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 시게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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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NPB 야구 선수, 평론가, 해설가. 전 주니치 드래곤즈 감독.
고교 시절 과학기술공업 고등학교의 에이스로 활약했으나, 3학년 때 폐교가 결정되면서 여름 고시엔 예선 패배 후 고마자와 대학 고등학교로 전학해서 그곳에서 졸업했다.
졸업 후엔 고마자와대학에 입학해 거기서도 활약하면서 5번의 대학야구 리그 우승을 경험하고 퍼펙트 게임을 달성하기도 하였으며 제5회 일미 대학야구 선수권 대회에 대표로 출장하기도 했다. 대학 시절의 성적은 41시합 출장. 18승 9패. 방어율 2.11. 191탈삼진.
졸업년도인 1976년 드래프트에서 롯데 오리온즈의 1위 지명을 받았으나 거부. 그 후 사회인야구팀 '''스미토모 금속'''에 입단하여 1977년 사회인야구 선수권대회 우승을 이끌었다.
그 뒤 1978년 드래프트에서 닛폰햄 파이터즈, 주니치 드래곤즈, 야쿠르트 스왈로즈, 세이부 라이온즈의 1위 지명을 받았고, 제비뽑기로 선제 교섭권을 얻은 세이부 라이온즈에 입단했다.
입단 첫해인 1979년은 당시 팀이 막 새 터에서 자리를 잡아가던 때였기에 전력이 심하게 약해서 리그 최다실점을 포함, '''5승 16패 7세이브, 방어율 4.51'''의 처참한 성적을 기록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80년부터 두 자릿수 승수를 기록해 괜찮은 성적을 거두며 세이부의 중심 선발진으로 자리잡아갔다.
그러나 1982년 시즌 초반 선발 투수로써 부진한 모습을 보이자 당시 감독이었던 히로오카 타츠로에 의해 구원투수로 전향. 이해 팀의 연고이전 이래 첫 우승에 공헌했고 이듬해인 1983년엔 리그 최다 세이브 포인트를 기록해 최우수 구원투수 타이틀을 획득하며 팀의 리그 연패에 공헌했다.
하지만 1983년 이후론 부상 등으로 인해 성적 부진에 시달렸고, 결국 1988년을 끝으로 은퇴하였다.
'''10시즌간 통산 성적은 57승 62패 82세이브 455탈삼진 방어율 3.73'''이다.
은퇴 뒤 1989~1991년 세이부 라이온즈의 2군 투수코치를 맡은 후, 1992년 치바 롯데 마린즈 최초의 감독으로 선임되어 떠난 야기사와 소하치의 뒤를 이어 1군 투수코치가 되었으나 1998년 시즌 도중 투수진의 저조한 성적의 책임을 지고 2군 투수코치로 강등. 1999년 시즌 후 해임당했다.
그 후 2000~2001년 닛폰햄 파이터즈 투수코치로 전임했으나 팀 투수진이 2년 연속 방어율 5위로 주저앉고 2001년 팀 순위가 최하위를 찍으면서 또 해임당했다.
이듬해인 2002년엔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투수코치로 전임했지만 2003년 해임당했다. 2년 내내 팀 방어율이 4점대에서 놀았고 방어율 성적도 2002년 5위, 2003년 최하위를 찍었고 팀 순위조차 2년 연속 최하위로 추락한 게 원인이었다.
그리고 2004년 주니치 드래곤즈의 배터리 치프 코치로 부임. 2010년엔 수석코치로 부임해 2011년까지(오치아이 히로미츠 감독이 이 해 퇴임) 수석코치를 맡으며 팀의 전성기[5] 를 이끌었다.
그 뒤 2012~2013년 야구해설자, 야구평론가로 일하다 2014년 주니치 드래곤즈의 수석코치로 다시 부임. 2016년 시즌 도중 타니시게 모토노부 감독이 성적부진으로 휴양(을 빙자한 사실상의 해임)을 선언하면서 감독대행을 맡게 되었다. 만약 감독대행으로써 좋은 성적을 거둔다면 주니치의 차기 감독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근데 보면 알겠지만 주니치 때를 제외하곤 코치 성적이 쓰레기다(...)
9월 29일, 주니치의 정식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타니시게가 그랬던것처럼 올해도 세리그의 나머지감독들이 외야수 출신이라 유일한 비외야수 출신 감독이다. 게다가 세리그 6개팀 감독 중에 가장 감독 데뷔가 늦은 신인 감독이지만 나이가 가장 많아 신인이라고 부르기는 어찌보면 민망한 상황... NPB에 대해 잘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베테랑 감독으로 착각할 듯.
중남미 지역에 연이 있어 중남미 출신의 용병을 주로 영입한다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2018년 들어서는 팬들 사이에서 보다 다양한 출신의 용병 영입에 대한 요구가 늘고 있다.
감독 데뷔전인 3월 31일 돈을 물쓰듯 쓰는 팀에게 개막전 패배를 포함 시원하게 스윕당했고 홈개막전인 4월 4일에도 지난 시즌 리그 우승팀에 패해 개막 4연패에 빠졌다. 신임 감독의 개막 4연패는 이웃나라에도 똑같은 상황이 나왔다. 4월 5일 경기에서 드디어 첫승을 거두나 싶더니 마무리 타지마 신지가 제구난에 실점위기에서 여지없이 적시타를 얻어맞아 승부를 연장으로 끌고갔고 연장전에서도 찬스마다 말아먹는 형편없는 플레이를 선보인 끝에 무승부. 4월 7일 라미짱과 아이들과의 홈경기에서 엎치락뒤치락 치열한 전개끝에 개막 7경기만에 드디어 감격의 데뷔 첫승을 거두었다.
이후 최근 몇년간 그랬듯 과거의 영광만 추억하면서 하위권 고정이다. 그나마 도쿄에 있는 두 팀이 인터리그에서 센트럴리그 망신을 시켜준 덕에 어부지리로 전반기를 4위로 마쳤지만 곧 5위로 추락. 올스타 브레이크 직전부터 잉어 셔틀들이 거한 약을 빨았는지 연승을 내달린 것도 있지만 중요한건 본인들이 너무 못해서 5위 자리 그대로 시즌 마감이다. 팀이 못나가면 다른 화제거리라도 있어야 되는데 감독부터 별로 기대감이 들지 않는 평범한 커리어에 프런트가 코칭스탭 중에 말 잘들을 것 같은 사람을 앉힌 것 같은 느낌이라 화제성도 없다. 결국 센트럴리그 6개 팀 중에 유일하게 관중동원마저 감소하는 등 성적뿐만 아니라 구단경영 전체에서 위기상황을 맞고 있다.
기용 문제에 있어서도 오치아이 감독 시절 선수들에 유난히 집착을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현재 팀 상황에서 감독이 누가 되든 답이 없는 건 마찬가지. 그나마 올해 총평을 미리하자면 외국인 타자 알렉스 게레로의 활약[6] 과 거포 노망주 후쿠다 노부마사의 재발견, 신인 시즌 최다 안타에 도전한 교다 요타의 발견 정도가 있다.
8월 7일에 안타깝게도 첫째 딸이 유방암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러나 팀 분위기가 다운될것을 우려했는지 감독이 경기에 결장할 수 없다는 의사를 내보이며 경기에 얼굴을 비추었다.
2018년 6월 23일 나고야돔에서의 요코하마전에서 승리를 거두며 잠시 a클래스 진입에 성공하여 감독 첫 a클래스를 맛보았으나 다음날 패배하며 다시 5위로 추락.
압도적인 최하위가 예상되던 시즌이었으나 신 용병들의 활약과 베테랑의 회춘, 히라타 다카하시 등의 각성으로 어찌저찌 진흙탕 싸움에 끼어드는데는 성공하였다.
그러나 결국 2년 연속 5위로 시즌을 마감하였고 정규시즌 마지막 경기를 가진 직후 사임을 발표할 예정이고 구단편성본부장으로 자리를 이동하여 팀을 떠나지는 않게 되었다.
후임 감독으로 또다른 팀의 레전드 요다 츠요시 라쿠텐 투수코치가 선임되었다고 발표하였다. 본인은 시니어 디렉터 로 구단편성에서 일하게 되었으며 최근 쿠바 출신 육성 포수 아르엘 마르티네스의 가족과 접견한 근황이 포착되었다.
1. 소개
전 NPB 야구 선수, 평론가, 해설가. 전 주니치 드래곤즈 감독.
2. 학창 시절
고교 시절 과학기술공업 고등학교의 에이스로 활약했으나, 3학년 때 폐교가 결정되면서 여름 고시엔 예선 패배 후 고마자와 대학 고등학교로 전학해서 그곳에서 졸업했다.
졸업 후엔 고마자와대학에 입학해 거기서도 활약하면서 5번의 대학야구 리그 우승을 경험하고 퍼펙트 게임을 달성하기도 하였으며 제5회 일미 대학야구 선수권 대회에 대표로 출장하기도 했다. 대학 시절의 성적은 41시합 출장. 18승 9패. 방어율 2.11. 191탈삼진.
졸업년도인 1976년 드래프트에서 롯데 오리온즈의 1위 지명을 받았으나 거부. 그 후 사회인야구팀 '''스미토모 금속'''에 입단하여 1977년 사회인야구 선수권대회 우승을 이끌었다.
그 뒤 1978년 드래프트에서 닛폰햄 파이터즈, 주니치 드래곤즈, 야쿠르트 스왈로즈, 세이부 라이온즈의 1위 지명을 받았고, 제비뽑기로 선제 교섭권을 얻은 세이부 라이온즈에 입단했다.
3. 선수 시절
입단 첫해인 1979년은 당시 팀이 막 새 터에서 자리를 잡아가던 때였기에 전력이 심하게 약해서 리그 최다실점을 포함, '''5승 16패 7세이브, 방어율 4.51'''의 처참한 성적을 기록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80년부터 두 자릿수 승수를 기록해 괜찮은 성적을 거두며 세이부의 중심 선발진으로 자리잡아갔다.
그러나 1982년 시즌 초반 선발 투수로써 부진한 모습을 보이자 당시 감독이었던 히로오카 타츠로에 의해 구원투수로 전향. 이해 팀의 연고이전 이래 첫 우승에 공헌했고 이듬해인 1983년엔 리그 최다 세이브 포인트를 기록해 최우수 구원투수 타이틀을 획득하며 팀의 리그 연패에 공헌했다.
하지만 1983년 이후론 부상 등으로 인해 성적 부진에 시달렸고, 결국 1988년을 끝으로 은퇴하였다.
'''10시즌간 통산 성적은 57승 62패 82세이브 455탈삼진 방어율 3.73'''이다.
4. 은퇴 후 코치 시절
은퇴 뒤 1989~1991년 세이부 라이온즈의 2군 투수코치를 맡은 후, 1992년 치바 롯데 마린즈 최초의 감독으로 선임되어 떠난 야기사와 소하치의 뒤를 이어 1군 투수코치가 되었으나 1998년 시즌 도중 투수진의 저조한 성적의 책임을 지고 2군 투수코치로 강등. 1999년 시즌 후 해임당했다.
그 후 2000~2001년 닛폰햄 파이터즈 투수코치로 전임했으나 팀 투수진이 2년 연속 방어율 5위로 주저앉고 2001년 팀 순위가 최하위를 찍으면서 또 해임당했다.
이듬해인 2002년엔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투수코치로 전임했지만 2003년 해임당했다. 2년 내내 팀 방어율이 4점대에서 놀았고 방어율 성적도 2002년 5위, 2003년 최하위를 찍었고 팀 순위조차 2년 연속 최하위로 추락한 게 원인이었다.
그리고 2004년 주니치 드래곤즈의 배터리 치프 코치로 부임. 2010년엔 수석코치로 부임해 2011년까지(오치아이 히로미츠 감독이 이 해 퇴임) 수석코치를 맡으며 팀의 전성기[5] 를 이끌었다.
그 뒤 2012~2013년 야구해설자, 야구평론가로 일하다 2014년 주니치 드래곤즈의 수석코치로 다시 부임. 2016년 시즌 도중 타니시게 모토노부 감독이 성적부진으로 휴양(을 빙자한 사실상의 해임)을 선언하면서 감독대행을 맡게 되었다. 만약 감독대행으로써 좋은 성적을 거둔다면 주니치의 차기 감독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근데 보면 알겠지만 주니치 때를 제외하곤 코치 성적이 쓰레기다(...)
5. 감독 시절
9월 29일, 주니치의 정식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타니시게가 그랬던것처럼 올해도 세리그의 나머지감독들이 외야수 출신이라 유일한 비외야수 출신 감독이다. 게다가 세리그 6개팀 감독 중에 가장 감독 데뷔가 늦은 신인 감독이지만 나이가 가장 많아 신인이라고 부르기는 어찌보면 민망한 상황... NPB에 대해 잘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베테랑 감독으로 착각할 듯.
중남미 지역에 연이 있어 중남미 출신의 용병을 주로 영입한다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2018년 들어서는 팬들 사이에서 보다 다양한 출신의 용병 영입에 대한 요구가 늘고 있다.
감독 데뷔전인 3월 31일 돈을 물쓰듯 쓰는 팀에게 개막전 패배를 포함 시원하게 스윕당했고 홈개막전인 4월 4일에도 지난 시즌 리그 우승팀에 패해 개막 4연패에 빠졌다. 신임 감독의 개막 4연패는 이웃나라에도 똑같은 상황이 나왔다. 4월 5일 경기에서 드디어 첫승을 거두나 싶더니 마무리 타지마 신지가 제구난에 실점위기에서 여지없이 적시타를 얻어맞아 승부를 연장으로 끌고갔고 연장전에서도 찬스마다 말아먹는 형편없는 플레이를 선보인 끝에 무승부. 4월 7일 라미짱과 아이들과의 홈경기에서 엎치락뒤치락 치열한 전개끝에 개막 7경기만에 드디어 감격의 데뷔 첫승을 거두었다.
이후 최근 몇년간 그랬듯 과거의 영광만 추억하면서 하위권 고정이다. 그나마 도쿄에 있는 두 팀이 인터리그에서 센트럴리그 망신을 시켜준 덕에 어부지리로 전반기를 4위로 마쳤지만 곧 5위로 추락. 올스타 브레이크 직전부터 잉어 셔틀들이 거한 약을 빨았는지 연승을 내달린 것도 있지만 중요한건 본인들이 너무 못해서 5위 자리 그대로 시즌 마감이다. 팀이 못나가면 다른 화제거리라도 있어야 되는데 감독부터 별로 기대감이 들지 않는 평범한 커리어에 프런트가 코칭스탭 중에 말 잘들을 것 같은 사람을 앉힌 것 같은 느낌이라 화제성도 없다. 결국 센트럴리그 6개 팀 중에 유일하게 관중동원마저 감소하는 등 성적뿐만 아니라 구단경영 전체에서 위기상황을 맞고 있다.
기용 문제에 있어서도 오치아이 감독 시절 선수들에 유난히 집착을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현재 팀 상황에서 감독이 누가 되든 답이 없는 건 마찬가지. 그나마 올해 총평을 미리하자면 외국인 타자 알렉스 게레로의 활약[6] 과 거포 노망주 후쿠다 노부마사의 재발견, 신인 시즌 최다 안타에 도전한 교다 요타의 발견 정도가 있다.
8월 7일에 안타깝게도 첫째 딸이 유방암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러나 팀 분위기가 다운될것을 우려했는지 감독이 경기에 결장할 수 없다는 의사를 내보이며 경기에 얼굴을 비추었다.
2018년 6월 23일 나고야돔에서의 요코하마전에서 승리를 거두며 잠시 a클래스 진입에 성공하여 감독 첫 a클래스를 맛보았으나 다음날 패배하며 다시 5위로 추락.
압도적인 최하위가 예상되던 시즌이었으나 신 용병들의 활약과 베테랑의 회춘, 히라타 다카하시 등의 각성으로 어찌저찌 진흙탕 싸움에 끼어드는데는 성공하였다.
그러나 결국 2년 연속 5위로 시즌을 마감하였고 정규시즌 마지막 경기를 가진 직후 사임을 발표할 예정이고 구단편성본부장으로 자리를 이동하여 팀을 떠나지는 않게 되었다.
후임 감독으로 또다른 팀의 레전드 요다 츠요시 라쿠텐 투수코치가 선임되었다고 발표하였다. 본인은 시니어 디렉터 로 구단편성에서 일하게 되었으며 최근 쿠바 출신 육성 포수 아르엘 마르티네스의 가족과 접견한 근황이 포착되었다.
[A] A B 시즌 도중 2군 코치로 강등.[1] 이때 수상기준은 세이브 수가 아닌 세이브 포인트(구원승+세이브, 약칭 SP)가 기준이었다. 2005년부턴 세이브 포인트가 폐지되면서 이 상도 최다 세이브 상으로 새로 개편된다.[2] 8구원승 29세이브. 세이브 수는 리그 1위[3] 5구원승 34세이브. 세이브 수는 에나츠 유타카와 리그 공동 1위[4] 10구원승 15세이브. 세이브는 리그 2위(1위는 킨테츠 버팔로즈 소속 스즈키 야스지로의 18세이브)[5] 리그 우승 5번. 클라이맥스 시리즈 우승 6번. 2007년 일본시리즈 우승.[6] 게레로마저도 없었다면 야쿠르트와 꼴라시코를 벌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