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자헤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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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자헤딘의 상징기. 현재 이 도안은 수 많은 테러단체에서 이용하고 있다.'''
مجاهد
Mujahideen
1. 개요
2. 역사
2.1.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1979~1989)
2.2. 제2차 아프가니스탄 내전 (1989~1992)
2.3. 제3차 아프가니스탄 내전 (1992~1996)
2.4. 제4차 아프가니스탄 내전 (1996~2001)
3. 최근 상황
4. 전술
4.1. 베트남 전쟁과의 공통점과 차이점


1. 개요



아프가니스탄의 반군 게릴라 단체들을 지칭하는 말.
무자헤딘은 ‘성전에서 싸우는 전사’를 뜻한다. 모자헤딘, 무자히딘, 가지라는 명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좁게는 아프간의 반군을 뜻하나 넓게는 아프간뿐만 아니라 이슬람 국가의 반정부단체나 무장 게릴라 조직이나 타국의 전쟁에 자기 스스로 나아가 개입한 외국인 이슬람 무장단체 등을 통칭한다.

2. 역사



2.1.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1979~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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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의 무자헤딘'''
1979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을 침공하여 기존 공산당 정권을 무너뜨리고 소련을 돕는 새로운 정권을 수립했을 때 저항에 나선 사람들을 무자헤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것보다 앞서 전년도인 1978년 군부 내부의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군사 쿠데타로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 정권이 성립했을 때 공산당 정부군과 반군 군벌 세력 간에 내전이 벌어지는데 이들 반군 군벌을 무자헤딘의 시초로 보기도 한다.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전쟁 당시, 미국은 돌풍작전(Operation Cyclone)이라는 이름으로 소련에 저항하는 아프가니스탄 내 무자헤딘에게 ISI(파키스탄 정보부, Directorate for Inter-Services Intelligence)를 이용해서 자금과 무기를 지원하였다. 이슬람 국가들도 이에 동참하였는데 사우디아라비아는 매년 60,000,000 달러를 지원하는 위엄을 보였다. 특히 무슬림 형제단 소속이었던 압둘라 아잠(Abdullah Azzam)과 오사마 빈 라덴이 창설한 마크탑 알-키타맛(MAK, Maktab al-Khidamat)은 사우디아라비아와 파키스탄 정보부에게서 집중으로 지원받으면서 막대한 자금을 이용해 무기를 공급하고 해외에서 오는 무자헤딘들을 훈련하게 했다.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전쟁에서, 중국과 독일등을 위시한 반소 및 서방 국가들이 물자를 생산, 미국이 배후에서 지원하고 파키스탄 정보부가 이것을 현장에서 지휘했으며, 사우디아라비아는 무자헤딘 알선책 역할을 담당했다. 즉, '''사우디아라비아가 아랍 국가에 득시글한 실업자들을 막대한 돈으로 고용해 아프가니스탄에 무자헤딘으로 보내고 파키스탄 정보부는 미국에서 오는 지원의 분배와 이슬람 국가에서 고용된 실업자들을 무자헤딘으로 아프가니스탄에 투입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때 사우디아라비아 주재 파키스탄 대사관에서는 하루에 수백 명에게 비자를 발급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파키스탄은 하루에만 비자를 수백 명씩 받아갈 정도로 인적교류가 활발하게 이뤄지는 관계도 아닐 뿐더러, 하루에 비자 수백 개를 발급한다는 것은 실상 제대로 확인과 절차를 거치지 않고 비자를 마구 '퍼 주었다는' 뜻이다. 즉 이 사람들과 '''탈레반의 탄생에는 두 이슬람 국가 사우디아라비아와 파키스탄의 지대한 공헌이 있었다는 것.'''
정부군을 상대로 내전을 치르던 무자헤딘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후 소련군을 상대로 전투를 치르게 된다. 무자헤딘들은 산악 지대와 협곡이 많은 아프가니스탄의 지형을 이용해 효과적인 게릴라전술로 소련군에 대항했다. 이때 이슬람권 전역에서 무슬림 전사들이 소련에 대항하고자 아프가니스탄으로 몰려들었다. 소련을 견제하고자 했던 미국은 무자헤딘을 적극으로 지원했고 같은 이슬람 계열 국가들인 파키스탄과 이란,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리비아 등도 이들을 지원했다.[1] 결국 소련은 10년간 15,000명에 달하는 희생자를 내고 1989년 2월에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했다.

2.2. 제2차 아프가니스탄 내전 (1989~1992)


소련이 물러났지만 무자헤딘은 손에서 총을 놓지를 않았는데, 그 이유는 여전히 아프가니스탄 공산정권이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비록 최대의 후원자인 소련이 물러났지만 소련군 철수 후에도 소련의 군사원조를 받고 소련-아프간 전쟁 시기 무자헤딘이 저지른 전쟁범죄에 의해 친족이 죽거나 피해를 입었던 피해자 유가족들과 수도인 카불 시민들을 정치적 지지층으로 확보하던 나지불라 정권은 무자헤딘의 공격에도 건재함을 과시했다.[2] 그리고 한편으로 나지불라 정권은 내전 기간 동안 무자헤딘 진압을 앞세우면서 한편으론 무자헤딘에게 평화회담을 제의하거나 또는 무자헤딘 반군병들에게 정부군으로의 항복, 귀순을 권유하여 투항한 무자헤딘 출신 반군병을 정부군 소속 민병대로 편입시키는 등의 삼중 전략도 사용하여 무자헤딘 세력들을 압박했다. 그러나 1991년 나지불라 정권의 버팀목이었던 소련이 붕괴하였고, 그 뒤를 이은 러시아의 보리스 옐친 정권은 아프가니스탄 정부에 대한 모든 지원을 중단하였다. 결국 국제적으로 고립된 나지불라 공산정권은 1992년 무너졌고, 무자헤딘이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한다. 그리고 이듬해인 1993년 망명 무자헤딘 수장 부르하누딘 라바니를 대통령으로 하는 아프가니스탄 이슬람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2.3. 제3차 아프가니스탄 내전 (1992~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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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 이슬람국의 국기
소련과의 10년간의 전쟁과 3년간의 공산정부와의 기나긴 전투는 무자헤딘의 변질을 불러왔는데, '''소수의 무자헤딘을 중심으로 뭉친 군벌화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들에겐 여전히 막강한 화력이 있었고, 자신의 거점을 기준으로 많은 지지자를 보유하고 있었는데(주로 같은 민족) 이로인해 점점 정치적 성향을 띄거나 이권을 추구하는 단체로 변해버렸다. 비록 공산정권이 붕괴하고 라바니가 대통령이 되었지만 그는 민족(부족)의식이 매우 강한 아프가니스탄에서 2류 민족인 타지크족 출신인데다가, 파슈툰족을 중심으로 퍼져있는 강경 원리주의 무슬림도 아니였다. 또한 점점 힘을 가지며 다른 생각을 품게된 군벌들이 이를 인정하지 않게되며 제3차 아프가니스탄 내전이 벌어지게된다.
내전은 라바니 세력(아흐마드 샤 마수드 포함)과 굴부딘 세력으로 나뉘어져 싸웠는데, 몇몇 군벌들이 라바니 측에 붙기도, 굴부딘 측에게 붙기도 하면서 점점 복잡한 양상으로 발전했다. 계속되는 전쟁으로 인해 민중은 점점 전쟁에 신물이 나게 됐는데, 이때 '''내전을 종식시키고 나라를 안정시키겠다며 등장 멋있게 한 단체가 탈레반이었다.''' 탈레반은 처음에는 굉장히 건전한 주장을 하며 빠른 속도로 민중의 지지를 얻으며 세를 불려갔는데, 많은 군벌들이 그들에게 무릎을 꿇거나 협력을 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거대화하게 된다. 결국 1996년에는 탈레반이 라바니 정권을 무너뜨리고 수도 카불을 차지했고, 아프가니스탄 90%를 점령하면서 사실상 아프가니스탄의 공식 정부 취급을 받게된다.

2.4. 제4차 아프가니스탄 내전 (1996~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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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카불에 입성하는 탈레반'''
'''탈레반에 대항하던 북부동맹'''
'''붉은색은 북부동맹, 나머지는 탈레반이다'''
무자헤딘은 '''탈레반에 협력하는 자탈레반에 거역하는 자'''로 양분되었다. 탈레반에 협력하던 이들은 탈레반에 그대로 흡수되었고, 거역하던 자들은 죽거나 구 나지불라 정권 시절 생존자들과 힘을 합쳐 북부동맹이라는 반 탈레반 조직을 만들고 기타 반 탈레반 파벌들을 흡수하여 탈레반 세력과 싸웠다.

2.5.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2001~현재)


이번에는 '''세계 최강대국'''과 싸우는 무자헤딘이 되어버렸다. 거기다가 '''테러리스트'''라는 별명이 붙은건 덤이다.
미국은 과거에 소련과 싸우라고 장비도 주고 요원들을 보내 훈련시킨 무자헤딘과 직접 맞붙게 되었고 무자헤딘들은 미국의 가르침을 충실히 이행하여 철저한 게릴라 전술로 전쟁을 지리멸렬하게 끌며 미군에게 큰 인적, 물적 손실을 강요하고 있다.

3. 최근 상황


한편 1988년 이후, 아프가니스탄에 투입됐던 해외 무자헤딘들은 투쟁 방향을 상실하고 혼란에 빠져있는 상태였다. 주적 소련이 물러나고서 본국으로 돌아가기도 마땅치 않은 상황이었고 그렇다고 아프가니스탄에서 누구를 이롭게 하려고 누구와 싸울지 목표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당시 아프가니스탄 내전에 참전한 무슬림들은 주로 이집트, 알제리, 모로코 등 북아프리카 아랍 국가들 출신이었는데 이런 국가에서는 이 무자헤딘들이 돌아오면 감시, 체포, 감금을 일삼고 있었다. 이슬람 원리주의 성향이 강하고 아프카니스탄에서 대규모 게릴라전 경험을 쌓고 온 무자헤딘들을 각국의 독재 정권이 껄끄러워 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다수 아랍 국가가 제조업이 발달되지 않은데다가 한창 원자재값은 바닥으로 떨어지던때였던 터라 경제력이 침체하여 실업자가 넘치는 상황이었기에 번듯한 직장을 얻기가 쉬운일이 아닌지라 무자헤딘 처지에선 본국에 돌아간다고 해서 뭔가 뾰족한 상황도 아니었다.
그래서 몇몇 무자헤딘은 중동권 외의 다른 이슬람권 분쟁 지역을 찾아서 일종의 군사 고문관이나 용병 같은 일을 하기도 했다. 구체적으로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 타지키스탄 내전, 보스니아 내전, 코소보 전쟁, 체첸 사태 등에서 군사훈련의 부재를 겪는 편에서 섰는데 이런 무자헤딘 중 러시아에서 가장 악명 높은 사람은 바로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의 이븐 알 하타브(Ibn al-Khattab(ابن الخطاب).
다만 부작용이 있다면, 전쟁 때는 좋았는데 이게 계기가 돼서 중동 본토 직송(...) 와하비즘 이슬람 극단주의 사상 같은 것이 현지에 퍼지는 골 때리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현지 수니파 세력으로 베슬란 학교 인질사건의 주범인 샤밀 바샤예프를 비롯한 무자헤딘과 친한 세력들의 민폐와 또라이 짓에 학을 떼고 러시아에 붙은 체첸의 일부 민족주의 세력이 좋은 예시.
'''그 악명 높은 예가 바로 알 카에다. 더욱 나아가면 다에시다.'''

4. 전술


'''베트콩과 상당히 비슷하다.''' 초강대국 소련을 이긴 무장단체이기에 전투력이 강할 듯하지만 실제로는 별 볼 일 없는 수준에 불과했다. 게릴라 전술로 싸우면 소련군을 곧잘 엿먹인 건 사실이지만 정면 대결했을 때 소련군에게 늘 털리는 게 일상이였다.[3] 단지 무자헤딘이 골칫거리였던 것은 앞서 말한 게릴라전술의 달인이였다는 것과 민간인과 도저히 구분이 어려웠다는 것 뿐이였다. 애초 정규군, 그것도 세계 1,2위를 다투는 군대와 일개 게릴라 민병대 수준에 불과한 무장 조직의 전투력을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다만 그렇게 털리고 또 털려도 덤빈다는 점에서 정신력은 충분하다.

4.1. 베트남 전쟁과의 공통점과 차이점


공통점은 냉전시대의 이념의 대리전의 양상이였고, 베트남전은 자유진영인 남베트남 정권을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참전했고(물론 통킹만 사건이라는 빌미를 이용해 본격적으로 참전함), 소련은 공산주의 성향인 북베트남에 암암리에 무기 및 장비를 지원했고, 반대로 아프간전은 소련이 아프간 내 공산주의 정권을 비호하는 명목으로 참전했고, 미국 등 서방은 암암리에 무자헤딘(이슬람 저항세력)에 무기 및 군사기술을 전수해 소련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수행, 장기전으로 끌고가 소련을 철수하게 만들었고 결국 전쟁은 미국, 소련 둘다 장기전끝에 철수로 종결된다.
다만 차이점은 북베트남은 소련이나 중국 등 공산권 국가에게 지원이 있어 어느정도 규모의 군사력이 존재하던 군대였고, 무자헤딘은 서방의 무기지원을 받았으나 근본적으로는 토착세력이 스스로 자국과 이슬람 이념을 지키기 위해 민병대 성격으로 이렇다할 군사력을 보유했다고 보기는 어려운 게릴라 집단이라고 볼수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베트남전쟁 당시 월맹군과 베트콩은 남베트남 현지에서 무장투쟁을 지휘하는 남베트남 중앙위원회(COSVN)를 넘어 하노이베트남 공산당이라는 그 권위가 도전받지 않는 유일무일한 정치적 지도세력이 있었다. 전쟁기 남베트남 내 투쟁 과정에서 전략, 전술은 어느정도 현지 조직의 판단 중심으로 돌아갔다 하더라도 이건 어디까지나 열강의 군대로 치면 임무형 지휘체계 같은 군사적 측면에서 일정부분 자율을 보장한거지, 정치적으로 남베트남 베트콩이 하노이 중앙당의 권위에 도전한다는건 불가능했다.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 베트남의 경우에는 남베트남 내부의 베트콩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통합된 정부의 지휘를 받는 막타를 날려줄 국경 밖의 동조 정규군 세력또한 있었다.''' 이러니 베트콩이 실컷 게릴라전으로 남베트남과 이를 지원하는 미군과 미국의 전쟁 수행의지를 꺾어놓으면 남은 일은 북베트남 정규군이 휩쓸고 내려와 이미 거의 시체인 남베트남을 주워먹기만 하면 되는지라 베트남은 일단 1975년 종전 이후 중국과의 국경분쟁 한번 빼곤 내외적으로 큰 분란없이 안정적인 통합 민족 국가를 성립하는데 성공했다. 반면 아프가니스탄의 경우 아무리 무자헤딘이 소련과 소련의 비호를 받는 현지 공산정권을 뒤흔들어놓아도, 주요 무자헤딘 지도자들이 모두 그 권위를 인정하는 정치적 구심점 자체가 없었다. 아흐마드 샤 마수드, 압둘 하크 처럼 국민적 존경을 받으며 대내외적으로 인정받을만한 지도력을 보여준 무자헤딘 지도자들이 없었던건 아니지만 이들도 결국 실질적으론 여러 군벌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베트남의 경우는 이미 북베트남이라는 내부적인 정통성과 통치력이 검증된 경쟁 정권이 게릴라전은 전략적으론 아무리 중요해도 어쨋든 부수적인 수단으로 사용한 이후 패망한 월남 정권을 정규군으로 접수했던 반면 무자헤딘들이 카불에서 공산정권을 몰아내도 국권을 접수하고 인수인계할 대안 집단이 없다보니 결국 무자헤딘들은 사오분열하고 서로 권력다툼하다 탈레반이란 변수에게 휩쓸려버렸다.

[1] 다만 미국이나 사우디, 이란의 군사지원을 또 다른 외세 개입으로 여기며 지원을 거부하며 자력으로 소련을 몰아내겠다고 입장을 밝힌 무자헤딘 반군들도 있었다.[2] 아예 아프가니스탄 나지불라 정부군이 무자헤딘의 공격을 격퇴하고 전투에서 승리하는 일까지 있었다.[3] 그 예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말기인 1988년에 있었던 3234 고지 전투에서 3234 고지를 지키는 39명의 소련 공수부대와 약 250명 가량의 무자헤딘이 맞붙었으나 무자헤딘측은 괴멸한 반면 소련군은 6명만이 전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