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하

 


[image]
2009년도 모습
'''필명'''
<colbgcolor=white,#2d2f34>'''김지하(金芝河)'''
'''본명'''
김영일(金英一)
'''출생'''
1941년 2월 4일 (83세)
일제 강점기 전라남도 목포부[1]
'''호'''
지하(地下)
'''학력'''
서울대학교 (미학과 / 학사)
'''종교'''
가톨릭 세례명 : 프란치스코
1. 개요
2. 반독재 투쟁 시절
3. 생명사상
4. 1991년 죽음의 굿판 칼럼
5. 고문 후유증설
6. 당사자들의 주장
7. 이후
8. 여담


1. 개요


대한민국의 시인. 전라남도 목포시 출신. 본명은 김영일로 김지하는 지하(地下)에서 따온 필명이다. 처음 쓴 필명은 성 없이 그냥 지하였는데, 하도 주변인들이 이름 대신 불러대는 통에 성을 붙이고 한자까지 갈아버렸다고. 목포산정초등학교, 중동고등학교서울대학교 미학과를 나왔다. 2008년부터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 석좌교수로 있다가 2013년부터 동국대학교 대학원 석좌교수로 재임중.

2. 반독재 투쟁 시절


4.19 혁명 이후로 학생운동을 했으여, 1964년 한일회담을 반대한 학생시위에 적극 가담했다가 수감되어 4개월간 복역했다.
1970년 저항시 〈오적(五賊)〉을 발표하여 독재에 항거하다가 정권의 눈 밖에 나서 필화를 입었고, 그는 반공법 위반으로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이 시기에 소리꾼 임진택이 담론시 '비어'의 첫부분인 '소리내력'을 판소리화 하기도 했다.
1971년 가수 김민기와 함께 야학 활동을 시작했다. 2년 후 김민기는 김지하의 금관의 예수에서 주여, 이제는 여기에를 작곡한다.
1973년 4월 소설가 박경리의 딸 김영주와 결혼했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그해 전남 홍도 영화촬영장에서 체포된 후 옥고를 겪었으며 최종적으로 사형까지 언도받았다가 1980년에 석방되었다.
1975년 〈타는 목마름으로[2][3]이 발표되었다.
적극적으로 독재에 저항하는 행동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보였으며 김수환 추기경 역시 이러한 모습을 대단하게 여기는 동시에 너무 열혈이 지나친 거 아니냐며 많은 걱정을 하기도 했다. 이때의 일로 인하여 노벨평화상노벨문학상 수상자에 추천된 경력도 있으며, 아시아 아프리카 작가회의 로터스 특별상(1975년 수상) , 브루노 크라이스키 인권상 , 정지용 문학상 , 만해문학상까지 수상했을 정도의 대단한 참여시인이자 민중시인이었다.
김지하의 시는 초기 〈오적〉으로 대표되는 재기 넘치는 풍자 정신을 보여주는 시편과 감옥에서 민주주의와 자유에 대한 열망을 아름답게 형상화한 중기의 시들을 통해 우리 문학사에 큰 족적으로 남아있다.

3. 생명사상


김지하는 70년대 후반 5년여 동안 옥중 생활을 하는 동안 수많은 서적을 탐독하면서 '생명사상'을 깨우쳤다고 한다. 재판이 끝나고 책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김지하는 미친 듯이 책을 읽어댔다고 한다. 선불교, 동학, 생태학 등의 책을 섭렵했는데, 인간과 삶의 진화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생태학에서 시작했으나 더 깊은 내면적 지식과 무의식적 지혜를 갈구하게 되었고 그때 접한 것이 선불교 사상이었다. 원래 그의 종교는 천주교였는데, 옥중에서 선불교에 크게 경도되었다. 아울러 동학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김지하는 선불교 관련 경전들을 읽으며 영적인 깨달음을 얻어 갔다. 그리고 감옥에서 꽃과 풀을 보며 깨달음을 이어갔다. 저런 미물들도 생명이며 '무소부재(無所不在)’라 못 가는 곳 없고 없는 데가 없으며 봄이 되어서는 자라고 꽃까지 피우는데, 하물며 고등 생명인 인간의 생명은 더할나위 없이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 여기에 민족주의와 반전주의가 더해졌다.
출감 이후 김지하는 장모인 박경리 선생의 도움으로 원주에 거주하게 된다. 이후 80년대에 걸쳐 김지하는 여러 종교의 생명 존중 사상을 혼합하여 수용하고 생명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노력했다. 출소 이후 그는 천주교, 선불교, 원불교, 도교 등 생명 존중과 관련된 각종 종교들을 섭렵해 갔다. 그의 관심은 증산도환단고기 등에까지 미쳤다.[4] 1990년대 후반에는 사실상 사이비 종교로 여겨지고 있는 단월드의 창시자 이승헌을 스승으로 모시기도 했다. 그러나 1999년에 이승헌의 내부비리를 접한 후 탈퇴하여 월주 전 조계종 총무원장과 환경운동가 최열, 강대인 당시 크리스챤아카데미 부원장, 박원순 당시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 등과 함께 '민족정신회복시민운동연합'을 창설해 단월드에 대한 반대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그는 생명사상과 관련된 여러 종교들을 포괄적으로 수용했는데 이것이 개별 종교들이 오히려 김지하를 못마땅해하고 그를 배척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90년대 이후 그가 보수적 성향을 보이자 진보 진영도 그가 고문 후유증으로 사이비 종교에 심취하게 되었다고 비난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1991년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라는 칼럼을 기고하면서 큰 파문을 불러일으키게 되었고 이후 진보 진영과 적대 관계를 이루게 된다.

4. 1991년 죽음의 굿판 칼럼


1991년 강경대 구타치사사건을 계기로 분신 자살이 연이어 터지면서 온 사회에 충격을 주고 있었다. 이에 김지하가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라는 칼럼을 기고한다.[5] 김지하는 생명주의 사상에서 접근하여, 목숨을 버리면서 하는 민주화 시위를 저주의 굿판에 비유하였다. 이 칼럼에서 김지하는 "자살은 전염한다. 당신들은 지금 전염을 부채질하고 있다. 열사호칭과 대규모 장례식으로 연약한 영혼에 대해 끊임없이 죽음을 유혹하는 암시를 보내고 있다."면서 운동권 세력들이 연이은 자살을 조장하고 있다고 공격했다. 심지어 이 칼럼에는 학생들처럼 자신의 죽음을 강요당했던 자신의 경험이 스며있다고 주장했다.
이 칼럼은 사회적으로 엄청난 후폭풍을 불러왔다. 항상 김지하를 든든한 민주화의 동지로 여겨왔던 운동권과 진보 진영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김지하가 아무런 근거도 없이 자신들을 부도덕한 세력으로 매도하면서, 군부독재에 아부하고 있다고 격렬하게 반발하였다. 결국 진보 성향 문인들의 단체였던 민족문학작가회의는 김지하를 제명하였고, 진보진영에선 김지하를 변절자, 배신자로 규정하고 모든 관계를 끊어버렸다. 대다수 운동권 인사들, 진보 성향 문인들은 김지하와의 사적인 만남조차 거부했다고 한다.
반면에 정권과 보수우익세력은 이 칼럼을 대서특필하면서 운동권을 혁명을 위해서 사람의 목숨조차 도구로 쓰는 부도덕한 집단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김지하의 칼럼 이후 서강대 총장 박홍 루카 신부가 바통을 이어받아 배후세력설을 주장했고, 공안 당국이 때맞춰 전민련 간부 김기설 자살 사건을 두고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을 일으켰다. 이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된 강기훈은 이후 재심을 통해 최종적으로 무죄가 확정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유서 대필을 통한 자살 조장이라는 식으로 대대적으로 보도되어 운동권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혔다. 연이어 정원식 밀가루 사건까지 터지게 되고, 노태우 정권은 일련의 사건을 기회로 강경 진압의 명분을 얻고 대대적으로 공안정국을 조성해서 위기를 탈출한다. 이후 분신 자살 등 과격 시위는 순식간에 사그라들고 재야와 학생운동, 노동운동은 급격하게 위축된다. 같은 시기 소련 등 공산주의권의 붕괴도 운동권의 쇠퇴에 한몫했다.
한편 김지하는 오히려 운동권 동지·후배들이 칼럼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을 일방적으로 매도한다면서 엄청난 충격과 분노, 배신감으로을 느껴 정신병원 진료도 여러차례 받았다고 한다. #

5. 고문 후유증설


1991년 김지하의 갑작스러운 '죽음의 굿판 칼럼'으로 운동권과 진보 진영은 큰 충격을 받게 된다. 진보 진영에서도 여러 의견이 갈렸다. 그를 변절자라고 극렬히 비난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가 70년대 민주화 투쟁의 아이콘이었을 뿐만 아니라 보수 정권으로부터 어떠한 금전적인 이익을 취한 정황이 없기 때문에 변절자라고까지 매도하는 것은 좀 지나치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후 김지하의 이런 급작스러운 변화에 대해 고문 후유증을 앓고 있으며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있다는 설이 대두된다. 급기야는 너무 심한 고문으로 외모까지 확연히 달라졌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image]
젊은 날의 김지하.
[image]
1981년 출감 후의 김지하.
자기 아들이 대학 진학 문제에 대해 다른 말을 한 적이 있어 기억이 오락가락하며 정신적으로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는 주장도 나왔다. 이것 외에도 과거 자신이 썼던 자서전적 내용과 이후에 주장하는 자신의 경험담이 일치하지 않는 점이 거론되기도 했다.

6. 당사자들의 주장


부인 김영주씨의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하였다.

“정권의 박해야 예상했지만 ‘민청학련’ 사건이 터지면서 요상한 일이 벌어졌다. 김 시인이 좌우 양편에서 박해를 받은 것이다. 고대 사회에서 산 인간을 제물로 바치듯 좌파 일각에서 김 시인을 박정희 정권이 죽이도록 유도해 ‘민족의 제물’로 바치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차츰 그 상황을 인식한 어머니는 사위를 살리기 위해 정권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조용하게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남편은 어떤 의미에서는 장모 덕분에 살아남았다.”

“좌파의 색채는 여럿이다. 순수한 사람도 많지만 야심가도, 종북주의자도, 간첩도 있다. 돌아보면 민주화 과정에 악(惡)도 기여한 바가 있다. 온갖 세력이 합쳐야 민주화가 가능했다. 민주화했다고 떠드는 사람들이 때론 은밀하게, 때론 공개적으로 남편 속을 들쑤시고 마음에 상처를 줬다. 석방된 이후 20년 동안 12차례나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젊은이들의 분신자살이 이어진 1991년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는 글을 발표한 뒤엔 무슨 사회적 발언만 하면 못 잡아먹어 조직적으로 난리를 쳤다. 그 배신감과 원통함이 오죽했겠나.

##
문단 거물 고은의 성추문으로 시끄러운 와중에 조선일보와의 인터뷰고은 “박경리에게 손자를 업고 시청 앞에서 김지하 석방 플래카드 들고 시위하라고 했더니 과부년 주제에 말을 안 들어. 하라고 하면 할 것이지”에서의 내용을 보면 고은이 김지하의 장모이기도 한 박경리 작가가 자신의 말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과부년'''이라고 비하한 것을 전해들었다는 증언을 했다. 그자리엔 당시 운동권 학생들의 사상의 스승이라고 할 수 있던 리영희나 문학계 거물인 백낙청도 같이 있었다고 한다.

7. 이후


2001년 5월에 그는 <실천문학> 여름호에서 '죽음의 굿판' 발언에 대해서 10년만에 유감을 표명하였다.
2012년 11월 26일 열린 시국강연회에서 새누리당박근혜 대선후보에 대한 지지 의사를 밝혔다.#
민청학련 사건 재심으로 보상금을 수령했는데, 인터뷰에서 ''을 목적으로 재심을 신청했다고 발언했다. 자식교육 등으로 돈이 필요했다고. # 5월 26일, 법원은 15억 배상판결을 확정했다.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그 밖에 문재인이나 안철수, 리영희, 백낙청 같은 인사들에 대한 원색적 비난 발언이 물의를 빚기도 했다. 그래도 비난받은 인물 측에서 법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지는 않아 그냥 넘어갔다. 여기에 대선 포기 후 27억을 반납하지 않은 이정희에 대해서도 일침을 가하였다.
민청학련 재심 이후 '오적 필화 사건'에 대해서도 항소하여 재심을 청구했으나 법원이 2013년 5월 9일 기각하였다. '재심 사유가 없는 반공법 위반 혐의의 유무죄를 새로 판단할 수 없다'는 법리상의 한계가 그 이유이다.
2014년 세월호 참사 시기 김지하 명의로 쓰여진 <김지하 시인의 세월호 유가족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등 세월호 특별법 비난글이 인터넷과 SNS에 유포됐으나, 실제로 김지하 본인이 쓴 글이 아니다. 이에 김지하 측은 2019년 관련 게시글 유포자나 단체에 법적대응을 하겠다고 밝혔다.
2018년 조선일보와 인터뷰한지 5개월 후, 시사저널과 인터뷰를 하였다. 그는 박근혜 전 대통령을 지지했던 것을 잘못된 판단이었다고 하였고, 촛불집회 ·미투 운동을 긍정적으로 보았다. 그러나 현 문재인 정부에는 여전히 비판적인 것으로 보인다.
2019년 11월 25일 부인 김영주 토지문화재단 이사장이 향년 73세로 별세했다.

8. 여담


리그베다 위키 때 수난을 겪은 항목이기도 한데, 타 작가 항목들에 나온 개인적인 문제점 사례가 편집 제한됐지만 해당 항목에만 개인 문제점 항목이 여전히 난잡하게 유지돼 형평성 논란이 있었으나, 위키게시판에서 합의된 끝에 작성금지됐다. 이는 2015년 나무위키로 넘어가서도 유지중이다.
[1]대한민국 전라남도 목포시[2] 이 시는 노래로 만들어졌고, 안치환이 부르면서 수많은 운동권 세력이 부르기도 했다. 특히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 노래를 부른 것이 유명하다.[3] 다만 폴 엘뤼아르의 '자유'와 그 형태가 너무 유사해서 표절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다.[4] 이런 면모는 1984년 간행되어 1999년 출판된 사상기행에 매우 자세히 나와있다. 그리고 장모 박경리에게도 영향을 미쳤는지 〈토지〉 4부부터 등장한 해도사라는 인물이 강증산을 언급하는 장면도 등장한다. 좋다 나쁘다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5] 확인할 수는 없지만 후에 회고하기를 조선일보쪽에서 보다 자극적으로 제목을 바꾸었다고 한다. 본 제목은 '젊은 벗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