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네르바 사건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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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미네르바라는 필명으로 인터넷 논객으로 활동한 '박대성'과 그에 관계된 여러 사건을 가리키는 말.
2. 활동
2.1. 다음 아고라 논객 활동
박대성은 '미네르바'라는 필명으로 2007년 10월 2일부터 2008년 11월 무렵까지 약 80개의 글을 다음 아고라에 남겼다. 이 글들은 누적 조회수 730만여 건, 댓글 3만 3천여 개, 답변글 2천여 개, 찬성 9만여 개, 반대 2천여 개의 기록을 세우고 있었다. #
리먼 브라더스의 몰락을 예언한 게 들어맞은 게 계기가 되어 '미네르바' 의 명성이 아주 널리 퍼졌는데 몇몇 주류 언론이나 방송 3사에서도 그 필명이 언급되고 특집 방송까지 제작되는 신드롬이 퍼지게 된다. # '인터넷 경제 대통령' 등의 별명도 가지게 된다. #
주로 반MB정부, 반여권 정서를 기조로 한국 경제 위기론을 역설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정부 공문을 위조하여 허위 정보를 유포하였다(?)는 혐의로 기소가 되었다. 사실 인터넷에 이런 글을 올린 네티즌이 대대적으로 언론을 타며 체포된 적은 거의 처음이다 보니, 당시 여론은 '정당한 비판을 가로막는 독재 정권의 부활이다'vs'사회적 영향력이 큰 만큼 기소해야 된다'로 서로 뒤엉켜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1]
당시 결정적으로 문제가 된 글은 "정부, 달러 매수 금지 긴급 공문 발송"이라는 것으로 검찰은 박대성의 글로 인해 20억 달러의 방어비용이 발생했다고 주장하였다. #
체포 후 검찰 측에서 "나이 30대[2] , 전문대 졸, 무직(백수)"라고 간략하게 신상을 공개했는데, 오히려 당시 전국적으로 어그로를 끌고 있었던 이 분(S대 법대, 미국 N대 경제학 석사 출신)을 비판하는 소재가 되고말아, 사람들이 "중구삭금", "중구난방"[3] 이라는 말을 실감하게 되었다고 한다.기사 1, 기사 2.
체포 후 박대성은 좌우 양측으로부터 관심의 대상이 되었는데 그의 주장에 따르면 우익에서는 자신을 빨갱이라고 비난하는가 하면, '''좌익으로 예상되는 어떤 사람들은 면회를 와서 "당신이 자살하면 MB정권의 붕괴가 시작된다, 열사가 되어달라"며 자살을 종용했다고 한다.'''[4][5] 이에 대해 박대성은 자긴 좌도 우도 아닌 평범한 시민이라고 주장했다.[6]
이후 진행된 공판 1심에서 허위임을 인식하지 못했고 공익을 해칠 목적도 없었다며 '''무죄'''가 선고됐다. 이후 2010년 12월에는 박대성을 기소한 근거가 된 전기통신기본법상의 인터넷 허위글(허위통신) 처벌 조항에 대해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이 내려졌다. 그리고 국가 상대로 1억 소송을 시작했다. 거기다가 애초에 박대성을 처벌한 그 법률은 허위 사실을 유포한 자를 처벌하는 법률이 아니었다. 허위사실유포죄 참고. 2013년 소송은 기각되었다.##
박대성이 석방된 후 공개 토론회에서 실제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에 따르면 의외로 말이 중언부언하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중간에 끊는 등 오프라인에서는 그렇게 매너가 좋거나 논리력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한다. 심리적으로 크게 위축되어서 그랬을 수도 있다.
3. 가짜 미네르바 논란
2008년 12월 2일 오후 5시께 파이낸셜 뉴스의 곽인찬 논설 위원이 '미네르바 자술서'라는 패러디 칼럼을 올리면서 곽인찬 위원이 미네르바라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으나 곽인찬 위원이 나중에 스스로 패러디였다고 밝히면서 일단락되었다. #
여담으로 미네르바가 인기를 한창 끌 때 허경영은 미네르바는 50대의 금융엘리트이고 '''자신이 정체를 안다'''라고 주장했다가 박대성이 체포된 후 데꿀멍 모드가 되었다.
한편 신동아에서는 미네르바의 실체를 밝힌다는 일련의 기사에서 미네르바를 자인한 어떤 사람의 글을 실었고 그 정체는 인터뷰 담당자를 포함한 7인의 금융엘리트그룹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한 달 뒤 박대성이 체포되었고 다음 달 신동아에서 주장하는 '진짜 미네르바'는 박대성이 가짜라는 주장을 실었다.
진상은 신동아에 나온 미네르바 자체가 대북사업가이자 한국전쟁 당시 첩보원을 자처하는 어떤 브로커가 개입한 가짜였고 이 일로 신동아는 동아일보 신탁통치 오보사건 이래 최대의 오명을 쓰게 되었다. 신동아에서 미네르바를 자처한 K씨는 진상 공개 때 대북사업가에게 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했고 2011년에는 '''신동아의 편집장 등 기자들'''까지 가세해서 자신을 폭행 및 협박했다고 고소장을 제출했다.
이런 일들이 벌어지자 '외환위기 때 조국의 현실을 외면해서 미안하다'는 등 50대 경제 엘리트를 자처해왔던 인터넷상의 모습과 전문대 출신 30세 무직자의 모습과의 괴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실제로 박대성이 구속되고 난 뒤에도 박대성을 "가짜 미네르바"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된다. 인터넷상의 자기 정체성 주장이 어디까지 허황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다.[7]
박대성은 2010년 11월 말, 수원지방법원 성남지원에 증인으로 출석하다가 박대성을 가짜 미네르바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폭행을 당하기도 했으며 신상이 유포되는 등 어려움을 겪고 있어 자신을 가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명예 훼손으로 고소했다고 한다. # 미네르바박 가짜설을 주도적으로 유포한 3인은 2014년 6월 유죄 확정 판결을 받아 각각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과 벌금 70만원,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이례적으로 실형이 선고된 것은 피고인들이 날조된 허위정보(청와대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둥)로 집요하게 박대성씨와 가족들까지 비난하고 박씨의 글을 허락없이 출판하여 부당이익을 취했기 때문이었다. #
4. 관련 기사
경제학 교수가 극찬하는 미네르바(미디어스, 2008년 11월)
미네르바, 정신과 치료 받고 있다(시사저널, 2011년 8월)
명예훼손 소송... 미네르바 증인 출석 안해(MBN뉴스, 2011년 10월)
감옥 있을때 20대 청년들 찾아와서 정부전복 가능하다며 자살 권유했다(데일리안, 2011년 3월)
[1] 이후 2009년 4월 20일, 그의 혐의는 법정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고, 미네르바 본인도 "개인의 권리를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고난의 과정인지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됐으면 바랍니다."라는 말로 국가의 부당한 공권력 남용을 시사했다.#[2] 나중에 알려진 정확한 나이는 1978년 생이다. 위키백과에는 박대성 (1978년)으로 등재되어 있다.[3] 본 어원은 여러 사람의 말은 막기 어려우니 "언로"를 터주고 자신의 할 일을 충실히 하는게 더 낫다고 말한 고대 중국 관리의 말이 그 시작이다.[4] 당시에 미네르바는 저항의 아이콘이라고 불릴 정도로 대중으로부터 반정부적인 이미지가 강했던데다, 인터넷 내에서만 활동했던 인물이라 실제로 알려진 정보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실제로 박대성씨의 성향이 자살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인물인지 아닌지 아무도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만약 박대성 씨가 정말 그런 성향(?)을 가지고 있었고 그런 일이 설사 벌어졌다면...[5] 원래 극렬 운동권에선 군사독재 시절부터 잡혀간 사람에게 자살 종용이 드물지 않았다. 대표적인 피해자가 김지하 시인. 박정희 정권 때 감옥에 들어갔다가 극렬 민주화 세력이 옥사를 유도했으나 김지하가 말을 듣지 않고 김지하의 장모인 박경리 작가가 석방시위를 하자 운동권은 박경리의 시위를 반대하며 쌍욕을 하였다고 한다.[6] 어찌 보면 참 안타까운 게 애초부터 좌우 이념 대립이 극심한 거의 마지막 냉전 지역이라고 볼 수도 있는 한반도에서 이 비극은 '''현재 진행형이자 미래 진행형'''이라는 것이다.[7] 심지어는 1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박대성이 가짜 미네르바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존재한다. 그들의 논리는 그 당시 이명박 정부가 미네르바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가짜 미네르바를 내세워 쇼를 벌였다는 것인데 일종의 인지부조화 현상으로 자신이 전문대졸 백수에게 속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심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