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까라족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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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까라족은 수단 공화국의 다르푸르와 차드, 니제르, 에티오피아, 남수단 등지에 걸쳐 거주하는 아랍계 유목민족이다. 다만 흑인과의 혼혈이 잦았기 때문에 투아레그족이나 누비아인처럼 전형적인 흑백혼혈 외모를 가지고 있다. 이들의 명칭은 암소, 목동을 의미하는 아랍어 단어 바까라 ( بقارة)에서 비롯되었다. 과거 마흐디 운동을 주도한 민족이며 한 때는 수단 전체를 장악할 뻔 하였으나 마흐디 운동이 진압된 이후 많은 수가 차드로 이동하였다. 오늘날 인구는 6백만여 명 정도로 추산되며 출산율이 높아 인구가 계속 증가하는 추세이다. 현재는 다르푸르와 차드 외에도 우간다, 모리타니, 말리, 나이지리아에도 분포 거주하고 있다.
2.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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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12세기 이후 수단의 이슬람 왕국들이 무너지자 쳐들어와 정착한 베두인의 후손이다. 바까라족은 단일 부족이라기보다는 베두인의 후손들로 이루어진 여러 부족의 연합 공동체였다. 이들의 선조들은 흑인 여성들을 처첩으로 삼아 인종적으로는 아프리카 흑인에 더 가깝지만 언어는 아랍 방식을 지켜왔다. 종교는 아프리카 토속 신앙 대신 이슬람을 고수하였으나 바까라족 절대다수가 문맹이었기 때문에 오랜 기간에 걸쳐 조금씩 교리에 변질이 일어났다.[1] 이들은 베두인이 사용하는 전통적인 검은 천막을 버리고 대신 아프리카 전통 풀과 소똥으로 만든 오두막에서 거주하는 것을 선호하였으며, 낙타를 주로 키운 베두인과 다르게 말과 양을 주로 키웠다. 이들의 선조인 베두인 여성들이 아바야로 몸을 가린 것과 다르게 바까라족 여성들은 하의만 입고 신체 대부분을 노출하고 다녔다. 바까라족 여성들이 니캅과 아바야를 입게 된 것은 마흐디 운동 이후이다. 이들의 생활은 사헬 지대의 초원에 맞게 변형되었다.
3. 코끼리와 기린 사냥
바까라족의 특징적인 문화로 코끼리와 기린 사냥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유라시아 유목민들이 활을 가지고 사냥한 것과 다르게 3미터가 넘는 찌르는 창으로 사냥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는 코끼리나 하마 등이 활로 사냥하기 힘든 동물이었기 때문이다. 바까라족은 코끼리를 사냥할 때 먼저 기수 한 명이 코끼리의 화를 돋운 후 덤불로 유인한 뒤 매복해있던 여러 명이 코끼리의 항문이나 고환을 창으로 찔러 사냥하는 방법을 애용하였다. 이렇게 얻은 상아는 외부로부터 무기를 구입하는데 사용하였다.
바까라족은 기린 고기를 즐겨 먹었다. 기린은 무려 500미터 밖에서도 위협을 느끼면 빠른 속도로 도망치기 때문에 바까라족 기수들은 말을 전속력으로 몰아 기린 다리를 창으로 찔러 사냥하곤 했다. 숙련된 사냥꾼의 경우 기린 뒷다리에 치여죽는 경우는 드물었지만, 많은 기수들이 기린을 전속력으로 추격하는 와중에 도랑에 떨어지거나 나뭇가지에 부딪혀 목숨을 잃었다 한다.
오늘날에는 전통적인 코끼리와 기린 사냥이 단절되었다. 코끼리와 기린은 계속 감소하는 반면, 바까라족 인구는 계속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소말리인들이 아프리카 각지에서 코끼리 밀렵 산업을 장악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4. 생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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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북아프리카 남부 사헬에 거주하며 사헬의 환경에 맞춰 고유의 유목 문화가 발달해 있다. 사헬은 사바나 초원으로 풀과 관목이 있고 결정적으로 우기와 건기가 뚜렷해 강수량이 적은 사막이나 스텝 지대와는 여러모로 생활양식이 다를 수 밖에 없다.
또한 이들은 체체파리가 옮기는 전염병인 수면병을 피해 건기와 우기를 따라 거주구역을 옮겨다녔다. 체체파리가 창궐하는 우기에는 북상하여 수단 남부 쿠르두판과 다르푸르, 센나르와 에티오피아 저지대 심지어 이집트 남부 아스완까지 북상하고 비가 안 와서 목초지가 없는 건기에는 남하해 남수단, 우간다, 콩고민주공화국 등 중앙아프리카 일대까지 내려가곤 하였다.
이동하는 도중 땅이 비옥해보이는 곳에는 기장과 수수 종자를 뿌려놓아 알아서 자라게 한 후 뿌려놓은 반야생 곡물이 익을 시점이 되면 다시 찾아와 추수해 먹었다. 이런 곡물들은 맛은 없고 수확량도 적었지만 생존력이 강했기 때문에 바까라족 생계에 많은 보탬이 되었다. 추수한 잡곡은 가축의 젖과 섞어 죽으로 만들어 먹었다.
바까라족 남성들은 이동할 때 말이나 당나귀를 타고 이동하였으며 여성과 아이들은 소를 타고 이동하였다. 이들은 개인 소지품이 거의 없었는데 중앙아시아의 유목민보다 소지품이 더 가난하고 초라한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다른 아프리카 부족들과 마찬가지로 여성 할례같은 악습이 있었다.
[1] 부적을 담근 물을 신성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