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소보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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Рат на Косову и Метохији, Косовски сукоб (세르비아어)
Lufta e Kosovës (알바니아어)
Kosovo War (영어)
La guerre du Kosovo (프랑스어)
Der Kosovokrieg, Kosovo-Konflikt (독일어)
La guerra del Kosovu (이탈리아어)
Wojna w Kosowie (폴란드어)
Косовская война (러시아어)
병력
NATO 및 반군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
코소보 해방군
9,000 ~ 20,000 명
유고슬라비아군
85,000 명
코소보 공화국군(반란군)
3,000 명
유고슬라비아 경찰
20,000 명
코소보 공화국군
100 ~ 150 명
유고슬라비아 경찰
20,000 명
NATO군 항공기
80 기
유고슬라비아 항공기
240 기
NATO군 항공기
1,031 기
유고슬라비아 SAM
100 기
NATO군 군함과 잠수함
30 척
유고슬라비아 대공포, 곡사포, 박격포
1,400 문
NATO군 병력
50,000 명
유고슬라비아 전차 및 전투 차량
2,032 대
1. 개요
2. 배경
3. 서구의 개입
4. 결과
5. 미디어에서
6. 관련 문서


1. 개요


술집으로 개조한 배 뒤쪽 갑판에 놓인 소파에 푹 파묻혀서, 나는 가까이 다가온 유고슬라비아의 해안을 보고 있었다. 코소보 전투는 끔찍스러운 상처를 매일 만들어내고 있었다. 저녁을 먹는데 종업원이 소리를 질렀다. 우리는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어둠 속에서 긴 불꽃이 이어지더니 연기 기둥이 솟아올랐다. 죽음의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NATO의 함선에서 쏘아올린 미사일이 세르비아에 떨어진 것이다.

베르나르 올리비에(Bernard Ollivier, 1938 ~ )

코소보 전쟁은 알바니아계 준군사조직이였던[1] 코소보 해방군UÇK (Ushtria Çlirimtare e Kosovës)과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신유고연방) 정부가 코소보알바니아 전역에서 1998년 2월 28일부터 1999년 6월 11일까지 벌였던 전쟁으로, 미국과 NATO 공군까지 참여하는 국제전으로 확대되었다. 2014년 돈바스 전쟁이 터지기 전까지 유럽 대륙에서 가장 최근에 벌어진 유혈 전쟁이었다.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일부로 보는 시각과 그에 반대하는 시각이 있다.

2. 배경


본래 코소보는 중세 세르비아 왕국의 발상지이자 중심지로서 세르비아의 영토였으나 오스만 제국과 벌인 코소보 전투를 기점으로 전세가 오스만 제국측으로 기울고 이후에 세르비아가 오스만 제국에 통치하에 들어가게 되면서부터 무슬림계 알바니아인들이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근대시기 이후에 코소보에서는 알바니아인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고, 1974년 유고슬라비아요시프 브로즈 티토 대통령에 의해 연방내 자치주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1980년 티토가 죽고, 1989년 밀로셰비치 대통령이 유고 내 세르비아 공화국에서 집권하자 세르비아 민족의 성지라는 이유로 코소보의 자치권을 박탈했다. 이러한 세르비아 측의 자치권 박탈에 분노한 코소보 내 알바니아계는 분리독립을 주장했고,[2] 1995년 아뎀 야샤리, 하심 타치[3] 등 일단의 급진파 인사들을 중심으로 코소보 해방군이 결성되어 무장 투쟁에 돌입하면서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문제는 독립군인 코소보 해방군의 실체도 또 막장이라, 이탈리아 마피아, 알바니아 마피아까지 연계된 현지 산적조직으로, 코소보 해방군이 결성되고 코소보 사태가 일어나기 전까지 이들은 미 국무부로부터 인신매매마약거래를 일삼는 위험한 범죄조직, 즉 '''산적'''으로 분류되고 있었다.
그러던 1998년 3월 코소보 해방군은 코소보 지역을 순찰 중인 세르비아 경찰을 사살하였고 이에 세르비아 중심의 신 유고 연방 정부는 군대를 코소보로 파견해 대규모 소탕작전을 펼치면서 코소보 전쟁이 발발했다. 개전 초기 신 유고 연방군은 코소보 해방군을 비롯하여 비무장 알바니아인들을 대량학살하였고 이에 코소보 내 알바니아계가 코소보 해방군에 합세하여 신 유고 연방군에 저항하면서 결국 코소보는 세르비아 주축의 신 유고 연방군과 코소보 해방군간 전투와 보복을 거듭했다.

3. 서구의 개입





1999 - 코소보 전쟁과 인종 청소에 관한 다큐멘터리

세르비아군 주둔지에 떨어지는 미군 B-52 폭격기의 융단폭격.
이러한 코소보에서의 전쟁상은 국제사회와 서방세계를 다시금 경악시켰다. 같은 해 6월 미국과 유럽연합은 코소보 전쟁에 대한 개입("직접적이고도 적극적인 개입방안")을 선언하고 신 유고 연방군의 코소보 철수와 학살 중단을 촉구했다. 그러나 세르비아는 이를 무시하고 1998년 8월 코소보 해방군의 주요 거점지들을 함락했다. 결국 같은 해 10월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는 세르비아에 대한 무력사용을 결정했으며,[4] 이듬해 1999년 3월 24일 신 유고 연방 세르비아 공화국에 대한 공습에 나서면서 전세는 세르비아에게 불리해졌다. 몬테네그로는 중립을 선언했지만 몬테네그로군 역시 일부 코소보에 참전했기에 NATO는 포드고리차(4차례)와 체티녜(2차례)도 6차례 폭격하였다. 체티녜 폭격이 끝난 이후 몬테네그로는 전쟁에서 완전히 이탈하여 NATO에 항복했다.
그러나 전쟁의 예상은 미국과 NATO가 바라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원래 NATO의 계획은 3-4일, 아니 길어도 1주일 폭격으로 세르비아를 회담장으로 끌어내 마무리 지을 생각이었다. 문제는 몬테네그로와는 달리 폭격을 당해도 세르비아가 버틴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작전 중 초기 상당 기간이 악천후라 제대로 된 폭격작전이 힘들었고, 설상가상으로 F-117 나이트호크가 격추되는 망신까지 당했다.[5][6] 작전 중반 이후 기상이 좋아지면서 공습량도 증가했으나 여전히 세르비아는 버티기로 일관했다.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마케도니아에 주둔하던 미군 3명이 순찰 중 유고군에 생포, 유고-세르비아 방송에 초췌한 모습이 그대로 공개되어 NATO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NATO군은 알바니아에 처음에 1천명, 나중에 8천명을 더 상륙시켰고 4월 말에는 영국군 4만명이 코소보에 파견되었다.
이렇게 되자 미국은 핀란드 대통령과 함께 미국 외교관을 특사로 러시아에 파견, 다시 옐친을 압박했다. 암울한 시기라 국력이 밀렸던 옐친은 이번에도 미국이 원하는대로 밀로셰비치를 압박해 회담장으로 끌어냈으며, 6월 종전이 이루어졌다. 이 경우에도 러시아군이 종전 직후 세르비아의 후견인으로 파견되어 코소보에서 UN군과 함께 평화유지 임무를 수행했다. 다만 옐친은 NATO군의 알바니아 상륙에 대해서 3차 세계대전을 경고하는 등 나름의 불쾌함을 처음부터 드러내고 있었고 최소한의 명분은 보장할 수 있었다.[7]
공습은 총 78일간 실시되었고, 코소보 지역에 주둔하던 세르비아 제3군단의 안전한 철수가 보장되었다. 이 와중에 NATO는 자신들이 폭격 동영상까지 공개하며 대대적으로 선전했던 것과 달리 상당수의 기갑차량과 항공기가 생존해 세르비아로 철수하는 충격적인 광경을 목도하게 되었다. 이는 세르비아 측이 공습에 대비해 상당량의 디코이들을 만들어 노출시킴으로써 폭격의 피해를 줄인 것도 한 몫 했다.# 이후 폭격 성과에 관해 논란이 생긴 것은 당연했다. 오폭으로 인해 중국 대사관 직원들과 코소보 난민들(100여명)이 사망하는 경우도 있었다.

4. 결과


평화 협상의 내용은 문제점이 많았다. 세르비아 군경(軍警)이 코소보 자치주에서 철수한 것은 사실이지만 기존에 세르비아군의 국경감시 임무는 유지하기로 합의를 봤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코소보와 알바니아 사이의 국경선은 여전히 세르비아군이 전담 관리하되 코소보 자치주 내의 치안권은 UN군에게 넘긴다는 이야기에 불과했다.
사실 이 내용은 공습이 시작되기 전 프랑스 '랑부예'에서 열려다 결렬된 최후협상 과정에서 논의됐던 사실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오히려 최후협상 막바지에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이 돌연 세르비아군의 국경감시 임무포기까지 요구하는 바람에 밀로셰비치가 회담장을 박차고 나간 것조차도 미국이 일부러 코너로 몬 것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이 때문에 세르비아 내부에서는 밀로셰비치에 대한 규탄과는 별도로 미국 등 서방권에 대한 인식이 매우 나쁜 편이고, 반대급부로 친러 성향이 강하다. 하지만 세르비아 군경의 코소보 학살극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 외의 의의는 유고슬라비아 전쟁 항목 참조.
1999년 미국 사회 평론가이자 저널리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저서 '렉서스와 올리브나무'에서 "맥도날드가 진출해 있는 나라 사이에는 전쟁이 발생하지 않는다."라는 자본주의에 의한 평화 이론을 주장하였는데 이 전쟁은 그 반례로 꼽힌다. 세르비아도 맥도날드가 진출해 있었고 나토 측 폭격으로 일부 세르비아 맥도날드 지점도 파괴당했다.
해당 전쟁으로 인해서 그 지역을 떠난 난민이 많다. 인근의 중립국인 스위스가 알바니아-코소보에서 이주한 난민들을 많이 받아 주었다.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에서는 코소보 난민 출신의 스위스 대표팀 선수 제르단 샤치리그라니트 자카가 '''세르비아'''를 상대로 나란히 골을 넣으며 스위스의 역전승을 이끌고는 알바니안 이글 셀레브레이션을 펼치고 나란히 징계를 받았다...
유로 2016 예선 I조에서 세르비아와 알바니아가 같은 조에 묶였는데 전반 41분 코소보 전쟁 관련 문구가 적힌 깃발이 드론을 띄우고 경기장에 들어와 세르비아 선수가 치우던 중 알바니아 선수와 충돌이 되면서 이에 폭행 난동으로 번지게 되었다. 결국 경기를 치룰 수 없게 되자 세르비아에게 3:0 몰수승을 선언한 반면 경기장 관리 미숙으로 승점 3점 삭감, 예선 2경기 홈 무관중 징계를 내렸고 양 팀에게 벌금 10만 유로 징계도 내렸다. 하지만 알바니아가 이에 CAS에 항소하면서 결과는 알바니아의 0:3 몰수승으로 변경되었고 세르비아는 승점 3점이 또 감점되면서 유로 예선에 참가한 모든 국가 중 제일 먼저 탈락확정을 지었다.
당연히 전쟁의 결과로 코소보는 독립을 선언했고 친미국가 겸 친서방국가가 되었다. 코소보 사람들이 usa나 NATO를 외치거나, 코소보에 주둔하는 나토군이나 미군들에게 커피를 준다거나 꽃을 주는 영상들이 유튜브에 존재하며, 심지어 클린턴의 이름을 딴 도로도 있고 수도인 프리슈티나에 가면 성조기와 유럽연합기가 걸려져 있을 정도다. 알바니아 수도 티라나에 가면 코소보의 독립을 인정하고 알바니아에 미군을 진주시키기로 한 것을 기념하여 조지 워커 부시 대로도 있고 조지 워커 부시 동상이 엔베르 호자 동상보다 더 크게 제작돼있기도 하다.

5. 미디어에서


  • 팰콘 4.0 AF에서 발칸반도 전장이 이 전쟁을 다룬다.

6. 관련 문서



[1] 사실상 알바니아 마피아와 연계된 범죄조직으로 본다.[2] 초반에는 자치권 회복을 요구하는 주장이 많았으나 나중에 유고내 연방 국가들이 분리독립을 선포하면서 그 영향을 받아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힘을 얻게 됐다.[3] 최초의 코소보 공화국 총리이며 2014년까지 재직한 이후 2016년부터는 대통령직을 수행 중이다. 그러나 2020년 코소보 전쟁 당시 전범혐의로 사임했다.[4] 큰 역할은 아니었지만 독일 연방군도 참전하여,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첫 해외파병 기록을 세웠다.[5] 한편 코소보 전쟁 당시 그 파일럿과 그를 격추시킨 사람이 서로 만나서 친구가 되었다고 한다. http://www.bbc.com/news/world-europe-20209770 [6] F-117기 격추 후 파일럿 구출작전은 노 맨 레프트 비하인드 4부(내셔널 지오그래픽)에 당시 파일럿 본인이 나와 정황을 설명한다. 당시 상황을 정확하게 알 수 있다. 단, 파일럿과 격추시킨 사람간에 대한 언급은 없다. [7] 실제로 종전 다음날 러시아군이 통보 없이 세르비아에 진주한 것은 좀 논란거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