 힘썼다. 방문객을 사절하고 조용히 옛 서적을 연구하여 이를 표현하여 짓는데 생각나는 대로 곧 글을 이루었다. 이제 이 시집을 보면 큰 작품은 화평스러우며 작은 시편은 고상하고 건전하여 법칙을 맞추려고 애쓰지 아니했는데도 틀이 저절로 잡혔고, 수식하려 하지 아니했는데도 형식이 꼭 들어 맞았으며, 솜씨를 부리려 하지 않았는데도 문채가 찬란하고, 견제를 가하지 아니하여도 한군데도 군색한 곳이 없다. 그는 맑고 심오하며 온자하여 하나도 부귀한 사람의 태가 없고 깨끗이 세속을 초월한 듯한 감이 있다. 스스로 이치를 분명히 보고 사물의 정수[精]을 본 것이 아니라면 어찌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으랴. 비록 늙은 학자로서 큰 솜씨로 문학계에 이름을 가진 사람이라도 이를 붙잡고 올라 갈 수 없을 정도이니, 저 하간헌왕이 동평왕 같은 무리야 어찌 어깨를 겨누어 비교할 수 있으랴. 세상에 몸이 부귀에 묻혀 있으면서 눈으로 글 한 획도 알지 못하여 머릿속에 들어있는 것이 없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오래 살았다 할지라도 생명은 짧은 것이다.
공은 학문이 풍부하였고 문장과 인품이 일대에 이름을 독차지하여 널리 퍼져서 찬란히 빛났으니, 몸은 비록 없어져서도 없어지지 아니한 듯 남아 있으니, 비록 인간의 연령으로는 일찍 죽었다 할지라도 생명으로는 오래 살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위로는 국가의 문화를 장식하고 아래로는 민간의 문학에 이바지하였으며, 아(雅)와 송(頌 궁중의 음악)을 지어서 빛나며 명랑히 역사에 남아서 없어지지 아니할 터이니, 뒷사람의 입에 음미 감상되는 것이 어찌 얕다고 할 수 있으랴. * 성현(成俔)
문효공(文孝公)이 불행히 일찍 세상을 떠나니 우리 전하께서는 특별히 천륜(天倫)의 슬픔을 가지시고 슬픔을 억제할 수 있는 일이면 무엇이든 그 극진함을 베풀지 아니하심이 없었다. 평생에 지은 시 약간 편을 갖다가 편집하여 이를 전하게 하시니, 그것은 영원한 세대에까지 밝게 유전하려 하심이다. 지극하시도다. 하늘과 땅은 끝이 없으니, 사람이 그 사이에서 나고 죽고 오래 살고 일찍 죽고 하는 것이 비록 길고 짧고 더디고 속함이 같지 못함은 있으나, 그것을 천지가 끝이 없는 것과 비교하여 본다면 다만 한 순간에 불과한 것이다.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라 하지만, 하루아침에 별안간 초목금수와 마찬가지로 없어져 버리고 들릴[聞]것이 없다면 어찌 슬프지 아니하겠는가.
이러므로 옛적의 군자는 혹은 덕을 세우고[立德], 혹은 공을 세우며[立功], 혹은 말을 세우[立言]되, 나의 심사(心思)와 재력(才力)의 미치는 바로 인하여 없어지지 아니할 자료를 만들어서, 뒷세상으로 하여금 모두가 그의 이름을 듣고 흠모하며 영원히 감탄하여, 그의 용모를 대하매 그의 음성을 들으며, 서로 더불어 그의 거처하던 자리에서 부앙(俯仰)하면 돌아다니는 듯한 감을 가져서 딴 세상 사람인 줄을 모르게 하였다면, 이런 사람은 비록 천지가 끝나고 만세에 이르도록 없어지지 않는다 하여도 가하다. 그런즉 일시의 길고 짧은 것이 족히 문제삼을 것이 못 되며, 이 문효공(文孝公)은 말을 세운[立言] 군자라고 할 수 있도다.
공은 천품이 지극히 높아서 비록 부귀한 가운데서 생장하였으나, 호화스러움에 마음이 팔리지 아니하여 풍류와 여색 같은 향락에 대하여는 담박하였다. 책 속에 들어 앉아서 도학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문장을 지은 것이 간결하며 고아(古雅)하였고, 더욱 시에 대하여 힘을 많이 썼다. 그의 시는 맑으면서도 차지[寒] 아니하며, 담박하면서 메마르지 아니하여, 자연으로 된 옥[天球]으로 손질을 하지 아니하여도 순수한 빛을 가릴 수 없으며, 주현(朱絃)의 소리로 다루지 아니하여도 태고(太古)의 소리가 저절로 있는 것과 같았다. 이를 도연명(陶淵明)ㆍ사조(謝眺)ㆍ한유(韓愈)ㆍ유종원(柳宗元)의 대열에 끼어 놓는다 하더라도 누가 먼저인지 누가 뒤인지를 구별하지 못할 것이다. 비록 그러나 공의 시를 읽고 다만 이것을 음향이나 음률 사이와 말과 글자의 말단적인 것에서 찾아 보고, “나는 공의 시를 다 알았다.” 한다면, 참으로 어찌 공의 시의 취지를 알았다 할 수 있으랴. 대개 3백 편이 비록 징계하고 느끼는 것이 일치하지는 않더라도 그것이 세상의 교화를 붙들고 백성의 본심을 도탑게 함에 있어서는 마찬가지니, 시가 없어진 지 오래다.
한(漢)의 가요(歌謠)와 위(魏)의 시(詩)에서 제(齊)ㆍ양(梁)의 옥대(玉臺)와 당(唐)ㆍ송(宋)의 서곤(西崑)과 강호(江湖)가 복잡하게 교대하여 일어났으나, 모두 글자를 가지고 정신을 피로하게 하며 힘을 쏟았으나, 그 의미를 따지면 모두 쓸데없고 부질없는 말뿐이었으니, 시의 도가 극히 곤난한 지경에 빠졌다.
문효공은 왕실의 존귀함으로 임금의 은혜를 가까이 받들어 붓과 벼루로 모시며 시문을 지으셨으니, 비유하건대 규(奎)와 벽(璧)이 서로 빛나는 듯, 훈(壎)과 지(篪)를 교대로 연주함과 같아서 글자 한 자 말 한마디라도 전하의 지극하신 우애를 형용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후일의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깊이 감상한다면 왕성하게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바가 없을 수 있겠는가. 그런즉 그것이 세상의 교화와 백서의 윤리에 있어서 어찌 작은 도움만이 되리요. 말의 정(精)한 것이 시보다 더한 것이 없는데 그 시는 또한 족히 세상의 교화를 붙들고 백성의 본심을 도탑게 하게 되니, 곧 공의 세워 놓은 것이 얼마나 많는가.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것이 확실하다. 또 슬퍼할 것이 무엇이랴. 삼가 서(序) 한다. * 신종호(申從濩)
월산대군은 새로운 책이나 알려지지 않은 글이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비싼 값을 주고서라도 기어이 사서 구입하고야 마는 열성적인 장서가(藏書家)였다.
지은 시 중 일부는 국조시산(國朝詩刪), 동문선(東文選), 여지승람(輿地勝覽), 대동시림(大東詩林) 등에 백여 편의 시가 실려 있다. 또한 시들 중 일부는 중국의 전우산열조시집(錢虞山列朝詩集)[16]에도 수록됐다. 서화(書畫)에도 조예가 깊어 성종은 손수 그린 사군자를 보여주고 차운(次韻)[17]을 부탁하기도 했다. 그리고 성종은 월산대군이 세상을 떠나자 형이 생전에 지었던 시를 모아서 풍월정집(風月亭集)을 간행하게 했는데 이 시집은 조선 중기 이후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한 시강원의 교재였으며 근대에 와서는 한학자들의 필독 시집이라고 한다.
1488년(성종 19) 월산대군이 죽고 성종이 화공에게 형의 초상화를 그리도록 명했는데,

"내가 살펴보건대 형은 산천의 간기(間氣)를 받고 꽃다운 자질이 있어 풍의(風儀)가 빼어나게 수려하고 지조가 우뚝하게 출중하니 진실로 군자다운 사람이다. 형의 용모는 성정(性情)에 근본 하였으니 엄숙한 모습은 옥처럼 빛나고 철인처럼 사색하여 순수한 자태가 핍진하고 운무가 활짝 갠 듯하며 빛나는 별을 보는 듯하다. 옥호의 가을 이슬 같고 난초처럼 빛나서 맑고 밝아 볼만하네."

라고 하였다. 성종이 월산대군의 용모를 묘사한 시를 남겼는데 다음과 같다.

雪作精神玉作容(설작정신옥작용)

흰 눈이 맑은 정신이 됐고 옥이 얼굴이 됐네

玲瓏庭院弄薰風(영롱정원롱훈풍)

영롱한 정원이 훈훈한 바람과 노닐며[弄]

肯隨桃李媚眷色(긍수도리미권색)

복숭아 자두 색깔따라 아름답게[媚]

물들었네

暗許氷霜老化公(암허빙상로화공)

보이지 않는 혹시[許]

얼음과 서리가 공을 늙게 하였는가

월산대군의 시에 백발, 흰머리 관련 구절이 많은데 나이 30세가 넘어가면서 새치가 생기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증조부인 세종도 33세부터 새치가 있었다고 한다.
월산대군 관련 문화재는 오랜 세월의 풍파 속에서도 불구하고 묘역, 신도비, 사당, 요여, 태실 등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소실되지 않고 대부분 보존되어 있으며 상태가 매우 양호한 편이다. 심지어 2007년에는 1489년(성종20) 편찬된 풍월정집 원본이 발견되기도 했다. (중앙일보-'풍월정집' 실물 나왔다)

3. 생애


1454년(단종 2) 12월18일 수양대군(세조)의 장남 도원군군부인 한씨(인수대비)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 한씨 역시 당대 최고의 권신 한확의 딸로 든든한 집안 배경을 가졌다.
월산대군이 태어난 이듬해 아버지 도원군이 세자로 책봉됐고 2년 후 동생 잘산군도 태어난다. 그러나 곧 의경세자가 세상을 떠난다. 세자가 죽으면 세손이 대통을 잇는 게 순리이지만 삼촌 해양대군이 세자가 된다.
이에 대해 혹자는 세조가 조카의 어린 나이를 명분삼아 계유정난을 일으켰기 때문에 세손이 같은 일을 당할까봐란 말도 있고, 혹자는 한명회, 신숙주 등 훈구공신들이 정사를 마음대로 하기 위해 정통성이 약한 차남을 밀었다고 말하는 자들도 있다.
1468년 예종이 즉위하는데 당시 월산대군의 나이는 15세였다. 그러나 불과 재위 1년 2개월 만에 갑자기 승하하자 후계 문제를 두고 말이 많았다. 예종도 친아들 제안대군이 있었으나 불과 4세 어린아이였다. 월산대군이 해양대군 때와 같은 논리를 주장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세조도 죽고 세조의 적자들도 모두 죽은 상태에서 왕위는 당시 최강의 권신인 한명회 등의 입김을 탈 수 밖에 없었다. 결국 한명회의 사위인 친동생 잘산군이 왕위에 오른다. 월산대군 역시 정공신에 3번이나 오른 훈구공신 중의 공신 박중선의 사위가 돼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월산대군 역시 몸이 약한 탓도 있었다.
혹자는 할머니 자성대왕대비계유정난을 일으킬 때 남편 수양대군에게 갑옷을 손수 입히면서 거사를 도운 여장부였는데 15살이 넘은 월산대군이 왕이 되면 자신의 수렴청정 기간이 짧아진다는 데에 동기가 됐다고 본다. 13살 잘산군을 지목해 자신의 수렴청정 기간을 늘리려 했다는 것이다.
반면, 후일 무시무시한 인수대비가 되는 수빈 한씨는 아직 시어머니 그늘이었을 뿐더러 잘산군을 택해야만 하는 동기는 상대적으로 옅었다.
한명회는 자신의 셋째딸이 예종의 왕비(장순왕후)라 일찌기 상당부원군[18]에 올랐지만 딸이 인성대군을 낳고 산후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난다. 인성대군도 3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 왕실과 끈이 떨어진다. 막내 사위인 잘산군을 밀어야 할 동기가 있었다.
어쨌든 여러 이유로 잘산군이 어린 나이에 왕에 올라 성종이 된다. 정통성 확보를 위해 우선 선대왕 예종의 양자로 입적했다. 왕실 용어로 입승대통이라 하는 이 절차는 성종이 예종의 장남이 되는 동시에, 친부인 의경세자 역시 왕으로 추존해야 하는 절차를 동시에 요구한다.
월산대군 역시 이제 덕종으로 추존되는 아버지의 적장자이자 봉사손으로서 명분을 받들어야 하는 상황이었고, 몸이 약하며 정치적 야심이 없었던 그로서도 더할나위 없는 것이었다.
자성대왕대비와 한명회 등 훈구대신들은 추존왕 덕종의 제사를 받들 월산대군을 좌리공신 2등에 책록했다. 좌리공신은 성종 옹립에 논공행상을 한 것으로 엄청난 부는 물론 역모만 아니면 죄를 받지 않는 유죄(宥罪) 조항 등 신분을 보장받는 동시에 자신이 이제 동생의 신하가 된다는 뜻이었다.
자성대왕대비는 예종의 적장자인 제안대군을 세종의 7남 평원대군의 양자로 입적시켜 혹시 모를 후환을 없앴다. 멀쩡한 친아들을 남한테 보내고 양자를 맏상주로 하는 무리수였다. 할머니 자성대왕대비는 이렇게까지 해서 성종의 정통성을 확보해주고, 왕실의 분란도 미연에 막고자 했다.
현실을 직시하고 덤덤하게 받아들인 월산대군은 일체 불평불만을 드러내지 않고 철저한 자기 관리로 일생을 보내면서 왕권에 부담을 주지 않았다. 가노(家奴)들에게 조차도 배경을 믿고 행패를 부려 빌미를 주지 않게 철저히 단속했다. 35년의 짧은 삶이긴 했지만 그 흔한 술 실수 한 번 하지 않고 풍월정과 고양 별장 그리고 망원정 등에서 시를 짓고 책을 읽으며 자연 속에 파묻혔다. 성종은 월산대군을 더욱 자주 만나고 각별히 대하며 위로했으며 성종의 아들인 연산군, 중종 때까지도 월산대군의 피붙이에게는 더 아끼고 신경을 써줬다.
한때는 한양을 벗어나서 낚시도 하고 여행을 하면서 풍류를 즐기는 일도 있었지만 나이가 들고 몸이 아파 점차 흥미를 잃게 되었다.
1488년(성종 19) 가을에 접어들면서 와병했다. 9월부터 친모 인수대비도 몸이 아파 장남 월산대군 집으로 피접을 왔는데 월산대군도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인수대비의 병구완을 하다가 결국 와병했다.
두어달을 앓다 12월 중순 위독해졌고 사저인 연경궁에서 어린 아들을 남겨두고 12월21일 3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489년(성종 20) 3월2일 친동생인 성종은 극진한 예를 갖춰 형의 별장이 있었던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 신원1리 견달산 정좌에 안장했다.

4. 사후


사후에 봉상시에서 시호를 공간(恭簡)으로 의논하였지만 성종이 특별히 효문(孝文)으로 직접 지어서 내렸다. 덕을 지키고 간사하지 아니한 것이 효(孝)이고, 시행함이 이치에 맞는 것이 문(文)이다.
승평부대부인 박씨는 불심이 깊어 죽은 남편을 위해 흥복사라는 원찰을 창건하고 명복을 비는 불사를 행하다가 유생들과 척을 지게 되었고 그럼에도 성종은 형수와 어린 유복자를 감싸고 보호했다. 재산은 거의 지켰지만 현재 합정동에 터만 남은 망원정은 연산군에게 뺏긴다.
당시 유생들은 승평부대부인 박씨를 두고 상소를 올리면서 벌을 주라고 했는데 승평부대부인이 조카 연산군과 통정했다는 스캔들까지 뿌렸다. 심지어 실록에 적히길 연산군이 박씨와 통정하고 자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월산대군 무덤에 쇠기둥을 박았다는 황당한 얘기까지 적었다.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 63권에 기록된 내용이나 사실일 가능성은 없다. 당시 박씨의 나이는 51살이었다.
야사에는 인수대비가 중종반정 직전 큰며느리 승평부대부인 박씨에게 자결을 명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결국 박씨 부인의 남동생 박원종이 분을 품고 중종반정을 일으켰다.
조강(朝講)에 나아갔다. 영사(領事) 정광필(鄭光弼)이 아뢰기를,
"성종조(成宗朝)의 일로 보면 월산대군(月山大君)을 대우하신 것이 제군(諸君)에게 보다 특별히 달랐으니, 임금과 신하 사이도 엄경(嚴敬)을 한결같이 할 수 없는데 더구나 형제 사이이겠습니까?"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기사관(記事官) 허흡(許洽)이 아뢰기를,
"성종대왕(成宗大王)께서는 월산대군(月山大君)과 가인(家人)의 예(禮)를 행하여 친애(親愛)와 돈독이 심상한 데서 나왔으니, 이것으로 보면 조종(祖宗)의 효도하고 우애하는 가법(家法)은 진실로 대순(大舜)이나 주공(周公)에 양보하지 않을 것입니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도제조(都提調)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월산대군(月山大君)도 바로 선릉(先陵)의 동기로서 우애(友愛)의 독실함과 풍류(風流)의 아름다움이 오히려 후세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월산대군은 종친의 모범이 되어 후세에도 칭송됐다.
조카 연산군은 월산대군이 국가에 공로가 있으므로 다른 대군에 비할 수 없으니 나뭇갓(나무를 베지 못하는 땅)을 도로 주라고 말하기도 했으며, 신하들로 하여금 월산대군 부인 승평부부인 박씨를 항상 부대부인으로 높여 부르게 했다. 백모와 덕풍군에게 많은 물품을 하사했고 후대했다.
훗날 광해군 때는 친형님 임해군이 몰래 사병을 기르다 걸리자 신하들이 죽이라고 들고 일어났다. 광해군은 임해군이 월산대군같았으면 얼마나 좋았겠냐고 말하기도 했었다고. 임해군은 강화도에 유배됐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죽는다.[19]
영조(英祖)는 월산대군 후손들이 왕계에서 멀어지면서 점점 가난해지고 묘역 관리도 허술하자 승지를 보내서 월산대군 묘소에 치제를 명하였는데 이어 하교하기를,
"일찍이 내훈에서 옛날에 돌보아 사랑하여 주었음을 알고 있었는데 이제 들으니 그 후손이 호서에 유락하여 살고 있다 하니, 어찌 돈목하는 도리라 하겠는가? 봉사손은 등용하고 호조로 하여금 공가를 후히 주게 하여 대군의 사우를 묘 아래에 세우게 하라." 하였고 국가에서 비용을 지원하여 월산대군 사당을 중수 하였는데 영조가 친히 석광사(錫光祠)라는 편액을 내렸으며, 당시 조정에서 벼슬을 하고 있었던 월산대군의 외손인 부교리 홍재가 말하기를 "대군은 성종의 형으로 지극한 덕과 티없는 문장은 대중이 따를 바가 아니며 우리 성종의 우애는 백왕에 지나시었으며 총애로 대우하심이 융슝하여 보통에 지나셨다 합니다."하니 영조가 말하기를 "그러하다 내 어제하신 내훈을 보니 인혜 왕대비께서 또한 지극히 사랑하시어 친자와 다름이 없었다 하였으며 선왕께서 매양 그 어짐을 감탄하심을 내가 익히 들었으며 인수 왕대비와 인혜 왕대비께서 대군을 두고 서로 내 아들이라고 하셨다니 얼마나 사랑하였는지를 알 수가 있다." 하였는데 홍재가 이어 아뢰기를 "대군 화상찬을 성종께서 친히 지으시고 손수 써서 주시니 어제 어필을 판에 새겨 단 것을 신이 어렸을때 외가에서 보았는데 종가에서 시골로 이사하면서 구판을 서울에 사는 자손집에 보관시켰다 하며 대군의 문집이 두 권이 있는데 태반은 어제 작품을 받들어 실었으며 신이 부복하여 보니 열성조 어제 중에 성조 어제가 또 태반이 대군과 수창한 작품이며 어제 대군 화상찬도 그 안에 실린 것을 보았사온데 이는 당시 우애 독실한 증거입니다." 하였다.
정조(正祖)는 월산대군 사당이 무너진 것을 보고 마음 아파 하며 말하기를,
"월산대군(月山大君)은 지위가 태백(泰伯)이나 중옹(仲雍)보다도 존귀하고 연릉계자(延陵季子)나 사어(史魚)보다도 높고 고귀한 뜻을 지녔는데 성묘(成廟)로부터 유난히 깊고 형제간의 우애로운 보살핌을 듬뿍 받았었다. 그리고 주옥같은 시문(詩文)과 필체(筆體)가 강호(江湖)의 풍월(風月) 사이에 고상한 운치가 애연히 넘쳐흘렀는데 아조(我朝)에 물론 훌륭한 종친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월산대군이 가장 으뜸이었다고 할 것이다. 우리 성조(聖祖)께서 높이 예우하고 총애하여 우애하신 성대함이 지금까지 사람들의 이목에 생생하다. 더구나 열조에서 군졸(軍卒)을 배치하여 수호하고 내려주신 물품도 성대하였다. 그런데 이제 이처럼 쓸쓸하게 되었으니 몹시 서글프고 한탄스럽다. 해도(該道)로 하여금 보조하여 수리하게 하라. 또 월산 대군의 봉사손 이헌규(李憲圭)를 해당 조(曹)로 하여금 초사(初仕)에 등용하도록 하고, 대군의 무덤에는 승지를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라. 대군이 살던 집은 강가의 교외에 있었는데, 자손들이 외지로 유리하여 낙향하였기 때문에 어느 때 전매(轉賣)하였는지 모르겠으나 ‘풍월정’이란 편액(扁額)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한다. 성종조[宣陵朝] 때에 대군에게 베푼 지극한 우애에 대하여 지금도 전송(傳誦)되고 있다. 그런데 대군의 자손이 하사(下賜) 받은 집을 대대로 지킬 수 없게 된다면, 어찌 흠이 되는 일이 아니겠느냐? 호조에서 즉시 값을 치르고 돌려주도록 하라 하였다. 그리고 월산대군 사당에 승지를 보내 제사를 올리도록 하고, 종가집이 빈한하니 본도로 하여금 먹을 것을 대주도록 하라. 이것이 바로 선왕께서 형제간에 우애하시던 성덕을 본받는 길인 것이다." 라고 전교하며 월산대군을 예우하였다.

월산대군 묘소에 치제한 글

振振公子

인후(仁厚)한 대군(大君)이여

若麟之定

기린의 이마와 같도다

園林鐘鼓

원림에 종고가 울렸음이여

際時熾盛

치성한 시대를 만났네

戩穀其終

끝까지 최선을 다했음이여

爲我貴宗

우리의 귀종이 되었네

虔揭有祠

위패를 모실 사당을 지었으니

捐出大農

큰 비용을 연출하였네

肅予以過

엄숙히 내가 들러서

拜陵前夕

능묘에 참배하는 전날 저녁에

醑旨爇馨

맛있는 술 향기롭게 갖추어 올리니

冥冥者格

영령이여 임하소서

월산대군 이정의 묘소에 치제한 글

在周泰伯

주 나라에 태백이 있고

在漢東海

한 나라에 동해왕(東海王)이 있었으니

鐘鼎江湖

왕실로서 자연 속에 노니는 때에

風月無際

풍월이 다함이 없었네

煌煌寶章

임금의 아름다운 글을

紫袖絲聯

소매에 넣어 뒀다 자주 보내셨고

芳樹金樽

향기로운 나무와 금으로 만든 술 그릇에

盛跡猶傳

성대한 자취가 오히려 전해지네

河淸舊甲

드물게 돌아오는 구갑을 맞아

陵柏有霜

능묘의 송백에 서리가 내리는데

瞻望玄兆

대군의 무덤을 바라보니

高峯之陽

높은 봉우리의 양지쪽이로다

先后之思

선후의 생각이

我公于最

우리 공에게 가장 간절하니

窈窕秋原

그윽한 가을 언덕에

牲酒是賚

희생과 술을 드리네

순조(純祖), 고종(高宗)때에도 조정에서 신하를 보내 왕을 대신하여 제사를 올리기도 했을 정도로 우대를 하였다.
월산대군이 살던 저택인 연경궁은 이후 임진왜란때 궁궐이 불타자 선조가 임시 궁궐로도 사용했고 광해군, 인조를 거치며 방치, 훼철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구한 말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한국사의 중요한 사건들이 이곳에서 일어나기도 하였는데 지금의 덕수궁[20]이다.

5. 가계도


[image] 본 내용은 전주이씨 월산대군파와 계성군파의 족보를 참조했으며 양자 입적과는 관계없이 실제 혈연 기준으로 딸을 제외한 아들 8대손까지 기술함
  • 현조부 태조 이성계(1335 ~ 1408) / 현조모 신의왕후 한씨(1337 ~ 1391)
  • 고조부 태종 이방원(1367 ~ 1422) / 고조모 원경왕후 민씨(1365 ~ 1420)
  • 증조부 세종 이도(1397 ~ 1450) / 증조모 소헌왕후 심씨(1395 ~ 1446)
  • 조부 세조 이유(1417 ~ 1468) / 조모 정희왕후 윤씨(1418 ~ 1483)
    • 부친 덕종 이장(1438 ~ 1457) / 모친 소혜왕후 한씨(1437 ~ 1504)
      • 본인 월산대군 이정(1454 ~ 1488) / 정실 승평부대부인 박씨(1455 ~ 1506) / 측실 원주김씨(생몰년 미상)
        • 독자 덕풍군 이이(1485 ~ 1506) / 자부 현부인 파평윤씨(1482 ~ 1536)
          • 장손 파림군 이주(1500 ~ 1541)
            • 증손 양천도정 이성(1526∼1587)
            • 증손 양원도정 이혜(1538∼1591)
              • 현손 이사인
              • 현손 이호인(1562∼1599)
                • 6대손 이희맹(1591∼1653)
                  • 7대손 이석번
                    • 8대손 이강
                    • 8대손 이위
                    • 8대손 이수
                    • 8대손 이온
                    • 8대손 이휘
                    • 8대손 이계
                    • 8대손 이소
                    • 8대손 이표
                    • 8대손 이영
                    • 8대손 이찰
                    • 8대손 이미
                    • 8대손 이곡
                  • 7대손 이석만
                    • 8대손 이구
                    • 8대손 이집
                    • 8대손 이기
                    • 8대손 이치
                    • 8대손 이종
                • 6대손 이희안
                  • 7대손 이석무
                    • 8대손 이찬
                    • 8대손 이적
                    • 8대손 이담
                  • 7대손 이석훈
                    • 8대손 이경
                    • 8대손 이현
                    • 8대손 이진
                  • 7대손 이석형
                    • 8대손 이회
                    • 8대손 이륜
                    • 8대손 이천징
              • 현손 이유인(1567∼1609)
              • 현손 이응인
                • 6대손 이희질
                  • 7대손 이석총
                  • 7대손 이석조
                    • 8대손 이두산
                  • 7대손 이석대
                    • 8대손 이두우
                    • 8대손 이두명
                  • 7대손 이석창
          • 차손 계림군 이유(1502 ~ 1545)
            • 증손 연양군 이시
            • 증손 금양수 이형
            • 증손 운양수 이후
            • 증손 정양군 이회
              • 현손 회은군 이덕인
                • 6대손 이팽형
                  • 7대손 이득춘
                    • 8대손 이봉림
                    • 8대손 이흥림
                    • 8대손 이경림
                    • 8대손 이취림
                    • 8대손 이무림
                    • 8대손 이계림
                    • 8대손 이성림
                    • 8대손 이승림
                    • 8대손 이태림
                    • 8대손 이효림
                    • 8대손 이동림
                    • 8대손 이신림
                    • 8대손 이원림
                • 6대손 이복형
                  • 7대손 이수문
                    • 8대손 이최량
              • 현손 회덕정 이처인
                • 6대손 이재형
                  • 7대손 이종뢰
                    • 8대손 이계량
            • 증손 은양군 이량
              • 현손 일선도정 이숭인
                • 6대손 이동형
                • 6대손 이시형
                  • 7대손 이수방
                  • 7대손 이수화
                  • 7대손 이수춘
                  • 7대손 이수창
                    • 8대손 이경승
              • 현손 적선군 이득인
              • 현손 숭선부정 이부인
              • 현손 정선부정 이안인
                • 6대손 이유형
                  • 7대손 이수문
                  • 7대손 이수번
                  • 7대손 이수전
                    • 8대손 이경만
                    • 8대손 이경윤
                    • 8대손 이경우
                    • 8대손 이경흥
                    • 8대손 이경점
                  • 7대손 이수장
                    • 8대손 이경조
                    • 8대손 이경유
                    • 8대손 이경지
                    • 8대손 이경복
                    • 8대손 이경록
                  • 7대손 이수완
                    • 8대손 이경창
                    • 8대손 이경태
                    • 8대손 이경만
              • 현손 영선군 이순인
              • 현손 회인정 이애남
                • 6대손 이동함
              • 현손 회의군 이철남
                • 6대손 이정정
                  • 7대손 이복뢰
                  • 7대손 이덕뢰
                    • 8대손 이상량
                  • 7대손 이몽뢰
                    • 8대손 이무량
                  • 7대손 이두뢰
                    • 8대손 이사량
                  • 7대손 이필뢰
                • 6대손 이태형
                • 7대손 이순뢰
                  • 8대손 이몽량
                  • 8대손 이득량
                • 6대손 이익형
                • 7대손 이성뢰
                  • 8대손 이수량
                  • 8대손 이최량
                • 6대손 이득형
                • 7대손 이하뢰
                • 7대손 이은뢰
                  • 8대손 이성량
                  • 8대손 이차량
                • 7대손 이진뢰
                  • 8대손 이숙량
                • 6대손 이재형
                • 6대손 이응형
                • 6대손 이창형
                • 7대손 이웅뢰
                  • 8대손 이기량
                  • 8대손 이표량
                • 6대손 이만형
          • 삼손 전성부정 이리(1506 ~ 1545)
            • 증손 영천수 이심(1524∼1542)
              • 현손 이영사
                • 6대손 이유경(1569∼1616)
                  • 7대손 이영진
                    • 8대손 이수준
                    • 8대손 이수창
                    • 8대손 이수담
                  • 7대손 이명진
                    • 8대손 이수기
                    • 8대손 이수벽
      • 여동생 명숙공주 이경근(1455 ~ 1482) / 매부 당양위 홍상(1457 ~ 1513)
        • 조카 홍백경(1471∼?)
          • 조카손자 홍윤우
      • 남동생 성종 이혈(1457 ~ 1494) / 제수 정현왕후 윤씨(1462 ~ 1530)

6. 가족과 후손


세조는 장손인 월산대군을 아끼고 총애했지만 왕권을 위협하는 인물이 되지 않기를 바랐다.[21] 그래서 이종사촌이자 글도 잘 읽지 못하는 무장 평양군 박중선(朴仲善)의 장녀와 혼인하도록 하였다. 월산대군의 정실인 승평부대부인 박씨(昇平府大夫人 朴氏)는 본관이 순천이며 중종반정 1등 공신 박원종의 큰 누님으로 대군보다 한 살 연하였는데 장안에 소문난 미인이었다. 성품도 선하며 온화했고 시어머니인 인수대비나 시동생 성종에게 있어서는 상당히 후덕하고 순종적인 며느리이자 형수였다고 한다. 이에 인수대비의 큰며느리 사랑이 유별났으며 성종도 예우가 극진하였다.
박씨 부인은 조정 중신 부인 모임에 이끌려 나가더라도 일일이 월산대군의 허락을 받았으며 일절의 청탁을 받지 않는 등 전혀 잡음이 없었다. 남편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 내조 같은 것들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또 한 가지 사례다. 하지만 34살의 젊은 나이에 월산대군과 사별하고 청상과부가 되고만 박씨 부인은 남편과 금술이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불임이여서 슬하에 자녀가 한 명도 없었다. 그래서 일찍 세상을 떠난 다섯째 여동생의 딸인 장경왕후 윤씨를 자신의 집에 데려와서 소학(小學), 내훈(內訓) 등 여러 편을 가르치며 길렀다.
또한 박씨 부인은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슬하에 장성한 아들이 없었기에 본인이 직접 월산대군묘 옆에 여막을 짓고 아침 저녁으로 곡하면서 상식을 올리며 3년 상을 치렀다. 이후 홀로 된 박씨 부인은 독실한 불자였는데 월산대군묘 근처에 대군의 원찰인 흥복사를 창건하고 불사를 자주 일으켜 남편의 명복을 비는 것으로 소일했다.
그리고 월산대군의 측실 원주김씨 소생인 서자 덕풍군을 적자로 인정해주고 윤임과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윤씨의 아버지인 파원부원군 윤여필과 혼인한 자신의 다섯째 여동생의 장녀와 혼인시켜 월산대군의 제사를 받들게 했다. 말년에 연산군의 부탁으로 어린 세자를 키우면서 지내다가 1506년(연산군12) 병에 걸려서 위중하였는데 박씨 부인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평소 존경하고 사랑하던 남편을 끝까지 따르겠다."며 월산대군 봉분 옆이 아닌 뒷자리에 묻어 달라고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월산대군은 평생을 자연과 벗 삼으며 전국을 여행하면서 풍류적인 생활을 하였지만 기방 출입이나 여색을 멀리하기로 정평이 나있었다고 한다. 성종은 형이 나이 30세가 넘도록 아직까지 후사가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오다가 형수인 승평부대부인 박씨 생일을 맞아 겸금(兼金)[22]을 아끼지 않고서 훌륭한 장인을 불러 황금 여섯 냥으로 만든 메뚜기 형상을 선물하면서까지 임신을 기원했으나 오랫동안 소식이 없자 어느 날 월산대군이 원주에 머물고 있을 때 성종의 명을 받은 원주 현감이 한 규수로 하여금 대군을 옆에서 잘 보필하도록 꾸몄는데 월산대군이 가까이하기는 했으나 정식으로 후실로 들이지 못하고 세월만 보내다가 병을 얻어 35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이 측실인 부호군 김량신(金良信)의 딸 원주김씨(原州金氏)에게서 서자 덕풍군 이이(德豊君 李恞)를 두었다. (1488년(성종19) 조선왕조실록 월산대군의 졸기에는 서자가 2명이 있었다고 하였는데 1494년(성종25) 외조부 한확의 신도비명에는 서자가 1명 있다고 기록된 걸로 봐서 덕풍군 외에 아들은 조졸[23] 한듯하다) 김씨 부인은 월산대군과 정실 승평부대부인 박씨를 모시는데 소홀함이 없었으며 지극정성으로 보필 하였다고 한다. 김씨 부인의 묘는 길 건너에서 월산대군묘를 향하여 마주 보고 있다.
덕풍군은 윤임의 누님이자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의 언니인 파원부원군 윤여필(尹汝弼)의 장녀와 혼인하여 슬하에 3남을 두었다. 장남 파림군(坡林君) 이주(李珘)는 학문을 좋아하고 검소하였으며, 을사사화가 일어나기전에 세상을 떠나 화를 면했고 차남 계림군(桂林君) 이유(李瑠)[24]와 삼남 전성부정(全城副正) 이리(李璃)[25]는 을사사화때 연루되어 사사당하였다.
그러나 파림군, 계림군, 전성부정의 자녀들은 화를 피해 대를 계속 이어 나갔고 현재 전주이씨 월산대군파와 계성군파로 이어지고 있다. (계림군의 후손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국민의 정부때 노동부 장관을 지낸 이기호가 있으며 월산대군의 후손들 중에서는 경기도 동두천시 부시장을 지낸 이성호와 육군 중장 출신으로 23대 국가보훈처장을 지낸 이재달이 있다. 또한 조선 말에 철종의 형 영평군 이경응의 양증손자가 된 청풍군 이해승은 실제 혈통으로는 월산대군의 장손 파림군의 14대손이다)
6세 집의 이희맹(李希孟)은 병자호란 당시 성하지맹(城下之盟)에 참여하여 대의를 존중하고 지켰으며 자손들에게 관직과 부귀영화를 탐하지 말라는 유훈을 남겼다.
후손들은 이를 지켜 사마(司馬) 양시(兩試)에 합격하고도 조정에 출사하지 않고 학문을 탐구하는 선비들이 많이 배출되어 조정에서 여러 후손들에게 증직을 내리고 포상하기도 하였다.
8세 성재공(醒齋公) 이형(李炯)은 숭조의 정신이 지극하여 실전된 월산대군의 유고를 전국을 두루 다니면서 찾아 모아 풍월정집(風月亭集)을 중판 발간하였다.
13세 육은공(六隱公) 이봉규(李鳳圭)는 석광사(錫光祠)를 중수하고 우면산에 태봉(胎封)을 봉축하는 등 대대로 내려오면서 숭조의 정신과 우애하는 마음이 돈독하였다고 한다.
현재 계림군의 후손들은 경기도 고양시, 제주시에 월산대군의 후손들은 경기도 고양시와 화성시, 대전시, 충청도에 다수 거주하고 있다. 월산대군 후손이 계성군파로도 분파된 이유는 손자 계림군이 성종의 서자 계성군의 양자로 입적되었기 때문이다.[26]
매년 월산대군의 기일인 음력 12월21일에 월산대군 사당에서 거행되는 기신제와 덕종(의경세자)과 소혜왕후 한씨(인수대비) 경릉의 제향을 월산대군 후손 전주이씨 월산대군 파종회에서 주관하고 있으며 1990년에는 풍월정집 한글 번역본을 발행하였다.
(고양일보-덕종대왕 562주기·소혜왕후 515주기, 경릉 제향)
전주이씨 월산대군파의 항렬자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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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월산대군 신도비명


조선국 순성명량경제좌리공신 월산대군 증시 효문공 신도비명과 서문. 절충장군 행충무위 대호군 임사홍(任士洪)이 왕명을 받아 지음.
전(傳)에 “어진 사람은 오래 산다”고 했다. 그러나 안회(공자의 제자) 같은 사람은 단명(33세)하고, 도척이 장수한 것을 보면, 오래 산 사람이 반드시 어진 것은 아니고 어진 사람이 반드시 오래 사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내가 그 이유를 궁리한 지 오래 되었는데 지금 월산대군을 보니 더욱 유감스럽고 슬픈 마음 금할 수 없다.
우리 전하께서는 하늘이 내린 훌륭한 성인으로 요(堯) 임금과 순(舜) 임금처럼 준철해서 정성과 효성으로 양궁(兩宮)을 모시고 있다. 또 지극한 인자함으로 일가친척을 친하게 대해 덕은 아랫사람에게 미치고 백성들은 믿음으로 따라 요순시대 같은 태평성대가 도래하게 되었다.
그런데 바야흐로 천륜의 즐거움을 펴려고 할 때 대군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으니 누가 생각이나 했겠으며 어떻게 슬픔을 멈출 수 있겠는가? 장례가 끝난 지 달포 뒤 전하께서 내게 하교했다. “내게 형 한 분뿐인데 홀연히 구천으로 떠나버리니 창자가 찢기는 듯하나, 겉으로는 억지로 참고 있다. 아무리 부의를 많이 보내고 증직을 해주며 제사를 부지런히 지낸들 내 곡진한 정이 없어지지 않으니 사람들의 이목에 들어온 형의 덕행을 글로 지어 돌에 새겨 신도비를 세워 없어지지 않게 하라.” 그리고는 내게 명(銘)을 지으라고 명했다. 나는 황급히 실상을 가려내 글을 지었다.
대군의 자는 자미(子美)이고, 정(婷)은 이름이다. 전하의 형으로 경태(景泰) 갑술년(1454년) 12월 18일 갑오일에 출생했다. 타고난 성품이 빼어나게 훌륭하고 총명함이 남달라 세조가 애지중지하여 궁중에 두고 기르면서 사어서수(射御書數)를 직접 가르쳤다. 전하가 성장하면서는 같이 거처하고 같이 놀게 하여 크고 작은 행차에는 뒤를 따르게 했으며, 가끔 궁중에서 놀이가 벌어져 함께 즐겁게 노는 모습을 보고 웃곤 했다.
천순(天順) 경진년(1460년) 대군의 나이 7살 되던 해에 월산군에 봉해지고 정의대부의 자급이 내려졌으며 임오년(1462년)에는 중의대부로, 성화(成化) 을유년(1465년)에는 흥록대부로, 무자년(1468년)에는 현록대부로 자급이 올랐다. 신묘년(1471년)에 월산대군에 봉해졌는데 전하가 등극한 지 3년째 되는 해였다. 같은 해에 조정에서 논열하여 순성명량경제좌리공신에 책봉되었다.
대군의 고아한 성품은 고요하고 맑아 화려하고 소란스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아 음악과 사냥 같은 일에는 마음을 두지 않고 오직 서사(書史)에 파묻혀 지냈다. 이미 대의(大義)를 터득하고 소장하고 있는 백가자집을 두루 섭렵한 것도 부족하여 새로운 책이나 알려지지 않은 글이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기어이 사서 구했다. 구한 책은 등불을 켜놓고 밤을 새워서라도 다 읽었다.
문장은 정치하고 순수하며 맑고 아름다워 율격이 높아 자못 위진(魏晋)의 풍미가 있었으므로 당대의 문인과 시인들이 “우리나라의 왕자와 왕손 중에 일찍이 이렇게 훌륭한 솜씨는 없었다.” 고들 하면서 탄복했다. 여러 사람들의 시를 차운한 한도십영(漢都十詠)은 강한 운을 적절하게 눌렀고 시어는 예스럽고 뜻은 원대하여 풍치가 유달랐다. 이것 하나만 봐도 다른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밖에 상물사회(狀物寫懷-사물을 묘사함으로써 자기의 생각을 드러냄)에 있어서도 자기만의 기틀이 있어 옛날 사람들이 남긴 발자취를 답습하지 않았으므로 한번 읽으면 잊혀지지 않았다.
저술한 시문 약간은 전하와 주고받은 내용들로 우애의 정이 베어있다. 왕이 자주 대군의 집을 방문했는데 집안사람을 대하는 예로 접대하니 어렸을 때처럼 즐거워하며 수많은 하사품을 내렸다. 왕이 대군의 집 서쪽 정원에 있는 정자에 가서 정자 이름을 ‘풍월’이라고 지어주고 친히 오언 율시의 근체시(近體詩)를 지은 다음 측근 신하들에게도 시를 짓게 했다. 이런 일 역시 특별한 은총이었다. 대군은 본래 산수를 좋아하여 고양의 북촌에 별장을 두고 시간 날 때마다 가서 구경하며 시도 읊으면서 흥취를 붙였다. 왕이 그것을 알고 중관에게 술을 들려 보냈다.
병신년(1476년) 사신으로 온 명나라 호부시랑 기순(祁順)이 대군의 거동과 풍모가 매우 한가하면서도 단정하고 예절이 있는 것을 보고 특별히 좋아하고 공경하여 시를 지어주었다. 계묘년(1483년) 봄 정희대왕대비와 인수대비, 인혜왕대비가 함께 온양온천에 행차할 때 대군이 호종하게 되었다. 대군은 이씨의 본향인 전주에 있는 태조의 영정에 참배하라는 왕명을 받았다. 대군의 풍도를 멀리서 바라본 남방의 백성들은 모두들 감탄했다.
조정의 신하들은 길에서 왕자를 만나면 말에서 내려 공수하고 서서 그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도록 법으로 정해져 있었다. 그 때문에 대군은 사전에 행차를 알려 피해 가게 했다. 전에 문소전과 종부시의 제조를 맡겼으나 기어이 사양한 적도 있어 세상 사람들은 그 겸양하는 미덕을 칭찬했다.
천성이 조심스럽고 근신하여 매일 아침 왕에게 문안을 드렸는데 아무리 춥거나 더워도 거르는 일이 없었으며, 간혹 활쏘기를 같이 하거나 조용히 정담을 나눌 때 아무리 만취했더라도 법도에 어긋난 행동을 하지 않았다. 평생 문사들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함부로 사귀지는 않아 집안이 조용하고 수레나 말이 왕래하지 않았다.
홍치(弘治) 원년(1488년) 9월 인수왕대비의 병이 심해져 궁 밖으로 나와 여러 집을 옮겨 다니면서 치료하게 되었다. 대군이 온종일 마음을 졸이며 침식도 잊고 탕약에 힘쓰다가 자기도 병에 걸렸다. 궁액(宮掖)들이 놀라고 문병객이 줄을 잇자 모시는 사람들이 거처를 옮기라고 권했다. 며칠 지난 뒤 대군은 자기 병에 차도가 없는 것을 알고 속히 집으로 돌아와 처방전을 찾아 증세를 알고자 했다. 모시는 사람이 일부러 지체하며 주지 않자 대군은 “죽고 사는 것은 운명인데 처방전을 본다고 마음이 달라지겠느냐?” 하고 말했다. 처방전을 본 뒤 부인 박씨에게 말했다. “내가 살아날 가망이 없으니 사별을 해야겠습니다.” 조금 있다가 “다시는 왕의 얼굴을 뵙지 못하겠구나.”라고 말한 뒤 한참동안 오열하다 담담하게 서거했다.
왕이 대군의 위급한 소식을 듣고 가보려고 차비를 하고 있던 중 중관이 달려와 때가 이미 늦었다고 보고했다. 왕은 너무 슬퍼 어찌할 바를 몰랐고 신하들로부터 거리의 백성들까지 애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날짜는 1488년 12월 21일 이었다. 조정과 저자를 사흘간 닫았고, 태상시(太常寺-시호를 주관하는 관서)에서는 ‘효문’이라는 시호를 정했으며, 부의는 다른 때보다 두 배를 내렸고 장례를 지내는 도구도 필요한 대로 쓰도록 했다. 또 대신에게 장지를 잡으라고 명하여 고양 별장의 서쪽에 정했다. 이것은 왕이 애도하는 마음에 구천을 떠도는 영혼을 위로하려는 뜻에서 나온 결과였지만, 대군이 마련한 별장 곁에 자기의 영혼이 쉬게 되었으니 어찌 천명이 아니겠는가? 왕과 대비는 길지를 얻었다고 좋아하고 특별히 청성군 한치형(韓致亨)에게 일을 맡겼다.
기유년(1489년) 3월 3일 경신일에 백관이 참여한 가운데 장례를 치렀다. 부인 박씨는 평양군 중선(仲善)의 딸로 현숙했다. 묘 옆에 여막을 짓고 아침저녁으로 음식을 올리고 곡하면서 종신토록 변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작은 부인에게서 아들 둘을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생각해보니 대군은 인자하고 효성스럽고, 지혜가 밝고 총명한 데다가 학문까지 갖추었기 때문에 성취한 것이 남달랐다. 귀하기는 왕의 아들이고 높기로는 왕의 형님으로 왕의 사랑을 받고 삼궁(三宮-정희, 인수, 인혜대비)의 총애를 받았으니 성덕이 아니면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수명이 길지 못한 것이 애석할 따름으로 내가 하늘의 이치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내가 전에 양한(兩漢)의 “제왕전(諸王傳)”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중위 상려(常麗)가 하간왕(河間王) 덕(德)에 대해 “몸가짐은 단정하고, 행실은 온화, 인자, 공손, 검소, 독실, 공경하며, 선비를 밝게 보고 깊이 살폈다.” 고 칭찬했다. 대행령(봉상시와 같음)이 시호를 짓는 법에 대해 “총명하고 예지가 있는 것을 헌(獻)이라고 하니 마땅히 헌으로 시호를 정해야 합니다.”고 했다. 반고(班固-한나라 역사가)는 이에 대해 “크게 고아하여 뛰어나게 탁월한 사람으로는 하간 헌왕이 근접할 것이다.”하고 찬(贊)을 썼다.
장제(章帝-후한 3대 황제)가 동평왕 창(東平王蒼)을 책봉하면서 “왕을 도와 예에 벗어난 일이 없었고 전교를 들을 때는 아래 서서 들었다. 하늘이 자애롭지 못해 위로 보답하지 않았다.” 범엽(후한서를 지음)은 이에 대해 논했다. “공자는 ‘가난하면서도 아첨하지 않고 부자이면서도 교만하지 않는 것이, 가난하면서도 도를 즐기고 부자이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것 보다 못하다’고 했는데, 동평 헌왕이야말로 예를 좋아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내 소견으로는 대군은 사실 두 가지를 다 겸했으나 자제들만은 많이 부족했다. 재주가 부족한 내가 감히 두 왕의 어진 점을 칭송하면서 대군에게 빗댄 것은 오래오래 그 덕을 드날리게 하고자 하는 욕심 때문이다. 나 역시 반고와 범엽을 사모하여 삼가 머리 숙여 본떠서 비문을 짓고 명을 붙이기는 했지만, 전하의 돈독한 우애에 들어맞지 못할까 심히 두려울 뿐이다. 명왈(銘曰),

하늘이 조화를 맡아 선악이 갈라지니

덕을 주었으면 수명도 줘야 하는 법

때로 고르지 않아 이치 알기 어렵네

개국한 이래로 성자 신손 계승하고

훌륭한 왕족이 끊어지지 않았으나

누가 대군처럼 재주와 덕 겸했는가?

대군이야말로 세운 뜻 높고 높아

공명을 멀리하고 경서만 탐했네

백가를 섭렵하고 박약으로 귀결하여

문장을 지으면 옥구슬을 꿴 듯하네

크나큰 솜씨도 손이 굳고 한숨이라

뛰어난 묘구 ‘한도십영’에 있다네

임금의 글과 시 공에게만 지어주고

화답하라 명하니 우애 생각함이라

우애는 말이 되고 글로써 즐기니

두터운 은우 힘으로 못 이기네

공경한 마음 교만하지 않는 안색

널리 소문나 온 조정에 퍼졌고

거동은 얼음 항아리 속 옥 같고

봄바람 같은 보살핌 따뜻한 은혜

모두 좋아하여 사신도 감복하네

벼슬은 세상이 영화로 여기는 일

공은 그렇지 않아 굳이 사양하니

겸양의 미덕은 청사에 빛나리라

매일아침 하는 문안 거르지 않고

한 발짝 움직임도 법도를 따랐네

절도 있는 행의는 고금에 드물어

동평왕의 착함과 하간왕의 어짐

그 이름 드높아 뉘 감히 비기랴?

천년 뒤 여기 공이 다시 있어

신성한 우리 임금 효로 다스리고

우애하여 체화(형제간의 우애) 더욱 빛나네

갑작스런 재앙 하늘의 뜻이나

임금의 정 어찌 두고 떠나는가?

구천에 위로삼아 묏자리 잡으니

그곳 어디인가? 고양 북쪽이라

무성한 풀에 나무는 빽빽하고

산과 물 돌고 감아 마땅한 유택이라

어제의 별장이 오늘은 현궁이니

미리 정했다면 하늘과 통함이라

영원히 평안하길! 높다란 무덤

왕명으로 비 세워 빛나는구나

살아서의 영광 죽어서의 슬픔

천년만년 그 아름다움 퍼지리라

부족한 글로 덕을 써 전하노라

홍치(弘治) 2년 기유년(1489년) 월 일

8. 친동생인 성종과의 우애


임금이 말하기를,

"월산대군(月山大君)은 나의 하나뿐인 형(兄)이다."

성종실록 60권, 성종 6년 10월 24일 경자 3번째 기사中

월산대군은 친동생인 성종과의 우애가 매우 돈독했다고 한다. 보통 왕의 형으로 지내면서 왕위계승과 관련해 형제간의 골육상쟁을 피해갈 길이 없는데 이들 형제는 우려와 달리 평생 우애가 좋았다.[27]

성종은 월산대군과 우애가 도탑고 지극하여 서로 대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였으며, 시편(詩篇)을 창수(唱酬) 하면서 쉬는 날이 없었다. 상방(尙方)의 정미하게 만든 물건과 내부(內府)의 진선(珍膳)은 연락 부절(連絡不絶) 하였으며, 친히 화상찬(畵像贊)을 지어 하사하기도 하였다.

국역증보문헌비고, 제45권 제계고6 부록 종실의 고사 돈서 내용中

먼저 형인 월산대군은 임금인 동생에게 짐이 안되기 위해서 가능한 정치적으로 엮이지 않기 위해 노력했는데 시와 술을 벗삼아 풍류적인 생활을 하면서 조용히 살았다고 한다. 사람도 함부로 사귀질 않아 집앞이 적막했으며 실제 월산대군과 교우관계에 있었던 문인과 종친들은 조신, 임덕여, 부림군, 강양군, 주계군과 처남인 박원종 이외에 교류하는 사람들도 극히 적었다.[28]
세종의 서자 계양군의 아들 부림군[29] 이식이 먼저 세상을 떠난 월산대군을 애도하는 시를 남겼는데 다음과 같다.

悼子美(도자미)

자미를 애도하며

冥寞人間隔(명막인간격) 

적막하게 인간 세상과 헤어져 

嗟君向此行(차군향차행)

아아 그대 이렇게 떠나다니

英靈埋厚土(영령매후토)

영령은 땅에 묻히고

名字寄銘旌(명자기명정)

이름은 명정에 부쳤네

鳥噪高陽宅(조조고양택)

새는 고양의 옛집에 울고

雲封望遠亭(운봉망원정)

구름은 망원정을 에워쌌네

遺稿盈一篋(유고영일협)

유고는 상자에 가득하니

千載揖芳馨(천재읍방형)

천년 후에도 그 향기에 절하리라

친동생인 성종 또한 월산대군을 생각하는 마음이 지극하고 각별해서 궁궐에 연회가 있을 때마다 형님을 불러서 모셨고 월산대군은 잔치에 입시할 때 항상 종친과 신하들보다 왕의 바로 옆인 제일 윗 자리에 배석하였으며 성종은 일본과 명나라 사신 접대 자리에 반드시 월산대군을 초청하여 연회를 함께 즐겼다.[30] 또 성종은 스스로 좋은일이 있으면 반드시 월산대군과 함께 즐겼는데 하루는 새로 수확한 맛 좋은 참외를 먹다가 문뜩 형이 생각나서 어제시와 함께 참외를 하사하기도 했으며 맛있는 먹거리가 생기면 늘 혼자 먹지 않고 같이 먹었다고 한다. 월산대군이 한강변 정자에서 시를 짓고 뱃놀이와 낚시를 한다는 말을 들으면 성종은 술과 각종 궁중 음식을 보내주어 형을 위안해 주기도 했고 월산대군 또한 계절마다 웅어, 황복, 잉어 등 직접 낚아올린 물고기라든지 궐 밖에서 구한 맛있는 음식들을 성종에게 보내서 즐기게 하였다.
월산 대군(月山大君) 이정(李婷)이 내전(內殿)에서 선온(宣醞)을 가지고 이르렀는데, 은호(銀壺)가 세 개였다. 은호의 양면(兩面)에는 금(金)으로 글자를 썼는데 혹은 오언시(五言詩)이거나, 혹은 칠언시(七言詩)이었다. 그 제목(題目)에 이르기를 ‘형(兄)과 함께 기뻐한다[與兄歡]’하였고, 또 이르기를 ‘형(兄)을 위하여 짓는다[爲兄作]’하였는데 모두 어제시(御製試)였다. 전교하기를,
"대군(大君)에게 은호(銀壺)에 시(詩)를 새겨서 주려고 하였는데 뜻하지 아니하게 대군이 나가서 경 등에게 보여주었으니, 내가 매우 부끄럽게 여긴다. 그러나 경 등은 그 운(韻)에 의하여 화답(和答)하도록 하라."
하니 이조 판서(吏曹判書) 서거정(徐居正)·병조 판서(兵曹判書) 유지(柳輊)·이조 참판(吏曹參判) 김유(金紐)·병조 참판 어세겸(魚世謙)·도승지(都承旨) 김계창(金季昌) 등이 모두 화답하여 바쳤다.
성종은 월산대군에게 많은 물품들을 하사 하였는데 이중에서 알려진 것들 몇 가지 소개하자면 효령대군에게서 얻은 희우정(망원정)이라는 정자를 월산대군에게 선물하였고 금으로 성종의 어제시를 세긴 선온, 일본 국왕이 보내온 냄비, 숟가락, 금부채, 천아(天鵝), 경기 관찰사가 바친 흰 기러기, 성종이 형의 장수를 빌고 근심을 깨뜨리길 바라며 '백년배'라는 이름을 짓고서 직접 제작한 우수한 구리 술잔과 하품의 옥 술잔, 성종이 형수(승평부대부인 박씨)의 생일을 맞아서 임신을 기원하며 겸금을 아끼지 않고서 훌륭한 장인을 불러 좋은 말로 깨우쳐 황금 여섯 냥으로 만든 메뚜기 형상 이외에도 중미, 황두, 청밀, 진유, 진맥, 면포, 정포, 사슴, 붕어, 이화주, 홍소주, 인삼차, 우각차, 설화차, 소룡차, 단봉차, 작설차, 청심연자음, 참외, 후추, 매, 황리, 강매, 밀감, 귤, 인삼, 황감, 산다화, 불두화, 먹, 벼루, 자문지, 유둔, 어의, 비단, 목면, 녹색 사모, 아청색 화문의, 돈피 이엄, 도홍색, 목면으로 만든 홑단령, 초록색 운문 비단으로 만든 핫더그레, 대홍주 철릭, 백주 과두, 한삼, 비단철릭, 유고, 침향목에 순금으로 배꽃 문양을 장식한 띠, 녹피화, 필단 초피 이엄, 감토 이엄, 서피 내공 주유 과두, 이피 내공 녹비화, 단의, 당표리, 호피, 대홍 필단, 초록 필단, 남라, 아마, 유마, 내구마, 조방양마 등 수 많은 물품들을 직접 지은 시와 글과 함께 자주 보내서 형제애를 돈독히 나누었다.

춤추는 거위(舞鵝)

일본국에서 천아(天鵝) 한 쌍을 진상해 왔는데 상께서 궁중에 두지 않고 즉시 월산대군(月山大君)에게 하사했던바 상께서 그 집에 행행(行幸) 했을 때 마침 거위가 음악 소리를 듣고 빙빙 돌며 춤을 추었다.

성현 허백당집(虛白堂集), 제6권 내용中

월산대군은 날이 추우나 더우나 매일 아침 입궐하여 삼대비전과 성종에게 문안을 드렸고 대군이 궐 밖으로 나가있을 때는 서로 편지로 시를 수창(酬唱)[31]하면서 하루도 빠짐없이 안부를 묻곤 했다고 한다. 성종은 월산대군과 잠시 떨어져 있을 때에도 형을 그리워했는데 혹여나 형이 적적해 하거나 건강을 염려하여 시를 쓴 편지와 함께 각종 먹거리와 물품들을 먼 지방까지 여러 차례 보내기도 했었다. 아래는 성종이 월산대군에게 보낸 편지글의 일부분이다.

봄날에 회포를 진술하다. (春日陳懷)

형이 쓸쓸히 앉아 있는 것을 생각하다. (憶兄寂坐)

입춘에 시를 지어 화답을 요청하다. (立春拙賦求和)

안부를 묻고 한가함을 틈타서 시를 짓다. (安否乘閑作詩)

대군을 위해 봄날에 절구를 짓다. (爲大君春日絶句)

대군을 위하여 두견화 시를 짓다. (爲大君作杜鵑花詩)

개구리 소리를 듣고 장난삼아 바로 부를 짓다. (戱寫鳴蛙卽賦云)

날이 추워 특별히 술을 내리고 아울러 시를 짓다. (日寒特賜酒倂題)

윤정월 눈이 쌓인 속에서 지은 시에 화답하다. (和閏正月雪中題韻)

형이 왕자의 탄생을 읊은 시에 삼가 화답하다. (恭和尊兄誕王子韻)

밤에 앉아 빨리 시를 지어 이효지 편에 부치다. (夜坐走筆 付孝智傳)

석양을 마주하여 형을 생각하며 서툴게 율시를 짓다. (對斜暉 憶兄拙律)

중사 이효지를 파견하여 선온과 시를 보내다. (遣中使李孝智送宣醞幷詩)

안부를 묻고 불두화 한 가지와 시를 봉하여 주다. (安否封贈佛頭花一枝幷詩)

가을에 형과 후일에 유람하기로 약속한 것을 떠올리고 회포를 쓰다. (秋日憶兄約後日之遊 寫懷)

형이 오지 않는 것을 한탄하며 시를 써서 한바탕 웃음을 산다. (恨尊兄不來 爲寫拙詩 以買一粲)

단오에 형을 위해 시를 지으니 비루하다 여기지 말고 질정을 구한다. (端午日爲兄拙作 勿陋求正)

내가 병을 앓고 난 뒤 형을 생각하며 근체시를 지으니 비웃지 말고 화답하라. (予病餘 憶兄拙賦近體 勿笑是和)

어제 고맙게도 말고기와 포도차를 보내주었기에 시를 지으니 비웃지 말라. (昨日惠送馬腹與葡萄茶 作拙詩勿哂)

안부로 지금 인삼차 세 근과 근체시 한 편을 보내니 한바탕 웃었으면 한다. (安否今賜送人參茶三斤 幷近體一篇 一哂)

갠 하늘을 바라보며 시 두 수를 지으니 비웃지 말고 화답하여 보내줌이 옳고도 옳다. (作望晴二首 勿笑和送 是可是可)

초봄에 영산홍을 보고 쓸쓸히 앉아 있는 형을 떠올리며 시를 지어 봉함하여 보내다. (早春見暎山紅 憶兄寂坐 爲賦封送)

늦봄 삼월이 국기이기 때문에 조용히 안석에 기대어 있다가 형을 불러 배율을 짓다. (暮春三月 以國忌靜然憑几 却招尊兄 爲賦拙律)

진상한 생선 여섯 마리를 받고 매우 기뻐서 시로 보답하니 수창은 다른 날에 해도 된다. (受所進鮮魚六尾 甚喜 報之以詩 所酬在他日也)

사월에 비가 온 뒤 쓸쓸한 형을 떠올리며 궁중의 일을 적어 심심풀이로 삼으니 비웃지 말라. (四月雨後 憶兄寂歷 用錄宮中事爲破閑 勿笑)

빗속에 형이 나에게 준 것을 생각하고 한결같은 시를 지었는데, 비루하다고 여기지 말고 가르침을 달라. (雨中憶兄之與予 一般拙賦 勿陋見敎)

오늘 아침에 보내는 사슴의 배 속에 편지가 있으니 형이 한바탕 웃을 수 있을 것이다 고시를 짓는다. (今朝所送鹿尾之腹有書 兄之可以爲一笑者也 作古詩)

듣건대 오늘 형이 득남하였기에 경하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먼저 기쁨의 시를 짓고 뒤에 회포를 펼치겠다. (聞今日兄得男 不堪慶賀 先作喜詩 後當展懷)

나는 특별한 목면 한 필이 있어서 형을 생각하며 지금 내리고 아울러 시를 쓰니 사양하지 말고 화답하라. (予有別樣木綿一匹 憶兄今賜 幷書拙詩 勿謝只和)

어제가 원정이라 시를 보내 뜻을 보이고자 하였으나 겨를이 없었다. 오늘 시를 지으니 한바탕 웃었으면 한다. (昨日元正 欲贈詩以示意 然無暇焉 今日拙稿一笑)

어찌하여 어제와 오늘도 안부가 들리지 않는가? 나는 마음이 유쾌하지 않아서 소회를 편지에 쓰고 또 서툰 시를 짓는다. (安否何其昨與今無聞來 予心不快 敢以所懷作簡 且賦拙篇)

형이 매우 쓸쓸함을 알아 재주가 천박함을 헤아리지 않고 털 빠진 붓을 뽑아 조롱박을 그렸으니 한바탕 웃었으면 한다. (知兄太寂 不揣才賤 抽禿中書君 摸畵葫蘆 爲之一笑)

자문지 네 장과 시를 내리니 비웃지도 말고 사양하지도 말라. 이 종이는 품질이 좋아 입모를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보낸다. (賜咨文紙四張幷拙詩 勿哂勿謝 此紙品好 可作笠帽 故送之)

한가롭게 앉아 형이 극심한 더위로 쓸쓸히 앉아 있는 것을 생각하다가 기쁘게도 혹독한 더위가 가셔서 부를 짓고 화답을 청하다. (閑坐憶兄之苦熱寂坐 因喜晴酷熱賦 請和)

선위사 풍천위와 이효지를 보내어 친한 이를 친하게 여기는 뜻을 돈독하게 하고, 아울러 시를 보내니 성내지 말고 오직 웃기 바란다. (遣宣慰使豐川尉及李孝智 以篤親親之義 幷詩勿怒惟笑)

오늘은 형의 생일이어서 전날 올린 붓으로 근체시 한 편을 쓰고, 아울러 아래의 변변찮은 물건으로 정성을 펼치니 비웃지 말라. (今日乃兄之生日 以前日所進尖橫 寫近體詩一篇 幷展忱薄物如左 勿笑)

병이 이미 회복되었다는 안부를 듣고 내가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한 편의 시를 지으니 어찌 꼭 억지로 화답하랴? 오직 심심풀이로 삼길 바란다. (安否病已平復 予不勝喜 爲之一詩 何必强答 惟冀破寂)

형을 위해 회포를 보이니 비웃지 않고 비웃지 않으면 매우 다행이고 무척 다행이다. 사방의 논밭에서 깊은 정을 살필 만하다. 운자는 60개이다. (爲哥致懷 勿哂勿哂 幸甚幸甚 東西阡陌 可究深情 韻是六十)

안부를 묻는다. 나는 일본 국왕이 보내온 냄비와 숟가락 각 한 개, 금부채 다섯 자루를 얻어서 형에게 보내니 사양하지 말라. 아울러 빨리 시를 짓는다. (安否 予所得日本國王所送銚鍉各一金扇子五把 贈焉勿謝 幷走筆)

여름에 쓸쓸히 앉아 있는 형을 생각하며 홍소주 다섯 병과 황리 백 개를 보내고, 겸하여 서툰 시 몇 편을 부치니 비웃지 말고 질정해주기를 구한다. (夏日憶兄寂坐 送紅燒酒五壺 黃梨百箇 兼寄拙詩數篇 勿笑勿笑 求正)

안부가 며칠 동안 오지 않았으나 그 이유를 알 수 없어서 아마도 사고가 있는가 걱정되어 저절로 근심이 생겼다. 편지와 시를 썼으나 돈독한 정에 부끄럽다. (安否數日不來 未認厥由 恐有其故 自生曲慮 作簡且詩 用篤情愧)

오늘 중관을 보내어 빈 뜰을 위로하고 또 서툰 시를 내리니, 한편으로 멀리서 그리워하는 정을 보이고 한편으로 형제의 [빠짐] 우애를 돈독하게 한다. (今日遣中官 慰來曠庭 且賜拙詩 一以視緬邈之情 一以篤鴒原之□云)

섬돌 앞에 불두화가 활짝 피어 내가 감상하다가 한 가지를 꺾은 뒤 적적하게 앉아 있는 형을 생각하며 시 한 수를 지었지만 봉함하여 보내려는 것은 아니다. (階前佛頭花盛開 予翫之 因折一枝 憶兄寂坐 作詩一首 非封送也)

하향으로 재계하고 조용히 작은 정자에 앉으니 갑자기 꾀꼬리가 낮은 담장 위로 지나가는 것을 보고서 형도 이러한 즐거움을 알 것이라 생각하였다. 바로 시를 쓴다. (戒夏享 靜坐小軒 忽看黃鶯過短墻 却憶兄亦知此樂也 卽書拙句云)

갑자기 우애의 은혜를 만나 기쁘게 문방의 보배를 받았는데, 이미 정이 가는 물건인 데다 정묘하였다. 기쁜 일이 없어서 오로지 서툴게 시를 지어 감정을 펼칠 뿐이다. (忽逢湛樂之惠 欣受文房之寶 旣爲之情玩 又爲之精妙 無以爲歡 聊以拙詞 庶展情緖云耳)

고열에도 거친 시를 지어 보내 부끄러움이 그치지 않는다. 그런데도 ‘칭찬을 그만둘 수 없다’는 말을 보고 더욱 부끄러워 땅에 엎어질 정도였다. 시를 보내왔을 때 장난삼아 빨리 시를 짓다. (苦 熱爲拙詩來 感愧不已 觀稱贊不已之語 尤慚到地 及來時 走筆以戱)

한가할 때 잠시 동안 적적한 형을 위해 부천사가 기자 무덤을 배알하며 지은 첫 번째 시에 차운하여 화답하니 다투어 비웃지 말라. 다만 시가 매우 차이가 나서 비웃을 것임은 알겠다. (閑暇暫刻 爲兄寂寞 和副天使謁箕子墓第一詩韻 勿以爭爲嗤 但以知懸絶爲笑)

봄이 가고 꽃이 져서 온 후원이 쓸쓸하여도 어찌 싫겠는가? 하늘이 큰비를 내려 바야흐로 추수할 희망이 있어 기쁘다. 생각건대 형은 조용히 앉아 있으리니, 부족한 시편을 보내지만 비웃지 말고 질정을 바란다. (春盡花落 何嫌萬苑寂寥 天將大雨 方歡西成之望 憶兄寂坐 以贈拙篇 勿笑求正)

내가 생각건대 봄과 가을은 흥이 한 가지이고 아우와 형은 뜻이 같아서 감히 가을의 사물로 아우의 정을 보내니 형께서 살펴보고 받았으면 한다. 또 국화를 읊은 율시 2수와 봄꽃을 읊은 율시 1수를 비웃지 말고 살펴보기를 깊이 원하는 바이다. (予惟春與秋一興 弟與兄同志 敢將秋物兼附弟情 惟兄察受 且菊花律二詩 春花詩一律 不哂諒察 深所願也)

오늘이 형수의 경사스러운 날임을 알아 풍속에 따라 선물을 주려고 하였으나 궁중 창고에 볼만한 물건이 없었다. 그래서 황금 여섯 냥으로 주나라의 메뚜기를 만들고, 속마음을 피력하여 사물에 가탁한 뒤 주어서 징표로 삼고 또 부를 짓는다. (今日知尊嫂之佳辰 欲脩俗以贈物 而帑藏無可見之物 故以兼金之六兩 製周家之阜螽 披懷托物 遺以成驗 且爲之賦)

안부를 들었는데 구설창은 어떠한가? 나의 경우에는 정치를 돌보는 여가에 두 도위와 여러 차례 대화하였다. 매번 궁원의 자리에서 중처럼 쓸쓸한 형을 생각하며 속으로 아파한 것이 몇 번인지 모른다. 지금 편지와 시를 보내니 한바탕 웃어라. (安否 口舌瘡何 若我則萬機之暇 與兩尉相話屢矣 每當苑席 思兄之寂然如禪 暗傷懷者 不知其幾也 今致簡幷詩 一哂)

이 먹이 지극히 좋고도 귀하지만 내가 보배로 여기는 먹은 이것보다 낫기 때문에 아끼지 않고 형에게 주니 문방의 보배로 삼기 바란다. 이에 고시를 지어 하루의 한적함을 깨트리고 장년의 웃음을 이루려고 한다. 시를 비루하다고 여기지 말고 질정을 구하고 또 먹을 사양하지 말라. (此墨至精且貴 而予之所珍 猶勝乎此 故不惜以贈 爲作文房之寶 仍題古詩 以破一日之閑 以成長年之笑 勿陋求正 且勿謝)

오늘 형이 희우시를 올렸는데, 문중선이 대군의 말을 잘못 듣고 아뢰기를 “전일에 차운한 시입니다”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정오 가까이 시를 펼쳐보고서 놀란 마음을 진정할 수 없었다. 바로 붓을 잡고 벼루에 먹을 갈아 시를 지었으나 보고 들은 바가 지극히 천박하여 바로 보내지 못한다. (今日尊兄進喜雨詩 文仲善誤聽大君之語以啓曰 次韻前日之詩也 以是近午披覽 不堪驚心 卽秉寸管磨硯 而所見聞至淺 未卽送之)

안부를 듣고서 음주 중에 새콤한 맛이 없어서는 안 되기에 가지고 있던 밀감 80매를 또 떠올렸다. 정자에서 오늘 흥이 나서 시를 짓고 내관 최치돈을 보내 아울러 내 뜻을 보인다. 보내는 기생과 시인은 밤잔치에 머물도록 해서는 안 되니 술을 마신 뒤에 서울로 보내는 것이 지극히 옳고 지극히 옳다. (安否 酒中不可無酸 以所有柑子八十枚且憶 亭中今日興作詩 遣內官致敦 幷諭予意 所送妓伶詩人 不可留夜宴 飮罷後送京 至可至可)

근래에 가뭄으로 인하여 궁궐 정원의 모임을 오래 그만두어서 천륜의 정이 막혀 애통하고 친한 뜻이 소원하여 슬프다. 그러나 일에는 경중이 있고 [빠짐] 에는 심천이 있다. 하늘이 큰 가뭄을 내리니 어찌 형제가 상견하는 일 때문인가? 잔치를 여는 날에 잠시 만나 대화를 나누고자 하니 옳지 않겠는가? 시로 정을 말한다. (近因旱魃之暵 久停園囿之會 倫情痛隔 親意悲踈 然事有輕重 □有淺深 天縱大旱 豈緣兄弟相見之故哉 欲於淸宴之日 暫會一語 無乃可乎 詩以言情)

이제 그림을 그림에 남방에서 온 물새 두 마리였다. 물새라고 칭한 것은 이름이 가마우지와 갈매기이다. 먼 곳에서 왔으나 길이 잘 들었기 때문에 은어 아홉 마리를 주자 순식간에 삼켜버리니 진실로 물고기를 탐하는 새이다. 그림에 쓸모가 없기 때문에 모두 놓아 보냈는데, 가마우지는 못에 풀어주었다. 한바탕 웃고 아울러 시를 짓는다. (今以摸畵 自南方來水鳥二首 稱鳥者 名加亇烏灰者 名蘆未烏者 自遠而來馴甚 故賜食銀魚九尾 頃刻而呑 眞貪魚鳥也 而於畵無用 故兼送 灰鳥放池 一笑倂拙詩)

오늘 수전을 보려고 형의 화려한 정자에 행차하니, 나의 마음이 매우 유쾌하였다. 마음이 유쾌함을 알면서도 속마음을 펼치지 않는다면 어찌 이러한 흥취의 무궁무진함을 알 수 있겠는가? 오로지 변변찮은 물건으로 작은 정성을 보인다. 또 아래와 같이 물품을 기록하고 겸하여 서툰 시를 짓는다. 상품 비단 1필, 조방양마 1필, 비단철릭 1벌, 목면 50필, 후추 10말, 2장을 붙인 유둔 2부 (今日以觀水戰 幸尊兄之華亭 予心甚有快焉 知所以心快 而不披中情 安知此趣之無盡也歟 聊將薄物用視寸忱云 且錄之如左 兼以拙詩 上品紗一匹 照房良馬一匹 紗帖里一襲 木綿五十匹 胡椒十斗 二張浮油席二浮)

비가 갠 뒤에 옹인이 직무를 수행하여 살곶이에서 붕어를 그물로 잡아 한가한 날에 나에게 한 대야를 올렸다. 내가 우연히 붕어를 살펴보니 모두 죽지 않은 채 입을 벌리고 물을 급급하게 마시려고 하였다. 내가 저절로 붕어를 불쌍하게 여겨 몇 말의 물을 주도록 하자 어릿거리다가 마치 서호의 즐거움이 있는 듯하였다. 이에 감격하여 형에게 붕어 두 마리를 보내고, 아울러 시를 보내니 심심풀이로 삼았으면 한다. 붕어를 구워서 먹든 삶아서 먹든 형의 뜻대로 하고, 붕어를 풀어서 헤엄치도록 하든지 형의 마음대로 하고 부족한 시를 비웃지 말라. (頃雨後 饔人修職 網中鮒於箭串 薦一盤于閑日 予偶觀其身 皆不死開口 欲吸水之汲汲 予自憐之 俾升數斗之水 圉圉然如西湖之樂 感之送二尾于尊兄 幷詩破寂 炙之烹之 任兄之意 放之泳之 適兄之心 勿笑拙詩)

내가 생각건대 봄이 한 번 가면 꽃이 다시 피지 않고, 사람이 한 번 늙으면 젊음이 돌아오지 않으니 자연히 바꿀 수 없는 천도이다. 쓸 곳이 있는데도 돈을 간수하는 것은 달인의 지혜가 아니고, 쓸 곳이 없는데도 재물을 낭비하는 것은 달인의 검소가 아니다. 옛날에 안자가 제나라의 재상으로 있으면서도 포의를 입자 군자가 옳게 여겼고, 공손홍이 한나라 임금을 보필하면서 무명 이불을 덮었으나 군자가 비난하였다. 포의를 입은 것은 동일하지만 평가가 다른 것은 왜인가? 다른 것이 없고 그 뜻이 정성스러운가 정성스럽지 않은가에 달렸을 뿐이다. 나는 우매하여 들은 바가 지극히 천박하고 본 바가 지극히 경박하여 무식한 시골 사람과 같다. 한마음으로 어머니의 간곡한 가르침을 받았으면서도 학문을 익힌 것이 조잡할 뿐이지만 어찌 허비하며 경박한 유자들이 눈물을 흘리며 저 사람을 경시했던 것을 받아들이겠는가? 다만 정과 뜻이 매우 중하고, 쓰고 남은 것도 넉넉하기 때문에 특별히 우수한 구리 술잔과 하품의 옥 술잔을 제작하였다. ‘백년배’라 이름을 짓고서 형의 장수를 빌고 형의 근심을 깨뜨린다. 겸하여 시를 올리지만 곧바로 화답시를 쓰지 않아도 된다. (予惟春一去兮花不再 人一老兮少不回 自然不易之天道也 有用而守錢非達智 無爲費財非達儉 昔者晏子相齊而布衣 君子是之 孫弘輔漢而布被 君子非之 布則一 而評則異何 無他矯其志之誠不誠耳 予以寡昧 所聞至淺 所見至薄 與無知野人同 一心而但受慈訓丁寧 學問粗習 安可費以受輕儒汍瀾薄彼哉 但以情意深重 用餘亦饒 故特製銅盞之優玉斝之下 名之曰百年 以禱兄壽 以破兄愁 兼呈拙筆 卽度不雕)

또 궁궐에서는 임금과 신하로서의 구분이 엄격하여 형제간의 정분을 다할 수 없으므로 월산대군의 사저나 별장[32]에 자주 들러서 이야기를 나눴다고 하며 반드시 가인례(家人禮)[33]를 행하여 형을 예우하였다. 월산대군과 성종은 3살 차이인데 어렸을 때 일찍 아버지 의경세자(덕종)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두 형제는 궁중에서 조부인 세조의 보살핌 속에 자랐다.
어머니 수빈 한씨는 타고난 성품이 반듯하면서도 엄격하였는데 학문을 중요시 했을 뿐더러 아버지 없는 자식이라는 험담을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자녀들을 가르칠 때에 조금이라도 허물과 실수가 있으면 얼굴빛을 바로 하고서 절대 감싸주거나 봐주지 않고 정색하면서 꾸짖어 바로 잡았으며 더욱 혹독하게 글 공부를 시켰다. 이에 시부모인 세조와 정희왕후는 수빈 한씨를 향해 폭빈[34]이라고 부르곤 하였다. 이러한 어머니의 엄한 교육열로 월산대군과 성종은 더욱 더 서로에게 의지하면서 공부와 놀이를 같이 하였는데 때로는 학문을 논하고 산수를 유람하며 어린 시절 대부분을 함께 보냈다. 둘다 성격도 비슷해 잘 맞았고 시와 학문을 좋아해서 어렸을 때부터 우애가 남달랐다고 한다. 형제이면서 서로에게 학문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가장 가까운 벗으로 지냈다.
태어난지 두 달 만에 아버지를 여의여서 얼굴도 모르고 기억에도 없어 편모슬하[35]에서 외롭게 자란 성종은 어린 시절부터 그 누구보다 친형인 월산대군을 매우 사랑하여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으면서 잘 따르고 심적으로 많은 의지를 하며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였는데 형인 월산대군도 진귀하고 좋은 물건을 얻게 되면 자신보다 동생인 성종에게 주면서 각별하게 챙겼다. 한마디로 월산대군은 성종에게 피를 나눈 단 하나뿐인 형이자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이들 형제는 형식적인 우애가 아니라 진심으로 정이 깊었는데 월산대군이 교외로 사냥을 갈 때에는 호위하는 겸사복(兼司僕)과 매사냥을 돕는 좌우패 응사(左右牌鷹師)를 따르게 하였으며 교년(交年)에는 월산대군과 함께 밤을 지새우기도 했었다. 이때 성종은 여러 신하들에게 시를 지어서 아뢰라 전교하였고 성현이 왕명을 받들어 교년에 대한 시를 남겼는데 다음과 같다.

朝野無虞日

온 나라는 근심 걱정 없는 날이요

光陰欲盡時

한 해의 세월은 다해 가는 때로다

萬機勞聖慮

만기 중에 많은 생각을 써 오시다가

一夕樂淸嬉

하루 저녁 좋은 놀이를 즐기시네

花映千條李

꽃은 천 가지 오얏나무에 서로 비치고

光舒八彩眉

광채는 팔채의 눈썹에 환히 빛나누나

御廚分玉饌

수라간에서 좋은 음식 나눠 보내고

鈞樂下丹墀

균천광악을 붉은 궁전에 내리시니

貂珥邀三客

초이 착용한 삼객을 맞이해 오고

犀簪列六姬

서잠 꽂은 육희를 줄지어 앉혔네

長歌和羯鼓

긴 노래는 갈고 소리와 어울리고

急管雜繁絲

관현악 소리랑 왁자지껄한 가운데

貫蝨爭穿的

이를 꿰듯이 다투어 과녁을 뚫고

張燈坐鬪棋

등불 환히 밝히고 바둑도 두누나

笑談方繾綣

한창 곡진히 담소를 나누는 가운데

盤飣點參差

음식 쟁반 들쭉날쭉 늘어놓으니

彤橘輝銀椀

붉은 귤은 은쟁반에 휘황찬란하고

金波凸玉巵

금물결은 옥술잔에 철철 넘치네

天高星斗爛

하늘이 높아 별들은 반짝거리고

夜久漏聲遲

밤이 오래매 누각 소리 더디어라

興極渾無寐

흥에 겨워 밤새도록 잠 못 이루고

情深醉不知

정이 깊어 취하는 것도 모르겠네

惟將稽古力

오직 계고의 힘 하나만 가지고

每侍講書帷

매양 강서의 자리에 모시면서

仰荷需雲澤

우러러 수운의 큰 은택을 입고

恒添湛露滋

항상 담로에 흠뻑 젖곤 하노니

毫毛何所補

털끝만큼도 무슨 도움 있었으랴

空賦太平詩

부질없이 태평시나 읊을 뿐이네

심지어 성종은 월산대군이 한양을 떠나서 지방에 머물러 있다가 오랜만에 궁궐안으로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전교하기를 "대군이 궁궐에 들어오니 내가 만나 보고 싶어 주강(晝講)과 석강(夕講)을 정지하고자 한다." 라고 했을 정도이다.
또 월산대군은 아버지 덕종(의경세자)의 묘를 돌보기 위해 경릉(敬陵)이 있는 고양에 별장 두고 자주 찾았는데 대군이 고양 별장에 갔다는 소식을 성종이 알게 되면 반드시 내관에게 명하여 선온을 가지고 가서 형을 모셨으며 만약 이곳에 오래 머물러 있을 경우에는 관리들을 보내서 월산대군에게 문안을 드리도록 했다고 한다.
그리고 성종은 낚시를 즐겨 하는 형을 위해 귀한 생선인 웅어[36]나 횟감용으로 먹을 수 있는 생선이 많이 서식하는 난지포(難地浦) 일대에서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권리를 월산대군에게만 내려 주었으며 민간에서 빙고의 설치 및 운영을 금한다는 국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종은 형에게만 허락하여 월산대군은 양화도(망원동, 합정동)에 사빙고를 설치하였다.
또한 성종은 승정원에 전교하기를 "내가 혹시 월산대군을 접견(接見)할 때에는 승지가 대면(對面)하여 아뢸 수가 없을 것이다. 또 긴급(緊急)하지 않은 일 이외에는 모두 대면(對面)하여 아뢰도록 하라." 라고 하면서 형과 만나는 시간을 소중히 여겨 이때만큼은 정사를 잠시 보지 않겠다 선언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성종은 월산대군이 오랫동안 자녀가 없다가 나이 30세가 넘어서 뒤늦게나마 서자를 얻자 형의 아들 탄생을 매우 기뻐하여서 득남을 축하하는 어제시와 함께 잔치를 내렸고 이이(李恞)[37]라는 이름도 친히 지어서 하사였다. 또 1494년(성종25)에 이이가 장성하고 형의 제사를 받기들기 위해서 이이를 월산대군의 서자가 아닌 적자로 인정해주고 덕풍군(德豊君)이라는 군호도 친히 지어주었다. 그리고 병을 앓자 성종은 내의와 약을 보내서 덕풍군을 치료하게 하는 등 형의 아들을 소중하게 여겨 각별하게 보살펴주었다.
월산대군은 나이 35세가 되던 1488년(성종19)부터 점차 병약해짐을 느끼게 되었다. 젊은 나이인데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인지 30세가 넘어가면서 매년마다 조금씩 하얗게 세어졌던 머리카락도 이때에 이르러서는 양쪽 귀옆머리가 모두 다 세어버려 3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백발이 되어버렸고 한때는 한양을 벗어나서 지방으로 나아가 풍류를 즐기는 일도 있었지만 그도 이제는 점차 흥미를 잃게 되었다. 그해 가을에 접어들면서 건강이 전과 같지 않음을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
더군다나 원래 앓고 있던 지병에 또 새로운 병이 생겨 월산대군은 고양 별장에서 꽤 오랫동안 병치레를 하였는데 성종은 형이 걱정이 되어 매양 중관을 보내서 직접 쓴 어제시와 편지 그리고 각종 물품들과 치료 약을 가지고 가서 월산대군에게 대신 문병하게 하고 왕실 내의원에서 가장 경험이 많고 나이가 60살이 넘은 의술에 정통하고 침구가 뛰어난 내의 차맹강(車孟康)을 보내서 월산대군을 전담하여 시약하게 해서 치료하게 하였는데 형의 병환에 차도가 있자 성종은 매우 기뻐하여 조정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차맹강을 특별히 정3품 당상관 품계인 통정 대부를 제수하였다.
하지만 12월에 자신의 병을 숨기면서까지 어머니 인수대비의 병을 밤낮으로 극진히 간호하던 월산대군이 결국 병석에 눕게 되었는데 병이 점점 더 심해지자 성종이 깊이 걱정하여 월산대군 집에 군졸을 배치해서 수호하게 하고 내의를 보내 치료하게 하였으며 날마다 중관을 보내어 문병하였는데 좋은 약과 맛있는 음식을 많이 내려서 전하는 인편이 길에 끊이지 않고 잇따랐다. 또 왕의 신분이라 병구완을 친히 할 수 없었기에 자신이 형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덜어내주고 위로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월산대군이 눈과 시를 좋아하니 가져다주려고 여러 신하들에게 눈(雪), 설청가회(雪晴嘉會)의 제목을 내리고서 "비록 문신(文臣)이 아니더라도 능히 글을 지을 이가 있으면 모두 지으라." 전교하였으며, 성종 본인도 형을 생각하는 진실된 마음을 담은 굉장히 긴 시를 친히 지어서 월산대군에게 주었는데 다음과 같다.

憶疇勝絶當時泰

절묘하게 태평했던 당시를 생각하니

無事還堪發興長

일이 없어 도리어 흥취가 길었네

不邇經營趨競俗

경영을 멀리한 채 시속을 따랐고

更遐羈束負喧郞

속박을 멀리하여 소란함을 등졌네

羲和已識天成用

희화는 하늘의 운행을 벌써 알았는데

水土方知地厚常

수토가 땅에서 상도임을 이제 알았네

天地中間人最貴

하늘과 땅 사이에 사람이 가장 귀한데

彛倫此處道爲臧

여기에서 떳떳한 도리로 선을 행했네

曾聞人事如蟣蝨

인사가 서캐 같다고 일찍이 들었는데

始信功名似蠅蝗

공명이 파리 같음을 비로소 믿었네

萬卷群書螢雪誦

만 권의 책들은 형설로 암송하고

十年燈火蠹魚攘

십 년 등불로 독서하여 좀을 물리쳤네

波瀾虛盪春江岸

물결이 봄 강 언덕에 헛되이 부딪히고

崖蜜空流白玉堂

석청이 백옥당에 공연히 흘렀네

自敗秋蘭寒雨裏

찬비에 가을 난초 저절로 시들고

多衰野菊夜霜傍

밤 서리에 들국화가 많이도 상했네

廟堂幾許稷皐策

조정에서 얼마나 직고의 계책 올렸나

翰墨誰追班馬香

문단에서 누가 반마의 향기 따랐나

李杜文章無比櫛

이두의 문장과 견줄 수 없었고

蘇黃才思少相當

소황의 재주를 감당할 수 없었네

忘情榮辱仁人趣

영욕을 잊음이 어진 이의 운치이고

樂任窮通智者腸

궁통을 즐김이 지자(智者)의 마음이었네

所說可煩猶自噤

말한 바가 번거로워 스스로 입 다물고

攸懷聊叙庶能張

품은 바를 서술하니 거의 펼칠 만했네

有花荊樹盤行引

꽃이 핀 형수가 구불구불 뻗었고

無價天倫委曲彰

값이 없는 천륜이 곡진하게 빛났네

否隔每憐曹植表

불통을 표현한 조식을 매번 슬퍼했고

忍殘長歎厲王傷

잔인하게 해친 여왕을 오래 탄식했네

牽持愛篤雲天薄

애독을 견지하나 하늘이 박정했고

斗斛期襟契濶疆

두곡을 기대하나 고생이 끝없었네

滄海栴檀僧不棄

중들이 창해의 전단수를 버리지 않았는데

五陵豪貴我何忘

내가 어찌 오릉의 부호들을 잊었으랴

香廚豈憶雕胡滑

어찌 부엌에서 부드러운 조호반을 생각했으랴

玉椀盛漿錦帶芳

옥완에 죽을 담고 순챗국이 향긋했네

氷置玉壺泉一勺

옥호에 얼음 넣으니 한 국자의 샘물이고

氣纏秋月色長光

가을 달이 떠오르니 달빛이 길었네

絶儔符采眞無敵

시문이 짝이 없어 진실로 무적이고

少匹聰明孰並行

총명이 짝이 없으니 누가 나란히 갔나

金距鬪鷄思漢苑

금 발톱의 투계는 한나라 궁궐을 생각했고

玉鞭騎馬入宮墻

옥 채찍의 기마가 궁궐로 들어갔네

紛飛颺雨驚泥燕

흩뿌리는 폭우에 진흙 문 제비가 놀라고

山滿尺童驅牧羊

산 가득한 목동이 치던 양을 몰고 갔네

逆聽春鶯工逬淚

꾀꼬리 소리 듣고 교묘하여 눈물 흘렸고

顧欣花萼巧施粧

꽃들이 활짝 피어 공교롭게 단장했네

題咏長懷江左逸

시를 지음에 강좌의 표일을 오래 품었고

爲文多病鄴中狂

문을 지음에 업중의 광달을 병통으로 여겼네

服膺不失拳拳意

가슴에 깊이 새겨 잃어버리지 않았으니

咂鬢何勞撲撲量

어찌 머리를 뜯고 가슴 치며 애썼으랴

心緖如膠寧吝匱

마음이 아교 같으니 함의 보물 어찌 아끼랴

步蛙容易兀稱觴

팔짝팔짝 쉽게 가서 높이 잔을 올렸네

河間經術江湖大

하간은 경술이 강호처럼 위대하고

子建詞篇霹靂忙

자건은 시편이 벽력처럼 내달렸네

欲學背肩非嗜舊

어깨 맞대고 배우면서 벗과 즐기지 않았는데

安知兄弟鑑興亡

형제가 흥망을 경계할 줄 어찌 알았으랴

雨知天意難諶問

비 내릴 줄 아는 하늘 뜻은 정말 묻기 어렵고

贏得人情易作瘡

이익 구하는 인정은 상처를 쉽게 받네

在澗考槃誠不羨

냇가에서 소요함이 진실로 부럽지 않고

與君湛露正無償

형과 밤이슬에 술 마심은 정말로 보상 없네

軒墀寵鶴將墟衛

수레 타고 총애 받던 학도 위나라 땅에 묻혔고

禁掖尊親寔軼唐

궁중에서 어버이 높인 일이 당나라에서 사라졌네

棲鳳自何疑鎩翮

오동에 사는 봉이 어찌 화살 맞을까 의심하랴

臥麟安得畏迷蹡

들판에 누운 기린이 어찌 비틀거릴까 겁내랴

甲第厭飡龍鳳餠

좋은 집에서 용봉병을 실컷 먹었고

芳腰宜佩紫羅囊

예쁜 허리에 자라낭을 의당 찼었네

璵璠絶價崑崙極

여번은 곤륜산 옥보다 값이 비쌌고

風味全和錦瑟旁

풍모는 금슬 타는 가인 옆에서 화락했네

鴻鴈影來遲彩席

기러기가 돌아올 때 잔치에 더디 왔고

鶺鴒飛急到春浪

할미새가 급히 날 때 봄 물결에 갔었네

金尊泛蟻葡萄熟

포도가 익을 때 술통에 개미 거품 떴고

秋圃採香苜蓿荒

목숙이 시들 때 밭에서 국화를 땄네

處貴自嫌如白屋

귀한 곳을 꺼려서 초가에 사는 듯했고

包華還冷撥寒塘

화려함을 냉소하며 찬 연못을 경영했네

茅亭雪岸叢梅白

모정의 눈 내린 언덕에 매화가 희게 피고

宮苑春溪御柳黃

궁원의 봄이 온 시내에 버들잎이 노랗네

加禮崇惟徐孺榻

예를 더해 서유자의 탑상처럼 높였고

題詩驚岌謝公章

시를 지음에 사공의 시와 같아 놀랐네

龍鍾不是安貧所

못난 내가 안빈낙도할 곳이 아니지만

湛樂深知洛醉場

화락하여 서울에서 술 마실 곳임을 깊이 아네

堪笑神仙燒藥竈

신선들이 선약 다리는 부엌을 비웃었고

自多身世沐恩莊

신세가 임금 은혜 입은 것을 자랑했네

大夫皎潔□機重

대부가 깨끗하면 [빠짐] 업무가 막중하고

兒女安閑細媚良

아녀자가 한가하면 꾸밈이 우수하네

半夜隋珠今我□

한밤중의 수주에 이제 나는 [빠짐]

臺邊燕石昔人猖

오대 옆의 연석에 옛사람이 미쳤었네

承歡頻接南薰殿

기쁘게 남훈전에서 자주 접하고

帶暮徐過敎樂坊

저녁에 교악방을 천천히 들렀네

仙李蟠根繁玉葉

선리가 뿌리내려 옥엽이 번성하고

海桑綿祉擬金湯

부상에 복이 이어져 금성탕지에 비겼네

知兄每喜無憂日

형이 근심 없어 매번 기뻤지만

顧己長慙寡德王

나는 덕이 없어 오래도록 부끄러웠네

欲罷不能宣側佇

그만두려 해도 할 수 없어 갈망하였고

却將無盡步踉䠙

도리어 끝이 없어 걸음이 비틀거렸네

淺深莫得飜離間

정이 깊어 떨어진 동안에 바뀌지 않았고

臨履何爲抵咎殃

조심하니 어찌하여 재앙에 이르렀으랴

風雨寒山佳桂樹

비바람에 차가운 산에는 계수나무가 아름답고

衣裳高處整秋霜

높은 곳의 단풍이 가을 서리에 정연했네

沈淪勳業增文采

공업이 영락하여 문장을 증가시켰고

偃息山林惡自强

산림에서 쉬면서 자강불식하였네

玉斝解愁傾琥珀

시름 풀며 옥 술잔에 호박주 기울였고

金盤酬謔薦檳榔

농담하며 금 소반에 야자열매 올렸네

蹉跎白日忽如擲

세상에서 불운하여 갑자기 내던졌고

寥落胸中明不佯

마음이 쓸쓸해도 방황하지 않았네

學貫天人何灑落

학문이 천리 인사 꿰뚫어 무척 쇄락하고

情窮造化不荒凉

정은 조화를 다하여 황량하지 않았네

畢竟斯時無限樂

마침내 지금은 무한히 즐거운데

了然當日有誰防

분명히 당일에 누가 방해했으랴

璿源獨立提庸道

왕실에서 독립하여 중용의 도 잡았고

戚里威儀有義方

왕족의 위엄 보여 의로운 도리 있었네

兩不猜疑如見肺

두 사람이 폐부를 보여주듯 의심하지 않았고

初無技癢久聞痒

애당초 기양이 없는데도 오래 병을 앓았네

一代風流誰是主

한 시대의 풍류는 누가 주인이었나

三朝宗室共如倀

종실로서 세 조정에서 분주히 함께했네

朝來紫陌鳴金騕

아침에 도성 거리에 준마가 울었고

暮入靑門響玉鉠

저녁에 청문에서 옥 방울을 울렸네

合沓濃恩猶可勝

큰 은혜가 중첩해도 오히려 견뎠는데

慇懃孤臆也何遑

은근히 내 마음은 왜 이렇게 황급할까

秉心不過存惺法

마음가짐이 성성법을 보존함에 불과하니

爲政那踰迪吉康

정치가 어찌 편안히 인도함에서 벗어나랴

今日不圖逢此歲

오늘 뜻하지 않게 이 해를 만났는데

一方愁在白衣鄕

한 나라의 근심은 평민의 마을에 있네

이러한 성종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월산대군은 12월21일 3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는데 형의 갑작스런 죽음에 친동생인 성종은 "창자가 찢기는 듯이 슬프고 애통하다."라고 했을 정도로 스스로 견디지 못할 만큼 큰 충격을 받아서 울부짖으며 매우 슬퍼하였다고 한다. 월산대군은 죽어서까지 성종에게 짐이 안되려고 "내가 죽어서 묘가 남쪽(궁궐)으로 향해 있으면 성상께서 부담을 가질 것이다. 정치에 일절 관여하지 말고 나무꾼을 해도 넉넉하게 살기를 바라니 북쪽으로 향해야 한다."라는 유언을 남겼다.[38]
성종은 월산대군이 죽기 열흘 전에 친히 형의 집으로 거둥하여 병문안을 했는데 다음날까지 오랫동안 월산대군 곁에 머무르는 바람에 정무를 돌보지 못하여 성종실록 1488년(성종19) 12월 13일 기사 내용이 없다. 이후에 성종은 월산대군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가보려고 거가를 대령하게 하고서 차비를 하고 있던 중 내관이 달려와 이미 대군이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를 전해 듣고 몹시 놀라서 당장 가보려고 재촉하였는데 때마침 그러한 성종의 거둥을 말리는 인수대비의 전교를 받고 어머니의 명을 어길 수가 없어서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매년 1월1일에 열리는 정조(正朝)의 하례를 정지하게 하였으며 성종은 지나치게 애통해하여 스스로 슬픔을 이기지 못해 수라도 거르면서 식음을 전폐했고 화산대도 파했으며 왕의 거둥시 울리는 고취(鼓吹)까지 폐지시켰다. 오랫동안 조회나 경연에 나가지 않아 조정일을 돌보지 않을만큼 힘들어 했으며 애통하고 마음이 아파서 결국 작은 병에 걸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병석에 눕게 된 성종에게 신하들이 문안을 와서 슬픔을 억제하고 수라와 육선 들기를 여러 차례 권하였으나 성종은 듣지 않았으며 전교하기를,
"나의 이 증세는 본래부터 있었는데 마음이 상하면 가슴이 아프다. 지난번 자위(慈闈)께서 편찮으시자 침식(寢食)을 편히 못한 것이 오래였는데 천지(天地)와 조종(祖宗)의 도우심을 힘입어서 거의 평복됨을 얻었었다. 이제 또 형님의 상화(喪禍)를 만나니,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여 한갓 울부짖을 뿐인데, 이로 인해 작은 병을 얻은 것이고 별로 다른 증세는 없다."
"나는 다른 증세는 없고 다만 마음이 상하여 가슴이 답답하고 아플 뿐이다. 다만 생각하건대, 대비께서 편찮으시다가 평복되신 지 오래 되지 아니하였는데 대군(大君)의 일로써 진선하지 아니하시니, 마음이 아프고 망극하다. 여러 번 진선하기를 청하였던 바, 비록 청한 바에 따르신다고는 하나 진어하는 바가 심히 적으시니, 내가 어찌 할 바를 알지 못하겠다. 나는 백성의 임금이므로 필부(匹夫)와 같지 아니한데, 어찌 대의(大義)를 헤아리지 아니하고서 내 몸을 상하게 할 수 있겠는가? 다만 하늘이 나를 돕지 아니하여 하나인 형님을 일찍 잃게 된 것을 슬퍼할 뿐이다. 어찌하여 대비의 명령을 따르지 아니하겠는가? 경 등이 대비께 진선하시도록 청하면 내 마음이 편하겠다."
"대군(大君)이 병이 위독하자 내가 가서 보고자 하였으나 대비께서 말리시므로 자지(慈旨)를 어기기 어려워서 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이제 이미 영결(永訣)하였으니, 애통함을 어찌 다 말하겠는가? 어제 의정부에서 진선(進膳)하기를 청하였고 또 자지(慈旨)를 받들어서 이미 진선하였는데, 어찌 반드시 고기를 먹은 뒤에야 밥을 먹었다고 하겠는가? 형제의 정은 예나 이제나 다름이 없으며, 하물며 형님의 몸이 식지 아니하였는데 갑자기 좋은 반찬을 먹겠는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눈물이 떨어짐을 깨닫지 못하겠다. 내가 친히 대비전에 나아가서 육선(肉膳)을 진어하시기를 권하려고 하였는데, 마침 작은 병에 걸려서 아마도 일어나서 가기가 어려울 듯하다. 만약 병이 낫기를 기다린다면 또한 늦어질 것이니, 경 등이 의정부와 더불어 같이 의논하여 대비전에 나아가서 아뢰어 청하는 것이 사체에 마땅하지 아니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월산대군 사후 성종은 형의 3년 상을 치르기 위해 호조에 전교하기를 "졸(卒)한 월산대군 이정에게 3년을 한하여 녹봉(祿俸)을 주라." 하였고 조회와 저자를 사흘간 닫았으며[39] 동부승지를 보내서 형의 상사(喪事)를 살피게 하였다. 또 부의를 다른 때보다 두 배를 더 내렸고 장례를 지내는 도구도 품질이 제일 좋은 상등의 물품으로 준비하여 필요한 대로 쓰도록 했다. 그리고 월산대군이 어린 두 명의 서자들만 남겨 놓고 적자 없이 세상을 떠나자 성종은 형과 평소에 친분이 두터웠던 부림군의 장남인 회안부정(淮安副正)[40]으로 하여금 대군의 상사(喪事)를 주관하게 하였고 장례 이후에도 제전(祭奠)을 받들도록 배려하였으며[41] 도승지 송영(宋瑛)을 보내어 월산대군 빈소에 치전하였고 우의정 노사신(盧思愼)에게 장지를 가려 잡으라고 명하여 고양에 있는 월산대군의 별장 서쪽으로 정하면서 형의 장례와 제사에 정성을 다했으며 시호를 봉상시에서 공간(恭簡)으로 논의했으나 특별히 효문(孝文)으로 자신이 직접 지어서 내렸다.[42]
월산대군 묘역 조성 당시 장지의 규모가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종친 1품 이상 장지는 백보로 명시되어 있는데 월산대군의 장지 규모가 4백 20보 정도로 명시된 제도보다 지나치게 넓어 사헌부에서 문제가 있다며 상소를 여러 차례 올렸으나 성종은 "장지(葬地)를 고르는 것은 유래한 바가 오래인데, 어찌 한두 무덤을 옮기는 것을 염려하여 대군의 장례를 보통 사람과 같이 하겠는가?" 라고 전교하며 특별히 어머니 인수대비의 사촌 오빠인 청성군 한치형(韓致亨)에게 일을 맡겨 감독하게 하였다. 이러한 성종의 애틋한 마음이 오롯이 배어 있는 월산대군묘는 시원하게 트인 전망과 형식이 잘 갖추어져 있고 규모도 왕릉 버금가게 장엄하며 봉분이나 석물들이 다른 왕자묘에 비해 매우 크고 조각이 섬세한 편이다. 후손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으로 500년이 넘는 오랜 세월 동안 도굴이나 훼손이 되지 않았고 묘역 보존이 매우 잘 되어 있으며 조선시대 대군묘의 대표적인 예이다. 1986년 경기도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었다.
1489년(성종20) 3월 2일에 성종은 백관에게 특지를 내려 거애(擧哀)하고 회장(會葬)[43]하게 한 가운데 국장 버금가게 예장(禮葬)으로 고양에 장례를 치렀는데 이때 성종은 주서 김숙향(金叔響)에게 명하여 장례 일을 가서 살피게 하였고 9일에는 좌승지 이계남(李季男)을 보내서 월산대군묘에 치제하였다.
그리고 성종은 거의 1년간 공식적인 제사나 행사 때 연주되는 음악을 제외하고는 사사로이 음악을 듣지 않았으며 궁중에서 열리는 잔치도 형이 세상을 떠난 지 5개월 후에 처음으로 행할 만큼 월산대군의 죽음을 애통해하고 진심으로 애도했다. 또 형의 3년 상을 치른 후에 1491년(성종22) 2월20일 월산대군의 우제(虞祭)에 우승지 허침(許琛)을 보내어 홍제원에서 치제하게 하였다.
성종은 당대에 문장가로 널리 알려진 임사홍을 불러 형의 신도비 비명을 짓게 하고 월산대군이 생전에 지었던 시들을 모아서 문장이 뛰어난 신하들에게 명하여 서문을 짓게 하고 풍월정집을 편찬하기도 했다. 또 화원에게 월산대군의 초상화를 그리게 하고 초상화를 보면서 느낀 감상을 시와 문장으로 적은 초상찬을 성종이 친히 짓기도 했으며 완성된 초상화를 보면서 성종은 형을 매우 그리워 했다고 한다.
또한 월산대군의 정실 승평부대부인 박씨가 3년상을 치른 후 남편의 명복을 빌기 위해 묘 근처에 흥복사(興福寺)라는 큰절을 창건할때 불교를 배척하고 존숭(尊崇)[44]하지 않았던 성종이었지만 흥복사는 일반 사찰이 아닌 월산대군의 위패를 모시고 사당의 역할도 겸한 원찰이였기에 형과 과부가 된 형수를 위해서 사찰 건립에 필요한 물자와 재정을 물심양면으로 적극 지원했는데 신하들이 이를 문제 삼아 상소를 올려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월산대군(月山大君) 묘소(墓所)에 동철(銅鐵)·채색(采色)·촉랍(燭蠟) 등 잡물(雜物)을 많이 내려 주었다고 합니다. 동철과 채색은 모두 본국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타국(他國)에서 무역하여 쓰는데, 더구나 상장(喪葬)에는 쓸데가 없는 것이겠습니까? 생각하건대 대군의 부인이 사찰(寺刹)을 창건하려고 그러한 것입니다. 청컨대 금지하소서."
"전하께서는 민력(民力)을 손상시키는 것을 중하게 여기시어 영선(營繕)이 지나치지 않았으며, 한 번 가뭄을 만나자 곧바로 줄이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월산대군(月山大君)의 묘(墓)에 큰 절을 창건(創建)하여 역도(役徒)가 수백 명이나 되는데 공적이 이루어지기 어려워서, 국가의 창고에 있는 곡식을 빌려서 비용에 이바지하고 있습니다."
"사찰(寺刹)을 짓는 것이 과연 명복(冥福)이 있다면 성상께서 우애(友愛)하시는 정으로 마땅히 하지 아니하는 바가 없을 것이나, 결단코 유익한 바가 없는데 동철(銅鐵)과 채색(采色)을 내려 주신 것이 적지 않습니다. 또 대군(大君)의 부인(夫人)이 영안도(永安道) 여러 고을에 곡식을 바치고 경기(京畿) 고을 군자 미곡(軍資米穀)을 바꾸어 받았고, 또 듣건대 충청도에 전지(傳旨)를 내려 대군의 집안에서 재목을 베는 것을 금하지 말도록 하였다고 하니, 이 절은 비록 대군의 부인이 짓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국가에서 준비하는 힘이 진실로 많습니다. 성상께서 평상시 의논은 불씨(佛氏)를 가혹하게 배척하고 성도(聖道)를 존숭하셨는데, 이번에는 금하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실로 도와서 이루게 하시니, 신은 진실로 실망됩니다."
라고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렸으나 성종은 이 일은 결단코 들어줄 수 없다며 신하들의 요청을 거절하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켰다. 형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승평부대부인 박씨에게 특별히 녹봉을 계속 지급했고 많은 물품들을 하사하며 예우하였다. 그리고 월산대군을 기리는 마음에 성종은 두번 다시 망원정(望遠亭)을 찾지 않았다고 한다.
성종의 애통한 마음은 이에 그치지 않고 1492년(성종23) 월산대군의 처남이였던 박원종을 특지를 내려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동부승지로 임명하였다. 이 배경에는 월산대군이 정실 승평부대부인 사이에서 적자는 없었고 서자인 늦둥이 아들 둘을 두었는데, 서자가 태어나기 전에 자식이 없었던 월산대군이 처남인 박원종을 아들 대하듯 총애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때문에 성종이 박원종의 나이가 20대로 젊은축에 속했고 무관 출신이여서 승지에 적합하지 않았지만 월산대군을 생각해서 박원종을 전격 발탁했다고 볼 수 있다. 이를 두고 신하들의 반대가 심해 박원종이 동부승지를 사직하겠다고 청하자 성종이 들어주지 않고 오히려 글을 배우라며 선생까지 붙여주면서 배려하였다. 성종은 박원종을 월산대군의 피붙이라 생각하고 곁에 두고서 아꼈다고 한다.
성종은 월산대군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형을 늘 그리워했는데 특히 대군의 기일이 다가올 때면 사경에 산이 달을 토해 내니 미명에 물이 누각을 환히 비추는구나(四更山吐月 殘夜水明樓)와 옥당영월(玉堂詠月) 등 유독 월(月)이 들어간 시귀와 제목을 내리고서 신하들로 하여금 율시를 짓게 하였다. 그리고 성종은 사무치게 그리운 형을 생각하며 시 한수를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鶴唳庭松

뜰의 소나무에서 우는 학

胎化神區去幾年

태생하여 선경으로 떠난 지 몇 년인가

冲天警露是禽仙

학이 이슬을 경계하여 하늘로 날아오르네

昻藏自有林溪態

기상이 뛰어나 숲 속 자태 절로 있고

飮啄都忘歲月遷

먹고 마시며 흐르는 세월을 온통 잊었네

華表一歸悲世變

화표주에 돌아와 변한 세상 슬퍼했고

九臯淸唳屬時蹁

구고에서 학이 맑게 울어 춤출 때에 속하네

庭松偃亞淸陰處

뜰에 솔이 드리워져 그늘이 진 곳에서

縮頸閑眠待月絃

목 움츠리고 잠자며 반달을 기다리네

평생동안 월산대군과 성종의 우애는 매우 깊었고 이를 두고서 후세에 임금과 신하들 사이에도 알려져 두고두고 칭송 받았다고 전해진다. 이 두 형제의 우애에 대한 일화 중에서 하나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이탁은 돌아가는 길에 한강을 건너 10여리를 가다가 냇가 모래밭에서 말에게 먹이를 먹이고 있었다. 월산대군도 휴가를 얻어 남도 여행을 하고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말에서 내려 냇가에 이탁과 자리를 함께 하였다. 점심을 은그릇에 담아 내왔는데 이탁이 은그릇을 손에 쥐고 두루 살펴보다가 도로 소반 위에 놓자 대군이 말하였다. “자네 그 그릇을 가지고 싶은가? 그렇다면 내 자네에게 줌세." 이탁이 웃으며 말하였다. “제 평생에 일찍이 은그릇이라는 것을 보지 못했는지라 구경했을 뿐입니다. 어찌 선비 대접을 그리 야박하게 하십니까?” 하고는 헤어져서 갔다.
월산대군은 바로 성종의 친형이었다. 그날 성종은 제천정까지 거둥하여 대군을 맞이하였는데 월산대군의 손을 잡고 맞으며 성종이 “여기저기 힘든 곳을 다니시느라 피로하시지는 않으신지요? 오래 뵙지 못해서 마음이 매우 울적했습니다.” 하고는 말을 이었다. “인재는 나라의 으뜸가는 기운입니다. 형님께서는 여기저기 장거에 두고 찾아보셨는지요?” “이미 성상의 하교하심을 받들었사온데 어찌 감히 소홀히 했겠사옵니까? 오래도록 마음에 두고 찾아보았사오나 만나지를 못하다가 아까 길가에서 어떤 선비 한 사람을 만났사온데 그야말로 기이한 선비였사옵니다.” 하고는 이탁과 주고받은 말을 성종에게 아뢰었다.
성종은 기쁜 마음으로 그 이야기를 듣고 즉시 내사복시에 명하여 쫓아가 그를 데려오게 하였는데 성종은 이탁과 이야기를 나누어 본 뒤에 매우 기뻐하며 즉시 홍문관 수찬 벼슬을 내려 주었다. 이탁은 품계의 차례를 뛰어넘어 승진을 하다가 마침내 재상이 되었다.

국역기문총화(國譯紀聞叢話), 제405화 내용中
월산대군은 왕의 형이란 지위를 내세워 얼마든지 세도를 부릴 수 있었지만 동생의 예우에 대해 겸덕으로 답하였고 모든 욕심을 내려놓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성실히 살아서 왕위에 있는 동생에게 누를 끼치지 않았다. 조정의 언관들은 성종의 지나친 월산대군 사랑에 대해서 간쟁을 한 적은 있으나 월산대군의 행실에 대해 비난한 적은 없었다. 월산대군과 성종은 그 형에 그 아우였다. 형은 최선을 다해 종친으로 살았고, 동생은 최선을 다해 국왕으로 살았기에 성군(聖君)의 명성을 얻었다.
월산대군과 성종은 피를 나눈 형제 이상으로 세상에서 가장 가깝고 믿을 수 있는 벗이였으며 서로 의지하고 격려하면서 속마음도 편하게 털어 놓을 수 있는 진정한 형제지기(兄弟知己)[45]였다. 왕이 된 동생과 그로 인해 자신의 뜻을 펼 수 없는 형. 그러나 세상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 피를 나눈 형제애이다. 못할 것 없는 권력의 유혹도 끝내 어쩌지 못한 것이 바로 형제이면서도 평생을 신뢰하는 벗이자 서로의 멘토로 살았던 성종과 월산대군의 아름다운 우애였다.
어제(御製) 풍월정시(風月亭詩)를 승정원(承政院)에 내리고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집에 거둥하였더니, 대군이 정자(亭子)를 짓고서 명명(命名)하지 않았으므로, 내가 풍월(風月)로써 이름을 짓고, 또 이 시를 지었더니, 대군이 이미 현판을 걸고서 화운(和韻)하는 자가 없는 것을 한(恨)하니, 모든 승지(承旨)는 각각 화운(和韻)하여 올리라." 하였다.
월산대군(月山大君) 이정(李婷)이 상서(上書)하여 다시 풍월정(風月亭)의 시(詩)를 내려 주도록 청하니, 임금이 그 글을 승정원(承政院)에 보이면서 말하기를,
"내가 전일에 풍월정을 지었는데 감히 시(詩)로 쓴 것이 아니나 척령(鶺鴒)의 생각을 다 읊었을 뿐이었다. 대간(臺諫)들이 시(詩)를 짓는 잘못을 말하였기 때문에 명하여 이를 없애버렸다. 지금 이 글을 보니, 형제 사이의 좋은 정의를 능히 스스로 금할 수가 없다. 마땅히 다시 잘 써서 보내야겠다." 하였다.
성종은 형인 월산대군과 시를 많이 주고 받았는데 알려진 시 만해도 엄청 많지만 이중 형제간의 따뜻한 우애가 느껴지는 동생이 형을 위해 지은 시 몇수만 소개한다.

問兄何事送羲娥

묻노니 형은 무슨 일로 세월을 보내는가

遐想洋琴與渭歌

상상하건대 거문고와 노래겠지

期會親戚 聘招佳妓

친척들을 모으고 아름다운 기생을 부르니

義雖君臣 恩則兄弟

의리는 비록 군신이지만 은혜는 곧 형제이다

新苽初嚼水精寒

새 참외를 처음 맛보니 수정처럼 차구나

兄弟親情忍獨看

형제간의 친한 정의로서 어찌 차마 혼자만 먹고 보랴

此日兄何去

오늘형은 어디로 가는가

秋風霜更淸

가을바람에 서리가 더욱 맑네

知鴻不失伍

기러기가 줄을 잃지 않으니

可以識我情

내 마음을 알았으면 하네

淸秋節欲晩

맑은 가을의 절기가 늦어지는데

楓葉幾日紅

단풍잎은 몇 날이나 붉었던가

離夏蟬聲匝

여름 지나 매미 소리 두루 들리고

依籬菊蘂濃

울에 기댄 국화꽃이 진하네

尊兄今却疾

형이 이제 도리어 병이 나서

惟弟政深衷

동생은 정말로 속으로 걱정하네

調護無疑日

조섭하여 병이 다 나은 날에

相歡後苑中

후원에서 서로 만나 기뻐하세

斜陽暎屋角

석양이 집 모퉁이 비추는데

夏日正濃濃

여름 해가 정말로 뜨겁네

樹裏鶯嬌韻

숲 속에서 꾀꼬리가 곱게 울고

階頭花滿紅

섬돌 위에 꽃이 가득 붉구나

氷梨兼旨酒

노인이 맛난 술을 겸하고

團月灑薰風

둥근 달빛이 훈풍에 쏟아지네

閑樂誰相及

한가한 즐거움을 누가 미치랴

今知大醉翁

크게 취한 늙은이가 지금 아네

病摺多愁思

병이 겹쳐 시름이 많은데

氈簾僅捲開

전렴을 겨우 걷고 내리네

撒成雲葉下

흩어져서 구름이 내려오고

旋撲玉塵回

휘몰아쳐 눈송이가 선회하네

灞岸千條柳

패수 언덕에 천 그루 버드나무

梁園幾樹梅

양원에는 몇 그루 매화가 있었나

東風無巧意

동풍이 공교로운 마음 없어

吹入太虛來

바람 불어 허공에서 내려오네

春歸愁思起

봄이 가서 근심이 일어나는데

花落有新聲

꽃이 지자 꽃 파는 소리 나네

爲厭紅裙醉

물리도록 붉은 꽃에 취하고

期忘白髮驚

잊으려도 백발에 놀라네

擔枝來夢幻

가지를 메는 일이 꿈속에 들어오고

拾蘂賴晴明

꽃을 줍는 일은 맑은 날에 의지하네

正値風兼雨

정말로 비바람을 만났으니

功名一銖輕

공명은 일수전처럼 가볍네

簡藏鹿尾腹

사슴의 배 속에 편지를 넣었는데

豈是秘書謨

어찌 비서의 계책이랴

所以今日術

오늘 이 방법을 썼지만

徒然意衷無

헛되이 의중에는 없었네

兄應知食物

형은 음식을 알고 있으니

奚暇健奴呼

어느 겨를에 건장한 종을 부르랴

與其鬱不暢

울적하여 펼치지 못하는 것보다

寧若淸讌娛

차라리 잔치 열어 즐기리라

夜砌蛩響急

밤 섬돌에 귀뚜라미 소리가 빠르고

高枝蟪聲癯

높은 가지에 쓰르라미 소리가 약하네

節序三秋好

계절은 늦가을이 좋으니

雲物此時腴

풍경이 이때에 풍성하네

近約勞身事

근래에 힘든 일을 줄여서

悤悤更怡愉

허둥대다 다시금 기쁘네

想今如夢幻

생각건대 지금은 꿈 같으니

何忍心踟躕

어찌 차마 마음을 머뭇거리랴

題句自慙拙

시가 서툴러서 부끄럽지만

然非富醇儒

풍부한 순유는 아니네

明朝如有意

내일 아침에 마음이 있다면

携春須一壺

봄 술 한 병을 들고 오라

相對山茶手自裁

손수 심은 산다화를 마주하니

雨中如火一枝開

빗속에 불꽃처럼 한 가지 피었네

分明有意兄知否

분명히 마음 있는 것을 형은 아는가

欲暎天晴携酒來

하늘에 비가 개면 술을 들고 오리라

何心不覺年華晩

어찌하여 봄이 저무는 것도 알지 못했나

自聘姸姿秋日開

고운 모습 불러서 가을에 꽃이 피네

應是爲予深寂寞

나 때문에 응당 매우 적막하리니

與兄相玩泛金杯

형과 함께 즐기면서 금 술잔을 띄우리라

山北山南錦雉飛

북쪽 산과 남쪽 산에 꿩들이 나는데

非渠何以致朱扉

네가 아니면 어떻게 좋은 집에 잡아 올까

頑雲氷雪春無力

먹구름과 빙설도 봄에는 무력하니

更副兄心空不歸

형이 헛되이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네

妙年得慶良可驚

묘년에 경사 얻어 진실로 놀랐는데

微兄誰識弟深情

형이 아니면 아우의 깊은 정을 누가 알랴

聯茵相對竢有日

자리 깔고 마주할 날이 오길 기다리고

談笑自應肝膽傾

담소하며 마땅히 속마음을 터놓으리라

宮壺催箭曉鷄鳴

궁궐 시간 빨리 가서 새벽닭이 우는데

憑檻沈吟感慨聲

난간에 기대 감개의 소리 내며 시를 읊네

花露濕衣烟一炷

꽃에 내린 이슬이 옷을 적셔 등불 켜니

杯中兩得有心情

술잔 속에 두 사람의 마음이 담겨 있네

半成拙句羞猶改

시를 반쯤 짓다가 부끄러워 고치고

一失佳辰悔莫追

좋은 때를 놓쳐서 후회해도 소용없네

招得撫琴兄破寂

형은 심심풀이로 불러서 거문고를 연주하고

期知讀易我啣疲

나는 피곤한 몸으로 주역을 읽으려네

山雲匹練樓前度

흰 비단 같은 산 구름이 누각 앞을 지나가고

樹葉錦裁階下來

붉은 비단 같은 나뭇잎이 섬돌 앞으로 날아오네

無限秋光何處送

무한한 가을 풍경을 어디에서 보내오는가

夕陽兄醉綠尊開

석양에 술통 열고 형과 술에 취하리라

況是時節正東風

게다가 계절도 봄바람이 불 때여서

紅白花開春雨濛

붉고 흰 꽃들이 봄 가랑비에 피었네

皇華竢儀東歸後

중국 사신이 우리나라에서 돌아가길 기다려

與兄典禮遵周隆

형과 함께 융숭한 주나라의 전례에 따라

絃歌擬聽□無窮

풍악을 울리며 [빠짐] 끝없이 즐기리라

予有一兄無寂寞

나에게 형이 있어 쓸쓸하지 않은데

日論三德更溫純

날마다 삼덕 논하고 또 온순하네

慇懃自不堪情重

은근히 중한 정을 감당할 수 없거니와

詩句何從寫意眞

시구는 어디에서 진의를 표현할까

故製蓮杯無所吝

일부러 연배 만들어 아끼는 바 없는데

待看宮苑泛靑春

궁원에서 봄날에 띄우기를 기대하네

殿閣微凉日半斜

해가 반쯤 기울어 전각이 시원한데

靜然危坐截紛挐

조용히 앉아서 번잡한 생각을 끊네

非空不是參禪意

비공은 참선의 참뜻이 아니고

對晩聊成解慍嗟

저물녘에 오로지 분노를 해소하네

花賞金錢貧欲濟

금전화를 감상하며 빈곤함을 벗어나고

酒斟紅露醉知涯

홍로주를 마시며 취한 채 살아가네

憶兄汗透羅衣滴

형의 땀이 비단옷에 스며서 흐를 텐데

御暑流涎莫此加

더위 막느라 침 흘림을 더하지 말라

梅雨初晴景倍嘉

매우가 막 개자 풍경이 배나 좋고

華亭春日錦烟霞

봄날 정자에 안개 노을이 비단 같네

閑多自覺登臨數

한가하여 정자에 자주 오름 알겠는데

目極還驚望遠賒

응시하니 망원정이 멀어서 놀라네

樂許佳賓分半席

즐겁게도 좋은 손님이 자리에 나눠 앉고

靜饒飛鷺占平沙

조용히 날던 백로가 백사장을 차지하리

知兄此處吟情豁

형은 여기에서 시정이 활달함을 알겠거니

故送宮壺一醉華

일부러 궁궐 술을 보내어 취하게 하네

病餘愁思逐閑生

병 뒤에 시름겨워 한가한 삶 따르니

炎赫隆隆麥未榮

불볕더위 성대하여 보리가 피지 않았네

樑燕啣泥粘却落

들보 제비가 진흙 물어 붙이려다 떨어지고

宮鶯如響聽非聲

궁궐 꾀꼬리가 울어도 그 소리가 아니네

沈沈晝景烘如火

무더운 대낮은 불처럼 뜨겁고

寂寂低軒念在兄

고요한 난간에서 형님을 생각하네

何日天瓢傾數夕

어느 날에 하늘 바가지를 며칠 기울여서

一催檀板共金觥

단판을 치면서 술을 함께 마실까

華亭落落與雲平

정자가 높아서 구름과 평평한데

檻外澄江一泒橫

난간 너머 맑은 강이 비스듬히 흐르네

芳草連天春雨綠

고운 풀이 하늘에 닿아 봄비에 푸르고

翠巒浮地海風淸

푸른 산이 땅에 떠서 해풍이 시원하네

楚雲萬里侵軒繞

만 리의 초나라 구름이 난간에 들이치고

吳樹千重入座明

천 겹의 오나라 나무가 자리에 들어오네

遙憶兄懷不盡興

형의 회포 생각하니 흥이 다하지 않아

更驅歌妓起纖聲

가기에게 말 몰아 노랫소리 일어나리

我得蒼鷹毛骨淸

푸른 매를 얻으니 모습이 깨끗한데

一飛千野衆禽驚

온 들판을 한 번 날면 새들이 놀라네

韝邊萬里心先發

토시에서 만 리 나는 마음이 먼저 일고

呼處多能氣自呈

부르면 능력 많아 기운 절로 솟아나네

却憶尊兄開別墅

형님이 별장을 지은 것을 생각하니

深知錦雉送春聲

꿩들이 봄 보내며 우는 것을 알겠네

纖纖雨霽花明日

부슬부슬 비가 개어 꽃들이 선명한데

應不忘吾選貺情

내가 가려 선물을 보낸 정을 잊지 않으리

風攬碧霄氣轉嚴

바람이 하늘에서 불어 날씨가 추워지고

六花飄亂半堆鹽

어지럽게 눈이 날려 소금이 쌓인 듯하네

粧成宮苑梅千樹

궁궐의 천 그루 매화를 단장하고

蕩漾雕欄玉四簷

난간 위의 네 처마에 눈발이 일렁이네

鷄誤曉來三搏翼

닭들이 새벽 온 줄 잘못 알아 날개를 치고

雀驚枝折數回瞻

참새들이 가지 꺾여 놀라서 자주 돌아보네

憶兄家興有堪樂

생각건대 형의 집에 즐거움이 있으리니

低唱淺斟心不厭

노래하고 술 마시며 싫어하지 않으리라

憶兄酒後思新橘

술 마신 뒤 형이 떠올라 새 귤을 생각하니

始得猶酸色未黃

처음에 시큼하니 누렇게 익지 않았네

的皪豈同桃李子

빛깔 선명하니 어찌 복숭아 오얏과 같으랴

芳新肯比枳棖香

향긋하니 어찌 탱자 정자 향에 견주랴

甘成石蜜皤翁笑

단 꿀을 만들어 파옹이 웃음 짓고

金鑄彈丸公子揚

황금으로 탄환 만들어 공자가 드날리네

欲飮瓊漿王母遠

경장을 마시려니 서왕모가 아득하여

不如醉裏恣心嘗

취중에 마음껏 먹는 것만 못하네

望遠登臨水拍天

망원정에 오르니 강물이 하늘을 치고

主人迎我笑聲先

주인이 나를 맞아 웃음소리 앞서네

松陰滿檻秋光動

솔 그늘이 난간 가득하여 가을빛이 일렁이고

雲影搖尊醉色牽

구름이 술잔에 흔들려 취기에 이끌리네

危坐便知財一粟

바로 앉으니 재물이 좁쌀 한 톨 같음을 알겠고

相談何遠享千年

서로 이야기하니 천 년을 사는 것이 어찌 멀랴

雖慙薄物難充寶

변변찮은 물건으로 보물 보태기 어려워 부끄럽지만

洞我深情作□仙

나의 깊은 정을 알아 [빠짐] 신선이 되었으면 하네

兄不見

형은 보지 않았는가

如蠅道士掛帝眼

파리 같은 도사가 황제의 눈에 띤 것을

又不見

또 보지 않았는가

會稽王朗傳奇功

회계의 왕랑이 기이한 공 전한 것을

爭姸張李不足慕

고움을 다툰 장과 이는 사모하기 부족하고

燒竈致富頗如蒙

부엌 태워 치부함도 매우 몽매한 듯하네

忽然深憶兄在寂

갑자기 쓸쓸한 형을 깊이 생각하며

封贈欲曉予深衷

먹을 주어 나의 깊은 마음을 밝히네

養之錦囊堪掇裏

비단 주머니에 보관하다 꺼내어서

應憶靑蓮幕下翁

청련 막하의 노인을 생각하리라

尊兄畵像贊

존경하는 형님의 화상에 쓴 찬문

溫溫玉質

온화한 옥의 자질로

栗然縝密

엄숙하고 치밀하며

器範自天

기량이 하늘에서 나와

璿儀表帥

종친의 모범이었네

肅穆盛容

엄숙한 모습은

璠璵煥瑟

옥처럼 빛나고 

孶孶往賢

현인에게 힘써 가서

乾乾終日

부지런히 종일 공부했네

孝以事親

효도로 부모를 섬기고

忠以作臣

충으로 신하가 되어서

履道無遹

정도 걸어 잘못이 없고

尙德若人

남들처럼 덕을 숭상했네

哲工運思

철인처럼 사색하고

粹姿逼眞

순수한 자태가 핍진하여

豁如披霧

운무가 활짝 갠 듯하고 

粲瞻星辰

빛나는 별을 보는 듯했네

琅琅尊哥

낭랑한 형의 말이

昻昻獨鳴

높이 홀로 울렸지만

他人奚識

남들이 어찌 알랴

我愛篤誠

나는 정성 다함을 아꼈네

心胸恢廓

마음이 드넓어서

海闊天晴

넓은 바다와 갠 하늘 같았고

文章陶鑄

문장을 단련하여

觸物混成

사물 보고 글을 지었네

時接華萼

형제를 때로 만나

友愛實深

우애가 실로 깊었고

韞匱飄馥

상자의 옥에서 향이 일어

灼乎知心

마음을 밝게 알았네

麒麟鳳凰

기린과 봉황은

千載難尋

천 년 뒤에 찾기 어렵고

風流氣像

풍류와 기상은

丹靑合臨

초상화에 모였네

一雇明鏡

명경을 한 번 보면 

撫掌應驩

손뼉 치며 기뻐하리니

何以爲樂

어찌하여 즐거운가

澄瑩大觀

맑고 밝아 볼만하네

玉壺秋露

옥호의 가을 이슬 같고

英炯猗蘭

난초처럼 빛나서

天錫眉壽

하늘이 장수를 주었으니

永保鴻

영원히 큰 은택을 보존하라


9. 월산대군의 시(詩)


[image] 웹상에 알려진 대표적인 시 몇수만 소개함

추강(秋江)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낚시 드리우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무심(無心)한 달빛만 싣고 빈 배 저어 오노매라

창밖에 국화를 심고

국화 밑에 술을 빚어 놓으니

술 익자 국화 피자 벗님 오자 달이 돋네

아희야 거문고 청쳐라 밤새도록 놀아 보리라

백척의 동대는 자줏빛 연기에 싸이고

시신은 언제고 백량편을 받드네

신마가 음보 전함을 이미 즐겼는데

흉노가 변경 침범함을 다시 한하였네

제사 파한 감천에서 눈물을 흘렸는데

약 없는 봉도에서 신선을 찾을쏜가

소고 울리며 횡분한 즐거움을 그 누가 알 것인가

오늘날 다시 찾으니 옛일이 되었구려

밝은 달이 내 연못을 비추니

못 가의 정자가 밝고 밝구나

정자 위에서 홀로 술을 따르는 사람

근심에 정이 끝이 없구나

바람에 반딧불이 이미 자취도 없는데

이슬 맞은 풀에 빛이 더욱 반짝이네

갑자기 근심스런 적막함을 깨고

일어나 펼쳐진 은하수를 보노라

홀로 오언시를 지으니

맑기가 도연명 같구나

시가 이루어지니 달이 이미 지는데

때마침 찬 다듬이 소리 들리네

그대는 강태공이 반계에서 늙은것을 의심하지말라

그 사이에서 낚싯줄을 드리우지 않았으니

또한 엄자룡이 부춘산에 누웠음을 의심하지 말라

그 사이에서 낚시터에 임하지 않았으니

인생의 행복은 참다운 즐거움을 만남이니

이 땅에 편히 깃들고자 하나 늦었나 보네

그림을 보고 마음이 트이니 기쁘고

돌이켜 보면 이 속된 생각이 아주 미미해지네

좋은 수레와 옷이 나의 일생을 그르쳐 늙게 하였으니

흰머리가 듬성듬성하고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하다네

그대는 웃지 말게 나는 돌아가리니

전주덕진지 출여지승람

깊은 연못 바라보니 파란 하늘이 비쳐있네

예부터 이 못 여느라 파낸 많은 사람 공일세

마을의 저녁연기 멀리 가을 달을 감싸고

고깃배 노 젓는 소리 저녁바람을 비끼도다

가을밤 품은 생각

두 살쩍이 이미 다 희었거니

그윽해지네 이 밤 내마음이여

하늘 끝으로 기러기 줄지어 날고

서리 내린 저 밖에는 다듬이 소리

뜰 나무에는 가을 달 그림자 지고

처마 구름은 저녁어스름 만드네

그리운 정은 다하지 않아

머리 돌려 그대 그린 시를 읊노라

음주

혜강은 양생을 좋아했지만

양생은 장수의 계책이 아니었네

어지러운 때를 만나 죽임을 당했기에

이름을 끝네 전하지 못하였네

사람이 한 세상 사는 동안에

목숨이 금석처럼 단단하지 못해

그러므로 내 몸을 귀히 여김이

어찌 바로 눈앞에 있지 않을까

삶이란 다시 즐길 수 없는 것

세월은 흐르는 강물 같은 것

두어라 날마다 술이나 먹지

어질거니 어리석거니 따지지 말자

임금이 지은 이른 봄 일에 갱진하여

아침 해 뜨자마자 대궐 문 비추니

새봄의 경물자태 어그러짐 하나없네

못가에 가는 풀은 푸른 빛 잎을 내고

동산 속 긴 가지는 푸른 빛으로 바뀌였네

단청 건물에 제비 쌍쌍히 지나는 걸 이미 보았는데

다시 보니 궁궐 깊은 곳엔 몇 사람만 돌아 오네

태평세월 이곳에 경물자태 다함 없음은

이로부터 군왕이 만기를 맡아 보기에

藏義尋僧(장의심승)

푸른 언덕 일만 겹이 푸른 옥 같은데

그 안에 있는 절 거의 3백 곳

나는 샘물 폭포 되어 절벽에 걸렸는데

바위 가에 큰소리 옷감이 찢기는 듯

노는 사람 이 좋은 경치 두고 혼자서 돌아가리

종일토록 중을 찾아 마주 앉아 말하네

머리 돌리니 인간 세상은 꿈만 같으니

이곳은 정녕 노닐 만한 곳이네

興德賞花(흥덕상화)

누대 그림자 겹겹이 물속에 비치는데

누대 앞 연꽃 아침 이슬에 씻겼어라

난간에 옮겨 의지하여 풍경을 구경하니

6월의 맑은 향기가 모시옷에 풍겨난다

붉은 깃대 푸른 일산 수없이 많은데

마주 앉아 때로는 총채를 휘두르네

서늘한 기운이 뼈에 스며 구슬 자리 차가운데

날 저물자 가벼운 바람 비를 불어오네

盤松送客(반송송객)

오늘 아침 천리 길 떠나는 손 전송하니

나를 대해 앉아 황금 술잔 사양마소

떠나는 길에 술을 부으니 눈물자국 젖었는데

이별하는 마음 얼마인가 수심도 그지없네

사람이 이 세상에 사는 것이 삼상(參商)과도 같아

가고 오는 저나 내나 모두 애끊는 일이로세

바람을 당해 서서 세 번 탄식하고 다시 슬퍼하는 것은

그리운 그대 볼 수 없고 마음만 망연하여서라네

鍾街觀燈(종가관등)

서울 10리 천만 집에 거리

등불 곳곳마다 붉은 안개 감도네

향 수레 보배 말 길 가득 지나가니

취한 노래 노는 여자 얼굴이 꽃 같아라

밝은 달 휘황하여 맑기가 대낮 같은데

옆사람 오가는 것 작은 원숭이처럼 여기네

인간 세상 즐거운 일 여기에 많나니

음악 소리 끝나는 곳에

새벽녘 물시계의 물 떨어지는 소리 들리누나

題畵扇(제화선)

부채 그림에 읊기

黃葉秋風裏(황엽추풍이)

가을바람 속 누른 단풍잎

靑山落照時(청산낙조시)

청산에 해지는 시간

江南渺何處(강남묘하처)

강남은 아물아물 어느 곳인지

一棹去遲遲(일도거지지)

노 젓는 배 느릿느릿 떠나간다

寄君實(기군실)

군실에게 부친다

旅館殘燈曉(여관잔등효)

여관 새벽에 가물거리는 불빛

孤城細雨秋(고성세우추)

아무도 없는 성에 가랑비 내리는 가을

思君意不盡(사군의부진)

그대 생각하니 온갖 생각 다 일고

千里大江流(천리대강류)

천리 기나긴 큰 강물 흘러만 가는구나

伸也風騷客(신야풍소객)

신은 픙류객이요

詩名又一奇(시명우일기)

시명 또한 뛰어나도다

獨能兼古律(독능겸고률)

홀로 능히 고시를 겸하였으니

不奈是珠璣(불내시주기)

어찌 아름다운 구슬이 아니랴

吟裡思無盡(음리사무진)

시 속의 생각이 무궁무진하여

閑中喜有期(한중희유기)

한가로운 기망 있음을 기뻐하노라

相逢一樽酒(상봉일준주)

서로 만나 한 통 술을 마시며

談笑興遲遲(담소흥지지) 

담소하니 흥취가 느긋하도다

有所思(유소사)

그리움

朝亦有所思(조역유소사)

아침에도 그리운 사람 

暮亦有所思(모역유소사)

저녁에도 또 그리운 님

所思在何處(소사재하처)

사랑하는 님 어디 계시나 

千里路無涯(천리로무애)

천릿길 아득히 먼 곳 

風潮望難越(풍조망난월)

풍랑으로 건널 수 없고 

雲雁托無期(운안탁무기)

구름 속 기러기라 소식 못 전해

欲寄音情久(욕기음정구)

오랜 사랑 전하고 싶지만 

中心難如絲(중심난여사)

내 마음은 엉크러진 실타래라네

待月有懷(대월유회)

달 뜨기를 기다리며

灩灩高樓月(염염고루월)

높다란 누각 위엔 달이 휘영청

團團玉窓裏(단단옥창리)

둥그런 옥창 가에 기대섰으리

娟娟一美人(연연일미인)

아리따운 그 미인 바로 내 사랑

渺渺隔秋水(묘묘격추수)

아득해라 가을 물이 가로막혔네

紉佩不可見(인패불가견)

차고 있는 패란은 아니 보이고

蘭香空在玆(난향공재자)

난초의 향내만이 여기 있구나

思之望何處(사지망하처)

그리워서 어느 곳을 바라보아도

腸斷亦天涯(장단역천애)

애닯아라 그 역시 하늘 끝일 뿐

懷浪翁

낭옹을 그리워하며

近來宗室老

근래 종실에 늙은이가

知我嘆相離

자신을 알고자 한탄하여 이별하였네

會面何時識

언제 그것을 깨닫고 만나게 되려나

論情底處期

정을 논함이 그 어느곳일지 기약하네

江山微雨後

강산의 보슬비를 뒤로 하고

煙樹夕陽時

안개 낀 나무에 석양이 비치네

對此亦惆悵

이런 곳에서 또한 애달퍼하며

思君終日思

그대 그리며 종일토록 그대만 생각하네

奉敎御製寫親筆畵蘭(봉교어제사친필화란)

幸得萬機暇

다행히 정무 가운데 한가함을 얻어             

揮毫造化來

붓을 휘두르니 조화가 찾아왔구나             

蘭莛圖已妙

난꽃 그림은 이미 묘한데                        

詩詠興相催

시를 읊어 흥이 서로 돕는구나    

對物思無盡

사물을 대하니 생각이 끝이 없고    

霑恩感幾廻

은혜에 젖어 감회를 몇 번이나 돌이키네   

相看似眞性

형상을 보니 본성을 잘 나타냈으니

疑是手栽培

아마도 손수 재배한 것인 듯하네

奉賡御製問病賜藥1

임금이 글을 지어 병을 묻고 약을 내려주신데 대해 받들어 화답함

此日逢身病

이 말 몸의 병을 만나

茅堂且獨居

초가 집에서 또한 홀로 거처하네

園林移鳥雀

동산의 수풀에서는 새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池水樂龜魚

못의 물에는 거북이와 고기들이 즐거이 노니네

得趣唯新酒

취미를 얻음은 오직 새로운 술이요

論談亦古書

담론함은 또한 옛 서적일세

感君恩未極

임금의 은혜에 감사함은 끝이 없어

回望禁宮廬

머리 돌려 궁궐을 바라보네

奉賡御製問病賜藥2

임금이 글을 지어 병을 묻고 약을 내려주신데 대해 받들어 화답함

從來賜藥處

지금까지 약의 처방을 내려주시니

一一更忘憂

일시에 다시 근심을 잊었도다

聖澤忽如此

임금의 은택이 홀연 이와 같으니

深恩應已留

깊은 은혜 응당 이미 간직하고 있네

身閑唯卧宅

몸은 한가하여 오직 집에 누워있고

心感亦低頭

마음은 감사하여 또한 고개를 숙이네

須識屛營裏

모름지기 알겠노라 두려움 속에서

淸風吹解愁

맑은 바람이 불어 근심을 풀어줌을

謝賜醫藥愈小兒病患1

의약품을 내려 주셔서 아이의 병환이 나은 것에 감사함

有兒初病起

아이가 처음 병이 일어나니

忽忽感如何

허둥지둥하며 느끼는 감정은 어떠했으리

况被深恩重

게다가 깊은 은혜의 무거움을 입어

堪驚賜藥多

많은 약을 내려 주심에 놀랄만하네

宸心人罔極

임금의 마음에 사람은 망극하고

臣貌老還嗟

신하의 모습은 늙어서 도리어 탄식하네

稽首念無限

머리를 조아리며 생각은 한이 없고

看看雙淚沱

양쪽 눈에서 눈물이 흐름을 보네

謝賜醫藥愈小兒病患2

의약품을 내려 주셔서 아이의 병환이 나은 것에 감사함

好生曰大德

살리기를 좋아함을 넓고 큰 덕이라고 말하니

孰不感君恩

누가 임금의 은혜에 감격하지 않으리요

到處仁風足

이르는 곳마다 인풍이 풍족하고

斯時睿澤臻

이러한 때 임금의 은택이 이르렀네

宸心憐眷重

임금의 마음은 사랑하고 돌보아 줌이 무거우니

兒子戲游頻

아이가 즐거이 놂이 잦아졌네

病起雖然樂

병이 일어나 비록 근심 걱정했지만 즐거우니

何知雨露新

어찌 비와 이슬이 새로움을 알았으리요

謝賜醫藥愈小兒病患3

의약품을 내려 주셔서 아이의 병환이 나은 것에 감사함

金門拜謝處

궁궐 문에서 절하며 감사해 하던 곳

人問汝何爲

사람들이 묻기를 당신은 무엇을 하시오

我是君恩飽

나는 임금의 은혜가 가득하니

誰能此樂知

누가 이 즐거움 알 수 있겠는가

癡兒初病後

어리석은 아이놈 처음 병이 난 후

明主賜恩時

밝은 군주 은혜를 내려 주신 때이네

今日心多感

금일의 마음 감사함이 많도다

從前賜藥醫

지금까지 의약품을 내려 주심에

奉賡御製夏日憶兄寂坐私第

임금이 지으신 여름날 형을 생각하며 고요히 사가에 앉았노라 글에 받들어 화답함

濃淡靑山暮

짙고 옅은 청산은 저물고

䆫前兩䯻丫

창 앞에는 양쪽 갈래머리 계집이 있네

將衰難可興

장차 노쇠하여 흥겨워하기가 어려우니

於物未堪誇

물건에 대해 자랑을 할 수 없도다

醒醉誰家草

성취는 누구집의 풀이며

傾陽此處花

경양은 이곳의 꽃일세

時平唯可樂

시대가 태평함이 오직 가히 즐겁고

身病亦堪嗟

몸의 병에 또한 탄식하네

戀彼朝天闕

저 궁궐에 조알함을 그리워하며

看他走錦車

저 비단으로 장식한 수레가 달려감을 보네

禁門雖可樂

궁궐은 비록 가히 즐거우나

蓬屋寂無譁

봉실은 고요하여 시끄러움이 없네

更惜殘生晩

다시 얼마 남지 않은 생이 끝무렵임이 애석하고

多慙聖澤加

임금의 은택이 더하여짐이 많이 부끄럽네

平生念祝筭

평생동안 오래 살기를 축원함을 생각하며

今日笑懷沙

금일 회사에 웃음짓네

閶闔思無盡

궁궐의 생각 다함이 없는데

煙雲望更遮

구름과 같은 연기 바라보니 또한 가리고 있으니

何時對宮苑

어느 때 궁궐의 정원을 마주 대할까

風物喜柔嘉

풍물은 온화한 덕에 기뻐하네

京都十里千萬家(경도십리천만가)

서울이라 십리 수많은 집들

燈街處處蒸紅霞(등가처처증홍하)

등불켜진 거리곳곳 붉은 노을 타오르네

香車寶馬滿路去(향거보마만로거)

향기로운 수레 단장한 말 거리에 가득 오가고

醉歌遊女顔如花(취가유녀안여화)

술에 취해 노니는 여인들 그 얼굴 꽃같구나

留連光景竟何如

끊임없는 햇살이 마침내 어떠한가

政是春歸欲夏初

정말 봄이 가고 여름이 되려 하네

田麥登時風澹蕩

보리를 타작할 때 바람은 넘실거리고

園梅熟處雨殘餘

매실이 익는 곳에 빗방울 남아 있네

人多望重愁讒謗

사람들은 많이들 명망이 중하여 참소를 근심하는데

我獨身閑脫毁譽

나는 홀로 신세가 한가하여 칭송과 비방 벗어나 있다네

幸被聖君恩顧重

다행히 성군의 은혜 돌아봄에 무거우니

豈辭華髮曳長裾

하얀 머리에 긴 옷 끌고 다님 어찌 사양하리요

옛 절에서 꽃을 보다

春深古寺燕飛飛

봄 깊은 옛 절에 제비들은 훨훨 날고

深院重門客到稀

깊숙한 집 겹대문에 찾아오는 사람 적네

我正尋花花正落

내가 꽃을 보러 갈 땐 꽃이 한창 지는 때라

尋花還爲惜花歸

꽃을 보러 갔다 되레 꽃 애석해 돌아오네

又戲有題(우희유제)

太平宗室月山君

태평한 종실 월산군이

雙鬢雖衰爵齒尊

귀밑머리는 희끗하지만 벼슬과 나이는 높다네

庭下有兒多愛栗

뜰아래 많은 아이들 밤을 좋아한다지만

堂中無客共傾樽

마루에는 함께 술잔을 기울일 손님도 없다오

箭郊尋訪

살곶이벌을 찾다

春郊細草如華茵

봄철 교외 가느다란 풀은 비단자리 같은데

春風載酒尋遊人

봄바람에 술을 싣고 노는 사람 찾아가네

朝乘駿馬踏靑去

아침엔 준마 타고 푸른 풀 밟고 나갔다가

日暮醉歸空惜春

저물녘 취해 돌아오며 공연히 봄을 아까워하네

立石釣魚(입석조어)

선돌에서 낚시하다

把釣閑來獨倚立

낚시를 들고 한가히 와서 홀로 서니

雨餘新水尙涵碧

비 뒤의 새물에 오히려 푸르게 젖었네

浮萍動處水紋散

부평초 움직이는 곳에 물결 흩어지니

魚戱有時潛復躍

물고기 노는 때라 오르락내리락

斯須釣出作膾羹

잠깐 동안 낚시로 회와 탕을 만드니

沽酒已知來滿甁

미리 알고 술을 사서 병에 가득 채워오네

人生適意古所重

인생은 자기 뜻에 맞는 것이 예로부터 소중하니

嚴光豈羡公侯名

엄광이 어찌 공후 이름 부러워하리

奉和御製元日內宴詩

임금이 원일에 궁중 잔치에서 지은 시를 받들어 화답하다

乾坤和氣協新陽

천지의 화기가 새봄에 알맞은데

風景如薰禁苑香

봄바람이 솔솔 불어 궁궐이 향긋하네

閶闔九門迎木德

대궐의 아홉 대문에서 봄을 맞이하고

君王萬歲捧金觴

임금의 만수 빌며 금 술잔을 올리네

旌旗望見雲烟色

깃발을 바라보니 구름연기 감돌고

宮殿回看日月光

궁전을 돌아보니 해와 달이 빛나네

佳節已知供盛事

좋은 절기에 성대한 일 받듦을 알고서

歡呼聖壽與天長

임금께서 하늘처럼 장수하길 기뻐 외치네

寒食(한식)

寒食淸明二月天(한식청명이월천)

한식과 청명의 이월 맑은 하늘에서

東風庭院掛鞦韆(동풍정원괘추천)

동풍 불어와 정원에 그네를 매었네​

流鸎啼過畫樓去(류앵제과화루거)

꾀꼬리 울며 아름다운 누각을 날고​

一樹杏花開正姸(일수행화개정연)

한 그루 복사꽃이 예쁘게도 피었네

楊花踏雪(양화답설)

양화도 눈 밟기

江村漁家數茅屋(강촌어가수모옥)

강마을 어촌에 초가 두어 채

籬下森森滿銀竹(이하삼삼만은죽)

울 밑에는 은죽 같은 고드름이 촘촘히 맺혔네

歸來此地足乘興(귀래차지족승흥)

세속 떠나 돌아오니 흥이 일어나

吟詩擧酒無休息(음시거주무휴식)

시 읊으랴 술잔 들랴 쉴 새 없네

木覓賞花(목멱상화)

남산에 꽃구경

春雲窈窕春山高(춘운요조춘산고)

봄 구름은 우아하고 산은 높은데

翠微隱隱連溪橋(취미은은연계교)

푸르스름한 빛 은은히 다리까지 이어졌구나

登高賞花且就醉(등고상화차취취)

산에 올라 꽃구경에 술까지 거나하게

與君盡日斟葡萄(여군진일짐포도)

그대와 진종일 포도주를 주고 받네

蜂喧鳥咽幾村塢(봉훤조열기촌오)

마을 두둑엔 벌들은 붕붕 새들은 짹짹

花氣已蒸春晩雨(화가이증춘만우)

꽃 기운 쩌오르니 늦은 봄 비가 내리네

歸來日斜春陌長(귀래일사춘맥장)

해질녁 집으로 돌아오는데 봄 두덩은 길고

雲鐘街裏聞鐘鼓(운종가리문종고)

종로에서는 인경소리 들리네

愛蓮亭(애련정)

鑽(鑿)得新塘又種蓮(찬(착)득신당우종련)

새로이 못 파고 연까지 심으니 

風流可愛主人賢(풍류가애주인현)

풍류를 아는 원님 어질기도 하네

淸馨冉冉誰能賞(청형염염수능상)

솔솔 퍼지는 맑은 향기 누가 기리나 

濃艶娟娟我獨憐(농염연연아독련)

고운 꽃 나 홀로 사랑하고 싶어라

翠蓋紅粧遙夜月(취개홍장요야월)

푸른 갓 붉은 옷 입고 달빛 속에서

碧波淸浪泛瑤船(벽파청랑범요선)

찰랑이는 맑은 물에 꽃배 띄우네

此間對酒堪乘興(차간대주감승흥)

이 풍경 대하며 술로 흥을 돋우고

唯得吟哦喜欲顚(유득음아희욕전) 

시 읊으며 환희에 도취하고 싶네

濟川翫月(제천완월)

제천정에서 달을 구경하며

銀河無風素波靜(은하무풍소파정)

은빛 강물은 바람 없어 흰 물결 고요한데

老蟾吸此潭底影(노섬흡차담저영)

달빛은 못 밑까지 환히 비추네

江頭似轉白玉盤(강두사전백옥반)

강머리에서 백옥 소반 굴리는 것 같은데

雲際已吐黃金餠(운제이토황금병)

구름 저 사이로 벌써 황금 떡이 솟아났네

高樓樽酒冷似徹(고루준주냉사철)

높은 다락에 한잔 술 차갑고 깨끗한데

對此淸光欺白髮(대차청광기백발)

이 맑은 빛을 대하니 백발도 모르겠네

回頭橫笛一聲來(회두횡적일성래)

어디선가 잣대 소리 들려와 머리 돌리니

夜蘭似聽霓裳曲(야란사청예상곡)

깊은 밤 월궁의 음악소리 듣는 것 같네

麻浦泛舟(마포범주)

마포 포구에서 뱃놀이를 즐기는 정경을 읊다

滿浦煙光綠發地(만포연광록발지)

포구에 자욱한 안개 대지엔 초록빛 피어나는데

微風嫋嫋吹寒漪(미풍뇨뇨취한의)

미풍이 산들산들 불어 차가운 잔물결 일으키고

江邊小草綠於染(강변소초록어염)

강가의 작은 풀들은 물감색갈보다도 더 푸른데

堤柳又作黃金枝(제류우작황금지)

강둑의 버드나무는 또다시 금빛 가지를 틔우네

畵船蕭鼓橫渡頭(화선소고횡도두)

북소리 요란한 놀잇배는 나룻가에 정박해 있고

碧蘅紅杜生芳洲(벽형홍두생방주)

푸른 족두리 붉은 두견화는 모래섬에 피었는데

蕩漿歸來夕陽邊(탕장귀래석양변)

해저무는 강가에 상앗대 노를 저어 돌아오다가

回頭忽見來沙鷗(회두홀견래사구)

고개돌려 문득 모래밭에 내리는 갈매기를 보네

暮春日與伯胤同遊望遠亭有感

(모춘일여백윤동유망원정유감)

저문 봄 백윤과 함께 망원정에서 노닐다가 느낌이 있어

望遠亭前三月暮(망원정전삼월모) 

망원정 앞에 춘삼월이 저무는데

與君携酒典春衣(여군휴주전춘의) 

그대와 술 마시려 봄옷 잡혔네

天邊山盡雨無盡(천변산진우무진)

하늘가 산은 다하여도 비는 그치지 않는데

江上燕歸人未歸(강상연귀인미귀)

강의 제비는 돌아가도 사람은 돌아가지 못하네

四顧雲煙堪遺興(사고운연감유흥)

안개를 돌아보니 흥을 풀 만한데

相從鷗鷺共忘機(상종구로공망기)

갈매기와 서로 좇아 사심을 잊는다

風流似慰平生願(풍류사위평생원)

이 풍류가 평생의 소원을 위로할 듯하니

莫向人間學是非(막향인간학시비)

인간 세상 시비를 배우지 마세

奉賡御製賜雪花白紙四張

임금이 지은 글과 설화백지 4장을 내려 주신데 대해 받들어 화답함

條風颯颯瓦簷鳴

조풍이 삽삽하니 기와얹은 처마가 우는데

忽覺終宵細雨聲

홀연 밤새 가랑비 소리임을 깨달았네

多病倦看身體冷

병이 많으나 간호함에 게을러 신체는 차고

凌晨坐待日華晴

이른 아침 앉아서 해가 뜨기를 기다리네

衰顔短髮同枯槁

쇠약해져 핼쑥해진 얼굴과 짧은 머리털은 함께 마른거와 같고

美景良辰幾轉更

아름다웠던 모습의 좋은 시절은 거의 바뀌어

藥鼎響時心獨亂

약 달이는 솥이 끓어서 소리가 날 때 마음은 홀로 심란하네

君恩賜處眼雙明

임금의 은혜 내려 주던 곳 두 눈은 반짝였고

娟娟此物非常品

고운 이 물건은 평범하지 않은 물품이니

耿耿孤懷不奈驚

근심스럽고 외로운 마음은 어찌할 바 몰라 놀라고

爲染兎毫題此久

토끼털(붓)을 적시어 이것을 쓴지 오래이네

不知詩興動盈盈

모르는 새 시흥이 걸핏하면 가득해지로다


10. 평가


월산대군은 대중들 사이에서 본인보다는 덕수궁의 본래 주인, 성종의 형 그리고 조카인 연산군이 큰어머니를 범했다는 소문으로 부인이 더 알려진 인물이다. 왜냐하면 살아생전 월산대군은 사고도 치지 않고 그저 조용히 살았기 때문이다. 그가 등장하는 각종 사극 작품들 속에도 주인공이 아닌 대부분 어머니인 인수대비나 동생인 성종에게 가려져 그저 왕위에 관심 없는 소심하고 병약한 인물로 그려지곤 하는데 이는 전혀 사실과 다르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각종 역사서나 조선왕조실록 속에서의 월산대군에 대한 기록은 꽤 많이 등장하며 대부분 긍정적인 내용이 많았고 악평은 전혀 없었다. 그의 졸기나 신도비명 그리고 실록 속 사관의 평가에 있어서도 호평 일색이며 현대의 역사 학자들도 월산대군을 대부분 호의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는 세조의 장손, 덕종(의경세자)의 장남으로 조선에서 장자승계의 원칙에 따라 왕위 계승에 있어 정통성이 가장 강력했으나 어리다는 이유로 숙부인 예종에게 또 한명회의 사위가 아니라는 이유로 친동생인 성종에게 두 번씩이나 왕위를 빼앗긴 비운의 왕자였다. 월산대군은 요절한 아버지 덕종(의경세자)을 대신하여 할아버지 세조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을 뿐 아니라 그의 시가 중국에까지 알려질 정도로 잘산군(성종)보다 학문에 깊이가 있고 능통했다. 또 시호 효문(孝文)대로 왕가의 필수 덕목이라고 할 부모에 대한 효성과 형제에 대한 우애도 지극했으며 인품 역시 훌륭해 마땅히 보위를 이을 적임자로 여겨져서 차기 왕으로 손색이 없었다.
예종이 즉위한지 1년 3개월만에 승하하고 후계자를 정할 때 원자인 제안대군이 4세로 너무 어리기때문에 왕이 될 수가 없다면 16세로 가장 연장자에 세조의 장손이였던 월산대군이 왕이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였지만 잘산군(성종)의 장인이였던 한명회 등 훈구 대신들과 정치적 결탁을 한 정희왕후 윤씨는 월산대군의 몸이 병약하다는 이유로 대신 친동생인 잘산군(성종)을 후계자로 내세웠는데 왕후에 의해 다음 왕이 지명되는 조선왕조 최초의 선례가 된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서 월산대군이 병약하다고 기록한 흔적은 전혀 없으며 그는 35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 당시에는 평균 수명이 40세 정도로 단명했다 보기에는 어려우며 월산대군이 안타깝게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은 어머니 인수대비가 병이 났을 때 마침 본인도 병에 걸린 상태였었다. 월산대군은 자신의 병은 전혀 돌보지 않으면서 밤낮으로 침식을 잊고 어머니의 간병에만 열중하여 이 과정에서 건강이 급격하게 악화 되었다고 한다.
유년시절 세조가 어린 월산대군을 애지중지하여 궁중에 두고 직접 기르면서 사어서수(射御書數)[46]를 친히 가르치기도 하고 월산군(月山君)이라는 군호도 세조가 직접 지어준 것이라고 한다. 또 장손의 혼인때에는 종친과 재추들에게 명하여 모두 시복 차림으로 위요하였으며 세조 본인도 사복시 담 밑에 비루(매우 높은 곳에 세운 누각)를 만들어서 이를 구경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월산대군과 사냥도 함께 가고 말이라든지 물품들도 하사 하면서 월산대군을 각별하게 아꼈고 총애했다.
정희왕후 윤씨는 어째서 예종의 적자였던 제안대군과 세조의 장손 월산대군을 왕위 계승자에서 배제하고자 했을까? 그것은 맏아들 의경세자가 20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을 때 원손 월산군이 아닌 세조의 차남 해양대군을 세자로 책봉했던 것과 똑같은 이유로 나이 어린 단종을 죽이고 왕권을 찬탈했던 한 사람으로서 또다시 그와 같은 상황이 재현되는 것을 막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강변되는 명분과는 다르게 특별한 흠결이 없었던 세조의 장손 월산대군과 예종의 적자였던 제안대군을 제치고 덕종(의경세자)의 차남인 잘산군(성종)이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성종의 장인이었고 당대의 권세가였던 한명회의 수완이 발휘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대체적이고 일반적인 여론이었다. 이에 월산대군은 당시 권력을 분점하고 있던 정희왕후 윤씨와 한명회의 이해관계에 따라 친동생 잘산군(성종)에게 왕위를 빼앗기는 비운을 맞게 된다.
사실상 왕위 계승권을 성종에게 양보한 월산대군은 자신의 존재로 인해 정통성 문제가 일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아 현실을 떠나서 자연을 벗삼아 조용히 여생을 보냈다. 예종이 승하하고 친동생 잘산군(성종)이 즉위하던 날 월산대군은 그 길로 한양을 떠나서 전라도 깊은 산 속에 들어가 은둔하기도 했었다. 이후에 돌아와 집안에 풍월정이라는 정자를 짓고서 서적을 쌓아둔 채 시문을 읊으면서 풍류적인 생활을 한다. 친동생에게 왕위를 빼앗긴 뒤 혹시 모를 역모에 휘말릴까 봐 가급적이면 사람을 만나는 것을 자제하고 혼자 조용히 살았는데 성종 역시 월산대군의 처지와 마음을 이해하고 늘 안타깝게 여겨 항상 형을 챙기면서 배려하고 위안해 주었다.
그는 왕의 형이었기 때문에 함부로 처신할 수 없었고 자연 속에 은둔하며 조용히 사는 삶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조선시대에는 적장자 왕위 계승이 원칙이었기 때문에 왕의 형이 존재함은 비상식적인 처사였다. 더군다나 월산대군은 학문이 풍부했었으며 인품이나 능력에 있어서 전혀 흠결이 없었고 오히려 뛰어난 사람이였다.
왕에게 다른 왕자들이란 아무리 피를 나눈 형제라 해도 잠재적인 경쟁자일 수밖에 없다. 절대 권력인 왕의 자리는 단 하나 뿐이기 때문에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형제를 희생시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대체적으로 왕위 계승에 탈락한 왕자들은 추후 왕권에 위협이 되기 때문에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역모에 몰려서 죽음을 당할 확률이 높았다. 현 집권 세력들이 결코 살려두지 않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러하다면 왕권에 위협이 되는 월산대군은 반역의 누명을 쓰고 제거되는 것이 권력의 비정한 수순일 것이다. 그러나 형 월산대군도 동생인 성종도 자신들이 취해야 할 바를 잘 알고 있었고 이를 잘 지켜 나갔다.
하지만 월산대군은 왕권에 있어서 친동생인 성종에게 가장 위협이 되는 적장자였으나 두 형제의 우애는 매우 돈독하여 성종의 보호속에서 예우를 받으며 살았다. 이는 성종이 천성적으로 효우[47]스러움을 타고난 인물이기도 했지만 형인 월산대군이 정치적으로 엮이는 것을 피하기 위해 종친으로서 주어지는 관직도 맡지 않았고 스스로 가택연금을 선택하여 사람도 함부로 만나지 않았으며 집안의 사람들에게도 철저히 입단속을 시켜서 구설수가 전혀 나오지 않게 하여 자기관리를 매우 철저히 했기에 가능한 일이였다.
홀어머니인 인수대비와 친동생인 성종을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했던 월산대군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혼자 술이나 마시면서 시를 짓고 독서하면서 낚시도 하고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여행이나 하는 즉 풍류적인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형의 처지를 이해하고 가슴 아프게 여긴 성종은 평생 형인 월산대군에게 미안해했고 존경하면서 각별하게 예우하였다. 이러한 동생의 애틋한 마음에 월산대군도 감사했고 그 누가 이간질을 시도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월산대군과 성종의 우애는 매우 깊었다. 친동생이자 왕이였던 성종이 아낌없는 사랑과 우애를 보여줄 정도로 덕행이나 인품이 매우 훌륭한 인물이였다.
예를 들어 오늘날에 비유하자면 장차 대기업을 물러 받을 흠결이 전혀 없고 능력이 매우 뛰어난 장남이 주변 사람들의 술수로 후계자가 되지 못하고 대신 삼촌이나 동생이 그 자리를 물러 받는다고 한다면 그 누가 월산대군처럼 모든 욕심을 내려놓고 혹여나 동생이 부담스러워 하거나 피해를 입을까봐 사람도 함부로 안 만나고 혼자서 술 마시면서 시나 쓰며 독서하고 여행이나 다닐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대부분 형제간에 반목하면서 소송을 해서라도 자기 권리를 찾고자 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하지만 월산대군은 왕권을 두고서 권력투쟁보다는 양보라는 선택을 하게 되는데 어머니와 동생에 대한 깊은 사랑 때문에 필연적으로 피를 부를 수밖에 없는 권력투쟁을 피했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그는 효성도 지극해서 날이 추우나 더우나 매일 아침 입궐하여 할머니인 자성대왕대비, 어머니인 인수대비, 숙모인 인혜대비에게 문안 인사를 드렸으며 삼대비전(三大妃殿)이 함께 온양온천으로 행차할 때 월산대군이 친히 호종하기도 했다. 성종19년에 인수대비의 병이 심해지자 자신의 병을 숨기면서까지 침식도 잊고 밤낮으로 정성껏 어머니의 병간호를 지극 정성으로 하다가 도이려 자신의 병이 도져서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또한 성종이 친동생이긴 했으나 임금이였기에 월산대군은 군신 간의 의리에 따라 신하로서 법도를 지키면서 충성을 다 했으며 조선은 계급사회였는데 왕의 형이라는 최고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늘 신하들이나 아랫사람에게 자신을 낮추면서 공손하고 예의 바르게 행동했는데 그 겸손한 덕이 이와 같았다. 그리고 신하들은 길에서 왕자를 만나면 말에서 내려 공수하고 서서 그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도록 법으로 정해져 있었는데 월산대군은 이 법이 너무 과하다고 생각하여 성종에게 파해달라고 아뢰였으나 형의 품위와 위상을 지켜주고 싶었던 성종은 윤허하지 않았다. 하지만 월산대군은 사전에 자신의 행차를 신하들에게 알려 피해 가게 함으로서 왕의 형이라는 지위를 내세우지 않았고 이 같은 행실로 인해 세상 사람들은 그 겸양하는 미덕을 칭찬했다고 한다. 신도비명을 보면 월산대군이 세상을 떠나자 궁궐 사람들과 신하들 그리고 심지어 거리의 백성들까지 애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했을 정도이다.
월산대군은 주어진 명예와 부에 안주하고 있기에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의 굴레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럴수록 더욱 조심하고 또 자제하려 애를 썼다. 정치 문제 등의 국정에 전혀 간여하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거의 매일같이 벌어졌던 연회석에서 단 한 번도 자세가 흐트러지거나 주정을 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왕실이나 종친과 관련된 송사에서도 원칙과 명분에 충실했다. 그러면서도 최대한 온건하게 일을 처리해 종종 약자의 입장인 민간의 편을 들기까지 했다.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부인이나 가까운 친척 그리고 집안의 종까지 엄하게 단속해 구설수에 오른 적이 없을 정도였다. 그의 처신에 세상 여론은 대단히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월산대군이 직접 몸으로 감당해야 했던 실제 삶이란 사람들이 편하게 생각하는 우아한 모습과는 한참 거리가 먼 것이었다. 술자리에서 술을 마셔도 기생질은커녕 그 흔한 주정 한 번 할 수 없었고 여유 있는 사대부라면 너 나 할 것 없이 즐기는 사냥이나 온천 가는 것조차도 간관의 힐난을 꺼려 궁중 행사 이외에는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엉뚱한 모함에 휘말릴까 사람들과의 교분도 가급적 자제했으니 그의 시작품이 당대에 높은 평가를 받았음에도 실제 교유관계에 있었던 사람이라고는 친동생 성종과 종친으로 당숙이었던 부림군 이식, 문인 조신 정도로 다섯 손가락을 다 채우기도 어려웠다고 전한다. 말이 왕공 귀인이었지 세상과 단절되어 지내야 하는 유폐 생활과 별반 차이 없었다. 일상생활의 사소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극단적인 자기 절제력을 발휘해야 했던 그의 삶은 속으로는 골병이 들어가면서도 남들 앞에서는 품위를 연출해야 하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적장자로 태어나서 두 번씩이나 왕위를 빼앗기고 풍류와 시문 뒤에서 은둔하듯 소박하게 한평생 살다간 월산대군은 귀하기는 왕의 아들이고, 높기로는 왕의 형으로 신분은 높았지만 마음은 외롭고 궁핍할 수 밖에 없었으니 시인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대비인 어머니와 임금인 동생을 등에 업고 얼마든지 권세를 누리고 이권에 개입할 수 있었던 당시 실세였지만 그는 비록 사내대장부로서 세상의 중심에 서지 못하고 한가하더라도 떳떳한 삶을 선택했다. 마치 살얼음판과도 같았던 미묘한 처지 속에서도 세인들의 구설수에 오르내리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월산대군은 비록 왕이 되지는 못했지만 오늘날에 조선시대의 유명한 시인으로 명성이 길이 남았다.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추강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낚시 드리우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무심한 달빛만 싣고 빈 배 저어 오노매라

시조가 그의 대표 작품이며 교과서에도 실려있다고 한다. 월산대군의 무욕적인 삶과 부드럽고 율격이 높은 시문은 조선 성종시대 문치(文治) 주의를 더욱 풍요롭게 하였다.

11. 관련 작품



12. 관련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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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산대군 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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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6 예종·성종실록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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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월산대군파 선원속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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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이씨 월산대군파 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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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월정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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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산대군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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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산대군 보도블록 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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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산대군 치제문과 치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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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산대군 초상화 찬문(성종 어제어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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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산대군 저택 석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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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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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산대군 요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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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산대군 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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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면산 월산대군 태실과 태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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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 월산사지 월산대군 명 암막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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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산대군 신도비 상형문자 제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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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산대군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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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산대군묘

13. 관련 문서



[1] 군호는 경상북도 경주를 달리 부르는 월성(月城)에서 유래했다.[2] 덕을 지키고 간사하지 아니한 것이 효(孝)이고 시행함이 이치에 맞는 것이 문(文)이다.[3] 월산대군은 전주이씨 시조 이한(李翰)의 27세손이다.[4] 예쁠 정[5] 아들 자, 아름다울 미[6] 호의 유래는 월산대군의 사저에 정자가 있었는데 친동생인 성종이 와서 보고 너무 마음에 들어서 풍월정(風月亭)이라는 이름을 친히 지어주었다고 한다.[7] 1455년(세조1)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경근(慶根)이다. 당양위 홍상과 혼인하여 슬하에 외아들 홍백경을 두었으나 1482년(성종13)에 28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다.[8] 1455년(세조1)에 태어났으며 본관은 순천(順天)이다. 평양군 박중선의 장녀이자 중종반정 1등 공신 박원종의 큰누님이며 성종의 형수로 연산군과 중종의 큰어머니이기도 하고 중종의 계비인 장경왕후 윤씨의 이모다. 월산대군이 요절하자 묘 근처에 원찰인 흥복사를 창건하고 불사를 자주 일으켜 남편의 명복을 빌면서 지내다가 1506년(연산군12)에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9] 1485년(성종16)에 월산대군의 측실인 부호군 김량신의 딸 원주김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파원부원군 윤여필의 장녀이자 윤임의 누님인 현부인 파평윤씨와 혼인하여 슬하에 파림군, 계림군, 전성부정 등 3남을 두었으나 1506년(연산군12)에 22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다. 최종 품계는 정2품 승헌대부(承憲大夫)에 이르렀고 시호는 소도(昭悼)이다. 세 아들에 의해서 월산대군의 혈통은 계속 이어져 현재에 이른다.[10] 월산대군의 묘와 신도비는 1986년 6월 경기도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1호다.[11] 성종을 일컫는 말[12] 우리 왕조(王朝)[13] 연산군중종의 큰아버지이기도 하고 박중선의 맏사위이자 장경왕후 윤씨의 이모부이며 박원종의 매형이다.[14] 오태백: 해주 오씨의 도시조이기도 하다.[15] 월산대군의 시호는 효문(孝文)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처음의 시호는 문효(文孝)였다. 그래서 성현과 신종호는 서문에서 월산대군을 문효공이라고 불렀다.[16] 청나라의 학자 전겸익이 엮은 역대 왕조 별 시집으로 우산은 그의 호이다.[17] 남의 시에 화답하면서 운자를 그 차례대로 두며 시를 짓는 일[弄] :희롱할 롱이나 여기선 문맥상 노닐다라는 뜻이 돼야 하며 노닐다라는 뜻으로 쓰인 예가 있다.[媚] :아첨할 미이나 여기선 아름답다라는 뜻이며 칭찬한다는 뜻도 된다.[許] :허락할 허이나 부사로서 혹시란 뜻 역시 가지고 있다.[18] 국구, 왕의 장인이란 뜻이다.[19] 임해군의 사인에 대해서는 당시 유배소를 지키던 이정표란 관리가 음독하게 했다고 보고됐으나, 인조반정 후 재조사를 해 광해군의 심복 이이첨이 자객을 보냈다라고 사건을 재정의했다고 한다.[20] 선조 때부터 고종이 황위에서 퇴위하기 전까지는 '경운궁'이라고 불렸다.[21] 월산대군은 세조의 장손이자 맏아들 의경세자(덕종)의 장남이었기에 적장자 승계를 원칙으로 하는 종법으로 따지면 세조의 차남인 예종보다 정통성이 더 높았기 때문이다.[22] 보통보다 값이 배나 되는 좋은 황금[23] 젊은 나이에 죽음[24] 성종의 서자 계성군의 양자로 입적되었다.[25] 조선왕조실록에 전성정으로 기록되어 있다.[26] 전주이씨 계성군파는 후사가 없었던 성종의 서자 계성군 양자가 월산대군의 손자 계림군이므로 혈통상 직계 조상은 월산대군이다. 그래서 계성군파 후손들은 매년 월산대군 기신제에 참석하며 경릉 제향에서 종헌관을 맡기도 한다.[27] 다만 조선에는 이미 무려 세자였다가 폐세자 당하고도 동생인 왕의 우애어린 배려를 받고, 천수를 누린 왕의 큰형이 있다. 월산대군과의 우애는 성종 자신의 성품이 가장 큰 이유겠지만, 또한 성종은 세종을 존경하고 닮고자 한 만큼 양녕대군의 전례를 의식하지 않았을 리도 없다. 그리고 세종 재위기에도 숱한 비행으로 자주 탄핵을 받은 양녕대군도 동생 덕에 처벌을 면했는데, 월산대군은 그와 달리 처신을 상당히 잘했으니 성종은 더욱 형을 배척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28] 월산대군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엉뚱한 모함에 휘말릴까 염려되어 사람들과의 교분도 가급적 자제했다고 한다.[29] 1458년(세조4) 세종의 서자 계양군(桂陽君)과 인수대비의 언니인 정선군부인 한씨 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났으며 휘는 식(湜), 자는 낭옹(浪翁), 호는 사우정(四雨亭)이다. 시문에 능하였고 명창(名唱)으로 널리 알려졌으나 30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다. 슬하에 회안부정(淮安副正)과 도안군(道安君) 2남을 두었으며 대표 저서로는 사우정집(四雨亭集)이 있다.[30] 외국 사신 접대 자리는 나라의 외교와 관계되는 중요한 행사이므로 종친이나 신하들 중에서도 아무나 입시할 수가 없었는데 이 자리에 종친을 대표해서 월산대군이 늘 참석하여 성종과 함께 사신을 맞이하였다. 명나라 사신도 월산대군의 풍모가 조용하고 반듯하며 예의가 있는 것을 보고서 특별히 좋아하고 공경하여 시를 지어주었다고 한다.[31] 시가(詩歌)를 서로 주고받으며 부름[32] 정릉동 연경궁(延慶宮) 저택, 풍월정(風月亭), 망원정(望遠亭) 등 정자, 고양 별장[33] 임금과 신하 관계를 떠나 집안 식구끼리 행하는 예법[34] 폭군 같은 며느리[35] 홀로 남은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처지[36] 임금님이 드시던 귀한 청어목 멸치과의 바닷물고기로 회유성 어류로 맛이 좋아 조선시대부터 수라상에 올랐으며 뼈째 먹을 수 있다.[37] 연산군과 중종을 비롯한 성종의 16명 왕자들의 이름은 모두 항렬자로 忄심방변 부수를 사용했는데 이이 역시 이름에 忄자를 따랐다.[38] 월산대군묘는 한양을 뒤로하여 아예 북쪽을 향해 있다. 볕이 좋은 남향을 택하는 게 풍수지리의 상식이나 이를 정면으로 위배하고 있는데 후대에 큰 인물이 나와 정치에 관여하게 되기를 바라지 않고 나무꾼을 해도 넉넉히 먹고 살 수 있는 지역이라 하여 묘를 썼다고 한다. 이후 그의 뜻대로 후손들 중에서 큰 벼슬을 한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고 하며 월산대군의 후손은 한때 묘의 방향을 바꿔볼까 하는 의논이 있었지만 차마 선대의 뜻을 거스르지 못하여 옛 모습 그대로 지키고 있다고 한다.[39] 조선시대에는 왕, 왕비, 대비, 세자, 세자빈, 후궁, 대군, 왕자군, 공주, 옹주, 의빈, 왕비의 부모나 예장 대상의 공신과 종2품 이상 종친, 종1품 이상 문무관들이 사망하였을 경우에 조회를 정지했는데 국장 대상자는 5일 정지, 예장 대상자는 1~3일 정지하였다.[40] 부림군의 장남이며 슬하에 외아들 덕양부수(德陽副守)를 두었다.[41] 이후 월산대군의 서자였지만 대군의 유일한 아들이라 적자로 인정받은 덕풍군이 장성하자 회안부정에 이어서 월산대군의 제사를 받들었다.[42] 임금이 대신이나 종친의 시호를 직접 짓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성종은 봉상시에서 논의한 형의 시호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자신이 시법(諡法)을 상고하여 친히 지었으니 월산대군에 대한 우애가 지극했음을 알 수가 있다.[43] 임금이나 왕비 및 2품 이상의 장례에 각사(各司)의 관원이 각각 1인 이상씩 참례하여 장사 지내던 제도[44] 존경하고 숭배(崇拜)함[45] 형제이면서 마음을 알아주는 관계[46] (사)활쏘기, (어)말을 타거나 부림, (서)글을 읽고 씀, (수)산수[47]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를 통틀어 이르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