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고등학교 야구부
1. 개요
대구, 경상권을 넘어 명실상부한 전국구 '''고교야구의 최고명문팀'''
명성에 걸맞게 프로 출범 후 거의 매년 프로선수를 배출하는 야구부로, 우승횟수 기준으로 전국 고교 야구부 중 가장 뛰어난 역대 성적을 자랑한다.
대구상원고등학교 야구부와 함께 삼성 라이온즈의 성골 고등학교[4]
참고로 모교인 경북고등학교가 경고라는 약칭으로 불리기 때문에 대구 경북지역에서는[5] 경고 야구부라고 불리기도 한다.
2. 연혁
2.1. 1920년대~1950년대
경북고 야구의 역사는 일제강점기였던 대구고등보통학교 시절(약칭 대구고보)인 1920년까지거슬러 올라간다. 1920년 5월 11일에 일본인 교사 센게 다카노부(千家 尊宜)와 스에노브 이치로(未延 一郞)가 주도해서 야구부가 처음 탄생했다. 당시 창단 선수진은 김명갑, 배소업, 손관성(孫觀星), 이규현(李圭鉉), 이상오(李相旿), 이원복(李元福), 이희철(李熙徹), 주덕근(朱德根), 차희순(車喜淳), 최경희(崔慶熙), 편무조(片茂祚) 등으로 조선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다만 이 시기 창단된 이후로는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했는데 1928년 대구춘계쟁패전 4강 진출[6] 이 당시 주요 대회에서 낸 유일한 성과였다. 대구상업이 고시엔 조선 예선 결승을 밥먹듯이 가던 것과는 사뭇 대조적인 성적.
8.15 광복 이후에는 한동안 이름을 드러내지 않다가 1956년 제11회 청룡기에 참가, 1957년에는 제 12회 청룡기와 제11회 전국지구대표고교쟁패전에 참가, 이중 전국지구대표고교쟁패전에서는 에이스 김창영(金昌永)을 앞세워 결승까지 진출했으나 9월 23일에 열린 결승전에서 동산고에 3:2로 패배하며 우승 트로피 수여를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그 기세를 몰아 제38회 전국체전 고교부에 경북지역 대표로 참여, 4강까지 진출했지만 경기지역 대표였던 인천고에 6-3로 패배하며 아쉽게 발길을 돌려야 했다.
1959년은 경북고 야구부에는 치욕의 역사로 볼 수 있다. 제14회 청룡기에서는 동산고의 고순선(高順先)에게 26명의 타자가 단 한개의 안타를 뽑지 못하며 대한민국 야구 역사상 3번째 노히트 노런[7] 을, 제13회 전국지구별 초청 전국고교야구쟁패전에서 인천고의 이선덕(李善德)에게 35타자가 단 한개의 안타를 치지 못하며 대한민국 야구 역사상 4번째 노히트 노런[8] 을 당하는 수모를 겪었고, 이런 모습에 "인문계 고교의 이미지를 해친다"는 이유로 폐부되기에 이른다.
2.2. 1960년대~1970년대 : 사상 최강의 야구부
그러던 중 1965년 다시 재창단 되면서 다시 기지개를 폈다.
임신근, 남우식, 황규봉과 이선희 등 에이스가 이끈 시기는 경북고의 황금기였다. 이들과 함께 뺄 수 없는 인물이 삼성 라이온즈 초대 감독으로도 알려진 서영무로, 1974년까지 경북고 감독을 맡으면서 13번의 우승을 함께 했다.
임신근은 고교 2학년 때인 1967년에 대통령배, 청룡기 우승을 이끌었고, 고교 3학년 때인 1968년에는 대통령배, 청룡기, 황금사자기까지 모든 중앙대회[9] 를 제패했다. 유격수 강문길[10] 과 중견수 조창수 또한 당시 각광받던 선수.
임신근이 졸업한 후 1971년 고교 3학년인 투수 남우식과 천보성, 배대웅, 정현발 등 타자들이 대통령배, 청룡기, 황금사자기, 봉황대기[11] , 화랑대기, 문교부 장관기 등 6개 대회를 제패했다. 여기서 화랑대기와 문교부 장관기를 뺀 4개 대회만 치더라도, 역대 고교야구 팀 중 중앙대회 4개 대회를 제패한 건 전무후무하며 아직까지 다시 나오지 않고 있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지역연합 6개팀과 붙어서 6경기 모두 등판, 6경기 모두 승리하였다. 즉, '''고시엔 올스타팀에게 6전 전승'''을 했는데, 이때 일본 전국이 발칵 뒤집어졌다. 일본의 사사키 회장이 직접 찾아와 매년 교환경기를 해달라고 요청했을 정도. 이를 계기로 이후 정기적으로 한일고교 교환경기가 열리게 되었다. #
당시 경북고 야구부가 우승했을 때 대구의 군부대에서 오픈카를 빌려줘 야구부가 대구 시내에서 행진하곤 했는데, 우승을 너무 많이 하다보니 점점 군부대에서 오픈카를 빌려주기를 꺼렸다는 일화도 있다. 또한 경북고가 지는 걸 보기 위해 고교야구를 보러 오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1971년 경북고는 '''고교야구 역대 최강팀으로 손꼽힐 정도로 강한 팀'''이었다. 특급에이스였던 남우식은 한양대학교를 거쳐 실업야구 팀인 롯데 자이언트에 입단한 후 1980년에 은퇴했고, 동기들과 달리 프로에는 진출하지 않아 현 시점에서는 인지도가 떨어진다. 그래도 롯데그룹에 입사해 푸르밀의 대표이사직까지 승진했다.
남우식 등이 졸업한 후에는 황규봉과 이선희가 나왔다. 둘다 팀을 대표할만한 에이스 투수였지만 당시 황규봉이 주로 등판하고 이선희는 1루수로 나온 적이 많았다. 이들이 활동하던 시기는 임신근과 남우식의 시절과 달리 전국적으로 고교야구 붐이 일면서 선린상고나 군산상고 등의 팀이 떠올랐고, 어느 팀이라도 전국대회 우승을 확신하기 어렵던 시절이어서 경북고는 대통령배 우승과 청룡기 준우승에 그쳤다.
황규봉과 이선희의 시절이 지난 후에는 1975년 성낙수가 팀을 이끌었고, 청룡기와 봉황기 우승을 차지하면서 그 해 최고투수가 됐다.
2.3. 1980년대~1990년대 : 침체기
1981년 청룡기, 황금사자기, 봉황대기 등 3개 전국대회에서 우승한 후 경북고는 기나긴 침체에 시달렸다. 성준, 김성래, 김동재, 류중일[12] 등 뛰어난 선수는 많았지만 전국대회 우승과는 거리가 멀었다. 1980년대 이후 경북고가 예전만큼 성적을 못 내는 이유는 대구 지역 경제의 성장이 점점 침체되면서 대구 지역 선수층도 점점 얇아져 갔고, 또한 같은 지역내의 상원고와 대구고도 경북고 못지 않게 성장하면서 경북고가 예전만큼 막강한 전력을 꾸리기도 어려워졌기 때문이다.[13]
1993년 고교 2학년이던 이승엽이 투타에서 맹활약하는 가운데, 고교 3학년 강동우와 김수관의 활약이 더해지면서 1981년 이후 12년만에 청룡기에서 우승해 고교야구 팀 중 최초로 전국대회 20회 우승을 달성했다.
1997년 김일엽의 호투로 봉황대기에서 준우승했지만 또다시 몇 년간은 8강에 진출하는 데에서 만족해야 했다.
2.4. 2000년대 이후
2000년대 초반에는 대구권 3개 고교 중에서 약체였던 대구고가 우수한 중학교 선수들을 몽땅 스카웃[14] 해가면서 전국대회 우승까지 차지하는 동안 부진을 면치 못했다. 그나마 안방에서 펼쳐지는 대붕기에서는 좋은 성적을 기록했다.
2007년 봉황대기에서 박지훈의 호투로 4강에 올랐고, 2008년 봉황대기에서는 유격수 김상수 와 호투를 반복한 투수 이상민의 활약에 힘입어 준우승을 했다.
2012년 경북고등학교 야구장에서 열린 전국체전 야구 고등부에서 동메달을 차지했다. 4강전 당시 투수는 경북고 2학년 박세웅과 북일고 3학년 송주영, 윤형배의 대결이였는데, 8회까지 5대 4로 앞서있다가 9회 1점을 더 내주고 결국 경기는 승부치기까지 이어졌다. 경북고가 절호의 기회를 얻었었으나 좌익수의 호수비로 득점하지 못하고, 반면 북일고는 득점에 성공하여 동메달에 만족했어야 했다.
2015년 3월 부산에서 열린 전국 명문고 야구열전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다. 대구상원고에 13:11로 역전패를 당하여 아쉬움을 남겼다. 한편 이 대회에서 곽경문의 홈런쇼가 펼쳐져 많은 야구인과 팬들의 큰 관심을 받았다.
2015년 첫 메이져 대회인 봉황대기에서는 막강한 원투펀치인 최충연[15] - 박세진[16] 에 2학년 거포 곽경문[17] 에 1학년 내야수 배지환[18] 등의 활약이 더해지며 결승에서 장충고를 10:1로 크게 이기고 우승을 차지했다. 봉황대기 우승은 34년만이며 메이저 전국대회 우승은 22년만에 달성했다. 그리고 그 해 10월 제96회 전국체전에서 결승전까지 올라갔지만 용마고에게 8-3으로 패배하며 은메달에 만족해야 했다. 한편 박세진과 최충연 두 선수 모두 전국구 투수였기에 삼성은 누구를 1차지명할지 고민하다가 최충연을 지명하였고, 그 뒤 kt가 박세진을 1차지명했다.
2016년 약체라 평가받았지만 부산에서 열린 전국 명문고 야구열전 준우승의 성과를 냈다. 경남고에 6:2로 패배하여 이 대회 연속 2위를 차지했다. 또한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 4강이라는 성과를 냈다. 배재고, 전주고, 장충고를 꺾었지만 4강에서 동산고에게 7:4로 패배했다.
2017년에는 유격수 배지환의 활약으로 청룡기와 황금사자기에서 8강에 진출했으나 각각 배명고와 마산용마고에 무릎을 꿇었다.
2018년 황금사자기에는 원태인이 신일고와의 16강전에서 104구를 던지는 바람에 결승에 올라가도 더는 나오지 못하는 핸디캡을 안게 됐고 결국 8강전에서 접전 끝에 경기고에게 패했다.
2019년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장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4강에 올랐으나 전주고에 패했다. 2020년 같은 대회에서는 8강전에서 세광고에 패했다.
2020년 언론의 보도로 논란의 중심에 서고 있다.관련기사1관련기사2[19] 그러나 관련 기사를 쓴 사람이 배지헌이라는 점에서 정말로 순수한 의도에서 기사를 작성하는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3. 출신 선수[20]
[1] 인문계 고교의 이미지를 유지한다는 교내 방침 때문에 1959년 해체.[2] 4대 메이저 + 협회장기[3] 나무위키 등록 선수만... 졸업 연도 순.[4] 삼성 라이온즈 선수 시절 김한수는 서울 출신인데도 삼성의 나이 많은 팬분에게 '''"니는 경고 아가? 상고 아가?"'''라는 질문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5] 부산광역시의 경남고등학교도 경고라고 불리운다.[6] 4강에서 신생팀이던 대구상업에게 7-4로 패배[7] 9이닝 15탈삼진, 6사사구, 2실책, 0피안타, 0실점, 2:0 승리.[8] 9이닝, 15삼진 7사사구 2실책 0피안타 0실점. 4:0 승리.[9] 봉황대기가 창설되기 전이었다.[10] 훗날 단국대학교의 감독이 되어 오승환을 배출한다.[11] 이 해가 1회 대회였다. 준우승팀은 서울의 신생팀인 대광고로, 대광고에는 작은 체구 때문에 경북고 진학이 실패해 경북고에 앙심을 품었던 '''김재박'''이 있었다. 운명의 장난인지 결승전에서 김재박의 에러로 주자가 출루해 1대0으로 경북고가 우승했다.[12] 참고로 류중일은 1982년 7월 17일에 열린 잠실야구장 개장 기념 경기에서 부산고를 상대로 '''잠실 야구장 첫번째 홈런'''을 쏘아 올린 인물이다.[13] 그 외에도 지역 아마야구의 운영에서 침체의 원인을 찾기도 한다. 대구, 경북 지역 학교들은 유난히 선수들의 유급이 잦은 편으로 특히 중학교에서 유급하는 선수들의 비율이 높다. 중학교 팀들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지만 막상 이 선수들이 고등학교로 올라간 뒤에는 기량이 정체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14] 당시 대구고 유니폼을 입은 선수가 박석민이다. 박석민을 포함해 대구지역 중학교 3학년 유망주들에게 야구 장학금을 안기며 영입했고, 그 결실로 대구고는 2003년 대통령배에서 경주고를 꺾고 대회 첫 우승의 영광을 안았다.[15] 2016년 삼성 라이온즈 1차 지명[16] 2016년 kt wiz 전국단위 1차지명[17] 2017년 삼성라이온즈 2차8R지명[18] 2018년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계약, 구단 측 문제로 해지 후 피츠버그 파이어리츠 계약[19] 대구고는 손경호 감독이 2015년 가을에 취임했고, 상원고는 2020년 초 이종두 감독의 사임으로 공개경쟁을 통해 김승관 감독이 임명됐다.[20] 나무위키 등록 선수만... 졸업 연도 순.[21] 플레잉 코치였다.[22] 1986년 신고선수 입단.[23] 입단은 외야수로 했으나, 이후 투수로 전향.[24] 신생팀 혜택으로 연고 상관 없이 전국 지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