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들린 올브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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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 역사상 '''첫 여성 국무장관'''. 콘돌리자 라이스, 힐러리 클린턴, 서멘사 파워 등의 앞길을 연 선구자. 하지만 유럽 중심의 사고방식이 강해서 중동 등 타 지역엔 소홀했다는 비판이 있다.
2. 생애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에서 태어났다. 유대인이지만 가족들은 가톨릭 신자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영국으로 피난했기 때문에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를 피할 수 있었지만, 이때 친인척 3명이 학살당했다.
전후 체코슬로바키아가 공산화의 길을 걷자 1950년 미국으로 이주한다. 1959년 웰즐리 여자대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언론 재벌 출신의 조셉 올브리이트과 결혼하고 한동안 가정 주부로 생활한다. 이후 존스 홉킨스 대학교을 거쳐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정치학 석사 및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동 대학교의 러시아 연구소에 근무했었다.
1970년대 후반 에드먼드 머스키 상원의원의 입법담당 수석고문을 잠시 지냈고, 1978년부터 1981년까지 당시 외교안보보좌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밑에서 NSC 직원을 역임한 후 조지타운 대학교에서 소련 외교를 가르친다. 이때 가르친 제자 중에 훗날 일본의 외무상이 되는 고노 다로가 있다. 1982년 남편 조셉 올브리이트와 이혼한다. 1980년대엔 2번의 민주당 부통령, 대통령 후보 캠프에서 활동하지만 정권 교체에 실패한다.
1992년 빌 클린턴 대통령 후보를 돕고 그가 당선되자 1993년 UN 주재 미국대사로 부임하여 UN 개혁을 밀어붙이던 부트로스 갈리 사무총장과 사사건건 대립하게 된다. 결국 부트로스 갈리 총장의 연임을 좌절시킨다.
1997년 빌 클린턴 행정부 2기의 출범과 함께 국무장관에 취임했다. 유고슬라비아 내전에 적극 개입해 학살을 막으려 노력했다. 한편 1998년 8월 나이로비에서 생긴 케냐 미 대사관 폭탄 테러 이전에 케냐 대사가 대사관의 경비를 강화하도록 국무부에 거듭 요청하였음에도 이를 묵살했다는 비판도 있다. 북한의 NPT 탈퇴로 불거진 북핵 문제를 해결하고자 2000년 방북하였다.
2009년부터는 올브라이트 스톤브리지 그룹의 회장을 역임하며 현재 조지타운 대학교의 외교학교 국제정치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12년 5월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 의해 미국 대통령 자유 훈장이 수여되었다. 또한 비영리 싱크 탱크인 외교협의회의 이사로도 활동 중이다.
프랑스어, 러시아어, 체코어를 할 줄 안다.#
3. 여담
- 키가 작은 편인데, 웬만한 서양인 여성 단신도 150은 넘는 것에 비해 147밖에 되지 않는다. 이는 미국 여성 평균키보다도 10cm 이상 작은 키다. 하지만 노인이라 키가 작을 가능성도 있다.
-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서 한 탈북자가 여성 미 국무장관을 본 적이 있다고 해서 진행자들이 힐러리 클린턴이냐고 묻고 제대로 밝혀지지 않는 다소 답답한 장면이 나왔는데 올브라이트의 방북 당시를 이야기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