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원황후

 


'''조위의 황후
明元皇后 | 명원황후
'''
'''시호'''
명원황후(明元皇后)
''''''
곽씨(郭氏)
'''출생'''
불명
'''사망'''
263년 12월
'''재위'''
'''조위의 황후'''
238년 ~ 239년
'''조위의 황태후'''
239년 ~ 263년
'''부군'''
명제(明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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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元皇后 郭氏
(? ~ 263년 12월)

1. 소개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성은 곽씨(郭氏), 는 불명. 조예의 두 번째 황후.
서평군(西平郡) 사람으로서 대대로 하우(河右)의 호족이었지만 황초 연간에 그녀의 군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므로, 그녀는 신분을 박탈 당하여 관노가 되어 황궁으로 들어왔다. 조예가 황제에 즉위한 후 많은 총애를 받아 부인(여관의 지위)이 되었고 명도황후 모씨가 조예의 명으로 자결한 후 조예의 병세가 위독해지자, 드디어 황후로 옹립되었다.[1] 제왕 조방이 즉위하자 황태후가 되었고, 곽씨의 가족들은 작위와 영지를 받았다.
조방, 조모, 조환 시대에는 사마씨가 정권을 잡고 있었고, 나라의 큰 일은 곽태후에게 물어 명이 떨어진 후에 시행하는 체제를 취했다. 고평릉 사변에서 사마씨가 명원황후의 허락을 받아 쿠데타를 정당화했고, 관구검과 종회 등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도 명원황후의 명령을 빙자하여 난을 일으켰다.[2] 또한 사마사가 조방을 폐위할 때도 명원황후를 명목으로 이용했다.
회황후가 죽고나서 조방이 폐후 왕씨를 황후로 삼으려는 것을 명원황후가 반대했다.[3] 조방이 폐위되고 새로운 황제를 결정할 때 사마사는 조거를 추천했지만 명원황후가 강력히 조모를 천거해서 조모가 즉위하게 되었다. 조모가 가충의 부하 성제에게 죽자 사마소는 명원황후를 압박해 사실을 왜곡시켰다. 263년 12월, 명원황후는 죽고 264년 2월 고평릉(조예의 능) 서쪽에 묻혔다.

2. 평가


기본적으로 왕조에서 황태후라는 자리는 꽤 독특한 입지를 가지게 되는데, 수렴청정 같은 제도적 실권을 가지는 형태가 아니라 할지라도 황태후란 그 존재 자체로 현 황제에 있어 효의 대상이므로, 어떤 의미로는 유일하게 황제의 윗사람이라 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한 왕조를 반면 교사 삼은 조위 왕조는 외척은 물론 황실 혈족 전반의 정치 개입을 적극적으로 억제했고, 덕분에 과거 하태후와 하진처럼 황태후가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했다.
게다가 곽 태후 본인도 사정이 상당히 미묘했다. 호족 가문이었지만 몰락하여 그 자신은 관노 신세였었고. 그마저도 황후로 인정 받은 것은 이미 조예가 맛이 간 뒤였으니, 세력을 형성할래야 할 수가 없었고 황태후라고 스스로 떵떵거리기에도 좀 껄끄러운 입장. 이렇듯 '상징적 지위'와 '실질적 권력(또는, 최소한 영향력)'이 엄청난 격차가 있는 그녀는, 결국 말년까지 사마씨가 황제를 한 번 갈아 치우고 한 번 시해할 동안 열심히 그들의 정당성에 도장이나 찍어주는 신세가 되었는데...
그런 그녀가 딱 한 번 강력하게 목소리를 낸 사건이, 바로 조모의 황위 계승. 사마사는 조방을 폐위한 뒤 조거로 뒤를 이으려 했지만 곽 태후는 제사관계가 꼬인다는 이유로 조모를 밀어 붙였고, '그' 사마사도 결국 자신들이 기반으로 삼고 있는 유교적 명분 앞에서는 방법이 없었는지 백기를 드는데...결과적으로 이것이 사마사가 사마소에게 물려준 가장 무거운 숙제이자 사마씨 왕조 전체에 그늘을 드리우는 저주로 이어지고 만다.
사마씨 왕조 시대에 쓰여전 정사 삼국지 위서 후비전은 명원황후에 개인에 대해 이렇다 할 평은 내리지 않는다. 다만 위 왕조가 한 왕조의 실패를 경계 삼아 황후들의 정치 참여를 막은 것에 대해 훌륭하다 평가하며, 명원황후 역시 그 '나대지 않고 조용히 지내준 기특한' 여인들의 하나로 보고 있을 뿐.

3. 미디어 믹스



3.1.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


[image]
사마의가 국정을 장악하는 모습을 그저 바라만 본다.

4. 둘러보기



'''조위의 역대 황후'''
명도황후 모씨

'''명원황후 곽씨'''

회황후 진씨/견씨

[1] 즉 명원황후는 관노에서 황후라는 엄청난 인생역전을 보여준 인물이다.[2] 종회가 난을 일으킬 때 명원황후가 사망하기 전 사마소를 주살하라고 했다는 조서를 위조해 반란 명분에 사용했다.[3] 출처: 제왕기 주석 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