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성왕릉

 



[image] '''대한민국의 사적''' '''제26호'''
'''원성왕릉'''
元聖王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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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괘능리
'''분류'''
유적건조물/무덤
'''면적'''
75,372㎡
'''지정연도'''
1963년 1월 21일
'''제작시기'''
신라
'''위치'''


1. 개요
2. 역사
3. 교통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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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에 있는 신라 38대 국왕 원성왕 김경신의 능이다. 괘릉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흥덕왕릉과 함께 하대 신라왕릉의 능원 양식이 잘 보존된 양대산맥이고 주변 정비도 잘 되어있으며, 7번 국도변 바로 옆이라 교통도 좋은 편이라서[1] 경주 외곽의 신라왕릉 중에서는 가장 방문객이 많이 찾아오는 편이다.

2. 역사


원성왕은 798년 12월에 세상을 떠났다. 사후 왕의 유해를 봉덕사 남쪽에서 태웠다고 하는데, 삼국사기에는 화장한 후 왕의 유해를 어떻게 했는지에 대해 기록이 없다. 문무왕이나 효성왕처럼 화장하여 유골을 바다에 뿌렸다는 기록도 없다. 다만 삼국유사에는 왕의 유해가 경주 토함산 서쪽 동곡사(洞鵠寺)에 있는데, 그곳에는 최치원이 찬술한 비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최치원이 저술한 초월산대숭복사비문(初月山大崇福寺碑文)에 의하면, '동곡사'라는 은 본래 파진찬 벼슬을 한 김원양이라는 사람이 세웠지만 이 절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원성왕의 능을 옛 절터에 조성했으며, 동곡사는 이전된 뒤 '숭복사'라고 개명했다고 한다. 숭복사는 후대에 사라졌지만, 숭복사 터가 경주시 외동읍에 남아있다. 이 교차검증에 따라 숭복사 터 아래쪽에 '괘릉'이라는 능이 있었는데 원성왕의 능으로 밝혀졌다.
능치고는 좀 이상하게 '괘릉'이라는[2] 이름이 붙은 이유는 이렇다. 괘릉을 조성한 자리에는 본래 절의 연못이 있었는데 연못을 메워 능을 조성했다. 그런데 원래 샘이 솟는 곳이다보니 물이 괴어 왕의 유골을 바닥에 그대로 안치하지 못했여, 양쪽으로 관을 거는 장치를 만들고 거기에 유골을 안치했다. 그래서 걸 괘(掛)자를 써서 괘릉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지금도 능 주위는 항상 축축한 편이다.
오늘날에도 괘릉에 가면 능 뒤편으로 깎은 석축에서 물이 흐르는데, 물줄기를 돌리기 위해 수로를 따로 만들었음을 볼 수 있다.[3][4] '괘릉'이란 명칭은 현재 괘릉리라는 지명으로도 쓰인다.
괘릉은 1950년대까지는 '''문무왕가묘'''로 잘못 알려졌었다. 그래서 유튜브에서 일제강점기에 촬영한 영상을 보면 괘릉 앞에 있는 표지판에 '신라 중흥 문무왕릉'이라고 써 있었다. 괘릉이라는 이름이 붙은 사연이 문무왕의 장례와 같이 '물'과 관련이 있기도 하고, 삼국사기 기록대로 문무왕의 유해는 동해 바다에 뿌렸지만, 조선시대의 유교적 관념상 어쨌든 제사를 지낼 장소는 필요하므로 경주 땅에 따로 가묘를 조성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 때문에 오랫동안 문무왕의 가묘로 비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1955년 정인보가 괘릉이 문무왕릉이라는 설을 부정했고, 위에 언급된 숭복사 비문이 판독된 데다가 오늘날 문무대왕릉으로 알려진 대왕암이 발견되자[5] 괘릉이 문무왕 가묘라는 설은 부정되고 원성왕릉으로 인정되었다. 1960년대까지는 문무왕의 능이라고 알리는 비석이 있었으나, 원성왕릉으로 밝혀진 후 그 비석을 파냈다. 지금도 그때 세웠던 비석의 받침이 남아 있다.
괘릉은 신라의 왕릉 중 완성도가 높고 보존상태가 뛰어나기로 손꼽힌다. 괘릉의 십이지신상이나 여러 석물들은 그야말로 괘릉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유물들로, 이 석상들은 보물 제1427호 '경주 원성왕릉 석상 및 석주 일괄(慶州 元聖王陵 石像 및 石柱 一括)'로 지정되어 있다.
괘릉 더 이전 시대의 왕릉은 봉분 자체는 거대하기도 하지만 능원이 간략한 편이고, 더 이후 시대는 왕권 약화로 다시 단순화된다. 원성왕릉과 완성도가 비견되는 것은 흥덕왕릉 정도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흔적이 강하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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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물 중 무인상은 눈이 깊고 코가 큰 서역인의 모습을 하였는데, 그 모델을 두고 '''소그드인(페르시아인)'''이라고 추정한다. 최소한 중동 지역 사람이 모델임은 틀림없으므로, 당대 신라가 서역과 교류가 있었다는 한 증거가 되었다. 무인상은 앞으로 칼을 짚고 갑옷은 외투 안쪽에 입었으며, 뒤쪽에는 복주머니 같은 것을 찼는데 계산기 역할을 하는 주판 등을 넣는 산낭(算囊)이라고 추정된다. 흥덕왕릉에도 비교적 밋밋하지만 비슷하게 무인석상이 서역인의 형상을 하고 있다.
이런 소위 호인상(胡人像)이나 석사자 등 석물의 구성, 괘릉의 앞에 놓인 단면 육각형의 기둥, 그리고 무덤과의 배치관계는 당나라의 영향을 거의 직접적으로 받았다고 해도 될 만큼 많이 닮았다. 아마도 신라 후기부터 당의 복식이나 일부 제도들을 모방했으므로, 당나라 묘제를 왕의 무덤에도 비슷하게 적용했다고 추정된다. 그렇다고 당나라의 제도와 완전히 똑같지는 않다. 십이지신상을 장식한다거나 봉분의 둘레에 난간석을 만들거나 돌 담을 둘러치는 장식들은 신라의 고유한 요소이고, 석사자상의 배치 또한 당나라 양식과 차이가 약간 있다. 신라가 그만큼 7~8세기 동아시아를 휩쓴 세계화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음을 보여주는 요소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3. 교통


경주시울산광역시를 잇는 7번 국도변에 있어 차로 올 때 접근성이 좋은 편인데다, 무덤 자체 외에도 원형이 잘 남은 석물들도 있어, 수학여행관광버스들이 자주 들르는 곳이다.
대중교통으로는 경주 버스 154, 경주 버스 600, 경주 버스 605, 경주 버스 609번이 괘릉 앞에 정차한다.
[1] 반면 비슷하게 잘 보존됐다는 평가를 받는 흥덕왕릉은 위치가 매우 외진 곳이라 홍보가 잘 안 되어있다.[2] 고려와 조선의 능호는 모두 시호법에 따라 정해진 것이나, 괘릉은 시호법을 따른 능호가 아니다.[3] 요즘 기준에서 보면 물이 나오는 묏자리는 흉당이다. (...). 신라 시대에는 명당에 대한 기준이 달랐을지도. 풍수지리가 신라 말기에 중국에서 새로 유입된 것이다. 풍수지리 개념을 챙기지 않았던 신라가 풍수지리를 챙긴 고려나 조선보다 더 오래 존속했고 김씨 가문도 현대까지 번창하니..[4] 석굴암도 원래 물이 많이 흐르는 땅 위에 지었고 물줄기가 흐르는 수로를 만들어뒀는데 무식한(...) 근대인들이 이 수로를 잘못 건드렸다가 지금은 유리벽으로 막고 365일 내내 에어컨을 틀어놔야 하는 상태가 됐다. 석굴암 문서 참조. 이를 보면 신라인들은 습한 땅에 시설물을 세울 때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지 상당히 체계적인 노하우가 있었던 듯 하다.[5] 물론 문무대왕릉에 대해서 말이 많긴 하지만(유골을 바다에 매장했다는 설과 문무왕 유골의 산골처라는 설 등), 감은사이견대의 용도 및 위치와 바다를 바라보는 구조, 인공적으로 대왕암 바위를 다듬은 흔적, 현지 주민들에게 예로부터 내려오던 전승 등이 일치하는 것을 보면 문무대왕릉이 단순한 자연물이 아니라 문무왕의 장례와 관련 있는 장소임은 분명하다. 신라 왕릉의 묘제를 연구했던 이근직 경주대학교 교수는 신라 왕릉 가운데 전승과 실제가 부합하는 분묘는 8기밖에 없다고 하면서, 그 8기 가운데 괘릉을 꼽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