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덕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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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대한민국의 사적''' '''제30호'''
'''경주 흥덕왕릉'''
慶州 興德王陵
Royal Tomb of King Heungd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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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 산42번지
'''분류'''
유적건조물 / 무덤 / 왕실무덤 / 고대
'''수량/면적'''
62,281㎡
'''지정연도'''
1963년 1월 21일
'''제작시기'''
통일신라시대
'''위치'''


1. 개요
2. 상세
3. 교통
4. 기타
5. 바깥고리
6. 사적 제30호
7. 둘러보기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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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 산 42번지에 있는 신라 42대 국왕 흥덕왕 김경휘와 장화부인의 합장릉이다. 사적 제30호.

2. 상세


원성왕릉(일명 괘릉)과 함께 통일신라의 능원 양식이 가장 잘 보존된 두 왕릉 중 하나다. 물론 완벽한 형태로 보존된 건 아니라 왕릉비도 파괴돼 일부 파편만 남아있고[1] 기둥과 기둥 사이에 세로로 끼우는 관석(貫石)이 없어지기도 했다.[2]
왕릉 근처에서 몇 조각의 묘비 파편이 발견되었는데 거기 써 있는 얼마 안 되는 글자 중에서 흥덕대왕이 태조 성한의 24대손이라는 문구가 있어 이 무덤이 흥덕왕릉인 것이이 확실해졌다. 신라의 왕릉들 중 무열왕릉 등과 함께 확실하게 특정 왕의 능이라고 제대로 밝혀진 몇 안 되는 능 중 하나다. 또한 신라의 태조라는 성한왕금석문에는 등장하지만 삼국사기삼국유사에는 등장하지 않는 정체불명의 왕으로 항목 참조.
경주시에서도 상당히 외곽 지역에 있다. 경주 중심가보다 포항시 시가지에서 더 가까운 정도고, 큰 도로와도 많이 떨어져있으며 대중교통은 하루에 4번 다니는 시골지역이다. 그래서 인지도도 낮고 찾아오는 사람도 적지만 봉분 외에도 원성왕릉 등과 함께 여러 석조물이 많이 남은 신라 왕릉에 속한다.
흥덕왕은 애처가였는데, 즉위 첫 해에 정목왕후가 죽자 11년 동안 죽은 부인만 생각하다가 세상을 떠날 때 부인의 무덤에 합장하기를 유언하였다고 한다. 무덤의 주인공이 2명인 합장릉이라 그런지 무덤 봉분의 크기도 비슷한 시대의 다른 왕릉보다 큰 편이다.
능원을 지키는 무인석상은 원성왕릉석상들과 마찬가지로 서역인의 형상을 하고 있다. 단 원성왕릉의 수염 묘사까지 세밀한 그것에 비해서는 살짝 밋밋한 편이다. 또한 봉분의 병풍석에는 십이지신상이 아주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3. 교통


관광도시로 유명한 경주시에 있지만 대부분의 경주 주요 관광지가 모여있는 동 지역에서는 거리가 꽤 있는 북부 안강읍에서도 외곽지역에 있어서 교통이 매우 좋지 않다. 경주 버스 201이 흥덕왕릉 입구 정류장을 지나지만 배차가 하루에 5대(...) 뿐이라 자가용을 끌고 가거나 안강역 등에서 택시를 이용해 가는 것이 좋다. 차를 몰고 가더라도 큰 도로와는 떨어져 있고 좁은 시골길을 좀 지나야 한다.
인근에 있는 다른 주요 유적지로는 같은 안강읍 안에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양동마을, 옥산서원이 있다. 이곳들도 각각 대중교통 연결은 불편하므로 자가용이 있다면 같이 방문할 만하다.
경주 버스는 드물게 다니지만 포항 버스 기계1번이 하루 20회 다닌다. 안강서부터미널에서 200번, 기계1번을 이용하여 흥덕왕릉 정류장에서 내린 후 1.8km 걸어가면 된다.

4. 기타


  • 지금은 주변에 젖소 축사가 많이 생겨있어서 바람의 방향에 따라 분뇨 악취가 심한 편이다.
  • 능 앞으로 소나무 숲이 꽤 관리가 잘된 편이라 사진작가들이 자주 찾는 곳이기도 하다.

5. 바깥고리



6. 사적 제30호


신라 제42대 흥덕왕(興德王 재위 826∼836)의 무덤으로 무덤제도가 잘 갖추어진 왕릉이다.

흥덕왕의 본명은 김수종金秀宗(경휘景徽)이며, 제41대 헌덕왕의 아우이다. 장보고로 하여금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여 서해를 방어하게 하였고, 당으로부터 가져온 차(茶) 종자를 지리산에 심어 재배하도록 하였다.

이 능은 원형 봉토분으로 지름 20.8m, 높이 6m이다.

비교적 커다란 둥근 봉토분으로 무덤 밑에는 둘레돌을 배치하여 무덤을 보호하도록 하였다. 둘레돌은 먼저 바닥에 기단 역할을 하는 돌을 1단 깔고 그 위에 넓적한 면석을 세웠다. 면석 사이에는 기둥 역할을 하는 탱석을 끼워 넣었는데, 각 탱석에는 방향에 따라 12지신상을 조각하였다. 탱석과 면석 위에는 다시 갑석을 올려 마무리 하였다.

무덤의 주위 4모서리에는 각각 돌사자를 한마리씩 배치하였고, 앞쪽의 왼쪽과 오른쪽에 문인석·무인석을 각 1쌍씩 배치하였다. 무덤의 앞 왼쪽에는 비석을 세웠는데, 지금은 비석을 받쳤던 거북이 모양의 귀부만 손상된 채 남아있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무덤의 위치가 이 무덤과 대체로 일치하며, 왕릉 주위에서 ‘흥덕’이라는 글자가 쓰여진 비석조각이 발견되어 이 무덤이 흥덕왕의 무덤이라는 것을 뒷받침해 주고있다. 전체적인 배치와 장식물의 양식으로 볼 때 성덕왕릉과 원성왕릉의 형식을 많이 본따고 있다.

※(신라흥덕왕릉 → 경주 흥덕왕릉)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7. 둘러보기 틀





[1] 사실 왕릉비는 일부 파편이라도 나온 흥덕왕릉이 그나마 나은 편이다. 대부분은 흔적도 찾기 어려운 상태다.[2] 관석이 보존된 신라왕릉으로 무열왕릉, 신문왕릉, 성덕왕릉, 경덕왕릉, 김유신장군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