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원(야구선수)
1. 개요
MBC 청룡-LG 트윈스에서 활약했던 우완 투수. 현역 시절 등번호는 35번. 부활의 리더이자 기타리스트인 김태원과 동명이인이라 불암콩콩코믹스에선 그의 모습으로 출연했다.
2. 선수 시절
서울재동초, 휘문중, 우신고에서 야구부가 해체되어 배재고 전학 후 졸업하여, 성대 교육학과(1982학번) 시절만 해도 한희민에게 밀린 무명의 파이어볼러였으나, 190cm의 큰 체구를 앞세운 강속구 투수라는 장점을 본 김동엽 당시 MBC 청룡 감독이 1차 지명자로 낙점했다. 김동엽 감독이 김태원을 언급하면서 "우리 팀에는 선동열급의 신인이 있다"고 말했을 정도[3] 였으니.
그러나 문제는 너무나 새가슴이라서[4] 주자만 나가면 투구가 흔들렸다. 김태원의 부진은 김동엽 감독이 잘리는 데 일조했다. 게다가 방위 복무 등으로 인해 4년 동안 잉여 전력이었다. 전지훈련 소개에서 감독 인터뷰를 하면 "올해는 김태원이 기대된다. 김태원만 활약하면 우승할 수 있다." 는 말을 듣는 게 연례행사였다.
그러다가 MBC에서 LG로 바뀐 동시에 백인천 감독의 부임 첫 해인 1990년에 포텐셜이 폭발해 18승을 기록, 팀의 에이스로 자리잡게 된다.[5] 김태원뿐만 아니라 정삼흠도 이 즈음에 포텐셜이 터져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반 LG 트윈스의 기둥 투수로 활약한다.[6][7] 1993년 9월 9일 對 쌍방울전에서는 노히트노런(4탈삼진, 3사사구)을 기록하기도 했다. 1993년에 LG 김태원과 해태 조계현의 맞대결이 몇 번 있었는데, 이 때는 잠실이 매진되기도 할 명승부였다. 당시 조계현은 LG에 무척 강해서 LG를 상대로 12연승을 할 정도였다. 번번히 김태원은 호투하고도 조계현에게 주눅든 팀 타선 때문에 매번 1~2점차로 지며 5전 1승 4패를 기록했다.
1994년 이광환 감독의 스타 시스템을 앞세운 LG는 우승을 차지했는데, 이 때 김태원은 당시 정규 리그에서 16승을 거두며 이상훈, 정삼흠과 함께 선발 트로이카를 갖추고 거기에 신인 10승의 인현배까지 가세한 강력한 선발진[8] 을 구축했다. 스타 시스템으로 대변되는 LG 트윈스의 전성기에서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투수가 되었는데, 1990년부터 1995년까지는 짝수 해에만 10승을 거뒀다. 1996년까지 매년 규정 이닝을 채우는 꾸준한 활약으로 LG의 2선발 자리를 지키다가 1998년에 은퇴했다. 약간 일찍 은퇴한 케이스.
통산 성적은 87승 77패 5세이브, 평균자책점 3.43이다.
투구 스타일은 큰 체격에서 내리꽂는 최고 150km 초반대까지 찍는 강속구에 스플리터, 체인지업을 구사했는데 제구 불안이 있다보니 구속을 140 초중반까지 낮추면서 제구를 가다듬어 던졌다. 다만, 소위 긁히는 날은 140대 후반과 150초반을 연신 찍어대면서 그야말로 상대팀 타자들이 손을 못대는 구위를 자랑했다. 노히터 게임을 만들어낼 정도로 위력있는 구위였고, 전성기는 짧았지만 짧은 전성기시절에는 확실한 성적을 내었다. 90년 18승, 94년 16승에 두 번다 2점대 초반 ERA로 두 번의 우승을 견인한 숨은 에이스. 실제로 이상훈이 입단하기 전까지는 구위로는 단연 김태원을 최고로 꼽았다.[9]
결국 LG Twins의 두 번의 우승과정을 보면 꾸준했던 김용수와 빛났던 이상훈과 더불어 정삼흠과 김태원의 활약여부가 우승으로 이어졌다는 공통점이 있다.
1995년 9승 11패 5.01로 부진[10] 해서 역시 다소 부진했던 정삼흠[11] 과 함께 역할을 해주지 못했다. 95시즌 LG는 9월까지 5게임차 이상으로 앞서나가다 최종 0.5게임차 2위로 마감하고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하게 되었는데 4인방 중에 2인인 김태원과 정삼흠이 조금만 힘을 내줬다면 역사가 바뀌었을 가능성이 크다.[12]
한편, 1989년 9월 24일 열린 해태 타이거즈와의 동대문 더블헤더 2차전에서 선발승을 거둬 동대문야구장에서 열린 마지막 프로야구 경기 승리투수가 되기도 했다.
3. 지도자 시절
은퇴 후 친정 팀 LG에서 코치를 맡았지만, 2002 시즌 종료 후 해임되었다. 이후 통닭집, 주유소를 경영했으나 모두 사업에 실패했다고 한다.
이후 선배인 윤여국 동성고 감독의 추천으로 야구계로 돌아와서 2004년부터 광주동성고에서 일했다. 이 때 한기주와 양현종을 조련하여 동성고는 2004년 봉황대기 우승, 2006년에는 봉황대기와 대통령배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다. 이후에도 문양식, 윤명준을 키워 내어 투수코치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아 KIA 타이거즈의 서정환 감독 아래서 투수코치로 영입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한기주 전담 코치였다고 한다.
그러나 서정환 감독이 물러나고 조범현 감독이 부임하자 재계약에 실패한다. 일설에 의하면 성균관대학교 인맥인 장채근 배터리코치, 정재공 구단 사장과의 학연 때문에 조범현 감독이 못마땅하게 여겨서 잘렸다고 하지만, 어차피 감독이 바뀌면 새 감독은 그 아래있는 코치들은 자기와 맞는 사람을 쓰는게 보통이라 조범현이 옹졸했던 것은 아닌 것같다.
이후 광주동성고로 다시 돌아갔다가 2009년에는 대구상원고(前 대구상고)의 투수코치로 있었고, 2010년에는 공주고의 투수코치로 옮겼다. 2011년에 다시 상원고 코치를 지냈고 2013년부터 2014년까지 전남 세지중학교 야구부 감독을 맡았고 현재는 야구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다
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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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부활의 리더 김태원과 같은데, 보다시피 이문세를 닮았다. 현역 시절 별명도 야구계의 이문세, 말머리 등 이문세와 관련된 별명이 붙었고, 그 덕에 이문세가 진행하던 일밤에 LG 트윈스 경기복을 입고서 깜짝 게스트로 들어간 적도 있다. 예상보다 입담이 괜찮아서 반응도 좋았던 편. 서정환 감독은 김태원을 "문세코치"라고 불렀을 정도라고. 참고로 이문세는 자타가 공인하는 골수 LG 팬이다.
2016년 경, OB베어스 레전드 출신인 김상호 (95년 MVP)가 운영하는 팀베이스에서 투수코치로 엘리트 선수들을 육성 하였으며 현재는 경기도 김포에서 '원베이스볼'을 운영하며 유소년, 초중고 선수 육성 및 사회인 야구 레슨을 하고 있다. 가끔 한기주가 방문하여 훈련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벌투의 희생양이 된 바 있다. 1991년 8월 3일 빙그레와의 더블헤더 2차전 홈경기에서 백인천 감독은 김태원이 16피안타 12실점을 하고있는 와중에도 전년도 에이스의 부진[13] 에 대한 충격요법으로 4연패에 빠진 팀 분위기를 반전시키려는 시도로 경기 끝까지 내리지 않았고 182구를 던지게 했다. 그러나 백 감독의 의도와는 달리 치열한 4위 경쟁을 펼치던 디펜딩챔피언 LG는 8월 도리어 8승19패로 완전히 고꾸라지며 추락했고 백 감독은 선수들과의 불화 끝에 시즌 끝나고 옷을 벗었다.
5. 연도별 성적
6. 관련 문서
[1] 원래는 우신고등학교 야구부 소속이었다가 팀이 해체되면서 배재고로 전학했다. 우신고 야구부는 1979, 1980년에만 존속했다가 2019년에 재창단했다.[2] 교육학과(1982학번)[3] 150km를 던지는 190의 체격좋은 장신 투수는 2020년 지금이라도 주목받을텐데 1980년대에는 말 할 것도 없었다. 그만큼 김태원의 하드웨어나 실링은 압도적이었다.[4] 진짜 새가슴이었는지는 모르지만 파이어볼러 특유의 제구불안이 있었다.[5] 책 'LG 트윈스 때문에 산다' 에 나온 내용에 의하면, 백인천 감독이 윗몸일으키기 100개를 하지 못하면 전지훈련에 보내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김태원이 96개에서 퍼져 버리는 바람에 정말로 전지훈련에 가지 못하게 될 위기에 처했다. 그러자 김태원도 다시 한 번 기회를 줄 수 없겠냐고 부탁해 선배 선수들도 근육을 풀어 주고, 테이핑도 해 주는 등 여러 모로 도움을 주어서 겨우 전지훈련에 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때 체력 단련을 많이 한 덕분에 포텐셜이 터졌다고. 그 이후 KBS의 한국야구 레전드 백인천 편에서도 이 일화가 소개됐는데, 당시 윗몸일으키기 미니멈 개수는 100개가 아닌 150개였다고 한다. 김태원은 1차시기에서 146개로 전지훈련에 못갈뻔했으나 2차시기에서 150개를 겨우 채웠는데, 개수를 이미 채운 팀원 전체가 합심해서 응원하면서, 백인천이 당시 팀 케미를 강화시키는데 일조한 일화라고 한다.[6] 김태원은 1989 시즌이 끝나고 야구를 그만둔 뒤 지인과 나이트클럽을 경영하려고 했다가, 1년만 더 해 보겠다고 해서 나이트클럽 사업을 미뤘는데 그 1년에서 터졌다!![7] 알다시피 정삼흠은 전년도에 배성서 감독과 대판 싸운 사건으로 인해 제대로 시즌을 치를 수 없었다.[8] 15승 투수 세 명에 10승 투수 한 명까지 4인방으로 소위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와 비교되곤 했다.LG Twins와 애틀란타 브레이브스는 강력한 선발진, 90년대의 강호,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은 우승횟수등 당시에는 여러모로 비교대상이었다.[9] 다만 94 한국시리즈에서는 3선발로 나와 3이닝 3실점으로 부진했다.[10] 1994년 16승 5패 2.41에 비하면 엄청난 부진이었는데 부상으로 124이닝밖에 소화하지 못했다.[11] 94년 15승 8패 2.95 186.1이닝, 95년 8승9패 3.81 163이닝, 특히 정삼흠은 93,94년 2년 연속 185이닝 이상,15승이상, 2점대 ERA를 기록중이었기 때문에 95년은 꽤나 부진한 해였다.[12] 정삼흠은 전반기 부진하다 폼을 회복하고 규정이닝 이상 소화하며 그래도 3점대 방어율에 롯데와의 플레이오프에서 2경기 모두 호투했다. 다만 그가 등판하면 타선이 물방망이가 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김태원은 8월 1일 9승을 기록한 뒤 나왔다하면 2~3회도 채우지 못하고 난타당해 불펜의 과부하를 초래했다. 김태원은 규정이닝도 못채우고 5점대 방어율로 매우 부진했으며 4인 3일 휴식 로테이션을 불러와 팀을 망치는 원인을 제공했다. 플레이오프에서도 출전하지 못했다.[13] 7승 6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