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방

 



'''조위 제3대 황제'''
'''哀皇帝 | 애황제'''
'''묘호'''
없음
'''시호'''
소릉여공(邵陵厲公)
'''제호'''
애황제(哀皇帝), 폐황제(廢皇帝)
'''작위'''
제왕(齊王) → 소릉공(邵陵公)
'''연호'''
정시(正始, 240년 ~ 249년 4월)
가평(嘉平, 249년 4월 ~ 254년 10월)
''''''
조(曹)
''''''
방(芳)
''''''
난경(蘭卿)
'''생몰 기간'''
232년 ~ 274년
'''재위 기간'''
239년 ~ 254년
1. 개요
2. 생애
2.1. 즉위 이전
2.2. 즉위 이후
2.3. 폐위
2.4. 폐위 이후
3. 가족 관계
4. 미디어 믹스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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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국시대 조위(曹魏)의 제3대 황제. 자는 난경(蘭卿)이다. 시호는 소릉여공(邵陵厲公)[1]이다. 다른 칭호로는 제왕(齊王), 소제(少帝)[2], 애제(哀帝), 폐제(廢帝)로 불리기도 한다.

2. 생애



2.1. 즉위 이전


위명제 조예가 어디선가 데려온 양자로 형제로는 조순이 있었다. 어릴 때 조방은 황태자가 되었으며 조순은 진왕(秦王)에 봉해졌다. 이에 대해 정사 삼국지에는 애초에 황실의 비밀이라 근본을 알 수 없다고만 했고, 《위씨춘추》나 《세설신어》에서는 임성왕 조해(曹楷)의 아들이라고 했지만 근거는 없다.
비록 조방이 조예의 친자가 아니라도 출신이 명확한 양자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정말로 조해의 아들이라면, 조해는 조창의 아들이며 조예에게는 사촌이기에, 오촌 조카인 조방을 입양하는 것이 된다. 어차피 아들 없는 사람이 친척의 아들을 입양하는 게 흔했던 시대였다. 그러나 조방의 경우에는 아무리 황제인 조예의 양자가 되었다 해도 결국에는 누구 아들인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정통성에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2.2. 즉위 이후


조예가 239년, 재위 14년 만에 36살의 나이로 죽자 9살의 나이로 황제가 되었다. 하지만 나이가 어렸으므로 조예의 황후이자 조방의 양모인 명원황후(明元皇后) 곽씨가 대신 수렴청정을 하였고 조예의 탁고대신인 조상사마의가 어린 황제를 곁에서 보필했다.
'''여기까진 괜찮았다'''.
하지만 이후 조상과 사마의 간의 분쟁이 암암리에 격화되면서 조상은 사마의 측 인사들을 전부 배제하고 자신과 동생, 지인 등으로만 권력구조를 독점했고 황제 조방조차 무시한 채 전횡을 일삼았다.
물론 사마의도 이걸 그냥 당할 남자는 아니었기에 두 아들인 사마사와 사마소를 데리고 '''고평릉 사변을 일으켜 조상 일파를 죄다 죽여버린다.''' 이로써 사실상 조위의 전권은 사마가문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다만 사마의는 다른 생각이 있었는지 아니면 적어도 자기대에선 역성혁명을 벌이지 않았던 조조를 보고 느낀 바가 있었는지 건국 자체엔 관심이 없어 그냥 조위의 실세로 있는 데 만족하여[3] 조위의 사직은 보존할 수 있을 듯 했으나 '''문제는 두 아들들은 이런 사마의와 달랐다는 것'''
2자릿수도 안 되는 나이에 황제가 됐다는 것 때문에 사마의가 어린 조방을 꼭두각시로 만들었다는 이미지가 있지만 고평릉 사변을 일으켰던 때는 조방 재위 10년인 249년이다. 즉 조방의 나이 19세이므로 어리다면 어리지만 그 당시 기준으론 일단 성인에 속하는 나이다. 거기다가 10년이나 황제였으니 적어도 황제로서 경력만 보면 적은 것도 아니었다.

2.3. 폐위


사마의의 뒤를 이은 사마사가 권력을 잡자 조방은 외척인 장집, 중서령 이풍, 황문감 소삭, 영녕서령 악돈, 항종복야 유현, 태상 하후현 등과 함께 사마사와 그 일당들을 주살하고 하후현을 대장군으로 대신 삼으려고 했다. 그러나 '''발각되어 실패'''했고 이풍, 하후현 등은 처형되었다. 그 이후 황후인 폐후 장씨도 사마사에 의해 폐출되는 등 조방의 측근이 모두 정리되었다.
몇 달 뒤 수세에 몰린 조방은 사마사를 없애려 하였으나 계획만 세우고 실행치 않았다. 정확하게는 강유가 농우로 침범하자 허창에 주둔하고 있던 안동장군 사마소를 강유를 공격하라고 수도로 부른 다음 그를 죽이고 그 군대를 탈취, 사마사도 몰아낸다는 계획이었는데 막상 사마소가 들어오자 조방은 이를 두려워하며 실행하지 못했던 것이다. 사마소는 군대를 이끌고 수도로 들어왔고 사마사는 이 계획을 알고 황제의 계획을 황태후에게 말하며 황제를 폐위시킬 작정을 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사마사는 황태후인 명원황후를 통해 조방을 폐위시켰다.

가을 9월 대장군 사마사는 황제의 계획을 황태후에게 말했다. 19일, 황태후가 다음과 같이 명령했다.

"황제 조방은 이미 성년이 되었지만, 국가의 정무를 직접 처리하지 않고, 부인에게 탐닉하고 여색에 빠져 매일 배우들을 불러들여 추악한 유희를 즐기고 있고, 후궁 여자들을 맞아 내전에 머물게 하여 인륜의 질서를 파괴하고 남녀의 정절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소. 공손함과 효도하는 마음은 날마다 줄어들고, 도리에 역행하는 오만함만이 점점 심해져 하늘이 명한 대업을 잊고 종묘를 받들 수 없게 되었소. 겸태위(兼太尉) 고유에게 간책(簡策)을 받들어 종묘에 제사지내어 보고하고 조방을 제나라로 돌려보내 옛날대로 번왕을 담당하도록 하여 '''황제의 자리에서 떠나도록 하시오.'''"

이 날 황제는 다른 궁전으로 옮겨 머물렀으며, 이때 그는 스물셋이었다. 사자가 부절을 갖고 호송하였다. 하내군(河內郡) 중문(重門)에 제왕의 궁궐을 만들었고, 제도는 모두 번국의 예식과 같았다.

《위서 제왕기》

이로써 조방은 사마사에 의해 폐위되었다. 조방은 제왕(齊王)이라는 작위를 받고 하내군(河內郡) 중문(重門)으로 쫒겨났다.
참고로 삼국지집해에선 조방의 비행 부분에 대해 그거 거짓이라는 학자들의 의견이 줄줄이 달린다. 앞에선 선행을 잔뜩 써놓고 마지막엔 그에 상반되는 기록을 남겨 위화감을 느끼게 만드는 진수의 기법이라고 보이는데 실제로도 많은 학자들이 의구심을 가지고 반박했다.
삼국지연의》에선 사마사 토벌 밀모 장면이 과거 후한 헌제의 명을 받은 동승유비, 마등, 유표 등을 끌어들여 조조를 주살하려다 실패한 것과 비슷하게 묘사된다.

2.4. 폐위 이후


폐위 후 일생은 알려진 게 없는데 정사 삼국지에서는 폐위된 후 곧바로 조모를 옹립하는 걸로 끝난다. 《진서》에서는 약간의 기록이 더 있는데, 265년 서진#s-1이 세워진 후 사마씨 황족이 아니었던 그는 제왕에서 소릉(邵陵公)으로 '''격하'''되었다.
274년, 42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시호#s-1는 여공(厲公)으로 추증되었다. 문제는 시법에서 '''죄없는 사람들을 살육한 경우를 여라고 한다'''고 한 만큼 이 글자가 얼마나 좋지 않은지를 고려하면 고인드립인 셈이라는 거다. 참고로 우금#s-1도 이 시호를 받았다. 안습.

3. 가족 관계


황후로는 회황후[4]가 있었으나, 251년 세상을 떠나자 장집의 딸인 폐후 장씨를 맞아들였으나, 사마사 주살 시도 때문에 쫓겨났고 폐후 왕씨를 맞이했다. 후궁들은 당대에 특이하게 본명이 알려진 여자들이 많다. 자손은 없었는지 전혀 기록된 것이 없다.

4.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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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9,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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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2, 13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그래도 황제인 만큼 꾸준히 나오지만 능력치가 안습. 황제일 경우는 옥새를 들고 있으니 매력이라도 100이지만 황제가 아닐 때라면... 삼국지 3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7/무력 6/지력 29/정치력 55. 모략계 병법인 혼란을 가지고 있지만 지력이 저래서야.... 그 밖에 병법으로는 지식계 병법인 조영을 가지고 있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3/무력 8/지력 24/정치력 58/매력 71에 특기라고 있는 게 주호... 그나마 조상들 아이템을 물려받고 나온다면 전론, 의천검, 옥새 등을 물려받기 때문에 통솔력 3/무력 13/지력 30/정치력 58/매력 '''100'''이 된다.
삼국지 12에서는 짤렸다가 PS3판에서 새로 등장했다. 일러스트는 쓸데없이 성깔이 있어 보인다. 왕좌에 앉은 채 무섭게 노려보는 장면이 압권이다. 능력치 총합은 '''102'''.
삼국지 13에서의 능력치는 통무지정 순으로 20/14/27/48. 특기는 문화 1, 견수 1. 전수특기는 문화이고 전법은 고무. 하지만 능력치가 쓰레기라고 생포했을 때 죽이려고 한다면 이 사람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다시 생각하기를 바란다.
삼국지 14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5, 무력 8, 지력 28, 정치 48, 매력 71로 전작에 비해 지력이 1 상승한 대신 통솔력이 15, 무력이 6 하락했다. 개성은 소침, 주의는 왕도, 정책은 지역진흥 Lv 3, 진형은 안행, 전법은 고무, 친애무장은 이풍,[5] 장집, 하후현, 혐오무장은 없다.
삼국지 공명전에서는 위나라의 마지막 황제가 된 인물로 곧 조상이 실각되고 사마의에게 전권을 장악당해 황제답게 살지도 못했다. 마지막 전투인 낙양 전투를 클리어하면 낙양 황궁에서 자결한 시체로 발견되는데 유서에 죄는 모두 선조들과 나에게 있으니 장수나 관리들에게 죄를 묻지 말라는 말을 남긴다. 이를 본 제갈량은 "명군의 자질이 있었을지도 모르겠군"이라고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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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조조전 Online에서는 본래 성년의 모습으로 플레이어블 무장이 될 예정이라 초상화도 있었지만, 게임에서는 정작 제대로 사용되지 못하고 탈락 무장이 되었다. 병과는 보병, 능력치는 무력 26. 지력 76, 통솔 54, 민첩 48, 행운 50. 회심 대사는 비겁한 자들이로구나!, 퇴각 대사는 네 이놈, 기억해두겠다.
사마의전 스토리에서 어린 시절로만 등장하는데, 조상을 따라 고평릉에 동행했다가 사마의가 낙양을 제압하고 조상 앞으로 오자 사마의가 날이 춥다면서 먼저 처소로 들라면서 추후 찾아뵙겠다고 하자 낙양으로 돌아간다. 사마의가 왕릉의 반란에 연루된 황족 조표를 처벌해야 할 것과 종친들을 업에 불러 감시하게 하는 것을 주장하자 알았다고 허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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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에서도 비로소 마지막 60권에 등장한다. 스토리가 딱 촉나라 망하는 부분까지 진행되기에 조방은 어린 아이의 모습까지로만 등장한다.
대군사 사마의에서는 조예 황실 종친중 남아 한 명을 데려와 양자로 삼았다고 나와 누구의 자식인지는 밝혀지지 않고, 사마의의 첩 백령군이 유모로 돌본다. 하지만 개초딩스러운 성격에 황궁예법을 적응 못했지만, 백령군이 겨우 예법을 가리켰을때, 사마의를 쳐내려는 조상일파가 조방의 친모를 모셔왔다며, 임성왕 조해의 첩을 데려와 유모로 삼게한다. 세설신어의 임성왕 조해의 아들이라는 설과 첩의 자식이어서 드러나지 않았다. 라는 식으로 재해석을 해서 이야기를 풀어냈다.
[1] 서진에서 준 작위 '소릉공'에 시호 '여'를 합친 것이다.[2] 따지자면 조방은 통상적인 소제의 정의와는 맞지 않는다는 의견이 있다. 재위 기간이 15년으로 짧은 것도 아니고 향년 43세에 죽어 어린 나이에 죽은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차피 정식 시법도 아니고, 어린 나이(7세)에 즉위해 재위 기간 대부분 동안 미성년이었던 건 사실이기도 하고, 정사 삼국지에서부터 조방, 조모, 조환을 묶어 3소제기에 편성했기 때문에 그냥 쓰이는 중.[3] 사실 이건 당연한 것이 사마의는 고평릉 사변 당시 이미 70세였다. 당시 기준으로 언제 갈지 모르는 노인네였는데(실제로도 고평릉 사변 후 고작 2년 만에 죽었고.) 차라리 자식에게 후일을 맡기는 게 옳지 다 늙은 자신이 황제로 즉위하는 것은 심각한 무리수였다.[4] 견엄의 손녀로 고모 할머니가 문소황후이다.[5] 원술의 부하 이풍, 이엄의 아들 이풍이 아닌 위나라 관료 이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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