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종묵

 


'''역임 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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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귀족 남작'''
<colbgcolor=#0B0B3B><colcolor=#ffde09> '''대한제국 중추원 의장
민종묵
閔種默 | Min Jong-muk'''
'''이름'''
민종묵 (閔種默)
'''출생'''
1835년 (헌종 1) 2월 14일
한성부 (현 서울특별시)
'''사망'''
1916년 7월 20일 (향년 81세)
'''직업'''
관료, 외교관, 정치가
'''종교'''
유교 (성리학)
'''본관'''
여흥 민씨 (驪興)
'''자'''
현경 (玄卿)
'''호'''
한산 (翰山)
'''작위'''
조선귀족 남작
'''약력'''
한성부윤, 병조판서
외부대신, 중추원#s-2 의장
형조판서, 탁지부대신
농상공부대신, 조선귀족 남작
'''비고'''
친일인명사전 등재
1. 개요
2. 생애
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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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민종묵(1835 - 1916)은 구한말의 친러파 관료이자 정치가, 그리고 조선귀족 남작 작위를 받은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현경(玄卿)이고 호는 한산(翰山)이다.

2. 생애


1835년(헌종 1) 2월 14일,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명성황후와 같은 여흥 민씨로, 본래 민승세의 아들이었지만 민명세의 아들으로 입양되었다.
1874년, 과거에 급제해 성균관 대사성, 한성부우윤, 병조참판, 이조참판, 대사헌 등을 지냈다. 여흥 민씨 세력에 속해 있던 보수 성향 관료로 친러파에 속해 있었다. 갑신정변 이후로는 형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지냈다.
1889년 독판교섭통상사무가 되어 각국과의 통상사무 처리를 맡았고, 1896년에는 아관파천을 주도했다. 1898년에는 외부대신이 되었고, 이후 독립협회의 탄압을 받기도 하였다. 같은 해 만민공동회를 해체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1900년에는 탁지부대신, 농상공부대신, 예식원장 등에 임명되었다.
고종과 관료들의 모습 (1890년)
가운데가 고종, 왼쪽부터 이정로, 심상한, 김윤식, 김성근,
이용원, 김병익, 민종묵, 서정순, 이주영, 김영전
1905년에는 중추원#s-2 의장에 올랐다. 이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귀신도 사람도 다 분해하는 것이고 나라의 법이 용서할 수 없는 것"이라며 을사조약에 반대하였고 조약 체결에 찬성한 관료들을 처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1910년 경술국치 직후 일본 제국으로부터 조선귀족 남작 작위를 받았고, 2만 5천 원 정도의 은사 공채도 받았다.
1911년, 《매일신보》에 경술국치 1주년을 축하하는 글을 실었다. 1916년 7월, 81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남작 작위는 민철훈에게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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