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준

 

'''박노준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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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 MVP'''
김호근
(부산고등학교)

'''박노준
(선린상업고등학교)'''

선동열
(광주제일고등학교)

[image] '''1980 청룡기 전국고교야구 선수권대회#s-2 MVP'''



'''OB 베어스 등번호 18번'''
기세봉(1985)

'''박노준(1986~1991)'''

이상현(1992~1993)
'''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10번'''
이광우(1990~1991)

'''박노준(1992)'''

정성룡(1993~1995)
<color=#373a3c> '''쌍방울 레이더스 등번호 29번'''
방극천(1992)

'''박노준(1993~1997)'''

오충원(1998~1999)






'''안양대학교'''
'''ANYANG UNIVERSITY'''
<colbgcolor=#003399> '''이름'''
'''박노준'''
'''Noh-jun Park'''
'''출생'''
1962년 10월 26일 (62세) /
전라남도 신안군 압해읍[1][2][3]
'''학력'''
서울봉천초-선린중-선린상고-고려대[4]-성균관대 석사[5]-호서대 박사[6]
'''직업'''
야구선수(투수[7], 외야수 / 은퇴 )
교수
'''투타'''
좌투좌타
'''프로입단'''
1986년 1차 1순위 (OB)
'''소속'''
<colbgcolor=#003399> '''선수'''
OB 베어스(1986~1991)
해태 타이거즈 (1992~1993)
쌍방울 레이더스 (1994~1997)
'''프런트'''
우리 히어로즈 단장 (2008)
'''교수'''
우석대학교 레저스포츠학과 교수(2009~2020)
안양대학교 총장 (2020~ )
1. 개요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2.1.1. 부상
2.2. 프로 시절
3. 해설자 1기 시절
4. 프런트 경력
5. 해설자 2기 시절
6. 대학교수 시절
6.1. 2013 WBC 중계와 비판들
7. 안양대학교 총장
8. 기타
9. 연도별 주요 성적


1. 개요


'''인사이드 파크 호텔!'''

'''손가락 벌렸죠? 스플리터에요'''.[8]

OB 베어스, 해태 타이거즈, 쌍방울 레이더스 소속의 외야수이자 前 우리 히어로즈 단장. 前 우석대학교 체육과학대학 체육지도학과 교수. 2020년부터 안양대학교 총장을 역임하고 있다.
2019년 1월 7일 대한민국국가대표선수회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image]
박노준과 김건우
서울봉천초등학교 시절 '''1학년을 2번 다닐 정도로''' 몸이 약해 체력을 기르고자 야구를 시작했는데, 선린중학교를 거쳐 선린상고 시절엔 '''천재'''라고 불릴 정도로 뛰어난 야구실력과 훤칠한 외모로 유명했다. 선린상고 시절의 별명은 유독 챙이 짧은 선린상고 모자와 굳게 다문 입 때문에 '독일병정'.
어쩌다가 마운드에서 내려오면 야수로서도 뛰어난 실력을 발휘했다. 거기에 발도 빠르고 외야로 나가면 총알 송구까지 하는 등, 그야말로 고교야구의 로망인 투수인 동시에 중심타자였다.
선린상고 2학년 때인 1980년에는 전국 대회에서 이미 당시 고교 최고의 투수였던 선동열[9]이 마운드에 버티고 있던 광주제일고를 상대로 이겼던 경력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외모까지 빼어났다. 거기에 고3 때는 청룡기, 봉황대기 양 대회에 걸쳐 경북고와 혈전을 벌이면서 비극의 주인공이 되는 드라마성까지 갖췄다.[10]

2.1.1. 부상


[image]
1981년 봉황대기 결승전에서 부상을 당한 다음날 입원한 병원 앞에는 그의 부상을 안타까워한 여고생 팬들이 진을 치고 있었으며 방송국에서 병원에 입원해서 발목에 깁스를 하고 누워 있는 그를 찾아와서 준우승에 머문 심경 등을 인터뷰해 갔을 정도였다.[11] 그 후로 대한민국 야구 사상 이렇게 여고생들한테까지 인기를 한 몸에 받은 야구선수는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덕분에 선린상고의 쌍두마차이자 또 하나의 천재 김건우는 선린상고 때도 관심을 못 받았다. 그리고 프로로 진출한 뒤에도 교통사고로 인해 선수생활을 오래 이어가지 못했다.[12]

2.2. 프로 시절


그러나 1982년 선린상고 졸업 후 고려대학교를 거쳐[13], 프로까지도 이어진 투수#s-1와 타자 겸업 등으로 인한 혹사와 집중력 결여로 인해 프로에 입단한 후에는 크게 활약하지는 못했다.
프로 시절에도 자신의 능력을 과신한 나머지 투타 겸업을 선언했으나, 아무리 수준이 낮아도 성인 야구는 학생야구와는 달랐다. 사실 대학이 끝난 상황에서 투수 생명은 종료되었고, OB 베어스의 제의도 신인 최고 계약에서''' '타자' '''신인 최고 계약으로 변해 있었다. 그렇게 계약을 한 뒤에 황당하게도 OB의 김성근 감독이 투타 겸업을 제의했고, 그 걸 또 좋다고 받아들였다(...) 여기서 투타 겸업을 먼저 제의한 것이 어느 쪽이냐의 논란이 약간 있기는 한데, 어차피 다른 한 쪽도 쉽게 동의한 이야기다.
박노준
33경기 5승 6패 7세이브 ERA 2.28
17경기 0.173 1타점(타자)
김건우
37경기 18승 6패 ERA 1.81 탈삼진 102
만약 욕심을 버리고 투, 타 중 하나라도 빨리 진로를 정해서 전념했다면 다른 야구 인생을 살았을 거라고 아쉬워하는 전문가들도 많다. 특히 고등학교 동기이자 항상 2선발 취급이었던 김건우가 프로에 입단하자마자 일찌감치 투수로 정착해서 큰 활약을 했던 점과 극명한 대비를 이루었다. 김건우는 86년 신인왕을 먹었고 승승장구 하다가 그 후 여자친구를 집에 데려다 주려다가 뺑소니 차량에 치이는 교통사고라는 야구 외적인 요인으로 선수 생명이 단축되었다.
프로에 와서도 징그럽게 부상을 많이 당한 케이스이다.
1987년 어깨 부상
1988년 손등 뼈 골절
1989년 손가락 골절
1992년 왼쪽 무릎 인대 부상
1993년 갈비뼈 골절(...)
1994년 쌍방울에서 골글 탈 정도의 활약한 다음에 허벅지 근육 파열(...)
1996년 오른쪽 무릎 십자인대 파열(...)
1997년 결국 은퇴.
(...)
OB-해태-쌍방울을 거친 그의 프로 통산 성적은 타율 0.262, 28홈런, 266타점. 그리고 '''5승 7패 7세이브 3.13'''. 이 좌완투수 기록이 투타 겸업으로 망했다는 1986년 신인의 기록이다. 대신 타격이 망했다. 1986년 타격기록은 0.173, 0홈런, 1타점. 사실 투수 기록도 그다지 특출난 것도 아닌 것이, 이 시기는 투고타저의 시대라 3점대 방어율은 평범한 기록이었다. 1991년 시즌 후 이광우를 상대로 해태 타이거즈에 트레이드됐다가, 1993년에는 백인호와 함께 쌍방울 레이더스로 트레이드되어 쌍방울에서 골글 한 번 찍고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프로에서 딱 한번 연타석 홈런을 쳤는데 그게 92년 롯데를 상대로 한 플레이오프 2차전이다. 그런데 페넌트레이스에서의 활약이 빈약해서 그대로 쌍방울로 트레이드 되고 말았다. 쌍방울에서 뛸 당시 가족들 서울 양천구 목동에 거주하고 본인 혼자만 전주에서 생활했다. 자녀들의 교육 문제와 병원 등을 고려했다고 한다. 목동에는 이대목동병원과 지어진지 얼마 안 된 목동신시가지아파트가 있었으니까. 훗날 히어로즈 창단에서
아무튼 선린상고 시절의 박노준은 지금도 올드 야구 팬들에게는 로망 그자체였다.
'야구가 좋아'[14]라는 사이트에서 최훈이 연재한 레전드 카툰[15] 중 박노준 편에서 바로 이 투타 겸업으로 망했던 일화가 소개되었었다. 최고의 선수에게 투수의 재능마저 있었기에 오히려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안타까워하는 훈훈한 내용. 그런데 공교롭게도 다음 소개된 선수가 원년도에 선발로 10승 타자로 3할을 기록한 김성한#s-1…. 만화 속에도 나온다. '누구야? 투, 타 겸업이 힘들다고 한게...'
해태 타이거즈에서도 1년간 선수 생활을 했는데, 2할3푼대의 평범에도 못미치는 성적을 남기고 트레이드 된다. 편파해설을 하는 것을 보면 저때 알력이 있지 않았나 싶다.[16]

3. 해설자 1기 시절


그러나 선수 은퇴 후에는 선수 시절의 인기가 무색하게 되었다. 일단 미국 마이너리그 지도자 연수를 다녀오긴 했는데, 워낙 부상으로 떠돌이를 한 상황에 더해서 마지막 은퇴한 것이 지금은 역사에서 완전히 지워진 쌍방울이기 때문에 코치 복귀는 무리였다. 결국 2000년 iTV박찬호 등판경기 방송 해설로 데뷔, 이후 SBSSBS Sports로 이적했다.
경인방송 시절에는 나름대로 해설이 신선하다 내지는 무난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SBS 스포츠로 이적한 이후에는 '''손가락 벌렸죠? 스플리터에요''', '''인사이드 파크 호텔''' 등 컬트적인 발언으로 야구팬들에게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한편 한국시리즈를 끝낸 두 홈런을 중계한 유일한 해설자기도 하다. 2002년에는 상당히 흥분한 목소리였는데, 2009년 우승 당시에는 멘트가 매우 김샜다(...). 특히 2002년 한국시리즈2009년 한국시리즈는 각각 삼성 라이온즈의 한국시리즈 한정 첫 우승, KIA 타이거즈의 12년만이자 현대자동차그룹의 구단 인수 후 첫 우승이라는 의미있는 우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해설자로서 커리어를 쌓아가던 어느 날, 갑자기 매력적인 제의를 받게 되는데….

4. 프런트 경력


2008년에 창단한 우리 히어로즈의 단장을 역임했다. 당시 이장석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의 GM과 같은 역할로 박노준을 영입하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박노준의 진짜 역할은 얼굴마담 겸 대신 욕먹는 담당이었다. 선수들 연봉 깎는 것부터 시작해서, 목동야구장 인근의 아파트 민원담당까지 했다. 이때 선수들 연봉은 깎으면서 현대 시절 리스한 에쿠스를 몰고 다닌다고 붙은 별명이 '''에쿠스 박'''.[17]
그런데 정작 이 장면 이후는 아무것도 구단에 영향력 행사를 못 했다고 한다. 단적인 예가 당시 SK 감독이었던 김성근이 아직 터지기 전이었던 정상호를 내놓으면서, 당시 히어로즈에서 노장으로 텃세를 부리고 감독과 대립하였던 이숭용을 데려가는 트레이드가 진행되었다. 이는 SK에서 전권을 가지고 있던 김성근 당시 SK 감독, 그리고 히어로즈에서 트레이드 권한을 가지고 있었던 박노준 단장과 이광환 당시 히어로즈 감독이 모두 동의하면서 성사 직전이 되었는데, '''히어로즈 구단 상층부에서 현금 1억을 추가로 요구'''하면서 무산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박노준은 아무런 실권이 없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실제로 초기에 언급이 나왔던 플랜이 사실이라면 이 트레이드는 무조건 실행되었어야 했었다. 이숭용의 나이와 팀내 상황, 연봉, 에이징 커브와 실제로 하락세였던 성적 등 남겨둘 이유가 없었다. 실제로 MLB에서는 단순히 연봉을 덜어내기 위해서 가치가 남아있는 선수를 가치없는 선수와 트레이드하는 '''샐러리 덤프형 트레이드'''까지 존재하고, 당시 히어로즈가 현대 구단의 파행 운영으로 노장만 득시글거렸다는 것 등에서 이숭용 트레이드 파행은, 송지만이 트레이드 되려다 실패한 것과 함께 이후 히어로즈가 파행으로 가게 되는 것을 암시한다. 실제로 이후 히어로즈 구단 수뇌부는 팔아서 욕 먹고, 현금은 많이 들어오지 않는 노장 선수 대신에 '''젊은 주축 선수들을 현금 트레이드하는 방향'''으로 나가기 때문이다. 실제로 2008년 시즌이 끝나고, 장원삼을 30억에 삼성에 넘기는 현금트레이드가 터진다. 이 현금 트레이드는 너무 여론이 나빠져서 1년이 미뤄지지만, 대신 장원삼 트레이드가 이뤄진 한 해에 이택근, 이현승, 마일영이 현금에 팔려나갔고, 2010년에는 황재균이 트레이드를 빙자한 현금 장사[18]로 나간다. 그리고 이 시기까지도 이숭용과 송지만은 히어로즈에 남아서 평균연령을 높이는데 공헌하게 된다.

결국 '''욕만 우라지게 먹고''' 2008 시즌이 끝나자마자 구단 수뇌부와 마찰을 빚은 후 사임했다. 이 시기 박노준은 KBO와 히어로즈의 연결 통로이기도 했기 때문에, 박노준 링크로 들어온 인물들의 상당수가 히어로즈를 떠났고, 이광환도 감독직에서 경질되었다. 욕먹을 일이 터질 만큼 터진 이후였던 히어로즈에는 팬들의 지지를 받던 김시진 당시 경기 감독관이 감독으로 복귀했다.

5. 해설자 2기 시절


단장에서 물러난 후 원래 있던 SBS에서 해설가로 복귀했는데 여전히 해설에 여러가지 문제[19]가 많아서 박동희 기자와 더불어 각 팀빠들이 서로 자기 팀의 팬이 아니라며 타 팀에 떠넘기는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명언록도 무한증식했다. 명언/야구 참조.
후술하듯이 교수로 임용되면서 해설은 부업으로만 하게 되었는데, 2012년 TV조선청룡기 전국고교야구 선수권대회 중계 해설을 맡았다. 2013 WBC 해설을 JTBC에서 맡았으며, 2014년에는 KBS N 스포츠에서 일본프로야구 해설을 맡았다.

6. 대학교수 시절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에서 스포츠산업과 관련된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히어로즈의 단장에서 물러난 이후 2009년에는 2월부터 6월까지 한 학기 동안 서울산업대학교에서 겸임교수로 강단에 섰다. 같은 해 8월에는 우석대학교의 겸임교수로 초빙됐다. 박사과정에 매진한 그는 2011년 2월 스포츠마케팅 관련 논문으로 호서대학교 벤처전문대학원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우석대학교 체육과학대학 레저스포츠학과의 교수로 정식 임용되어 재직하고 있으며 학과 통폐합으로 인해 체육지도학과의 교수가 되었다.

6.1. 2013 WBC 중계와 비판들


2013 WBC에서 네덜란드와 대만의 경기를 중계하며 보스턴 레드삭스 유격수가 시즌아웃되었다는 근거 없는 드립을 던지며 위태위태[20]하더니, 본선 1라운드 C조 베네수엘라-도미니카 경기를 중계하며 마틴 프라도치퍼 존스의 공백을 메꿔야 한다는 개드립을 치며 그란도시즌을 작렬했다. 아니발 산체스에딘슨 볼케즈의 프로필을 바꿔 읽기도 했으며, 파블로 산도발을 좌타 거포라 칭했고, 에릭 아이바에게 류현진의 동료 드립을 쳤다(…).[21][22] 또한 페르난도 로드니가 모자 비뚤게 쓴 채 투구를 하자 '''이제 그 모자 삐둘게 쓰는 건 트레이드 카드가 됐어요'''란 드립을 작렬하며 인사이드 파크 호텔에 이은 새로운 유행어를 창시했다.
이튿날 미국 vs 멕시코 경기에서는 R. A. 디키의 2012년 성적을 보고 아메리칸리그 이야기를 해서[23] 이틀 연속 그란도시즌을 작렬시켰다(…)[24]. 그리고 그런 와중에 미국이 득점기회를 잡자 '''홈런보다 나은 안타''' 발언을 꾸준히 설파하기도 했다.

7. 안양대학교 총장


'''"야구로치면 저는 5회초쯤 와있습니다."'''

- 2020년 3월 20일 조선일보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

2020년 2월 11일, 안양대학교 11대 총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안양대학교대진성주회 매각 논란 및 실패 직후에 선임된 것이라서 분위기 쇄신용 카드라는 의심의 눈초리도 받고 있다. 게다가 안양대는 체육 관련 학과가 하나도 없어서 어울리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었다. 그리고 안양대는 장로회 미션스쿨이라서 역대 총장들이 목사, 장로 같은 기독교계 인물들인데, 박노준 총장은 10대 장병집 총장에 이은 두 번째 비기독교계 출신 총장이라서 안양대학교의 기독교 정체성이 흔들리는것 같다며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물론 저명한 야구 인사라서 총장으로 선임되자마자 뉴스로도 알려져서 홍보 효과를 톡톡히 누렸다.
안양대학교 총장 자리는 7대 김석준 총장 이래로 그동안 내부승격 없이 외부 교육자들을 총장으로 선임했다가 임기를 완전히 채우지 못하고 교체되는 일이 계속되고 있다.[25] 일련의 사건 때문에 생긴 학내 구성원들의 불만을 없애는 것과 임기를 다 채우는 것이 관건이다. 일단 선임되었으니 소방수 역할을 해내주길 바라는 여론도 많다. 이를 의식해서 자신은 CEO형 총장이고 사기를 진작시키고 배우고 싶은 학과 중심으로 체질 개선을 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2020년 3월 17일에는 최대호 안양시장과 지역청년 취업활성화에 공동 노력할 것을 약속하는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관내기업의 채용정보를 제공해 졸업예정자의 일자리매칭 취업연계서비스를 실시하고, 지역 청년들이 취업지원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곳을 다양화한다고 한다.

8. 기타


  • 야구계 아이돌 스타의 원조이자 젊은 여성을 야구장으로 끌어들인 원조격 인물이기도 한데, 여성 팬들의 인기는 2013년 시점의 잠실돌 정수빈을 압도하고도 남을 수준이었다. 여성팬들이 자꾸 선린상고 담장 너머로 팬 레터를 수백 통씩 던져대서 일일이 줍느라 고생했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 심지어 어느 잡지 인기투표에서 당시 최고 인기를 구가하던 가수 전영록을 제치고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 조카 박건우가 2021년 2차 1라운드 4번으로 KIA에 지명되었다.

9.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 타자 기록
연도
소속팀
출장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86
OB
17
52
.173
9
1
2
0
1
3
0
2
.269
.204
1987
34
89
.315
28
4
2
0
7
8
2
8
.404
.371
1988
67
146
.240
35
5
2
4
20
18
0
12
.384
.294
1989
107
326
'''.298'''
(7위)
97
12
2
0
26
54
'''25'''
(6위)
39
.347
.373
1990
106
342
.249
85
9
2
3
24
37
13
26
.313
.300
1991
120
430
.293
'''126'''
(9위)
17
4
5
39
60
19
34
.386
.345
연도
소속팀
출장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2
해태
92
238
.239
57
11
3
2
28
39
11
22
.336
.302
연도
소속팀
출장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3
쌍방울
113
331
.227
75
14
3
0
26
28
14
29
.287
.289
1994
108
340
'''.303'''
(7위)
103
15
1
3
36
44
'''43'''
(3위)
39
.379
.374
1995
107
332
.220
73
11
3
2
20
39
20
21
.289
.266
1996
52
139
.345
48
7
1
4
20
15
1
11
.496
.393
1997
93
155
.187
29
4
2
5
19
23
6
24
.335
.296
<color=#373a3c> '''KBO 통산'''
(12시즌)
1016
2920
.262
765
110
27
28
266
368
154
267
.347
.323
역대 투수 기록
연도
소속팀
출장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피홈런
사사구
탈삼진
WHIP
1986
OB
33
110⅓
5
6
'''7'''
(3위)
'''2.28'''
(7위)
91
4
38
61
1.15
1987
9
16
0
1
0
6.19
16
3
15
8
1.88
1988
1
3
0
0
0
18.00
5
0
2
1
2.00
<color=#373a3c> '''KBO 통산'''
(3시즌)
43
129⅓
5
7
7
3.13
112
7
55
70
1.26
[1] 목포시 출신으로 되어있었으나 사실 인근 신안군 압해읍(당시 무안군 압해면) 출신이다.[2] 목포시와 뿌리가 같은 무안군, 신안군 출신의 인물들이 자신의 고향을 말할 때 상대방이 지명을 잘 모르기에 상대적으로 잘 알려져 있는 목포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타 지방 출신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군 단위 출신자 및 거주자들은 지역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지 않는 이상 인근 도시에서 살다 왔다고 말한다.[3] 서울봉천초등학교 시절부터 서울에서 자랐다.[4] 경영학과(1982학번),1986년 졸업[5] 스포츠산업과 관련된 논문으로 석사 학위 취득[6] 벤처전문대학원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 취득[7] OB 시절 1986년 ~ 1988년까지 좌완투수로 활동하였다.[8] 억울한 측면도 있다. 공이 날아가는 궤적을 보고 구종을 말하는 것에는 관대한 팬들이 되려 더 정확하게 구종을 판단할 수 있는 그립을 보고 스플리터를 던졌다고 해설한 것을 우스갯소리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공의 궤적만 보고 그립을 안 보면 알 수 없는 서클 체인지업이라고 말하는 해설자들에 대한 지적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9] 선동열의 아마 시절 전성기는 고교보다 고려대학교 시절이었다. 더 정확하게는 5.18의 직격탄을 맞으면서 한 시즌을 그대로 날린 것도 있고 해서 기대치가 대학 시절과는 비교도 안되었다. 더구나 이 때는 고교야구 전성기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괜찮은 선수들(박노준과 선동열을 연파하면서 혼자서 약소팀을 전국대회 우승으로 이끌었던 세광고의 민문식, 경북고를 우승시킨 성준, 그리고 천재소리가 관용어구였던 본문의 주인공인 박노준과 그의 팀원 김건우, 천안북일고이상군)이 군웅할거했기 때문에 더더욱 1년을 날려먹은 선동열이 주목받지 못했다. 다만 그렇다고 선동열이 이 당시 고교생 중에서 최고가 아니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본인 커리어상 기량이 만개하기 시작한 게 대학 시절이지 고교 시절에도 이미 군계일학으로 점쳐졌다. 당장 졸업을 앞두고 당시 대학야구계의 큰손인 연세대학교와 고려대학교가 최동원에 이어 선동열을 두고 또 한 번 스카우트 전쟁에 나섰다는 점 자체가 이 당시 고교선수 중에서는 최고였다는 점을 증명한다.[10] 선린상고고3때의 준우승이 워낙 부각됐지만 이분은 이미 1, 2학년 때 우승을 경험했다. 고등학교 때 콩라인은 아니었다는 얘기다.[11] 덕분에 그해의 우승팀 경북고를 이끌었던 '''나름대로''' 라이벌 성준이 묻혀 버렸다. 우승한 다음에 '박노준을 꼭 이기고 싶었습니다'라는 인터뷰를 하고 있었는데, 정작 방송사도 그렇고 여러 야구팬들의 관심은 박노준이 입원한 병원에 집중되어 있었다. 덕분에 비참함이 두 배.[12] 무슨 마라도 끼었는지 김건우와 박노준 두 선린상고 에이스들은 부상 퍼레이드로 자신들의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채 선수 생활을 끝냈다. 청소년 세계대회에서 노히트노런 한 것 제외하면 고교시절부터 대학까지 타자로 유명했던 김건우는 프로에 와서 투수로 전향하여 바로 신인 최다승을 기록하면서 신인왕에 등극했다. 그리고 다음해도 9월까지 12승을 하다가 교통사고로 두 팔과 한 다리가 완전히 박살나고 말았다. 겨우 복귀해서 투수로 좀 뛰다가 타자로 돌아가서는 바로 4번타자 겸 1루수로 교타자 전향에 성공하는듯 했지만, 이번에는 경기 도중에 타팀 선수와 부딪혀 손목 골절을 당했다. 은퇴했다가 다시 투수로 돌아와서 몇년 더 뛰기는 했지만, 본인의 잠재력과 부상 이전의 명성에는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둘 다 은퇴한 후의 행적도 그다지 운이 따르지 않았고, 해설자 시절에도 평판이 나빴다.[13] 이때까지만 해도 선린상고 때의 명성에 뒤지지 않은 천재성을 발휘했다. 하지만 대학야구 자체가 그 전에도 고교나 실업야구에 비해서 인기에 떨어졌고, 프로출범 이후로는 완전히 그들만의 리그화가 되어 사람들이 신경을 많이 안 써서 묻혔다. 참고로 MBC 청룡-LG 트윈스에서 뛰면서 '''106승'''을 올린 정삼흠은 동기인 선동열과 후배인 박노준에게 밀려서 대학 4년 동안 거의 등판 기회를 잡지 못했다. 덕분에 정상흠은 싱싱한 어깨를 가지고 프로에 진출하게 돼서 나중에 프로에 와서 성공할 수 있는 바탕이 되기는 했다.[14] 2009년 KBO가 주도해서 만들었던 사이트인데,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서 사이트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때문에 본문에 언급된 레전드 카툰을 볼 길이 없다. 현재 발견되는 카툰은 최훈 작가 스스로가 블로그에 남겨놓은 이만수 편과 구글 이미지 검색에서만 작은 사이즈로 발견되는 이정훈 편, 그리고 MLB 타운에서 남아있는 한용덕 편 정도이다.[15] 대상자가 단 10명이었다.[16] 박노준이 이적할 당시 30세면 여느 팀에서도 고참급이고 잘 나가는 선배라곤 선동열, 김성한, 한대화, 이순철 그리고 선수 생활이 얼마 남지 않은 김종모 밖에 없었고, 동기생으로는 성격 좋기로 유명한 장채근김정수가 있었다. 연배로 봐선 갈궜다면 김성한 밖에 갈굴 사람이 없다. ㄷㄷㄷ 근데 장채근은 나중에 김응용한테 술 먹고 개기다가 되리어 김응용에게 얻어터지고 난 뒤 주전포수가 됐다는 게 아이러니.[17] 박명환야구TV에서 조용훈이 푼 썰에 의하면, 조용훈이 당시 연봉 고과 1위였으나 2천만원에서 고작 1천만원 상승 제시안을 말했다. 해외 전훈에 나가 있는 조용훈에게 계약을 종용하며 국제전화를 걸었는데 수신인에게도 통화료가 부과되는 국제전화 특성상 40만원이나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박노준 단장은 조용훈에게 내주지 않았다고 한다.[18] 이 때 댓가로 김민성김수화가 넥센으로 넘어가는데, 당시 김민성과 김수화의 기대치는 엄청나게 낮았기 때문에 '''누구나 이건 현금 트레이드로 인식했다.''' 결국 KBO 트레이드 이면 계약 파문이 공개되면서 20억의 현금이 포함된 것으로 밝혀졌다.[19] 발음같은 사소한 문제도 문제지만, '''거의 종교 수준으로 스몰볼을 맹신하는 게 더 문제였다'''. 좌타자는 무조건 결대로 밀어쳐야 한다던지, 9회 3점차에 등판한 마무리 투수에게 2점 홈런을 뽑자 '''여기서 홈런은 안 됩니다. 안타를 이어가야 투수를 무너뜨릴수 있어요.'''라는 명언을 남겼다.[20] 네덜란드 대표팀에서 보스턴 유망주 잰더 보가츠가 3루수로 출전했는데 원래 포지션은 유격수네. 근데 레싹 유격수 다쳤다며? →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21] 프라도는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애틀랜타 브레이브스 간의 저스틴 업튼 트레이드로 디백스로 건너간 선수이며, 산도발은 스위치 히팅 슬러거고, 아이바는 류현진이 소속된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의 라이벌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오브 애너하임 소속 선수다. 물론 현지 중계에서 에인절스가 아닌 다저스 선수로 표기하는 오류를 저지르긴 했지만, 해설자가 되어가지고 그걸 수정하지도 못하고 뻘소리를 작렬했다. 대체 2013년 전후의 MLB 동향에 대해 아는 게 있기나 한 건지 의문이었다.[22] 웃기게도 훗날 산도발은 스위치 히터를 포기하고 우투좌타로 정착한다.[23] 디키는 2012년 내셔널리그 사이영상 수상자였다. 데뷔 후 2009년까지 아메리칸리그에서만 뛴 건 맞지만 2010~2012년가지 디키는 내셔널리그에 있었고, 2013년에 토론토 블루제이스로 이적하여 다시 아메리칸리그로 돌아갔다.[24] 이것 말고도 이 경기 그의 해설은 메이저리그를 아는 사람들은 도저히 실소를 금치 못할 정도로 틀린 정보가 많았다.[25] 안양대학교 총장이 임기를 완전히 채우지 못하고 교체되기 시작한 일은 6대 이은규 총장부터지만 그래도 그는 안양대 신학대학 교수 출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