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톨로메오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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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톨로메오스 1세의 문장[1]

현재 재위 중인 정교회에서 '동등함 가운데 첫 번째'인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2] 공식 직함은 '''새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대주교이자 세계 총대주교인 바르톨로메오스 1세 성하'''(Η Αυτού Θειοτάτη Παναγιότης ο Αρχιεπίσκοπος Κωνσταντινουπόλεως Νέας Ρώμης και Οικουμενικός Πατριάρχης Βαρθολομαίος Α')이며, 터키 내에서는 터키 정부의 암묵적인 정교회 억압 정책에 따라 '이스탄불의 그리스 정교회 총대주교'로만 지칭된다.
본명은 디미트리오스 아르혼도니스(Δημήτριος Αρχοντώνης)로 1940년 2월 29일 터키 마르마라 해에 위치한 임브로스 섬(터키어로는 괵체아다 Gökçeada)에서 태어났다.[3] 그의 아버지는 이발사였으며 커피 가게를 운영하였다. 소년기에 그는 괵체아다와 이스탄불 등지에서 공부하고, 이스탄불 근처 섬에 위치한 정교회 할키 신학교에 들어갔다. 1961년 우수한 성적으로 신학교를 졸업한 후 임브로스 대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고, 나중에는 임브로스 대주교, 엘리오폴리스, 칼케돈, 멜리톤 등지에서 대주교직을 역임했다. 1961년부터 1963년까지 터키 육군 예비군 장교로서 국방의 의무를 다했다. 1963년부터 1968년까지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청의 장학금으로 로마에 있는 그레고리오 대학교 교황청 소속 동방 연구소에서 박사과정을 마쳤다. 그의 박사논문 제목은 <정교회 안에서 성경의 성문화 과정과 교회법 제정에 관하여>였다.
1968년 이스탄불로 돌아왔을 때 할키 신학교 부학장으로 임명되었으며, 1969년 10월 19일 학장이 되었다. 6개월 뒤 당시 세계 총대주교였던 아테나고라스가 바르톨로메오스를 성 안드레아 대성당의 사제로 임명했다. 나중에 스위스 보세이 에큐메니칼 연구소에 가서 교회법에 대하여 더 많은 공부를 하였다. 그는 그리스어, 영어, 터키어, 이탈리아어, 라틴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 7개 언어를 유창하게 말한다. 수많은 연구논문들을 출판하였으며, '동방 교회 정의를 위한 협의회' 창립 멤버인 그는 이 단체의 부회장직을 역임한 바 있다.
1972년 디미트리오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로 선출되자 총대주교청 사무청을 개설하고 바르톨로메오스를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197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부주교가 된 바르톨로메오스는 이후 18년 동안 디미트리오스 세계 총대주교의 가장 친밀한 보좌관으로 봉사하였다. 1975년 이후로 그는 WCC 신앙과 직제 위원회 회원직을 수행하고 있으며, 8년 동안 부회장직을 수행하기도 한 바르톨로메오스는 1991년 호주 캔버라에서 열린 제7차 세계 WCC 대회에 정교회 대표단을 인솔하여 참석하였다.

1991년 10월 2일 디미트리오스 세계 총대주교가 사망하자, 10월 22일 만장일치로 바르톨로메오스가 제271대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에 선출되어 11월 2일 총대주교좌에 착좌하였다. 그는 총대주교직 착좌 연설에서 그의 비전은 정교회의 영적인 부흥, 정교회의 일치, 다른 그리스도교 종파들과의 화해, 타종교인들 간의 관용과 공존, 환경 보호, 정의 평화 운동에 앞장서는 것이라고 밝혔다. 특별히 그의 국가적, 종교적, 교육적 배경으로 인하여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의 대화와 화해, 세계 그리스도교회 일치와 화해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상당한 리더십을 보여주고 있다.
에르도안 정부 이후 점차 종교국가적 면모를 보이고 있기는 하나 역사적으로 터키는 정부가 종교를 장악하려는 성향의 강경한 세속국가였으며, 공화국종교부(T.C. Diyanet İşleri Başkanlığı)가 (주로 이슬람을 담당하긴 하지만) 터키 내 모든 종교행사를 감독, 관리하도록 되어 있다. 하지만 터키 내 정교회는 정부의 터치도 받지 않으며, 자체적인 성직 서임권도 보장받는다.[4] 국가의 입맛에 따라 맘대로 총대주교를 갈아치우기를 관행처럼 하던 오스만 제국 시절과 비교해보면 물론 지금이 낫다. 물론 실제 터키인들과의 관계에서 1955년 '이스탄불 포그롬[5]'으로 입은 막대한 피해들과, 도시 개발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알게 모르게 성당 철거 등의 불이익, 포그롬 이후의 불법적으로 강탈된 재산 행사 제한 등의 사례를 볼 때 결코 만만치 않은 상황이긴 하다. 사실 종교 문제 이전에 '그리스인'이라는, 터키인들이 상당히 의식하는 소수민족이라는 점에서 알게 모르게 활동에 눈치를 보고 실제로도 교구 운영은 그리스인 감소세와 이슬람화 정책 등 이유로 어려움을 겪는 것은 맞는다.[6] 그렇지만, 생각보다 에르도안 총리가 꽉 막힌 사람은 아닌지, 쿠데타 이전 에르도안 집권기에는 터키인들이 폐허가 되었던 곳곳의 정교회의 성당들을 복원해 주고 중요한 축일에 예배도 드릴 수 있게 해주는 등 한때나마 화해 무드가 불기도 했다. 그리고 총대주교 스스로도 터키어를 구사하고 자신을 비롯한 정교회 신자들이 터키 시민으로서의 국방, 세금 등 의무를 다하고 있으며 본인은 터키 시민이라는 점을 지속적으로 어필하곤 했다.[7]
1971년 터키 정부는 세속주의 원칙에 따른 교육법을 어겼다는 이유로[8] 127년간 존속하며 터키 내에서 정교회 성직자들을 양성해 온 할키 정교회 신학교를 폐쇄해버렸다. 이 때문에 총대주교는 할키 신학교의 부활을 위하여 전세계 그리스도인들의 도움과 기도를 호소하고 있다. 하지만 앞서 서술한 대로 정교회만이 아니라 이슬람이고 모든 종교에 한해 사립신학교 설립을 금지했던 조치였기에 국외 기독교에서도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모든 종교탄압이라고 되려 이슬람 아랍 측에서 반발할 지경이었으니 그래서 일부 기독교의 비난 외에는 뭐라고 할 수 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1995년 정교회 한국 전교 95주년을 맞아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으며, 2000년 한국 전교 100주년을 받아 두 번째 방한하였고, 2005년에는 한국 정교회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청 관할이 된 지 50돌 맞이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세 번째로 한국을 방문하였다. 한국외국어 대학교에서 특별강의를 발표하고 명예박사학위를 수여받기도 했다.
2018년 서울 성 니콜라스 대성당 축성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네 번째로 방한하여 천주교 염수정 추기경, 도종환 문체부 장관 등과 면담하고 문재인 대통령을 예방하여 한반도 평화를 지지하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한국에 애착이 깊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와 같이 방한이 잦은 것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청 소속인 다른 서양 국가들에 비하여 한국을 매우 특별하게 대우하는 것이다.
2018년 연말에 우크라이나 정교회 독립 문제로 러시아 정교회와 대립각을 세웠고, 결국 러시아 정교회가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성사교류 단절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바보가 아닌 이상 러시아 정교회가 발끈할 줄 예상할 수 있었을 테니, 이 또한 바르톨로메오스 1세의 계산이었을 것이다. 이 사건으로 그는 정교회 역사의 한 장에 이름을 뚜렷이 남겼다. 자세한 내용은 2018년 정교회 분열 항목 참조.

[1] 십자가 사이에 적힌 그리스 문자들은 '바르톨로메오스'이다.[2] 계산하기에 따라 제269대, 제270대, 또는 제271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 본다.[3] 임브로스와 괵체아다는 같은 지명을 그리스어로 부르느냐 터키어로 부르느냐의 차이다. 여튼 괵체아다 섬은 이스탄불과 함께 1923년의 그리스-터키 인구 교환에서 제외된 지역이다.[4] 종교부가 관리하는 터키 내 이슬람교단들은 모스크 설립부터 이맘, 뮈에진 등 성직자의 임명, 부임도 전부 국가가 관리한다.[5] 터키와 그리스는 놀랍게도 1950년대 초반만 해도 나쁘지 않았다. 터키에선 그리스보다 더 악랄한 소련과 공산주의를 견제하자는 움직임이 거셌고 그리스와 이제 동맹이라는 인식을 정부에서 홍보할 정도였다.그리고, 소련을 견제하고자 공산국가이던 유고슬라비아와도 우호를 다지며 1953년에는 터키, 그리스,유고슬라비아 3국 발칸 동맹까지 맺었다. 터키군들이 그리스로 파병훈련가서 반갑게 인사하고 같이 스포츠 대회로 치루며 사이가 조금은 좋아지는가 했으나, 1955년 키프로스에서 독립움직임과 같이 터키계에 대한 테러가 벌어지자 동맹도 깨지고 나아가 터키 내 그리스계에 대한 테러로 이어진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그리스인이 운영하는 가게 1천여 곳이 넘게 박살나고 그리스계가 운영하던 호텔 1백여 곳과 및 그리스 정교회 성당 70여 곳이 파괴되고 그리스계 약 서른 명이 살해된 사건이다.[6] 실제로 남은 정교회 신자들이 2등시민 취급받아 열악한 환경에 놓이기도 했고, 끝내 이주를 선택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마틴 루터 킹 목사의 흑인 민권 운동을 지원했던 남북미 대주교 이아코보스 쿠쿠지스이다.[7] 2016년 터키 군사쿠데타 시도 이후 에르도안이 1년에 한 번씩 거행되던 트라브존 수멜라 수도원에서의 성찬예배를 불허하면서(수멜라 수도원은 2015년 9월부터 현재까지 복원 공사로 인해 관광객의 접근이 금지되어 있다. 애초에 공사 중인 성당에서 예배가 가능한 일인가? 복원 기간은 1년으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2016년 12월 13일 현재도 완료되지 않은 상황이다.) 에르도안 정부의 대 정교회 정책 방향의 전환이 있지 않은가 하는 불안감이 감돌고 있다. 더군다나 세계 총대주교가 미국의 조야 및 정교회 공동체와 긴밀하게 교류하는 것을 견제하고자 하는 의도도 생길 수 있다. 실제로 2016년에 열린 범정교회 공의회의 원래 개최지는 이스탄불이었으나 크레타 섬으로 개최지를 바꾸었다.[8] 종교 문제로 보는 것보다는 터키그리스 간 민족 문제로 바라보는 것이 오히려 적절할 수 있다. 그리스가 모든 이슬람 국가들과 사이가 나쁜 건 아니며 반대로 터키 또한 모든 기독교 국가들과 사이가 나쁜 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1960-70년대는 종교주의자들과 대립하느라 유난히 세속주의 원칙을 빡빡하게 요구했던 시절이라 정교회 성직자뿐만 아니라 이슬람 성직자조차도 종교행사 때가 아니면 성직복을 입고 공공장소나 길거리를 활보함 자체가 금지되었다. 할키 신학교의 폐지는 터키의 세속주의와 관련이 깊다. 1971년 터키 헌법재판소가 사립 신학교 설립을 금지하고 이스탄불 대학으로 편입해야 한다고 판결하자 할키 신학교 운영재단 측이 거부하고 학교를 폐쇄했기 때문이었다. 즉, 세속주의를 강하게 관철하고자 모든 대학들, 특히 종교학교들을 국립화하는 와중에 정교회 신학교만 예외로 할 순 없던 것이었다. 참고로 2016년 현재 터키에서는 이슬람 종교학교조차도 아타튀르크와 세속주의에 대해 의무적으로 학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