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흐디 운동
1. 개요
19세기 이집트의 케디브 왕조와 영국의 이중 지배를 받던 수단에서 이슬람 학자 무함마드 아흐마드(محمد احمد, Muḥammad Aḥmad)가 바까라족[1] 의 수장 압둘라 와드 토르샤인의 추대를 받아 1881년 스스로를 마흐디(Mahdi, 영도자)로 선언하며 시작된 이슬람 근본주의 운동. 마흐디야 라고도 부른다. 이들은 자신들을 수피 신도라는 뜻의 데르비시(Darvish)라고 칭했으며 19세기 말 신정 국가인 마흐디 국을 건설하였다.
2. 배경
수단의 무슬림들은 수니파였으나 동시의 수피 신도이기도 했다. 수니파들은 시아파와 달리 구세주 교리[2] 를 갖고 있지 않았으나 수단 무슬림들 사이에서 번성하던 수피 교단은 시아파의 마흐디 교리를 받아들인 상황이었다. 19세기 초 무함마드 알리에 의해 이집트가 수단이 정복되고 수에즈 운하 공사비 문제로 이집트가 영국의 보호령이 되는 과정을 통해, 이집트와 영국의 이중 착취에 시달리던 수단인들은 이집트의 아랍인들과 오스만 제국의 튀르크인들을 불신자로 규정하는 무함마드 아흐마드를 영도자 마흐디로 받아들였다.
압둘라를 비롯한 수단의 수피 승려들은 무함마드 아흐마드가 터키인과 영국인 불신자들과 그들의 하수인 이집트인[3] 으로부터 수단인들을 구하고 지상낙원을 건설하기 위해 신이 보낸 영도자라고 추켜세웠다. 마흐디 운동 지도자들은 특히 오스만 제국을 적대시하였는데 오스만 제국은 불신자 집단이며 오스만 제국이 건재한 동안에 이루어지는 성지순례는 성지 순례로서의 의미가 없다는 주장을 하였다. 수단 아랍인 상당수가 맘루크 왕조의 아랍인 탄압[4] 을 피해 수단으로 탈주한 이집트 베두인들을 조상으로 두었기 때문이 전통적으로 반 튀르크 정서가 강했는데, 한술 더 떠서 19세기 수단에 들어온 오스만 제국 내 알바니아인[5] 들은 수단에서 가렴주구를 일삼았다. 무함마드 아흐마드는 하디스에는 아랍인과 튀르크인이 전쟁을 벌이게 된다는 예언[6] 을 근거로 심판의 날이 도래하기 직전 튀르크인과 아랍인의 성전이 시작되었다 선언하였다.[7]
엎친데 덮친 격으로 이집트를 보호국으로 만든 영국에서는 이 지역의 노예무역을 금지시켰는데, 상아 무역과 노예 무역이 같이 이루어지던 당시 상황[8] 에서 이는 상당수의 수단인들에게 있어서 “사업은 하지 말고 세금만 많이 내라”라는 명령으로 받아들여졌다. 바까라족 유목민의 신비주의 신앙 광신과는 거리가 멀었던 도시의 부유한 상인들마저 마흐디 운동을 적극 지원할 환경이 조성된 셈이었다.
3.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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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마흐디 운동에 호응한 바까라족과 베쟈족들이 수단 내 주둔한 이집트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으며, 이집트 식민지 군을 지휘하던 영국인 장교 중 적지 않은 수가 마흐디 군에게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1883년 11월 일어난 샤이칸 전투의 대승에 고무되어 많은 부족들이 마흐디 운동에 가담하자 무함마드 아흐마드와 압둘라는 마흐디 국가를 선언하였다. 1885년에는 청나라에서 영국군을 지휘했던 상승 장군 찰스 조지 고든이 마흐디 군에게 전사하면서 영국 내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영국군은 무함마드 아흐마드를 체포하거나 사살하여 고든의 복수를 노렸으나 무함마드 아흐마드 역시 고든의 사망 직후 발진티푸스로 1885년 41세로 사망하였다.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간파한 영국은 이집트로 맥심 기관총을 비롯한 최신 무기로 무장한 영국군을 급파하고 당시 보호국이였던 헤디브 왕조 치하의 이집트군의 훈련과 지휘 체계를 보강하였으며 수단 남부의 누에르족과 딩카족 현지인 군인들을 고용,징집하여 훈련시켰다. 또한 종래에 수단의 기득권을 누리던 수단 북부의 아랍 부족 자알리인족을 지원하여 다르푸르의 바까라족과 싸우게 만들었다. 바까라족은 아랍어 방언의 일종을 사용하였으나 아랍인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노린 것. 또한 북부의 아랍인 순니파들은 상술한 종교적인 이유로 마흐디 운동과 거리를 두고 있었다.
1899년 키치너 장군이 이끄는 군대가 움두르만에서 4만의 마흐디 군을 궤멸시키고 항복을 받으면서 마흐디 운동을 끝을 맺는다. 마흐디 국의 실질적인 지도자였던 압둘라 와드 토르샤인은 움두르만 전투의 대패 이후 벌어진 다른 전투에서 영국군에게 말을 타고 돌격하다 전사하였다.
[1] 바까라 아랍인은 흑인과 동화된 베두인의 후손으로 차드와 수단에 걸쳐 거주하며 기린과 코끼리를 사냥하던 유목 민족이었다.[2] 시아파의 구세주 교리는 영지주의의 영향으로 인해 미륵 신앙의 요소를 상당부분 흡수하였다.[3] 당시 이집트의 지도자들은 오스만 제국의 알바니아인 군인 출신이었다.[4] 아랍인들에게 말을 타는 것과 갑옷을 입는 것을 금지시켰다.[5] 이들 중 상당수가 오스만 제국에 군인으로 복무하고 있었는데, 같은 알바니아 출신이던 무함마드 알리가 이집트를 장악한 후 이들을 대거 불러들여 자신의 심복으로 삼았다. 이들의 직책은 공식적으로는 바시 바주크(봉급을 받지 않는대신 민간인을 약탈하는 비정규군 보병 전사)였으나 실상은 19세기 버전 시파히에 가까웠다.[6] 오늘날 이슬람 학자들은 이를 몽골 제국의 바그다드 침공과 칼리프 시해로 해석한다.#[7] 재밌게도(...) 마흐디 군은 당시 이집트와 수단에 들어온 영국군들을 “기독교를 믿는 튀르크인”이라고 불렀다. [8] 수단에서는 전통적으로 상아 운반을 흑인 노예에게 시켰으며 상아를 수출할 때 상아를 나르는 노예도 같이 부록으로 수출하는 관습이 있었다. 상아의 가격은 상아를 나르는 노예보다 비싼 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