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중일

 

'''류중일의 틀'''
[ 펼치기 · 접기 ]




'''류중일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 펼치기 · 접기 ]

'''한국시리즈 우승 코치'''
'''2002'''
'''2005'''
'''2006'''

'''아시안게임 금메달(코치)'''
'''2010'''

'''한국시리즈 우승 감독'''
'''2011'''
'''2012'''
'''2013'''
'''2014'''

'''아시안게임 금메달(감독)'''
'''2014'''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1번'''
황규봉(1982~1986)

'''류중일(1987~1999)'''

강동우(2000~2005)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75번'''
최한경(1993~1995)

'''류중일(2000~2016)'''

조규제(2018~ )
'''LG 트윈스 등번호 75번'''
한혁수(2015~2017)

'''류중일(2018~2020)'''

조인성
(2021~)


'''류중일의 역임 직책'''
[ 펼치기 · 접기 ]











'''류중일
柳仲逸 | Joong-il Ryu'''
'''출생'''
1963년 5월 21일 (61세)
[image] 경상북도 영덕군 강구면[1]
'''국적'''
[image] 대한민국
'''신체'''
176cm, 80kg, A형
'''가족'''
배우자 배태연 / 아들 류호윤, 류승훈
'''학력'''
[image] 대구삼덕초등학교[2]
[image] 대구중학교[3]
[image] 경북고등학교
[image] 한양대학교[4]
'''병역'''
방위병(1990.12~1992.6)[5]
'''종교'''
불교[6]
'''포지션'''
유격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7년 1차 지명 (삼성)
'''소속팀'''
[image][image] '''삼성 라이온즈 (1987~1999)'''
'''지도자'''
[image] 삼성 라이온즈 1군 주루코치 (2000~2008)
[image] 삼성 라이온즈 2군 수비코치 (2009)
[image] 삼성 라이온즈 1군 수비코치 (2009~2010)
[image] '''삼성 라이온즈 감독 (2011~2016)'''
[image] LG 트윈스 감독 (2018~2020)
[image]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 (2013~2014)
[image] 경북고등학교 야구부 수비·주루 인스트럭터 (2021~)
'''프런트'''
[image] 삼성 라이온즈 기술 자문 (2017)
1. 개요
2. 선수 시절
2.1. 아마추어 시절
3. 프로 생활
3.1. 연도별 성적
5. 기타
5.1. 김도환 KBS 기자 관중일 발언 논란
5.2. 류중일의 저주?
6.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야구선수 출신 감독. 삼성 라이온즈LG 트윈스 감독 및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역임했었다.
삼성 라이온즈프랜차이즈 선수 출신이자 삼성의 1번 라인인 황규봉-류중일-강동우-윤성환 중 한 명. 또한 잠실야구장 1호 홈런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삼성 라이온즈에서 원 클럽맨으로 활동한 선수 출신 중 최초로 감독이 되었다.
프랜차이즈의 기준에 있어서 완벽한 인물이다. 경상북도 영덕군에서 태어나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삼성에서만 선수로 뛴 원 클럽맨이며, 은퇴 후 삼성에서 코치와 감독을 역임한 '''진정한 푸른 피의 사나이'''. 원 클럽맨으로서 출신지까지 연고지와 일치하는 것은 물론, 선수-코치-감독 어느 자리에서건 뛰어난 성적을 올렸으니 순혈 프랜차이즈 스타의 좋은 예시라 할 수 있다. 골품제 수준으로 순혈주의를 철저하게 지키는 일본요미우리 자이언츠이 정도의 순혈 감독은 가진 바가 없다. 다만 선수 시절 우승이 없는 것이 흠이다.[7] 2018년에 LG 트윈스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순수 프랜차이즈라는 타이틀은 희석되었다.

2. 선수 시절



2.1. 아마추어 시절



포항 중앙초등학교 2학년때부터 야구를 시작했으며 5학년때 야구부가 해체되자 대구초등학교로 전학하였으나, 5학년이 끝나고 대구초등학교 야구부마저 해체되자 삼덕초등학교로 다시 전학을 갔다. 참고로 초등학교 시절에는 강한 어깨를 살려서 포수를 봤었으나, 대구중학교로 진학하고 난 뒤에는 유격수로 전향하게 된다.
'''경북고''' '''시절'''
전국 무대에 이름을 알린 건 경북고등학교 시절부터이다. 특히, 박노준, 김건우라는 한국 야구 사상[8] 최고의 야구 아이돌 스타를 보유한 선린상고와의 청룡기, 봉황대기 두 대회에 걸친 처절한 결승 명승부에서 경북고의 1번타자를 맡은 2학년 유격수로서 우승에 공헌, 다음 해까지 이어진''' 3차 경북고 전성시대'''[9]를 이끌며, 1981년 봉황대기 미기상, 경북고 주장을 맡은 1982년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 감투상, 대붕기 전국고교야구대회 최우수선수상을 수상. 초고교급 유격수로 발돋음했다. 특히 1982년 7월 17일, 잠실 야구장에서 개장 기념으로 열린 부산고와의 경기에서는 상대 에이스 김종석을 상대로 '''잠실 야구장 개장 1호 홈런'''을 기록했다. 기사참조 이래저래 본인 스스로도 상당히 자랑스러워하는 기록인데 2020년 맷 윌리엄스 KIA 타이거즈 감독과 선물 교환을 할 때 "내가 잠실 1호 홈런 주인공이다"라고 자랑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김재박을 존경했다고 한다. 사실 한국 프로야구 유격수 중에서 누가 김재박을 존경하지 않겠냐마는. 이종범 유지현 박진만 등을 존경하는 후배 유격수들이 있을 수 있긴 하나, 어차피 이종범 유지현 박진만이 존경하는 유격수는 김재박인 만큼 별 차이는 없을듯.
경북고 졸업후 한양대[10][11][12]로 진학해 국가대표 붙박이 유격수로 활약. 1985년도와 1986년도에 대학 올스타 유격수로 뽑혔다.

3. 프로 생활


[image]
프로에 뛰어든 그는 1987년 삼성 라이온즈에서 입단 첫 해부터 오대석을 제치고 주전 유격수 자리를 꿰찼으며 11타수 연속 안타라는 진기록을 작성했으며, 1987년과 1991년 두 차례 골든글러브 시상식에서 김재박을 제치고 유격수 부문 수상자 자리를 차지했다.[13]
하지만, 1988년에는 팔꿈치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했고 이 과정에서 전년도에 김용국과 3루를 번갈아 맡았던 오대석이 유격수로 포지션을 옮겨야 했으나 결국 시즌 후 롯데로 이적했다.
1989년부터는 2루수강기웅과 콤비를 이뤘다. 이 키스톤 콤비는 김은식이 한국 프로야구 최고의 키스톤 콤비로 꼽은 바 있다. 강기웅과 류중일이 한국 프로야구 최고의 2루수와 유격수는 아니었지만, 키스톤 콤비만큼은 최고였다는 평[14].
선수 시절에는 한국시리즈 우승과 인연이 없었다. 1987년 준우승, 1990년 준우승, 1993년 준우승. 게다가, 1993년 이후로 삼성은 1996년까지 3년 간 포스트시즌에 올라가지 못했으며 1997년 부터 은퇴 전 마지막 시즌이었던 1999년까지 한국시리즈에 진출하지 못하였다. 코치로 전향한 뒤로 다시 한 번 준우승을 경험했으나(2001년), 드디어 자신의 소속 팀에서 우승을 거머쥐었다.(2002년, 2005년, 2006년)[15]
은퇴할 때까지 삼성에서만 활약한 원클럽맨이며, 2000년 역대 현역 선수 중 처음으로 은퇴식을 치렀다. 삼성 구단 최초의 은퇴식이었다. 이후 김현욱, 김한수, 전병호, 김재걸, 양준혁, 이승엽 으로 이어지게 된다.
7번을 달던 팀 선배 김용국태평양 돌핀스트레이드되고 나서도 1번을 계속 달 정도로 1번에 대한 애착이 강하기도 했다. 이 때문인지 경북고등학교 시절에도 등번호가 1번인 줄 아는 사람이 많으나, 경북고 시절에는 16번을 달았었다.
장타력이 약했던 선수라는 인식과 다르게 선동렬에게 2번의 홈런을 친 전설의 4인[16] 중 한명이며, 그 중 만루홈런[17]도 있었다. 또한 위의 잠실 1호 홈런과 더불어 포스트시즌 4경기 연속 홈런이라는 기록도 가지고 있다.
기동력과는 거리가 먼 사자군단의 1번 리드오프를 맡았는데, 나름 제 몫을 해주고 주루센스도 좋긴 했지만 통산 도루에서 보다시피 전형적인 테이블세터와는 약간 거리가 있었다. 그도 그럴게 거포가 즐비한 삼성 선수단 중 그나마 발빠른 선수가 류중일이였기 때문이다.[18] 후에 비슷한 처지였던 박한이처럼 무리한 1번 타순 고정으로 스탯이 많이 깎였다고 보는 측도 있다. 아닌게 아니라, 박해민,김상수 등장 이전까지 삼성의 통산도루 1순위는 다름아닌 양준혁이며 국내 선수 중 시즌 도루 1위는 주전이라기에는 살짝 부족했던 김재걸이며 외국인까지 영역을 넓혀도 빌리 홀밖에 없다.
선수 시절에는 등번호 1번을 달았으며(1987~1999) 현역 시절의 별명은 '천재 유격수', '그라운드의 살구꽃', '수비의 달인', '어벙이' 등이 있었다.
선수보다는 감독으로 유명해진 오늘날에는 수비로는 탁월하지만 공격에서 약한 선수였다는 인식이 있는데, 적어도 류중일은 공격에서 김상수와 비교될 선수는 아니었다. 본격적으로 강기웅과 키스톤을 이룬 1990년에는 sWAR 5.44로 리그 전체 타자 중 4위를 기록하기도 했을 만큼의 실력자다.[19] 1993년에도 sWAR 4.46, wRC+ 134.8을 기록하며 역대급 타선에 힘을 보탰으며, 골든글러브를 받은 1987년과 1991년에도 sWAR 3.1을 넘기며 활약했다. 김상수의 타격 커리어하이인 2011년 타격 sWAR이 경기 수가 늘어났음에도 3.32에 불과하다는 걸 생각하면 엄청난 저평가. 다만 이런 인식이 생긴건 90년대가 투고타저 성향이 강했기 때문에 단순 스탯만 보면 OPS가 7할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wRC+로 따지면 얘기가 달라진다. 다만 선수 말년에는 부상에 자주 시달렸고, 그래서 비율스탯에서 다소 밀리게 되었다.
선수로서의 마지막 경기는 1999년 플레이오프 7차전으로, 경기는 삼성쪽으로 기울고로 유명한 그 경기이다. 다만 출전은 하지 못하였다.

3.1. 연도별 성적


역대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87
삼성
104
352
.287
101
17
2
2
28
'''57'''
(5위)
8
42
.364
.362
1988
47
116
.302
35
3
2
0
11
18
5
11
.362
.354
1989
113
329
.246
81
15
3
5
38
39
14
33
.356
.311
1990
120
425
'''.311'''
(5위)
'''132'''
(3위)
'''22'''
(4위)
5
6
45
'''70'''
(5위)
'''23'''
(4위)
60
.428
.394
1991
90
344
.285
98
14
4
5
45
59
19
38
.392
.352
1992
104
294
.211
62
12
1
5
27
43
8
38
.310
.300
1993
107
377
.281
106
13
1
8
45
58
6
60
.385
'''.378'''
(5위)
1994
36
131
.328
43
8
3
4
22
22
5
18
.527
.404
1995
64
155
.226
35
11
1
0
10
11
2
11
.310
.277
1996
111
355
.245
87
13
2
2
35
37
13
44
.310
.327
1997
79
215
.242
52
13
0
8
34
34
1
25
.414
.321
1998
64
140
.200
28
8
0
0
13
14
4
14
.257
.271
1999
56
60
.233
14
1
0
0
6
13
1
7
.250
.313
<color=#373a3c> '''KBO 통산'''
(13시즌)
<color=#373a3c> 1095
<color=#373a3c> 3293
<color=#373a3c> .265
<color=#373a3c> 874
<color=#373a3c> 150
<color=#373a3c> 24
<color=#373a3c> 45
<color=#373a3c> 359
<color=#373a3c> 475
<color=#373a3c> 109
<color=#373a3c> 401
<color=#373a3c> .367
<color=#373a3c> .343

4. 지도자 시절




5. 기타


  • 삼성에서만 선수로 13년 감독 포함 코칭스탭으로 14년을 재직한 진정한 의미의 삼성맨.[20] 그러나 류중일의 현역 마지막 경기는 1999년 플레이오프 7차전였다.
  • 별명은 그라운드의 살구꽃. 류중일 본인의 인터뷰에 따르면 얼굴에 여드름이 많아서 멍게라 불렸는데, 이미 선동열 전 감독이 그 별명을 갖고 있었는지라 그와 비슷한 살구꽃이라는 별명이 붙었다고...한 마디로 피부 때문에 생긴 별명이다. 이 덕에 나중에 중년이 되어서는 살구아재로 바뀌었다.[21]
  • 다시 태어나면 야구가 아닌 골프 선수를 할 것이라고 말하는 골프 매니아로 야구계 골프 최고수로 알려져 있다. 1991년 선수 시절 골프를 처음 접했는데 골프와 야구 스윙이 달라 골프가 타자에게 독이 될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골프에 푹 빠졌다고 한다. 2002년에는 야구인 골프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 팬 서비스가 좋은 편으로 삼성 때부터 좋았는데 문제는 요청하는 사람이...[22]
  • 한대화 감독이 야왕이란 별명을 얻자 1위 하면 야통이라 불러달라고 하였다. 그리고 2011년 6월 28일 LG 트윈스와의 경기에서 4:3으로 역전승하고 같은 날 0.5게임차 앞서 있던 SK한화에 1:5로 패하면서 순위가 바뀌어, 삼성 1위 등극과 함께 야통 등극. 2016년 7월 꼴찌로 떨어진 순간 꼴통이라는 복합 의미의 별명이 잠깐 붙었다.
  • 2013 시즌에 당시 2위였던 LG 트윈스1위, 3위, 4위와 3연전을 앞두고 있을 때 이를 삼국지의 유비, 관우, 장비에 빗댄 도원결의 짤이 돌면서 1위였던 삼성이 유비 포지션을 맡았고, 이 때 류비라는 새로운 별명을 얻었다.
  • 2011년 7월 15일 기아와의 경기에서 윤석민에게 타선이 압도당하자 이를 흔들기 위해 김평호 코치와 함께 마운드에 난입하였다.
  • 불암콩콩코믹스에서는 가쿠란을 입은 교복 캐릭터로 나온다. 이름이 중일(中1)인데서 착안한 듯 하다. 류중일과 무관한 에피소드에서는 관중석이 나오는 장면에 지나가는 관중1로 나오거나 관중석에서 떠드는 사람이 류중일 마킹이 된 옷을 입을때도 있다.
  • 2012년 초에는 시즌 전 터진 2012년 프로야구 승부조작 사건에 대해 가벼이 여기는 것 같은 발언을 하여 논란이 있었고,[23] 시즌 초에는 야통, 류승사자 등 그런 거 없고 돌중일, 관중일, 류정일[24]로 진득하게 씹히기도 했으나 다행히 여름에 1위로 복귀하는 데 성공하여서 악질 까들의 입을 잠잠하게 했다. 재미있는 점은 2012년 시즌 초반에 삼성이 한참 삽을 풀 때도 "선동열 감독님을 자르고 류중일을 앉힌게 화근이다"라는 의견은 삼성 팬덤에서 매우 드물었다는 점. 왜냐하면 류감독이 6위에서 삽을 푸던 무렵 선감독도 7위에서 사이좋게 삽을 펐었기 때문.
  • 삼양사의 '니코스탑' 금연보조제 가상광고[25]에 대해 사전 동의 없이 광고를 내보냈다며 항의했다. 기사
  • 이만수에게 본의아니게 수모를 당했다. 이만수는 '초보감독이 첫해에 한국시리즈에 간 적이 있는가? 선수들은 나만 믿고 따라왔으면 한다.' 라고 말했는데, 이는 2011년 처음 감독으로 부임해 정규시즌 우승과 한국시리즈 우승을 한 류중일을 까맣게 망각하고 한 이야기다. 다만 이만수 감독과 류중일 감독은 사적으로도 매우 친하며 감독시절에도 갈등을 겪은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저 인터뷰는 류중일 감독 디스라기 보다는 전임감독이 초토화 시키고 나간 팀을 재정비하여 2년 연속으로 한국시리즈 진출 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임기내내 욕만 먹으며 입지가 불안했던 처지에 대한 이만수 감독의 나름대로의 반발이라고 생각하면 될듯.
  • 감독으로써는 표정이 상당히 다채로운 편이며, 삼성과 관련있는 경기에서 자주 기습적으로 엠팍이나 야갤에 다양한 얼굴 표정이 짤방으로 올라오는 편이다.
  • 화를 잘 내지 않는 온화한 성격에 덕장으로 유명하지만 야구계에 몸담으면서 딱 3명에게 손찌검을 한적이 있다고 한다. 이 3명은 바로 노장진, 김진웅, 양용모.[26]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노장진은 덕아웃에 들어와 김응용 감독이 보는 앞에서 글러브를 집어던지고 쓰레기통을 걷어차는 난동을 부렸으며, 김진웅은 프로 3년차였던 2000년 초 친구랑 놀러간다는 이유로 선수단 소집을 무시했다가 당시 초임 코치였던 류중일에게 걸려 엄청나게 맞았다고 한다. 양용모는 스프링캠프 도중 숙소를 이탈해 새벽 4시까지 술먹고 오다가 당시 백인천 감독에게 딱 걸렸고, 이에 화가 난 백인천에게 자신이 고참으로써 후배 교육을 잘못 시켰으니 자신의 잘못이라고 한 뒤 류중일 본인이 직접 매를 들었다고 한다.[27] 그리고 저 중 노장진과 김진웅은 결과적으로 자기관리 실패로 강제 은퇴를 하게 된다.[28]
  • 평소 선수를 칭찬하기로 유명하지만 윤성환이 라디오 볼에서 인터뷰를 하던 도중 류중일 감독이 맨날 구속이 느리다고 구박하고 김태한오치아이 에이지 전 투수코치가 윤성환을 달래는 일이 종종 있었다고.
  • 위에서 이어서 꽤나 독설가이다. 2015년 시즌 부진한 장원삼에게 돈내놔라 먹튀야라고 하던가, 2013년 시즌 부진한 이승엽에게 공 안 보이면 은퇴하라고 하던가, 나성범 불러놓고 나성용과 비교하는 걸보면 엄할때는 엄한듯. 물론 위 믿음의 야구를 통해 볼때 다 애정이 있어서 그런 것이지 애초에 관심도 없으면 1군 올리지도 않는다. 대표적으로 2012년에 최악의 부진을 겪은 채태인의 연봉 협상 때 채태인의 연봉을 대폭 깎았으나 감독이 구단에 사정하여 옵션을 걸게 한다. 그리고 채태인의 2013년도 성적은...
  • 선수시절에는 삼성 시절 김성근 감독과 마찰이 있던 선수 중 한 명이다. 나머지는 이만수, 김성래, 강기웅 등이 있다.[29] 네이버 라디오볼에서 9개 구단 중 사람 좋기로 유명한 모 감독이 김성근 감독에 대해서 정색하면서 싫어하는 모습을 보여서 놀랐다고 하는 언급이 있었는데, 엠팍에서는 이 인물을 류중일 아니면 김시진으로 보는 이유도 여기 있다. 딱히 김시진과 김성근의 접점이 거의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류중일일 확률이 더 높은 편.[30]
  • 선수들과 내기를 많이한다. 감독 부임 이후, 삼성의 주요선수들과 개인성적을 걸고 내기를 하는데. 국내선수들과는 주로 돈으로하고 외국인선수들은 가방(배우자의)이나 지갑을 걸고 내기를 한다. 2012 시즌 목표를 달성한 탈보트와 조금 못미친 고든에게 2013 시즌 스프링캠프 때 루이비통여성용 가방을 사서 보냈다고 한다. 참고로 2012 시즌 여러 선수들과 내기에 건 금액이 3000만원이다.(...) 그 후, 2015 시즌을 앞두고 헐크나바로에게 작년 시즌 성적에 대한 내기로 선물을 주었다. 물론 2015 시즌에도 나바로피가로, 클로이드와도 내기를 했다.
  • 유독 성적에 비해서 인정을 못 받는 감독이다. 4년 연속 통합우승과 5년 연속 정규리그 우승에 2011 아시아 시리즈에서까지 우승을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팀빨 감독으로 매도당하여 매년마다 시험대에 오르는 감독이다. [31] 2016년이야말로 그동안의 성적이 팀빨, 선수빨이 아니었다는걸 입증할 절호의 기회[32]였는데 역대급 부상악령으로 팀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지경에 이르며 입증에 실패했고, 재계약 불발되며 입증할 기회도 사라졌다고 할 수 있다.
  • 2011년 재임 이래 KBO에서 수 많은 감독들이 잘리는 와중에 혼자만 제 자리를 지킨 덕에 류시퍼[33]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 2011년 우승 후에는 한 기자의 제안 덕에 야구 대통령의 줄임말 '야통'으로 불렸으나 그리 오래 가진 못했고, 이후로는 긍정적인 별명으로 ‘삼성밖에 모르는 야구광팬’, ‘살구아재’, ‘발전없는 감독’[34], 장수생, N수생[35]등으로 불리며 부정적인 별명으로는 '돌중일', '관중일', 쳐중일 ,류네바야시 중일콘 등으로 불린다.[36] 그 외에는 염갈량을 상대로 우승을 거둔 적이 있어서 사마중일이라는 별명도 있다. 하지만 사마의 포지션은 다음 우승 감독에게 넘어간 상황.
  • 이승엽에겐 그야말로 은인인데 선동열이승엽 와도 자리없다라고 말하며 이승엽의 복귀에 대해 부정적인 자세를 취한것이 비해 류중일은 감독이 된 다음 스프링캠프 자리에서 승엽아 삼성으로 올래? 라고 말했으며 이승엽은 그 한 마디로 삼성 복귀에 대한 희망을 다시 얻었다고 한다. 이승엽은 복귀 후 자신을 믿어준 류중일 감독의 믿음에 보답하며 삼성의 3년연속 우승에 큰 보탬이 되었다.
  • 선수 시절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외모가 크게 역변하지 않은 케이스로, 미청년 - 미중년 - 미노년의 계보를 착실히 밟고 있는 몇 안되는 야구인 중 하나다. 실제로 선수 시절에 미남 선수라는 이미지가 상당했었다. 또 현재 삼성 라이온즈에서 뛰고 있는 김상수와 얼굴이 은근히 닮은 편이다.
  • 중년배우 이계인과도 꽤 높은 싱크로율을 자랑한다.
  • 아내는 대구 달서구에서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 이긴 경기에서 퇴근할때 주먹으로 인사를 받는데 그날의 자신이 생각한 수훈선수에게는 등을 두드려준다. 이른바 투터치 세레머니
  • 흡연자이다. 인천 아시안게임 때도 결승 도중 담배 한 대 태웠다고 하기도. 긴장했을 때 담배를 핀거같다.
  • 수원시장 염태영과 상당히 닮았다.
  • 슬하에 아들 2명(호윤, 승훈)을 두고 있는데, 대를 이어 아들도 야구를 시키려고 했다. 특히 장남의 경우에는 태명을 유격수[37]로 지었고, 바로 야구를 시키는 게 아니라 풋워크를 중시하는 만큼 초등학교 때는 쇼트트랙을 시켜서 하체 강화를 하고 중학교 때부터 야구를 가르치려는 장기적인 계획도 짰다. 쇼트트랙 선수 제의까지 받을 정도로 운동에 재능을 보였지만 야구선수를 시킬 계획 때문에 거절했는데, 본격적으로 야구를 가르칠 때가 와서 직접 타격이나 수비하는 걸 선보였지만, 장남은 야구에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아서 그날로 포기했다고 한다. 장남은 이후 학업에 매진하면서 미국 유학을 떠났는데, 막상 유학 중에 클럽 활동으로 야구에 빠졌다고. 차남은 운동선수로서 소질이 보이지 않아 일찌감치 포기했다고 한다. [38]
  • 2020 신인들이 잠실을 방문했을 때 신인선수들에게 열심히 몸을 만들어라고 덕담을 하다 난데없이 손바닥 검사를 하며 이주형과 손호영의 손이 깨끗한걸 보고 "이게 운동선수 손이가 이게~ 니 피챠가 그래가꼬 무슨 방망이 돌린다 말이고~ 다음에 볼 때 둘이 손 본다" 하면서 장난스럽게 갈구는 장면이 엘튜브에 찍혔다. # 그 와중에 자신도 모르게 문앞에서 길막하는 장면과 최일언 코치가 혼자 검니폼 입은 모습이 소소한 웃음을 주었다. 2021 신인 중 이영빈을 상대로도 손검사를 했는데 합격했다.
  • 그날 경기에서 승리했을때 경기 후 인터뷰에서 그날 경기의 요약을 잘하는 감독으로 유명하다. 삼성 시절에는 별로 빛을 못봤다고 엘지 시절부터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때문에 엘지팬들은 하이라이트 안봐도 류중일의 요약만으로 그날 경기 다봤다고 할 정도...
  • 묘하게 김재박과 닮은 점이 많다. 둘 다 현역 시절 포지션이 유격수였고 유격수부문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는 것, 은퇴 후 처음으로 감독을 맡은 팀에서 각각 4번의 한국시리즈 우승컵(김재박 98, 00, 03~04, 류중일 11~14)을 들어올린 것, 한국시리즈 우승 감독임에도 일부에서는 선수빨이라고 절하받기도 했고, 국제대회에서 대표팀 감독을 맡았으나 각각 흑역사를(김재박 - 삿포로, 도하참사, 류중일 - 타이중 참사) 남긴 것, 그리고 둘 다 두번째로 감독직을 역임한 팀이 LG 트윈스라는 것도 비슷하다.
  • 2020 시즌 KBO에 처음 온 맷 윌리엄스 감독에게 KBO에선 감독끼리 경기 전 인사를 나눈다고 했는데, 이 말을 들은 윌리엄스가 감독들에게 직접 와인을 선물하며 다른 감독들이 또 선물을 주는 이벤트를 시작하게 된다. 둘은 젊은 시절 경기를 같이 뛴 적이 있으며, 그래서인지 류중일 감독이 옛날을 추억하며 윌리엄스를 유독 반갑게 대하는 편이다.

5.1. 김도환 KBS 기자 관중일 발언 논란


논란이 된 방송영상
2015년 8월 27일 아이 러브 베이스볼 방송 당시 김도환 기자가 뜬금없이 방송에서 '''관중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일이 벌어졌다. 분명 이승엽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고 앞뒤 맥락을 고려해도 관중일이라는 별명이 나와야할 이유가 전혀없던 상황에서 이런 관중일이라는 별명을 언급했으며, 이 후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변명이랍시고 "다른 기자들도 관중일이라 부른다"는 소리로 스스로를 포장까지 했다.
당연히 삼성팬덤은 이날 폭발했다. 삼갤엠팍은 물론이고 '''심지어 삼성 라이온즈 공식 홈페이지(삼피)[39]사자 사랑방까지 분노에 가득찬 글들이 올라왔을 정도'''[40]
이 후 변명이랍시고 한 다른 기자들도 관중이라 부른다는 발언에 대해 김은식작가와 손찬익 기자가 다음과 같은 트윗으로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서 여론은 점점 악화되는 중. 김은식 작가의 트윗/손찬익 기자의 트윗
하지만 이후에도 별다른 사과가 없어서 삼성팬들의 분노는 계속 되는 가운데 이번에는 백종인 칼럼니스트가 야구는 구라다라는 칼럼에서 시작부터 관중일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역시 비난받고 칼럼을 수정하는 일도 있었다. 이에 대해 네티즌들의 반응은 백종인 기자는 원래부터 인터넷에 떠도는 별명들을 칼럼에 갖다 썼다며 언론에서도 잘 언급되지 않는 야통(야구대통령)이라는 별명을 썼다는 점을 들어 비하할 의도 없이 해당칼럼을 올렸을 것이라는 의견과 어설프게 후배기자를 감싸려고 굳이 화를 자초했다는 의견으로 나뉘었다.

5.2. 류중일의 저주?


2011시즌 한화전 9승 10패
한대화 감독: 2012시즌 도중 '''경질'''
2012시즌 두산전 7승 12패
김진욱 감독: 2013시즌 준우승 후 '''경질'''
2013시즌 LG전 7승 9패
김기태 감독: 2014시즌 도중 '''야반도주'''
2014시즌 두산전 6승 10패
송일수 감독: 2014시즌 후 '''경질'''
2015시즌 한화전 6승 10패
김성근 감독: 3년 계약의 마지막인 '''2017 시즌 도중 경질.'''
2016시즌 롯데전 5승 11패
조원우 감독: 2016시즌에서 '느그가 프로가'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당해 NC와의 상대전적이 무려 1승 15패. 그리고 2018시즌 후 '''경질'''
2018시즌 두산전 '''1승 15패(...)'''
김태형 감독: 일단 SK에게 우승을 내주면서 14.5게임차 뒤집기의 불명예 기록
2019시즌 SK전 6승 10패
염경엽 감독: 정규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1위를 놓치는 것도 모자라 플레이오프에서 3위팀 키움 히어로즈에게 피스윕 기록. 2020 시즌 중 건강 문제로 인해 감독대행 체제로 전환 시즌 후 '''사퇴'''
2020시즌 키움전 6승 10패
손혁 감독: 2020 시즌 중 경질에 가까운 사퇴
출처
매 시즌 류중일과의 경기에서 '''가장 크게 우세를 거둔 팀'''의 감독은, 다음 해를 무사히 마치지 못했다. 한대화 감독은 2012시즌 도중, 김진욱 감독은 2013시즌 후 경질되었다. 김기태 감독은 2014시즌 초반 최악의 성적을 거두다가 사퇴하는 사상 초유의 행동까지 벌였다. 송일수 감독은 2014년에 우세 시즌을 보내고 바로 경질되었다. 2015년에 삼성전에서 가장 우세를 거둔 한화의 김성근 감독도 '''2016년 최악의 부진'''을 겪으며 그동안의 명성에 먹칠을 했고, 결국 2017년 경질되었다. 그리고 김성근 감독과 마찬가지로 조원우 감독도 2년 뒤에 경질되었다. 이렇게 우세를 가져가면 2년 안에 감독직에서 잘린다는 류중일의 저주는 너무나도 절묘해서 팬들 사이에서 이야깃거리가 되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면 2013시즌에 삼성에게 상대전적 우위였던(7승 1무 8패) 넥센의 염경엽 감독은 2016년까지 건재했다. 비록 넥센이 2013시즌에만 삼성에게 우위였으나, 2014, 2015시즌에 열세였다고 해도 염경엽 감독이 그대로 있는 것을 보면 억지에 불과. 저 드립이 흥할려면 염경엽 감독도 몇 년 전엔 옷 벗었어야 했다. 그래도 제일 크게 우위를 가진 팀이 아닌 건 맞으니...
2015년 삼성을 꺾고 우승한 두산의 김태형 감독도 이 범주에 포함될지 모른다는 의견도 있다. 시즌 전적은 5승 11패로 삼성에게 크게 밀렸지만, 한국시리즈를 앞두고 크나큰 재앙을 만나 분위기가 개판이 된 삼성을 상대로 4승 1패로 크게 일축시키고 우승했다. 더구나 두산은 OB시절부터 한국시리즈 우승 다음해에는 항상 크게 망하는 징크스를 갖고 있기 때문에(...), 과연 두산의 행보, 그리고 김태형 감독의 행보가 어떨지는 2016시즌때 판가름이 날 것이다. 다만, 위의 것은 시즌 전적 기준이라 PS는 표본이 없어서 두산은 무난하게 갈 것으로 보이고, 실제로 그렇게 되는 중이'''었'''다.
그러나 류중일이 LG 감독으로 취임하고 두산전 1승 15패를 찍으면서 다시 저주가 나타날지의 관심도 생겼다. 그리고 이 저주는 LG를 1승 15패로 압살했던 두산 베어스가 한국시리즈에서 SK에게 지면서 다시 적용되었다. 하지만 LG팬들에게는 큰 상처를 입었다.
이후 19시즌 SK, 20시즌 키움에게도 저주가 적용되면서 두 시즌 연속으로 같은 팀의 감독이 우세를 가져가면 저주의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예외 조항이 생겼다.
두산이라는 예외 덕에, 삼성 상대로 우세를 보였던 팀들이 시즌 전 약팀으로 평가 받았던 팀인지라 체력 안배를 위해 무리를 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며, 상기된 팀들은 2013년 두산을 제외하고는[41] 팀 전력 상 다음 시즌을 장담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그런 것일 뿐이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그리고 위의 팀들은 (두산 빼고) 그 시즌에 하나같이 돌풍의 팀이었다는 것이 있다. 실제로 2011년의 한화는 뭐 말할 것도 없고, 2012년의 두산도 2011년의 내홍 및 불펜진의 과부하가 표면화 되면서 약체 평가를 들었고, 2013년의 LG는 여름 되기 전까지는 기대도 안한 상황 이었으며, 2014년 두산의 경우 팀 분위기가 너무 뒤숭숭했다. 2015년 한화의 경우는 선수 투자를 많이 했지만 객관적인 전력 상으로는 역시 약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게다가 상기된 팀들은 두산을 제외하고는 기반이 부실했으니 다음 시즌에 부진해도 이상할 게 없기도 하고 말이다. [42] 그러나 이 반론은 LG 감독 시절의 19 SK, 20 키움에게도 적용되며 조금은 유명무실해졌다. 게다가 이 두 팀은 당해 시즌 전 강팀으로 평가받았다.

6. 관련 문서


[1] 한때 포항시 출신으로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경북 영덕군 출신. 영덕에서 태어나 포항에서 야구를 시작해 대구에서 성장하였다.[2] 단 야구를 시작한 곳은 포항 중앙초등학교이다. 자세한 사항은 아래 아마추어 시절 참조.[3] 1년 유급[4] 체육학과 (1983학번)[5] 1991년 11월 한일 슈퍼게임 때 방위병 신분으로 참가.[6] 류중일과 다르게 아내는 개신교 신자이며, 대구 우리교회 집사라고 한다.[7] 류중일이 최초로 우승 반지를 껴 본 것은 코치 시절이던 2002년 한국시리즈 때다.[8] '''프로야구 사상이 아니다, 전체 한국 야구 사상이다!''' 이 시절 박노준은 정말로 '''여고생을 몰고 다니는 아이돌'''이었다. 봉황대기 결승전 다음날 박노준이 입원한 병원에 당시 서울 시내 여고생들이 병원 앞에서 진을 치고 울먹이더라는 얘기는 아직도 고참 스포츠 기자들 사이에 회자되는 유명한 에피소드이다.[9] 1차 전성기는 남우식, 임신근이 이끈 1970년대 초반, 2차 전성기는 황규봉, 이선희의 1970년대 중반. 그리고 이 때를 마지막으로 경북고 야구부는 기나긴 침체기에 접어들게 된다. 1981년 이후 경북고의 메이저 전국대회 우승은 '''이승엽'''이 2학년이었던 1993년 청룡기 우승, 최충연-박세진이 이끈 2015년 봉황대기 우승 단 2회이다. 그럼에도 전국대회 통산 우승 회수는 여전히 1위이다.[10] 삼성 라이온즈의 레전드들 중 대졸 출신은 한양대학교 출신이 많다. 장효조, 이만수, 김시진, 류중일, 성준 등. 이승엽도 한양대 진학이 예정되어 있었다는 일화가 있다.[11] 사실 2010년대 프로야구 감독들은 고려대-OB 테크를 탔거나 그 둘 중 한 발짝이라도 걸친 경우가 대부분이며, 거기 속하지 않는 사람들은 죄다 한양대-삼성 테크를 탔다.[12] 경북고 유격수로서 이미 스타 반열로 올라온 류중일에게 대학교의 러브콜이 쏟아진 것은 당연한 일로서, 본인은 연세대에는 이순철(참고로 이순철은 대학교 및 프로 1년차까지만 하더라도 내야수였다)이, 고려대에는 민경삼(여러분이 생각하시는 그 SK 와이번스 단장 민경삼이 맞다)이 있어서 한양대로 진학했다고 한다 기사참조[13] 결국 오대석은 1987년 김용국과 함께 3루를 번갈아 맡았는데 이 같은 취약점을 극복하지 못한 채 삼성은 1987년 한국시리즈 준우승에 머물렀다[14] 1994년에는 목디스크로 시즌아웃 당했고 다음 해 스프링캠프 때 또다시 목디스크가 재발하여 그 해에는 신인 김재걸한테 주전자리를 빼앗겼다[15] 만약 그가 선수시절에도 우승을 했다면 삼성에서 선수,코치 그리고 감독으로 모두 우승을 이룰수 있었다.[16] 나머지 3명은 박승호, 전대영, 김동기. 선동열은 선수생활동안 28홈런 밖에 맞지 않았으며, 한명에게 3번의 홈런을 허용한 적이 없다. [17] 이를 기록한 사람도 3명뿐이다. 나머지 두명은 유승안, 김동기.[18] 류중일보다 더 빠르고 통산도루에서도 조금 앞서는 강기웅이 있었지만 강기웅은 주로 클린업 트리오를 맡았다.[19] 그런데 정작 이 시즌에는 골든글러브를 받지 못했고, 다음 시즌에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90년 골든글러브 수상자는 홈런왕('''유격수 최초''')-타점왕을 차지한 장종훈.[20] 류중일보다 한 팀에서 더 오래 뛴 선수/코치로는 같은 팀의 장태수 2군 감독이 있다. 이 쪽은 연수기간 1년을 제외하면 원년부터 2015년 현재까지 계속 삼성 소속이다. 장태수는 류중일보다 명백하게 4년, 구단에서 보내준 연수기간까지 합치면 5년을 더 오래 삼성에 소속되어 있으며 원년부터 현재까지기 때문에 더 찾아볼 것 없이 한 팀에서 재직 최장기록이라 할 수 있다.[21] 이 문서는 살구아재로도 통한다.[22] 그나마 삼성 감독때는 프랜차이즈 출신이라는 프리미엄 덕에 젊은 층들도 많이 알고 있었으나 LG 감독이 된 후에는... [23] 기사는 다음과 같다.[24] 최형우라늄, 차르봄바, 채르노빌 등과 함께 핵실험을 한다는 이유로[25] 감독이 난처한 상황에 처했을 때 나타나는 '한 대 피우고 싶으시죠?' 카피다. 잠실야구장 3루측 흡연구역에도 니코스탑 광고가 있다.[26] 특히 노장진은 이 부문에 있어서는 그 정수근이 양반으로 보일 정도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개막장이었다. 자세한건 해당 문서 참고.[27] 출처는 마해영과의 인터뷰.[28] 노장진은 잦은 항명을 일으키다 모든 구단에 찍혀서 더 이상 현역 생활을 이어 갈 수 없었으며, 김진웅은 공익근무 동안 체중 관리를 전혀하지 않아 살이 엄청나게 쪘고 이로 인해 무릎에도 문제가 생기며 아예 몸을 만드는 것조차 불가능한 상황이 되며 결국 1군에 한번도 못올라오고 30세에 은퇴하고 만다.[29] 이만수, 김성래는 상당히 김성근에게 홀대받은 선수였으며, 강기웅, 류중일은 삼성 수비 시스템 수정에 대한 김성근과의 마찰이 컸다. 결론적으로는 삼성의 수비 스타일의 확립에는 류중일의 방식이 맞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전 버전에는 김태한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김태한은 당시 1군에 갓 들어온 신인이라 김성근 감독에게 덤비는데 앞장설 여건이 되지 못하였다. 다른 모 좌완투수를 착각한 것으로 보인다.[30] 감독 취임 당시 감독으로써의 지향점이 당시 1위 팀 감독이던 김성근이 아니라 전년도에 치열하게 플레이오프를 치렀던 김경문이었던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31] 다시 한번 상기시키는 것이지만, 매년 전력이 상승한 상태에서 연속 우승을 한 것이 아닌, 매년 전력이 하락한 상태에서 연속 우승을 한 것이다. 이 쯤되면 설사 실패했더라도 시험대라는 말은 더 이상 하지는 말아야 할 수준이다. 더군다나 삼성은 예전 80년대부터 90년대 초반까지 그 좋은 선수층을 가지고도 우승문턱에서 매번 좌절했었다. [32] 2016 시즌 넥센의 전력과 현재 성적, 그리고 이로 인해 염경엽감독이 받고 있는 긍정적 평가를 보면 알 수 있다.[33] 2011년 개막 때 감독들 중 팀이 바뀌지 않은 채 2016년까지 재직 중인 사람이 류중일 밖에 없었다. 김성근김경문도 지금까지 감독직이긴 하지만 이들은 중간에 새 팀으로 이직해야 했다. 2011~15 감독으로 있던 5년간 13명의 감독이 재계약 포기 내지는 사퇴했는데 류중일만 제 자리를 지키는 유일한 감독이였다. [34] 늘 그랬듯 발전 없이 1등만 하는 감독이라는 칭찬이지만 2016년에는 진짜로 까는 용도의 별명으로 바뀌었다.[35] 매 시즌마다 시험대에 오른다는 사람들의 반응때문[36] 2016년 삼성이 원인 모를 긴 부진에 빠지자 더 자주 쓰이고 있다.[37] 당시에는 류씨가 유씨로 표기되던 때였다.[38] 김상수가 고등학생 시절에 삼성 코치였던 류중일이 자신의 이름이 박힌 글러브를 선물한 건 유명한 일화이고, 실제 류중일의 장남과 김상수는 1990년생 동갑내기이기도 하다.[39] 삼피 반응[40] 류중일에게 온갖 육두문자를 날리기로 유명한 사사방의 매니저 조차도 분노에 가득찬 글을 남겼고, 해당 카페내에서도 당연히 분노에 가득찬 글들이 올라왔다. 삼성 라이온즈 갤러리 문서와 사자사랑방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경기를 이겨도 단 한 가지라도 꼬투리 잡을 곳이 있으면 휴지통이라는 게시판이 류중일을 씹어대는 글로 폭발하는 카페라는걸 생각하면... [41] 사실 김진욱은 성적이 문제가 아니라 시즌 이후 선수 유출 건으로 프런트와 대판 싸우다 경질 된 거다.[42] 특히 한화는 2012시즌 당시의 근자감과 상반된 성적으로 웃음후보라는 단어를 탄생시킨다.(...)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