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만수

 




역임한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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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재정경제원 차관
문민정부
3대
임창열

4대
강만수


개편[32]
대한민국 통상산업부 차관
문민정부
3대
안광구

4대
강만수


5대
한덕수
대한민국 관세청장
문민정부
13대
이환균

14대
강만수


15대
김영섭


대한민국 초대 기획재정부 장관
강만수
姜萬洙 | Kang man-soo

<colbgcolor=#003764><colcolor=#ffffff> 출생
1945년 6월 30일 (78세)
경상남도 합천군 대양면 아천리[1][2]
본관
진주 강씨
재임기간
제14대 관세청장
1995년 12월 26일 ~ 1996년 12월 23일
제4대 통상산업부 차관
1996년 12월 24일 ~ 1997년 3월 7일
제4대 재정경제원 차관
1997년 3월 6일 ~ 1998년 3월 5일
초대 기획재정부 장관
2008년 2월 29일 ~ 2009년 2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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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764><colcolor=#ffffff> 학력
경남고등학교 (졸업[33])
서울대학교 (법학 / 학사)
뉴욕 대학교 (경제학 / 석사)
가족
아내 하인경, 슬하 2남 1녀
종교
개신교(장로교)[34]
병역
병역면제(고령)
약력
제8회 행정고시 합격
주미대사관 재무관
재무부 국제금융국장
재정경제원 세제실장
통상산업부 차관
재정경제원 차관
한국무역협회 상근부회장
디지털경제연구소 이사장
서울시정개발연구원장
기획재정부 장관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 위원장
대통령실 경제특별보좌관
산은금융그룹 회장
한국산업은행 은행장

1. 개요
2. 경력
2.1. 비판
3. 여담
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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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옛날 일화인데, 뉴욕에서 정인용 전 재무장관이 월스트리트 금융인들과 간담회를 하면서 ‘어느 나라 없이 재무장관에게 허락된 권리가 하나 있는데, 환율에 대해서는 거짓말할 권리가 있다 ’는 이야기를 한 적 있다.

- 경제부총리로 복귀 후, 기자들이 환율에 대한 질문을 하자, 우회적으로 한 말[3]

이명박 정부의 초대 기획재정부장관.1945년 경상남도 합천군 대양면 아천리에서 출생한 대한민국의 경제관료이다.

2. 경력


경남고등학교(18회, 수석졸업),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65학번으로, 윤증현 전 기재부장관과 동기. 그러나 그 둘의 사이는 그다지 좋지 않다 카더라.
1970년
제9회 행정고시에 재경직 수석으로 합격하면서 공직에 입문했다. 1980년대 김재익 경제수석비서관 밑에 있을 무렵, 과장급 중 일을 가장 잘 한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또한 시를 쓰기도 했는데, 이는 젊은 시절 예리한 판단을 보인 강 전 장관 본인의 문학 소양과 더불어 주변의 권고를 따른 것으로 추정된다[4]
부가가치세를 만드는데 참여한바 있다. 본인도 직접 산업은행장 퇴임 후 인터뷰에서 발언한 적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 따져 보면 주요 추진자는 강경식 前 부총리가 꾸린 team[5]이었으며, 강만수 前 장관은 오재구 등의 관료와 함께 실무를 맡은 것이다. 부가가치세야 지금보면 타국가의 모범이 될만한 훌륭한 간접세의 기준이 되지만 김종인 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 또한 부가가치세를 만드는 데 기여를 했기에 강만수 장관 혼자서 만든건 아니다.
1985년에는 근무평정이 좋은 우수 직원으로 미국에서 유학을 하였다. 이 시기에 뉴욕에서 진행된 플라자 합의[6] 소식을 접하고 경제적 방어수단으로서 환율을 주목하게 되었다고 한다.
1997년 ~ 1998년
대한민국의 제4대 재정경제원 차관이 되었다.[7]

“외환위기를 부른 가장 큰 문제점은 투명성 결여와 정치적 리더십의 결여였다. 20여 개 관련법이 국회를 통과하지 않았으며, 노동법 개정과 한보철강 뇌물사건도 그것이었다. 금융개혁법안을 올렸으나 제대로 처리되지 않았다. 내가 통산부 차관으로 부임하니(부임일 1996년 12월 24일) 우리 경제는 이미 거덜난 상태였다는 보고를 받았다. 일본에 대한 수출은 9.1% 절하가 됐다. 그래서 김 대통령이 나보고 국제수지 적자 해결을 위해 한번 일 해보라고 했다(재경원 차관 부임일 1997년 3월 7일).” - 당시, 강만수 재경원 차관의 증언[8]

차관직 사임 후, 10년간 야인으로 지내다가 이명박의 참모가 되어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주요 경제 공약인 747 공약을 설계하였으며, 이명박 정부 출범 후 기획재정부초대 장관을 맡았다. [9] 장관으론 고작 1년을 재임했지만 리만 브라더스(...)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임기 내내 이명박의 신뢰를 받았다.[10] 외환위기의 책임 주체라는 악재를 딛고 화려하게 재기한 강만수였으나, 지난 10년간 야인생활을 하는 동안 건강을 많이 잃었으며, 특히 고혈압으로[11] 인해, 젊은 시절의 시 작문을 하는 듯한 예리한 면모가 많이 사라진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2008년
기획재정부장관으로 있던 2008년 전국을 매우 뜨겁게 달군 화제의 인물이었다. 08년 세계금융위기 국면에 대항하기 위해, 97년처럼 다시 환율방어법을 시행하였는데, 외환보유고 60조 원을 날리기는 했으나[12], 대기업들은 이 저환율 정책의 수혜를 입고 수출 호조를 보이며, 1-2분기 만에 금융위기 파고를 벗어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유학생들은...[13] 2010년 아베노믹스도 이와 비슷한데, 일본은 양적완화를 통해 환율을 조절하여 또 다시 한국/경제에 먹구름을 드리운다. 차이점이라면 2008년 한국은 규모에 의한 해외 투기자본에 대한 방어능력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시행하여 60조원의 외환이 증발했다는 점인데, 일본은 그래도 방어가 될 정도의 규모가 된다는 것.
2008년 9월 산업은행의 리만브라더스 인수설을 흘리다가 포기했는데, 그 직후 세계금융위기가 시작되었다(...) 여담으로 조선일보 기자가 리만브라더스 찬성 칼럼을 쓰기도했다.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8/26/2008082601479.html
2008년 10월, 세계금융위기로 외환위기설이 나돌았던 가운데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이 한·미 통화 스와프(swap) 협정 체결 공식 발표를 하였다. # 하지만, 당시 한'미 통화스와프 체결 주체와 기여도를 놓고 한국 은행 측과 기재부 간에 크게 충돌하기도 했다.#
이 한-미 스와프 협정 체결 발표 이후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이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에게 이틀 연속으로 두 차례에 걸쳐 사과를 하였는데 당시, 협상 당사자인 한국은행[14]이 미국 측과 한미 통화 스와프 협정을 공식 발표하기 하루 전날인 지난달 29일, 재정부 쪽에서 관련 소식이 먼저 나와 대대적으로 보도가 되었다. 당시 한은은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미연방준비은행)의 최종 결정이 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재정부가 협상 당사자를 제쳐놓고 이러한 소식을 언론에 먼저 흘려 미 연준과의 협상판을 위태롭게 만들어 매우 불쾌했다고 전해졌다.[15]# 게다가 스와프 협정 체결 일화가 계약 당사자인 한국은행과 미 FRB를 배제하고 강 장관이 미국 재무부 인사와 접촉해 이뤄진 것처럼 보도가 되고 사진마저 강 장관이 이명박 대통령과 환하게 웃는 모습이 보도자료로 나갔기 때문에, 더 문제가 되었다.
- 한은 관계자는 "독립성이 철저히 보장된 미 FRB의 성격을 감안하지 않고 재정부가 브리핑을 하면서 미 FRB의 오해를 사는 행위를 했다"면서 "이렇게 되면 내년 4월에 통화 스와프 계약 추가 연장이 가능할지 우려됐다"고 불쾌한 심정을 전했다. 결국 강 장관은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에게 이틀 연속으로 사과를 하였다.#
2009년
2009년 1월, ‘MB노믹스 설계자’로 명성을 낳았던 강만수 장관이 11개월 만에 기획재정부 장관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장관에서 물러난 즉시 국가경쟁력강화위원장으로 임명된 데 이어 대통령 경제특별보좌관에 임명되기도 했다. 때문에 정권의 실세로[16] 늘 화제의 중심에 있었다. 국가경쟁력강회위원장 시절에는 기존의 행인 좌측 통행 → 우측 통행으로 바꾸는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이쪽이 더 자연스러우며, 서구권 등지에서도 우측 통행을 하고 있다는 것. 잠시 신임 포스코 회장으로 부임한다는 루머가 돌기도 했으나, 철강과 무관한 외부인이었기 때문에 ( ) 썰로 그쳤으며, 신임회장에는 정준양이 임명되었다.[17]
2010년 3월 한국은행총재 임명설이 돌아 루머만으로 화폐시장이 들썩거렸다. 진보언론들은 말할 것도 없고, 모피아로 비판받던 일반 경제관료들과 조선일보에서도 비판적일 정도. 우리은행 회장 된다는 소문이 나돈 적이 있을 때도 비슷한 분위기가 재현됐을만큼, 시장에서는 강만수 전 장관이 민간기업으로 가는 걸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2011년
2011년 3월 "산은금융지주" 회장이자 산업은행 행장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직계가족(딸)이[18] 국내 최고 의료기관에서도 치유불가능하다고 손을 든 병에 걸려 해외에서 치료를 받기 위해선 막대한 치료비가 필요해 '높은 보수'를 받는 자리가 필요하다는 기사가 올라왔다강만수, 결국 산은지주 회장 내정, "해도 너무해". 게다가 국내 주요 기업들의 지분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산업은행을 민영화한다는 방침을 발표한 이명박 정부였기 때문에, 최고 실세 강만수 장관의 입성은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2013년 3월, 김석동 금융위원회 위원장이 산은지주 회장 연봉 인상을 언급했으나 금융권 안팎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2013년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면서 후임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물러났다.
2016년
2016년 8월 2일 산업은행장 재직 당시 대우조선해양 비리에 개입된 정황이 포착되어 자택이 압수수색 당했다.# 이어 9월 21일 알선수재·배임, 제3자 뇌물수수 등의 혐의로 구속영장이 청구되었으나 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절치부심한 검찰은 추가 혐의를 발견하고 다시 구속영장을 청구하여, 결국 12월 1일 구속되었다#.
2017년 11월 17일 항소심에서 징역 5년 2개월을 선고받았다. 관련기사

2.1. 비판


상기했듯 부가가치세 관련 업적이 있다고 흔히 이야기되나, 부가가치세를 업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자체가 논란이다. 대부분 경제위기 시절에 경력을 쌓은 때문인지 전체적으로는 많은 비판을 받았다. 특히 2008년의 금융위기와 관련하여, 그의 환율정책은 엄청나게 많은 비판을 받았다.
강만수는 취임 초기에 환율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를 실행으로 옮겼다. 환율이 높아지면 국제 시장에서 대기업의 가격 경쟁력이 높아지고 그러면 한국 경제도 좋아질 거라는 보수 주류경제이념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여러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가장 큰 문제는 대한민국은 영토에 쓸 만한 자원이 거의 없기에 거의 모든 원자재와 석유 등을 해외에서 수입해오는 산업 구조를 갖고 있는데, 그럼에도 수출 잘 되라고 환율을 억지로 올려버렸으니 경제도 안 좋은데 원자재 값까지 올라서 모든 물건 값이 올라버리는 부작용을 가져온 것이다. 이는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는 간단한 경제논리인데, 비유를 들어서 말하면, 환율이 1 달러당 1,000원일 때 수입산 밀가루로 만드는 라면 1봉지 제작에 드는 원가가 100원이었다면, 환율이 1달러당 1,500원이 되었을 때에는 재료값 상승, 재료를 운반할 때 드는 운송비 상승 등으로 인해 라면원가가 150원 이상이 되고, 제작사는 이윤을 남기기 위해 최종 판매가를 그만큼 더 올려야만 하는 식으로 물가가 상승하게 된다. 게다가 중간에서 원가가 올라간 만큼만 가격을 올리면 그나마 나을 터인데, 소비자가 중간에서 가격이 얼마만큼 오르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을 무기로 삼아 자기들이 얻을 이익분도 몰래 올려버리면서 상황이 시궁창이 되고 말았다. 한마디로 자폭이라는 단어가 매우 잘 어울리는 병크였던 셈이다.
게다가 설령 강만수의 주장대로 수출기업들이 이득을 본다 하더라도, 이는 서민에게서는 세금을 더 걷고 부자에게서는 세금을 덜 걷는, 흔히 말하는 부자감세에 불과하다. 현대사회[19]에서 유통업계가 유독 비판을 많이 당하는 이유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당시 환율과 물가 뉴스를 검색해보면 당시의 민심과 언론의 반응이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인 것을 볼 수 있다. 비유를 들자면 2007년 300원이던 새콤달콤은 현재 500원으로 상승했으며 대부분의 껌들도 300원에서 500원으로 오르는등 IMF 이후 골디락스 호황으로 다시 살아난 중산층을 물가로 아예 싸그리 말려버린게 강만수 장관의 큰 실책이다. 하나더 이야기하자면 그 당시의 환율 덕분에 원달러가 1100원인 것도 높아보이던 것이 이제는 저렴하게 보일 정도로 착시효과까지 박아넣었다
특히 이라크전의 여파로 석유값이 미친듯이 폭등을 할 때 환율 폭등 크리까지 터져버리자 원가상승으로 인한 손해를 소비자와 함께 분담하고 있던 정직한 몇몇 운수회사들이나 택시기사들은 거의 파산 직전까지 갔다. 그렇다고 운송비를 올리면 국민 경제는...
또한 고환율을 발언한지 10여 일 만에 환율이 요동을 치면서 KIKO 사태를 불러온다. 이때 피해 규모를 보면 1000여개 기업이 10조 원가량의 손실을 봤으며, 20개 기업은 파산했고 18개 기업은 경영권을 빼앗겼다. 이들 기업들은 그 이후에도 수년간 소송에 진을 뺐으며 임직원들이 과로사한 경우마저 있었다.
이렇게 취임 초에는 환율이 올라가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민심에 급격한 변동이 보이고 대침체가 터지자 나중에는 입장 바꿔서 점심시간도시락 폭탄이라 불릴 정도로 외환시장에 달러를 쏟아 부었다. 금융위기가 심화되면서 주식시장에 시장경보조치(서킷브레이커, 사이드카)가 지속되고 환율과 채권금리가 요동을 치며 폭등하자 환율안정으로 대처를 한 것인데...
당시 금융시장은 98년 IMF 구제금융때를 보는 듯 하였다고 한다. 백약이 무효하고 시장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고...[20] 아래의 외환개입 그래프를 보면 그의 개입 시도가 효과를 낳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image]
이 기사[21]에서 말하는 외환개입의 효과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그래프다. 내 패 다 보여주고 포커치는데 돈을 꼴 수밖에. 지능지수가 의심되는 수장. 외국 외환딜러들은 호구를 만나서 밀고 당기며 한국의 외환을 공짜로 쪽쪽 빨아먹었다.
이 과정에서 대한민국의 외환보유고는 2,600억 달러에서 2,000억 달러로 추락했으며, 또한 이렇게 달러를 쏟는 과정에서 일본 수준의 경제도 아닌데 2004년 전설의 일은포[22]의 한국판, 즉 한은포(한국은행포)를 마구 퍼부으면서 환율을 엉망으로 만들었고 치솟는 환율과 떨어지는 주가지수가 서로 교차하게 하는 "그랜드 크로스"를 만들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심지어 풋만수[23]라고까지 불렸다. 일본에서는 개미들도 풋만수를 이용해서 수백만 엔씩 벌어갔다.[24]
한국을 비롯한 싱가폴, 대만 등 90년대 후반 외환위기와 그 파장을 겪은 국가들이 2000년대부터 대단히 높은 수준의 외환보유를 하고 있는 것(전세계 5위 부근)이 바로 이와 같은 이유이다.[25] 경제규모의 외환을 과도하게 쥐고 있는 상태는 유동성을 떨어뜨리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으나, 이것을 감소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전 국가적으로 높은 수준의 불안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감소시키는 것 역시 어렵다. 그러면 결국 이러한 위기상황에서 사용할 수밖에 없는 것.
실제로 이러한 달러 폭격 조치 덕분에 세계금융위기에서 한국/경제는 크게 충격을 받지 않았다는 평가를 내보기도 하나 강만수가 빨린 건 외환위기 문제와 상관없이 적정 환율이니 이런 멍청한 발언하다가 공짜로 뜯겼다는 데 있다.
또한 경제부처의 장관으로서 시장과 잘 소통하지는 못한 것으로 평가된다. 대표적 예 중 하나로 금융위기 발발 후 "국내 금융기관의 익스포져(exposure)는 제한적이며, 실질적인 영향도 제한적일 것으로 판단된다"라고 안이한 대응성 발언을 하였던 적이 있다.[26]
심지어 1997년 IMF 위기와 관련하여 그가 낸 변명은 "6.25 때부터 누적되어 온 한국 경제의 문제점을 내가 어떻게 해결하느냐?"였다. 물론 수십 년간 누적된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존재하지 않겠지만, 그에게 주어진 권한은 '그런 문제를 해결하라고' 주어진 것이라며 덮어놓고 비난하는 의견이 있으나, 정권교체가 당연시 되는 상황에서 임기 마지막 해의 정권의 재정경제원 장관도 아닌 차관이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었는지도 생각해봐야 한다. 외환위기의 해결은 결국 해외에서 달러를 가지고 와야 되는 것인데 이것은 관료의 영역이 아닌 정치인의 영역이다. 결국 외환위기는 정권이 교체되고 해외에서 달러가 들어오면서 부터 진정되기 시작하였다.
2008년 10월 6일 국회 국정감사에서 강 장관은 "신문에 보도된 것을 모아서 고환율 정책을 폈다고 하는데 제가 무슨 고환율 정책을 썼나"며 발끈했다.그는 또 "환율의 방향에 대해 말한 것도 3월 25일에 한 번뿐이었다"고 덧붙였다. 이는 한 언론사 초청 강연을 가리킨 것으로 당시 "환율과 경상수지 적자 추이를 감안할 때 어느 길로 가야할지는 자명하다"는 식으로 말한 바 있다. 하지만 "환율을 시장에 온전히 맡기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다"(2월29일 취임 간담회)거나 "환율이 올라갈 경우 서비스 수지도 좋아지고 있다. 앞으로도 중요하게 여길 것이 경상수지"(4월15일 정례브리핑)라는 발언만 보더라도 무엇이 진실인지가 명확해진다. 익명을 요구한 민간 경제연구소 연구원은 이에 대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이다. 웃음밖에 안 나온다"며 실소를 금치 못했다. 민주당 오제세 의원도 7일 CBS와의 전화 통화에서 "발언의 진위를 따져보겠지만, 국회에서의 위증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고발까지도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
2008년 그에 대한 평가는 '중소기업이나 서민들의 생활비에 아무런 고려 없이 오직 대기업의 수출을 장려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환율을 조작'했다는 말까지 나오는데, 정쟁으로 인한 비하를 감안하더라도 위 사례들을 보면 일반적인 국민들의 입장을 신경쓰지 못한 측면이 있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27]
다만 이러한 평가는 다시 생각해봐야할 측면이 있는데, 실제로 한국 경제는 수출-대기업 중심의 경제이며 대기업 경제는 대다수 서민경제와 무관한 그들만의 리그로 보이나 실제는 대기업과 대기업에 납품하는 중후장대 중장비 및 하청업체들로 구성되어 있다. 일례로 세계 조선업의 침체로 인하여 거제 및 울산은 심각한 내수침체를 겪고 있으며 한국/경제의 토대라고 하는 제조업은 해외에 직접 수출하는 기업들과 거기에 납품하는 기업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수출을 국가 경제의 최우선과제로 삼는 것이 잘못은 아니며, 실제로 한국은 2009년 마이너스 성장을 모면한 거의 유일한 나라이다.
하지만 환율로 인해 상승한 물가는 환율이 내려가면 다시 안정화 되지만 심각한 경기침체는 방향성을 가지고 쉽게 회복되지 못한다는 것을 생각하자.
종합하면, 현대식으로 말해서 한국판 아베노믹스를 5년 먼저 실행한 사람(...)이다. 다만 시기적으로 보면 세계 경제 위기는 2008년 후반기 이야기로, 고물가, 고환율은 2008년 2월 강만수가 기획재정부장관으로 취임한 이후 이미 반년 가까이 가속화 되었는데 강만수는 그 부작용에 전혀 신경 안 쓴 게 문제였다. 그러다가 통화 스와프로 잠깐 반짝 하고 빛난 것은 맞는데, 그 몇 달 뒤인 2009년 2월에 결국 잘렸다.
또한 리먼 브라더스 사태가 터지기 2개월 전 산업은행김승유(전 하나금융회장)를 중심으로 이명박, 강만수의 지지하에 인수를 추진했었다는 문건이 발견되었다. 민유성 산은회장은 투자의향에 대하여 순서가 잘못되었다고 반박을 하였다. 9월 10일 산업은행은 인수포기를 발표하였고 9월 15일 리먼브라더스는 파산했다. 만약 인수를 하였다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28]
참고로 결국 리만 브라더스의 북미 지역은 바클리스 캐피털이, 아시아 지역과 유럽 지역의 일부는 일본의 노무라 증권이 인수했다.[29]

3. 여담


  • 가장 유명한 명언을 꼽자면 "올해는 정말 원 없이 돈을 써 봤다." 2008년도에 돈을 하도 써서 윤증현 장관 시절엔 이 정도의 외환 정책이 다시 재개되지 못했다. 이것이 경제 관리 중심의 주류 "모피아"와 강만수계 모피아의 차이라고 평가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이런 수준으로 돈을 끌여쓸 수 있었을정도로 노무현 정부가 재정을 탄탄히 다졌단 이야기도 될 수 있다.
- 두번째 정도라면 "지하자금이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알 수 있다면 지하자금이 아니다" 가 있다. 고위 공무원 시절 지하경제 규모가 얼마냐는 물음에 특유의 변명성 말 돌리기로 한 말이지만, 지하경제를 가장 정확하게 나타낸 말이기도 하다.
  • 부하직원들의 의견 제시 자체는 막지 않지만, 이 의견 전달 경로에서 본인의 의견을 함께 제시하기 때문에 결국은 (지위와 업무경력, 명망이 더 나은) 강만수의 견해가 채택되는 경우가 많았다[30] 한다. 다만 이로 인해 자기 소신을 굽히지 않는 독불장군이라는 비판섞인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 2000년에 개정된 로마자 표기법에 큰 불만을 갖고 있어서, 언젠가 다시 개정해야 한다는 의지가 강한 분이기도 하다.
  • 2017년 1월, 미국 대통령 당선인인 도널드 트럼프가 "강달러는 옳지 않다"는 트위터를 올렸다. 이후 달러의 가치는 곤두박질을 쳤고 구두에 의한 환율시장 개입이라고 주요 언론들이 비판하였는데, 2008년 3월 강만수의 구두개입을 인용하면서 섣부른 발언은 시장의 기능을 훼손한다는 사례로 인용이 되었다.
  • 결국 이러한 국가적 위기사건때 마다 경제 중요 직책을 맏아서 본인의 결정으로서 여러 구설수를(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낳은 탓에 2018년 영화 국가부도의 날[31] 에 악역의 모티프가 되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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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근의 무곡리, 도리, 대목리와 함께 진주 강씨 집성촌이다.[2] #[3] 다만, 세간에는 "관료들에게는 거짓말할 권리가 있다"는 내용으로 알려져 구설수에 올랐다. 게다가 세월 흐름과 사람에 따라 예외가 늘어날 여지도 있기 때문에, 비록 사실을 이야기했을지언정 보다 완곡하게, 또는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하면서 뉘앙스를 조절할 필요가 있었다는 점에서 아쉬운 부분. [4] 시문학 장르 자체가, 해야 할 말을 생략-함축하는 과정을 거쳐 나오는 표현의 총합이다. 아마도 언행으로 인해 수차례 구설수에 올랐던 강 전 장관을 아끼는 지인이 시 작문을 추천해준 것으로 추정된다[5] 30대의 젊고 쟁쟁한 경제 관료들이 주축을 이뤘다고 한다[6] 미국 달러-일본 엔화, 독일 마르크화, 프랑스 프랑화의 교환비를 종전 대비 1/2로 줄인 협상. 예를 들면 기존에 일본에 진 200억 달러 빚을 갚기 위해 100억 달러만 내도 채무 상환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얘기이다.[7] 하필이면 1997년 외환 위기 즈음인데, 말하자면 위기 때 고위직에 중용될 능력은 갖추고 있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당시 무리한 환율 방어정책을 펼치다 외환위기를 초래한 경제관료들 가운데 주역급으로 주목받으며 강경식 재경원 장관과 함께 실패한 소방수로 후대의 비난을 받게 된다. 강 씨는 이후 재야에서 “고환율정책을 썼더라면 IMF위기는 일어나지 않았다”는 주장을 펼치면서 후일 고환율정책으로 불러올 환난을 예고했다. #[8] 월간조선,국가부도 직전에 경제팀 경질, 후임자들은 우왕좌왕[9] 이명박 정부 기재부 장관들은 다 경남 출신이다[10] 좋은 의미의 별명이 아니다. 리만 브라더스 참조.[11] 언론에 유독 고혈압으로 붉게 달아오른 얼굴이 자주 비춰졌다[12] 경제부총리직을 사임하는 자리에서 "올해 원없이 돈을 써보았다."는 사임사를 발언하기도 했다[13]한은포 전술로 인해 풋만수(풋옵션의 풋과 강만수를 합친 단어. 풋옵션은 주가지수가 내려가면 돈을 번다) 라는 별명이 각종 주식/경제 커뮤니티에 돌았다고.[14] 한미 통화스와프는 한국은행과 미 FRB(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계약이다. 따라서 협상도 두 나라 중앙은행 간에 이뤄진다.[15] 미연준과 한국은행은 지난 9월24일부터 한달여간 극비협상을 통해 한국에 300억달러 통화스왑을 해주기로 하고 이를 지난 10월30일 새벽 4시(한국시간)에 미연준과 한국은행이 동시 발표하기로 합의하기로 되어 있었다.[16] 또한 환란 후 10년 만에 주류에 재진입하는 데 성공한 舊 재무부 인맥(세칭 모피아)의 대부로써[17] 하지만, 정준양 회장이 물러난지 2년 후인 2015년에 워런 버핏이 포스코 지분을 전량 매도하고 철수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주요 사유로는 정준양 회장 치하의 포스코측이 대우조선해양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주주인 버핏의 의견("앞으로 조선산업은 한국에서 전망이 없다. 중국으로 주도권이 넘어갈 것")을 무시하고, 인수를 강행했다는 점이 제시되었지만, 대우조선해양이 잠수함을 생산하는 준방산업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 외에 다른 이유도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18] 결국 40대 초반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19] 굳이 현대사회뿐만 아니라 유교가 국가 이념인 조선시대인 오랜 옛날부터 상인을 비천한 이들이라 여겨온 이유도 이것이다. 유교가 농본주의를 중요시한 것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물가를 어지럽혀 국가의 경제의 근간 자체를 뿌리부터 흔들고 썩어가게 만드는 것이 상인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현대 사회에서도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중국사에서 손꼽히는 위인들 중 한 명인 장량은 이러한 이유를 들어 "상인에게 사기를 치더라도 신의가 상하지 않는다"고 말한 적도 있다.[20] 강만수는 외환위기와 2008년 금융위기를 재정부/기재부에 있으면서 둘다 겪었다.[21] <'종이호랑이 아니다'..정부 고강도 개입>(종합2보), 연합뉴스, 2008년 9월 3일.[22] 일본은행과 일본 금융 당국이 당시 엔고를 막기 위해서 헤지펀드에 대항해 분당 10억 엔, 35일간 30조 엔의 달러 매입을 퍼부은 사건.[23] 옵션시장의 옵션 + 강만수. 풋옵션은 주가가 떨어지면 돈을 번다.[24] 해당 글은 2chan에 올라온 스레드를 번역한 것이다.[25] 물론 이는 당시 외환위기를 너무 심하게 겪은 것에 대한 심리적 요인이 크다.[26] '강만수 "美 금융위기 영향 제한적"', 아이뉴스.[27] KDI "정부 고환율 정책으로 이익 본 회사 16개 불과"[28] 출처:"2008년 리먼 인수추진 MB 라인 입김 있었다" [29] 결국 시간이 흘러서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인수한 노무라 증권은 현재 흑자 상태이다. 하지만, 인수 직후 유능한 美 사원들이 대거 이직하는 사태를 감수하고도 흑자로 전환한 것은, 노무라 증권 측의 오랜 경험의 힘이라는 측면이 더 강하다고 봐야 한다.[30] 7번째 질문부터[31] 배우 조우진이 맡는 배역. 재정국(=당시 재정경제원) 차관으로 나오는데, 권력이 상당한 것으로 묘사된다. 영화 내에서 위기를 기회삼아 중소기업노동자들을 갈아엎고 대기업, 외자중심의 경제구조를 만들려고 하는 완전한 악역으로 김혜수가 맡는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 실제로는 없는 부서이다. )과 대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