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병권(야구선수)
1. 개요
전 LG 트윈스의 투수. 투구폼은 사이드암.
2. 설명
경북고를 졸업한 정통 TK였다. 고교시절에는 성준, 류중일 등과 함께 아직도 전설로 회자되는 혈투인 박노준, 김건우의 선린상고와의 맞대결 당시의 에이스인 성준의 백업으로 활동했으며 성준이 졸업한 이듬해에는 경북고의 에이스 역할을 했다.
대학 졸업을 전후로 한 1988년 프로 1차지명에서 류명선, 정윤수, 홍성연 등에 밀려 고향팀 삼성으로부터 외면받았고, 대신 MBC 청룡에 입단했다. 1990년 10승 5패, 방어율 3.72의 호성적을 기록하면서 팀의 우승에 큰 공을 세웠지만 6경기 연속 완투[1] 를 비롯하여 패전처리 역할까지 소화하는 등 혹사당한 결과 이듬해에는 규정이닝을 채운 선수 중 최소승(3승13패), 방어율 최하위(5.15)라는 불명예 2관왕으로 급추락하게 된다. 백인천의 만행을 이야기할 때 간간히 언급되는 선수.
그러나 선수로서의 본인에 대한 평가도 썩 좋지는 않은 편. 일단 성실한 편은 아니었던 것 같다. 고교 때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대학시절을 거치면서 기량이 전혀 늘지 않은 듯하다. 연세대 동기인 김성규(전 해태 타이거즈)는 대학 시절 문병권이 훈련 태도도 불성실하고 뺀질거리기만 했다면서 졸업해서 프로에 온 후에도 이를 갈면서 계속 디스하고 다니기도 했다. 경북고의 에이스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차 지명에서 '''3명'''이나 뽑을 수 있던 그 시절에 고향팀 삼성의 지명을 못 받은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 부분.
심지어 선수 시절 최고의 성적을 기록했던 1990년조차 후반기에는 투구폼의 속도를 조절하는 변칙스타일이 간파되어 공략당하기 시작했다. 결국 10승 투수임에도 불구하고 1990년 한국시리즈에서는 선발 로테이션에서 제외되어 불펜으로 배치전환될 정도였다. 같은 1990년에 급격한 기량향상을 보인 김태원이 그 후에도 괜찮은 활약을 유지한 것을 생각하면, 1991년의 저조한 성적이 혹사에만 기인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3. 연도별 성적
4. 여담
경상북도 상주시의 리틀야구단에서 코치로 활동하고 있다.
5. 관련 문서
[1] 당시 3일 간격으로 등판하면서 삼성전의 10이닝 완투승, 롯데전의 13이닝 완봉승 등 긴 이닝을 소화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