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다 츠요시
1. 개요
前 일본프로야구 선수, 해설가, 코치. 2019 시즌부터 주니치 드래곤즈 감독을 맡고있다.
2. 선수 시절
고등학교와 대학 시절엔 부상 등으로 눈에 띄는 활약이 없었지만, 이후 사회인야구팀 NTT 도쿄로 가면서부터 시속 150km가 넘는 강속구를 던지며 주목을 받았고, 1989년 드래프트 1위로 주니치 드래곤즈에 입단했다.
입단 첫 해인 1990년부터 구원투수로 뛰며 빠른 강속구를 주무기로 50시합 등판, 4승 5패 31세이브 방어율 3.26을 기록하며 신인왕, 최우수 구원투수 타이틀을 얻고 신인투수 최다 세이브 기록을 세우는 뛰어난 활약을 선보였다.[7] 같은 해 퍼시픽리그 소속으로 투수 4관왕에 신인왕, MVP, 그리고 사와무라상까지 독차지한 긴데츠의 노모 히데오와 함께, 그해 일본 프로야구에서 신인투수 돌풍을 일으킨 주역이었던 셈.[8]
하지만 그 해 이후엔 1992년 시즌[9] 을 빼곤 부상 등으로 인해 제대로 출장조차 하지 못하며 부진에 시달렸고 결국 1996년 시즌 도중 치바 롯데 마린즈로 트레이드되며 주니치를 떠났다. 이후 치바 롯데 마린즈, 닛폰햄 파이터즈, 한신 타이거스를 떠돌다[10] 2000년 허리부상악화로 끝내 은퇴를 선언하였다.
통산성적은 '''148시합 등판, 8승 19패 59세이브, 방어율 4.58'''이다.
3. 은퇴 이후
2001년부터 2015년까지 NHK 선데이 스포츠 프로그램에서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사회인 야구팀과 일본 여자야구대표팀 투수코치를 지냈고 2009년에는 제2회 WBC대회에서 불펜코치를 담당. 팀의 2연패에 기여하였다. 2013년 제3회 WBC대회에선 메인 투수코치를 맡았고 대회가 끝난뒤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다가 2016년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의 투수코치로 취임했고, 2018년까지 역임했다.
3.1. 주니치 드래곤즈 감독 부임 이후
2019년부턴 모리 시게카즈의 후임으로 주니치 드래곤즈의 감독이 되었다. 수석 코치로는 감독 경험이 풍부한 이토 쓰토무가 선임되었는데 이때문에 이런 저런 얘기가 나오고 있다. 여튼 선수로서의 첫 소속팀에 20여년만에 감독으로 돌아온 셈. 취임 액땜인지 시즌을 앞두고 마쓰자카 다이스케가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다가 어깨 부상을 당하는 예기치 못한 불상사로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액땜이 충분하지 않았는지(...) 주전, 후보 선수를 가리지 않고 부상을 당하며 누더기가 된 선수진으로 시즌을 보내야했다. 그탓인지 성적도 널뛰기를 거듭했는데, 4월 한때 리그 선두 다툼을 하면서 상승세를 타다가 선수 줄부상으로 인해 하위권으로 쳐졌다가, 다시 7월에는 부상 선수들의 복귀와 함께 8연승을 기록하며 센트럴 리그 2위까지 올라왔다가 다시 하락세를 타고 결국 9월 24일, DeNA전에서 패배하며 취임 첫 해 B클래스(4위 이하)가 확정됐다. 거기다 시즌 막판 한신의 극적인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 도전에 희생양이 되며 피해자가 된 히로시마 도요 카프 팬들의 원성을 사야했다.
다만 주전 선수들의 계속된 부상 이탈에도 불구하고 9월 초반까지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에 도전하는 등 나름 전 감독인 모리 시게카즈 시절보다는 조금 나아졌다는 평이 많다...
그러나 대망의 2020시즌,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때문에 리그 개막이 늦어진 걸 감안하더라도 실드를 치지 못할 정도의 개막장 운영과 삽질을 시전한 끝에 2020년 7월 말부터 도로 최하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급기야 7월 25일 주니치신문에서 요다 감독의 용병술과 작전에 대해서 대놓고 비판하는 기사를 1면 톱기사로 실었다. 기사 내용은 24일 선발 오노 유다이를 어거지로 끌고 간 것[11] , 불펜에 10명이나 투수를 쌓아 두고도 제때 교체 안한 것, 7회초에 역전을 허용하는 과정에서 전진 수비한 것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 기사 최상단 베플을 번역해 보면 '''원래 이토 쓰토무를 감독으로 올리려다가 말았다'''는 뉘앙스의 코멘트가 나왔다. 사실상 이토가 감독이고 요다 감독은 그냥 바지감독인 셈. 24일 경기 역전패 이후 코멘트는 아예 '''올해 주니치의 유행어'''라는 조롱까지 댓글로 받아야 했다. 그래도 에이스 오노 유다이를 중심으로 분전하며 시즌 막판에 3위 등극을 확정지었고 8년만에 A클래스 복귀와 5할승률을 기록했다.
4. 기타등등
프로 입단 2년째였던 1991년 시즌 후, 최초의 한일 슈퍼게임에도 출전했다. 고시엔 구장에서 열린 3차전에 일본 올스타가 역전하자 9회 마무리 투수로 등판하여 장효조 등에 안타를 허용해 득점권 출루까지 허용했지만, 마지막 타자인 이만수를 삼진으로 잡으면서 경기를 끝냈다.
[1] 1999~2000년까진 발음은 같지만 한자 표기가 다른 '''요다 츠요시(与田剛士)'''를 등록명으로 썼다.[2] 이때 수상기준은 세이브 수가 아닌 세이브 포인트(구원승+세이브, 약칭 SP)가 기준이었다. 2005년부턴 세이브 포인트가 폐지되면서 이 상도 최다 세이브 상으로 새로 개편된다.[3] 12구원승 28세이브, 세이브 수는 리그 1위[4] 4구원승 31세이브, 세이브 수는 리그 1위[5] 6구원승 26세이브, 세이브 수는 리그 1위[6] 2016년 시즌은 감독대행[7] 이후 16년 후인 2015년 야마사키 야스아키가 37세이브로 갱신하게 된다.[8] 요다와 노모는 그해 일본 프로야구 올스타전 첫경기에서 각각 센트럴과 퍼시픽 리그의 선발로 맞대결까지 했다.[9] 41시합 등판, 2승 5패 23세이브 방어율 3.48[10] 1995년 시즌 이후론 등판기록이 1999년 닛폰햄에서 1경기 구원등판해 방어율 8.00을 기록한 것이 전부였다.[11] 5회 종료시 '''투구수 103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