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하마드 모사데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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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hammad Mossadegh
مُحَمَد مُصَدِق;
(1882년 6월 16일 ~ 1967년 3월 5일)
1. 소개
이란 제국의 정치가. 1951~1953년 사이, 2번에 걸쳐 수상으로 재임했다.
자국의 자주성을 추구, 강조하며 자국의 가장 중요한 천연자원 채굴권을[1] 국유화하며 그 수익을 국민에 분배하는 정책을 펼쳤지만, '''영국과 CIA의 명령을 받은 권위주의적 황제'''에 의해 실각당한 비운의 지도자로 평가받고 있다.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2] 와 그를 이은 권위주의 독재자와 비슷한 케이스.
2. 초기 생애
1882년 이란(페르시아) 테헤란에서, 고위공직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스위스로 유학하였고, 이후 로잔 대학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15년에 하원의원이 된 것을 시작으로, 1920년 파르스 주지사, 1921년 재무장관, 1922년 남 아제르바이잔 주지사, 1923년 외무장관 등을 역임하며 승승장구했다.
강한 민족주의 성향으로 인해 투옥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1년에는 아프마다바드에서 억류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소련과 영국 군대가 이란에 진주하여 석방되면서 1943년 의회에 복귀했고, 1949년에는 이란 정계에서 민족주의 세력을 대표하는 지도자가 되었다.
3. 수상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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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지지하는 군중들과 함께)
1951년에는 수상에 취임했다. 당시 영국-이란석유회사(현재는 브리튼석유회사)의 국유화를 단행했는데, 이는 훗날 다른 중동 산유국들도 채택하는 '자원민족주의'의 시초로 평가받는다. 아울러 황제(샤)의 전제적 권한을 제한하려 했는데, 그 과정에서 팔라비 황제와 마찰을 빚게 된다. 이는 모사데크의 석유 국유화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미국, 영국 등의 국가들과 팔라비 황제가 합심하여 모사데크를 타도하려는 배경으로 작용했다.
설상가상으로 모사데크가 야심차게 단행한 석유 국유화는 기대했던 만큼의 경제적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국유화 과정에서 서방측 석유회사들의 숙련된 기술 인력들이 빠져나가 관련 시설들의 운영 능력이 크게 하락했고, 영국 등 서방 국가들이 해군력을 동원하여 이란의 해외 석유수출을 봉쇄, 저지하려 했던 것이다.
석유 국유화를 계기로 서방 국가들과 마찰을 빚자, 모사데크는 소련과의 협력을 통해 이란의 외교적 고립을 타개하려 했다. 그러나 이미 석유 국유화를 통해 '사회주의자'로 낙인찍혀 있던 모사데크에게, 이 조치는 도리어 자신의 정치적 몰락을 앞당기는 결과로 이어진다.
4. 실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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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로 실각당한 후, 법정에 세워진 모습)
결국 1953년 8월 팔라비 황제는 미국 중앙정보국(CIA), 영국 정보부의 도움으로 모사데크 타격대를 조직했고, 에이젝스 작전(Operation Ajax)에 따라 미국과 영국의 사주를 받은 파즐롤라 자헤디 장군의 친 팔라비 쿠데타로 실각하고 체포당하여 금고 3년형을 선고받았다.
1956년 8월에 석방되었지만, 이후 자택에서 가택연금되었다. 그리고 11년 후, 향년 85세로 사망했다.
5. 평가
미국은 당시 모사데크를 몰아내기 위한 쿠데타를 도우면서 팔레비 왕조의 철권통치를 지원한 것으로 두고두고 이란인들에게 원성을 샀고, 훗날 1979년 혁명 이후의 단교까지 이어지게 된다. 이란의 진보적인 지식인들은 모사데크가 실각하지 않았더라면 중동 최초로 이란이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수도 있었다는 회한을 토로하기도 한다.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을 주도했던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는 모사데크를 팔라비 왕조와 동급, 혹은 그 이상으로 싫어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호메이니는 골수 시아파 이슬람 근본주의자여서 팔레비 왕조뿐만 아니라 세속주의를 추구하는 모사데크도 대단히 싫어했다. "만일 그가 정권을 계속 잡았다면 그는 이슬람에 큰 타격을 주었을 것"이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3][4] 다만 공적으로는 이란내에서 추앙받는 인물로써 이란내 개혁파들도 모사테크를 모델로 내세운다.
2000년에는 매들린 올브라이트 당시 미국 국무장관이 과거에 모사데크 축출 쿠데타를 도운 것에 대해 후회한다는 발언을 하기도 하였다.
[1] 이란은 석유, 칠레는 구리.[2] 다만 아옌데와 다르게 모사데크는 사회주의자가 전혀 아니었다.[3] 출처 : 유달승 저, <이슬람 혁명의 아버지 호메이니>.[4] 때문에 이란의 세속주의적 성향의 반체제 인사들도 모사데크 전 총리를 자신들의 정치적 구심점으로 삼지, 팔라비 왕조를 구심점으로 삼으려고 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