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무지덧널무덤
積石木槨墳
1. 개요
한국, 특히 경주시 일대를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는 신라 전기 무덤 양식이다. 주로 4세기 후반~6세기 초에 축조되었는데, 대부분 경주에 밀집되었으므로 신라의 고유한 축조방식임을 알 수 있다. 무덤 크기도 정말 거대하여 고구려의 장군총과 비슷하거나 더 큰 것들도 많다. 경주 시내에 동산이 떡하니 있고 곳곳에 큰 무덤들이 늘어섰다. 멀리서 봐도 규모가 큰 것들은 대부분 이런 무덤들이다. 이후에는 신라에 불교가 들어와서 화장을 하기도 하고 부장품도 간소화되어서 고분 크기는 후대로 갈수록 작아졌다. 고려,조선시대에는 아에 이런 무덤들을 산으로 착각하였을 정도(....)
2. 구조
사진 링크
관이 중심에 있고 부장품들과 껴묻거리들을 주변에 놓은 다음, 다시 큰 목관 위에 냇돌을 쌓은 다음, 그 위에 봉토를 덮은 형태다.
구조와 축조 순서에 대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부연 설명을 하면, 먼저 무덤이 축조될 자리에 정지작업을 한다. 이후 돌과 흙을 이용하여 쌓아가는데 가장 바깥쪽에는 호석이라고 하여 무덤의 아웃라인을 그리며(동시에 하중을 어느 정도 받는 역할도 수행한다.) 그 안쪽에는 흙을 이용하여 쌓고, 더 안쪽에는 돌을 이용하여 쌓아 올린다. 그와 동시에 돌이 쌓여진 즉, '''적석(積石:돌무지)'''된 부분의 안쪽에 '''목곽(木槨)을 이중 또는 단일 목곽으로 설치(:덧널)'''하여 매장의 주된 공간을 조성하면서 일정한 높이 까지 계속해서 쌓아 올린다.
목곽이 완성되고 목관을 하관(下棺)[1] 을 할 수 있을 만큼 공정이 진행되면 이 때 시신과 화려한 부장품들을 같이 묻고 관련된 제사 행위를 실시하게 된다. 일련의 행위가 끝나면 목관과 목곽 사이를 다시 비교적 작은 돌들로 채워넣고[2] 목곽을 다시 봉납한다. 이후 다시 목곽의 상부에 적석과 성토를 시행하면서 무덤을 쌓아 올리면서 당초 기획 만큼의 규모에 달하면 공정을 마무리 한다.
흔히 돌무지무덤과 헷갈리는데 두 형식의 무덤이 공통적으로 돌을 사용하기 때문에 헷갈릴 수 있다. 돌무지무덤은 초기 백제와 고구려 초, 중기의 무덤 양식으로 오늘날 자주 보는 흙 봉분 대신 돌로 봉분을 쌓거나, 계단식 형태로 쌓아린 것이다. 대표적으로 서울 석촌동 돌무지무덤이 있는데, 이름이 비슷해서 일반인들이 헷갈리지만, 실제로 보면 돌무지무덤과 돌무지덧널무덤은 문외한이 봐도 생김새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헷갈릴 일이 없다. 대체로 돌무지무덤은 겉으로 보기에 계단식 피라미드처럼 생겼고 돌무지덧널무덤은 거대한 언덕처럼 보인다.
아래의 좌측이 대표적인 적석총인 장군총(5~6세기)이고 우측이 대표적인 적석목곽묘인 황남대총의 모습이다. 구조적으로 전혀 다른 형태로써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묘)는 기본적으로 흙을 사용하는 형태이고 돌무지무덤(적석총)은 사실상 아예 돌로만 쌓는다. 적석목곽묘를 한글식으로 굳이 엄밀히 구분하자면 돌무지덧널흙무덤이 정확하다. 돌무지덧널무덤은 시신을 어떻게 안치하였느냐(매장 주체부)에 따라 구분된 명칭이고 돌무지무덤은 무덤을 어떤 방식으로 쌓았는가(봉토)에 초점을 둔 명칭이다. 아래의 사진과 함께보면 굳이 이만큼 설명할 필요가 있나 싶을 만큼 다르게 생겼다.
2.1. 도굴하기 어려운 무덤
오늘날 신라 유물들이 고구려, 백제보다 훨씬 많이, 다양하게 발굴되어 전시되고 있다. 물론 고구려, 백제가 멸망하여 유물이 멸실되었다고 할 수도 있지만, 무덤 발굴 과정에서 유물들이 쏟아져 나온 경우는 (기적적 사례인 무령왕릉을 제외하면) 사실상 신라밖에 없기 때문. 고구려는 일찍이 중국의 돌방(石室)무덤 형식을 받아들여 장군총, 안악 3호분 등 알려진 무덤들이 전부 돌방무덤이다. 그리고 백제도 중국 양나라와 교류하는 과정에서 돌방무덤을 받아들여 무령왕릉 등 대부분 무덤을 개방형 무덤들로 축조하였다.
반면에 신라는 중국과 교류시기가 두 나라에 비해 늦었고, 자연적 위치 때문에 돌방무덤 형태가 쉽게 전파되지 못했다. 물론 후기에 돌방무덤을 채용했지만, 고구려가 4세기 후반, 백제도 비슷한 시기에 받은 반면에 신라는 6세기 초에 수용받았다. 그 공백기간 동안 돌무지덧널무덤이 형성되고 크기가 거대해지는 등 전성기를 맞았다.
돌무지덧널무덤이 주목받는 이유는 '''도굴에 아주 강한 구조'''이다. 굴식 돌방무덤은 왕릉이고 뭐고 걸리면 다 도굴 당했지만 왕릉급 돌무지덧널무덤은 도굴이 불가능하다. 크기가 워낙 크고, 신라 금성 근처에 있어 도굴꾼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었고, 무엇보다 도굴을 한다 치더라도 2중-3중 보호장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근대 이후의 발달한 도굴 기술로도 상당한 무리였다.
그 순서를 나열하자면 아래와 같다.
- 몰래 땅굴을 파서 훔치자! - 지하에서 굴을 파면 흙은 막는다 치더라도 돌무더기를 막을 수 없었다. 중간쯤 파들어가면 냇돌 수천 개가 바로 도굴꾼들 머리 위로 떨어져 끔살 확정. 그리고 무덤이 워낙 커서 봉토도 무시할 수 없다.
- 그러면 지상에서 파자! - 이거야말로 더 답이 없다. 무덤의 크기가 돌방무덤의 최소 2~3배는 돼서 봉토를 엄청나게 파야 된다. 게다가 봉토층을 다 파내려가면 이번에는 냇돌 수만 개가 도굴꾼들을 맞이한다. 밤에 몰래 판다고 하더라도 돌을 다 치우긴커녕 흙이라도 다 치울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리고 밤새서 신라군에게 잡혀 사형 확정. 신라 시대 이후에도 무덤 주위에 살던 경주 주민들에게 발각당하는 건 당연한 일. 그리고 무덤 도굴은 고려고 조선이고 일제강점기고 간에 과거에는 중범죄로 간주하여 거의 사형에 처했다.
- 신라군이 없는 사이 파는 데 성공! - 위협요소가 없다고 치고 무덤 중심부까지 도착했다고 해보자. 근데 그 중심부엔 부장품이 안 보인다. 왜냐고? 목곽이 썩어서 무너져 그 자리가 돌로 가득찼기 때문. 돌무지덧널무덤 구조 사진을 보면 중심부에 덧널(木槨)이 있는데, 비가 오면 덧널이 썩어 무너지는 구조였고, 그 과정에서 장식품들도 다 돌 밑에 있기 때문에 꺼내기가 절대 불가능. 현대에도 고고학자들과 발굴팀들도 돌무지덧널무덤을 파려고 엄청나게 고생했다.[3]
하지만 돌무지덧널무덤이라고 하더라도 세부적으로는 매우 다양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여기서 도굴이 어렵다고 표현하는 돌무지덧널무덤, 즉 적석목곽묘들은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에 위치하는 왕릉급의 지름 40 m 이상의 무덤들에 해당하는 이야기이다. 돌을 사용했기 때문에 도굴이 힘든 게 아니라, '무덤도 너무 크고 왕경이라 들키기도 쉬운데, 돌도 너무 많아서 안쪽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는 설명이 맞는다.
왕릉급의 적석목곽묘들이야 손 헤아릴 수 있을 정도지만 비교적 작은 만만한 적석목곽묘들 또한 매우 많다. 경주 말고도 경산의 임당동 고분군, 부적리 고분군, 조영동 고분군과 경북 의성군의 금성산 고분군, 울산광역시의 중산리 고분군 등등 비교적 대중적으로 마이너하게 알려진 고분군에서도 아주 많이 존재하고 경산시 부적리 고분군 B4호분이나 임당동 고분군 1호처럼 도굴당한 사례가 전혀 없지는 않다. 경주의 여러 고분들도 도굴 시도를 당한 적은 여러 번 있다.
3. 등장과 소멸
3.1.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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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와 여러 가야들이 4세기를 기점으로 점차 구분되어가면서 각 국마다의 문화적인 특징을 형성해 나갔다. 그러한 문화적 특징을 엿볼 수 있는 자료가 대부분 무덤과 관련되었기 때문에 적석목곽묘의 형성과정은 신라 고유의 고분 문화의 형성과도 관련이 있다.
여하간 원삼국시대 이래로 목관묘에서 목곽묘로의 변화 과정을 거치던 신라는 가야, 특히 금관가야(금관국)과는 구분되는 형태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소위 이혈주부곽식 목곽묘라는 것으로 주곽(시신을 안치하는 공간)과 부곽(부장품을 추가적으로 매납하는 공간)을 따로 구분하여 만드는 형태의 목곽묘를 사용하기 시작하는 것이 었다. 이후 신라는 4세기 중후엽에 접어들면서 경주시와 울산, 포항[4] 등지를 중심으로 조금씩 돌을 사용하여 주부곽식의 목곽묘를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적석목곽묘의 형태로 점차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사실 그 기원과 형성과정에 대해서는 완전히 정론이다 할 정도의 근거자료가 있는 것은 아니고 위의 도면에서처럼 소위 위석식(圍石式)의 돌을 둘러친 형태까지만 확인되기 때문에 완전한 적석목곽묘와는 약간의 괴리가 있는 편이긴 하다. 다만 이 위석식 적석목곽묘는 일반적인 적석목곽묘에 비해서 다종다양하고 넓게 영남지역을 중심으로 분포 중이긴 하다. 여하간 실물자료 상의 약점아닌 약점으로 인해서 흉노족 신라왕족설과 같은 이론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있는 것이다.
돌무지덧널무덤은 대략 내물 마립간 시기에 형성되었는데, 이 시기는 신라가 중앙집권화를 완성하고 주변 소국을 완전 합병하는 정책을 펼쳤을 때이다. 그 과정에서 신라가 주변 소국보다 강하고 우월하다는 인식을 심어줘야 했는데,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보면 당시 이집트의 권력을 알 수 있듯이, 신라도 일부러 무덤을 크게 키워 주변 소국에게 자신들의 힘을 과시했다고 추정된다. 단순히 흙만 높게 쌓으면 불편하니 돌로 내부의 지지력을 강하게 하고, 그 주변을 흙으로 덮어 봉분의 규모를 크게하여 과시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3.2. 소멸
과학적으로도 도굴이 거의 불가능했던 이런 무덤이 갑자기 6세기 초부터 축조되지 않았다. 돌방무덤 형식을 주로 사용하면서 돌무지덧널무덤은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를 보면 여러 상황 삼국 모두 거대한 무덤을 축조하며 노동력 동원 문제로 공통적으로 골머리를 앓았다. 고구려의 장군총이나 광개토대왕릉비 내용에서도 나타나듯, 이집트의 피라미드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돌을 연마하고 옮기는 과정에서 엄청난 낭비를 했다. 그리고 도굴이나 무덤 보수를 위해 수묘인까지 따로 차출해 동원될 지경이니, 가뜩이나 인구적은 고구려가 한두개면 몰라도 계속 감당하기는 어려웠다. 백제 역시 초기에는 돌무지무덤을 이용했지만 비슷한 문제로 상대적으로 덜 힘든 돌방무덤을 채택하였다. 비록 돌방무덤이 도굴에 취약함은 사실이지만 노동력 문제를 감안하면 훨씬 실용적이었다.
삼국에서도 가장 규모가 컸던 돌무지덧널무덤을 축조함에 있어서 신라도 부담이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왕뿐만 아니라 왕비, 고위귀족 등 신라 상류계층들이 사망해 일일이 이런 무덤을 만들려면 노동력이 엄청나게 필요했다. 노동력 동원이야 왕에게 보일 충성심으로 어쩔 수 없이 한다 쳐도, '''냇돌''' 구하기가 또다른 치명적 문제가 되었다. 엄연히 '''왕'''의 무덤이니 아무 돌이나 갖다 쓰지 못한다. 그렇다고 일일이 돌을 연마해 운반할 수도 없으니 많은 자연석을 가져와야 하는데, 셰일이나 사암 같은 박리성 암석은 무덤의 겉모습을 흉하게 했다. 그래서 둥글둥글하면서 볼 만한 강 근처 냇돌을 갖다 썼는데, 냇돌이 달걀마냥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도 아니니 단 1세기만에 냇돌이 부족해진 것으로 추측되어 무덤 축조에 차질이 생겼다. 황남대총 발굴 현장을 보면 봉토에 뒤덮힌 부분에도 돌이 쌓여 있었는데, 이런 무덤이 황남대총뿐만 아니라 시내 대릉원에만 '''20곳'''이 있다.
6세기 초 신라는 대내적으로는 강화된 왕권이 안정화되었고, 대외적으로는 원삼국시대의 수많은 소국들은 사라지면서 굳이 돌무지덧널무덤을 지어 왕권과 국력을 과시할 필요도 없었다. 마침 6세기에 왕실을 중심으로 적극적으로 불교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화장(火葬)[5] , 돌방무덤 형식도 함께 접하게 되면서 필요성이 사라진 돌무지덧널무덤이 소멸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완전히 폐기되지는 않았고, 크기가 작더라도 돌무지덧널무덤으로 추정되는 무덤들이 간간히 생기다가 성덕왕 때 완전히 사라졌다. 그 사이 시기 가령 무열왕릉이 있는 서악동 고분군을 보면 아직 돌방무덤과 돌무지덧널무덤의 과도기 단계로 추측되는데, 무덤을 발굴하거나 레이저 투사가 아닌 이상 확실히 설명하기 어렵다.
4. 돌무지덧널무덤 목록
5. 관련 문서
[1] 꼭 하관이 아닐 수 도 있다. 목관도 내부에서 설치하는 형태로 조성되었을 수 있다. 어째되었건 이 설명에서의 하관이라 함은 시신을 안치하는 행위 전반을 잠정적으로 표현한다.[2] 완전히 안 채웠을 수도 있다는 견해도 있다.[3] 천마총 같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돌무지덧널무덤을 발굴할 때는 위에서 봉토를 없애고 냇돌을 다 치우는 작업을 했다.[4] 모두 초기 신라의 형성과정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곳이다.[5] 실제로 신라의 몇몇 왕들은 화장을 지냈다. 대표적인 왕이 문무왕의 대왕릉.[6] 완전 적석목곽묘는 아니고 위석식'석곽묘'라는 것으로 적석목곽묘와 관련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