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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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신동아
'''유형'''
시사 월간지
'''창간일'''
1931년 11월 1일
'''본사'''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계천로 1
'''편집장'''
최영철
'''사이트'''

1. 개요
2. 역사
3. 논란 및 사건사고
4. 여담
5. 역대 편집담당자
5.1. 주간
5.2.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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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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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아 창간호
동아일보의 시사 월간지. 국내 종합지 중 가장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31년 11월 창간되어 1936년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강제 폐간되었다가 1964년 9월에 복간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2021년부로 창간 90주년을, 2021년 1월 통권 736호를 돌파한 장수잡지이기도 하다.
제작은 동아일보사 출판국 신동아팀에서 담당한다.
모지인 동아일보와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보수주의에 중점을 두고 있으면서도 다양한 시각의 글들이 실린다. 예를들면 대표적인 진보 논객 중 한명인 김호기 연세대 교수의 글이 연재된다거나[1] 심지어 김용옥이 칼럼을 연재할 때 동아일보 사주 일가를 까대는 글을 썼을 때도 그대로 올렸다. 그것도 사주가 직접 지시해서 무수정으로 게재했다고 김용옥 자신이 다른 글에서 고백했다. 폭로, 르포성 기사는 여야를 가리지 않고 성역없이 다 까는 경향이 있다. 2003년 9 ~ 10월에 걸쳐서 현대자동차그룹이 당시 정신적 여당이자 좌익 정당인 개혁국민정당 지구당위원장들에게는 유럽여행 비용을, 극우단체 국민행동본부에게는 언더머니를 주는 양다리걸치기를 했던 것을 폭로하기도 했다.
역사 분야에도 볼만한 글들이 꽤 많다.

2. 역사


조선민족의 전도(前途)의 대경륜을 제시하는 전람회요, 토의장이요, 온양소(溫讓所)

송진우의 신동아 창간사

1931년 11월 동아일보의 자매지로 창간했다. 당시의 사장은 송진우, 편집 겸 발행인은 양원모, 제작 총괄은 설의식, 주간은 주요섭이었다.
원래는 이름을 "월간동아"로 하려다가 설의식이 "신동아"로 정했다. 설의식의 창간호 편집후기를 보면 당시엔 시사만 다루는게 아니라 종합 잡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 잡지의 편집 대강에 망라주의를 취했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학술, 문예 등 각 방면을 통하여 시사 평론으로부터 과학, 운동, 연예, 취미에 이르기까지 무엇이나 간에 우리의 지식과 견문을 넓히고 실익과 취미를 도울만한 것이면 모두 취하기로 하였습니다."
초기 신동아 제작의 주역은 주요섭이었는데 그는 중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뒤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석사를 한 사람이었다. 그는 신동아 복간 기념 1964년 8월 22일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원고 부족, 총독부 검열 등 어려운 일이 많았다. 실명 외에 용악산인(龍岳山人), 양두식(梁斗植), 멍텅구리 등 가명 필명으로 마구 쓸 밖에 없었는데 한번은 양두식 선생이 어떤 분이냐고 문의가 와서 모두 웃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는 일들이다. 원고를 모아놓고도 고생이었다. 원고 검열이어서 손을 나누어 복사하고 한편으로 조판, 한편으론 검열을 진행시켰다. 신문사에서 하는 거라 보아 준다는 것이 자그만치 한달이나 걸리곤 했다. 그만두라는 이야기와 같았다. 총독부의 눈을 속이려고 투고의 자구를 요리조리 수정하느라 모두 땀을 빼기도 하고. 자유천지 미국에서 돌아온 직후여서 더 했겠지만 부자유스럽기가 감옥 같았다. #

신동아는 신문잡지 시대를 연 주역이었고, 평균적으로 1만부 내외로 팔렸는데 일제시대 당시 보통 잡지들이 2,3천부 정도 팔렸음을 고려하면 굉장히 많이 팔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아일보와 마찬가지로 신동아도 검열을 많이 당했는데 일제의 검열에 대해 당시 신동아 기자였던 고형곤은 이렇게 회고했다.

신동아의 원고 검열은 우리말에 능한 니시무라라는 일본인이 맡고 있었다. 부부 사이가 좋지 않은 이였다. 그래서 마누라의 바가지가 다음날엔 아무 죄 없는 신동아에 수많은 자국을 남겨도 어쩔 수 없는 억울한 시대였다. 하루저녁에 새 원고를 만들어 메우는 일은 예사였다. #

1936년 동아일보에서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를 지우고 보도한 일장기 말소사건이 터졌는데 이 때 신동아도 남승룡 선수의 일장기를 지우고 실었던 것이 발각되어 총독부에 의해 강제 폐간되었다.
1964년 9월에 복간되었다.
1968년 12월호에 차관업체들의 실태와 정권이 자신들이 혜택을 준 업체들로부터 자금을 공급받고 있다는 의혹을 파헤친 "차관"이라는 기사를 실었다가 해당 기자들과 신동아 부장 손세일 등이 중앙정보부에 잡혀간 사건이 발생했다. 언론계는 당연히 반발했으나 정권의 계속되는 탄압으로 신동아 부장인 손세일과 주필 천관우는 물론이고 동아일보 사주 가문인 김상만마저 발행인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1987년에는 이른바 신동아 사태가 터졌다. 김대중 납치 사건에 대한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의 "박정희는 이 사건을 사전에 전혀 몰랐으며 모두 자신이 했다, 김대중을 납치한 배가 일본을 출발한 후 대통령에게 알리니까 대단히 화를 냈다, 처음부터 김대중을 한국에 연행할 계획이었지 죽일 생각은 전혀 없었다"라는 인터뷰를 1987년 10월 호에 실을 예정이었는데 전두환 정권이 삭제를 지시하며 국가안전기획부가 인쇄소를 점거하고 물리력으로 인쇄를 막았다. 이에 신동아 간부들과 기자들이 삭제를 거부하고 철야농성을 벌이는 등 대립했고, 판이 커지면서 국회에서도 이 문제에 대한 추궁이 이어지자 결국 정부는 기사 게재는 언론사의 자율에 맡긴다고 밝히며 백기를 들었다. 이 1987년 10월호는 무려 40만 1000부가 팔렸다.#
2004년 노무현 정권의 집권여당인 열린우리당신기남, 이미경 등이 친일진상규명특별법 개정안을 통과시킬 것을 주도하며 정치공세를 펼치고 있었다. 그들의 타겟은 당연히 야당인 한나라당이었다. 그런데 신기남 당시 열린우리당 의장이 일부 언론에서 제기한 아버지의 친일 의혹에 대해 가짜뉴스 타령하며 부인하자 신동아가 2004년 9월호에서 신기남의 아버지가 일본군 헌병 오장이었다는 것을 탐사보도를 통해 상세히 특종보도하였고 신기남은 결국 사실을 인정했다. 거기다 이미경, 김희선 등의 아버지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밝혀지면서 열린우리당은 내로남불 소리만 듣게되었다.# 이 보도는 한국기자상을 수상했다.
2007년 6월호와 7월호에 최태민[2]의 비리 내용을 담은 "최태민 보고서"를 보도했는데[3] 검찰이 보도 경위를 파악하기 위해 해당 기자 2명의 이메일을 보려고 동아일보 전산실을 압수수색하려 했으나 동아일보 기자들이 언론자유와 취재원 보호를 이유로 반발하면서 압수수색을 무산시켰다. 이후 자료 임의제출 형식으로 일단락되었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실제 운동권 출신 인사들이 직접 운동권의 실체에 대해서 밝히고 문재인 정권이 보이는 각종 이상행보와 위선의 사상적 기반과 원인에 대해 분석하는 글들을 많이 싣고 있다. 그 외에도 586세대에 대해서 파헤치는 기획물들이 인기가 많다.

3. 논란 및 사건사고


  • 2009년에 이른바 가짜 미네르바 사건 때문에 욕을 많이 먹었다.# 당시 편집장이었던 송문홍의 친구가 "내 친구 K군이 진짜 미네르바이고, 박대성 그놈은 가짜 미네르바"라고 주장하면서 자칭 '진짜 미네르바'가 썼다는 원고를 송 편집장에게 보냈는데, 편집장은 이를 사실확인조차 하지 않고서 '진짜 미네르바 K씨 특집'으로 글을 연재한 것이었다. 이후 동아일보사에서 이 오보 사건의 진상조사를 하고 사과문을 실었다. 그리고 관련 책임자들은 해임, 정직되었다.
  • 최남선의 친일은 없었고 학도병 권유문은 군 지휘 경험을 쌓으라는 뜻이었다는 최학주(최남선의 손자)의 인터뷰를 실어서 논란이 되었다.#
  • 제로존 이론 같은 병맛 유사과학을 띄워주기도 했다.
  • 2006년 9월호에 통일교 창시자 문선명일가의 비밀에 대한 "대해부 통일교 왕국"이라는 기사를 실었다가 700여명의 통일교도들이 동아일보 본사로 쳐들어가 깽판을 친 사건이 일어났다.[4]

4. 여담


  • 이건 신동아가 특이한게 아니라 월간조선이 특이한 것이긴 하지만 2000년대까지도 본문에 한자가 난무하던 월간조선과 달리 신동아는 한글로 기사를 썼다. 스타일도 상당히 고루한 월간조선과 달리 더 세련된 편이다.

5. 역대 편집담당자



5.1. 주간



5.2. 팀장


1998년 직제개편 이전까진 호칭이 '부장'이었다.
  • 주요섭 (1933~1934)
  • 최승만 (1934~1936)
  • 권오철 (1964~1965)
  • 이종구 (1965~1966)
  • 최일남 (1966~1967)
  • 손세일 (1967~1968)
  • 임순묵 (1968~1970)
  • 이준우 (1970~1983)
  • 이정윤 (1983~1987)
  • 김종심[5] (1987~1993)
  • 김대곤 (1993~1995)
  • 전준우 (1997~1999)
  • 황의봉 (1999~2002)
  • 유영을 (2002~2004)
  • 이형삼 (2004~2008/2013~2016)
  • 송문홍 (2008~2012)
  • 이인철 (2012)
  • 김현미 (2016~2017)
  • 최영철 (2017~ )

[1] 주로 2010년대 초중반에 실렸는데 박정희노무현을 비교하면서 노무현을 추켜세우고 박정희를 상대적으로 부정적으로 묘사한 글, 리영희를 고평가하는 글, 이명박 까는 글 등 별의별 글이 다 실렸다.[2] 최순실의 아버지인 그 최태민이다.[3] [철저검증]박근혜 X파일 & 히든카드, [단독취재]'전두환 안기부', 박근혜 약혼설과 재산 의혹 수사했다[4] 관련 내용은 작성자인 신동아 차장 조성식 기자의 저서 <대한민국 주먹을 말하다> 편 바다이야기 항목 앞부분에 간결하지만 자세히 나온다.[5] 이후 동아일보 편집국장, 출판국장,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위원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