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사 호
'''Vasa'''
스웨덴의 3층갑판 갤리온 군함이자 침몰선. 침몰선들 중 목재 군함이 가장 잘 온전하게 보존된 특이한 케이스다. 침몰한 상황을 보면 크게 파손될 이유가 적었다.
17세기 초 스웨덴 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1] 는 30년 전쟁을 바탕으로 성장한 스웨덴의 해군력을 과시하고 발트해의 제해권을 차지하기 위해 신성로마제국과 경쟁을 하며 해군력을 강화하고 있었다. 이에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스웨덴의 강성함과 왕실의 위엄 그리고 발트해의 안전권을 보장하기 위해 새로운 갤리온형 전함을 만들라고 명했다. 그리하여 흐로테라는 상인을 통해 독일 출신 헨릭과 헨드릭을 데려와 함께 바사 호를 건조하기로 하고, 헨릭과는 바사 호의 건조 이후, 4년간 스웨덴 해군에서 유지보수를 하고 신예함 4척 건조에 참여하기로 계약을 맺었다. 그 자신도 해군력 강화 정책을 펼치면서 군함 건조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기에 바사 호의 설계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1626년에 첫 번째 함을 건조, 1627년 진수하여 1628년 스웨덴 해군이 인수했는데 이때 헨드릭은 지병으로 사망했다.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함명을 자신의 왕조 이름을 따서 바사(Vasa)라고 지었다.
1628년 8월 10일, 스웨덴의 스톡홀름항에서 수많은 인파들과 귀족들이 보는 앞에서 폴란드로 첫 항해에 나섰다. 바사호는 엄청난 환호와 함께 천천히 항구를 빠져나가 연안으로 뱃머리를 돌린다. 바사 호는 첫 항해를 구경하로 온 이들에게 선물이라도 주는 듯 한쪽 현의 함포를 일제사격을 하는 장관을 보여줬다.
그런데 '''갑작스런 돌풍과 대포의 반동이 합쳐져 배가 좌현으로 기울더니 전복되어 침몰'''했다. 그것도 출항한 지 30분 만에.[2]
이 소식을 들은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통탄해하며 '대포는 건져 올려서 녹여 쓰고, 돛대는 쳐서 없애 나로 하여금 이 배를 잊게 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에 따라 대포들은 모두 건져내었다. 북방의 사자에게 남긴 몇 안 되는 상처인 셈.
바사 호는 당시의 선박 제조술이 총동원된 걸작품이었다. 하지만 선체 자체는 잘 만들어진 반면 하갑판과 상갑판의 균형이 맞지 않았던 데다, 대포를 너무 많이 탑재했다. 장식물도 너무 많았고, 구스타브 아돌프 2세가 갑작스럽게 용골을 수정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바람에 설계가 수정되었다. 이 때문에 처음과 달리 제대로 설계가 되지 않아 윗쪽은 무겁고 아랫쪽은 가벼워, '''무게중심이 높아져 버렸다.''' [3] 다시 말해 무게가 한 쪽으로 쏠릴 때 선체가 쉽게 기울어지게 된 것이다. 조선공들은 이런 결함을 보완하고자 함선을 건조하며 균형을 맞추는 용도로 하갑판에 돌 수 톤을 깔았는데, 이마저도 상갑판과 하갑판의 균형을 맞추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게다가 대포 32문을 장착할 때 처음에는 12파운드짜리를 사용하려고 했지만, 구스타프 아돌프 2세는 화력을 강화하기 위해 상갑판마저도 24파운드 대포로 무장하라고 명령했다. 상대적으로 협소한 상갑판에 무거운 대포가 가득차 무게중심이 위로 올라왔는데, 이것이 바사 호 침몰의 결정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군사법원이 그 누구에게도 유죄 판결을 내리지 않고 바사 호 침몰사건을 종결한 사실에서도 입증된다. 한마디로 이 배의 설계에 간섭을 한 아돌프 2세의 잘못....
스웨덴 해군 해양학자로 일했던 고고학자 안드레스 프란첸(Anders Franzén, 1918~1993)이 발견하여 1956년 8월에 선체가 모습을 드러냈고, 이후 1961년에 완전히 발굴이 된다. 보존을 위해 배는 수십 년간 염분을 제거하는 작업을 거쳐야 했다.
현재 이 배는 복원이 되었고, 과거의 비극적이면서도 황당했던 기억과 무관하게 스웨덴 최고의 관광 상품이 되었다. 또한 당시의 선박 역사를 아는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한국 소설 베니스의 개성상인의 최후반 에피소드에 등장한다. 자세한 내용은 등장인물 항목 참조.
플라잉 더치맨(캐리비안의 해적)의 모델이 되기도 하였다. 기묘하게도 2001년, 동명의 바그너의 오페라, '플라잉 더치맨'의 DVD 촬영도 이 선박이 전시된 박물관 홀에서 진행되었다.
게임 대항해시대 온라인에서도 바아사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4] 희귀한 선박재질인 스웨덴군 공용 재질이 장착되어 있고, 모든 서버에서 이벤트 보상으로 소량 풀린 배라 가치가 상당하지만, 실제 성능은 대형선이면서도 선측포 슬롯이 4칸인 둥 유명무실하다. 스웨덴의 군선이 탐난다면 바아사의 자매함이고 건조가 가능한 애플릿을 주문하는게 속 편할 것이다.[5]
1. 개요
스웨덴의 3층갑판 갤리온 군함이자 침몰선. 침몰선들 중 목재 군함이 가장 잘 온전하게 보존된 특이한 케이스다. 침몰한 상황을 보면 크게 파손될 이유가 적었다.
2. 건조 당시
17세기 초 스웨덴 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1] 는 30년 전쟁을 바탕으로 성장한 스웨덴의 해군력을 과시하고 발트해의 제해권을 차지하기 위해 신성로마제국과 경쟁을 하며 해군력을 강화하고 있었다. 이에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스웨덴의 강성함과 왕실의 위엄 그리고 발트해의 안전권을 보장하기 위해 새로운 갤리온형 전함을 만들라고 명했다. 그리하여 흐로테라는 상인을 통해 독일 출신 헨릭과 헨드릭을 데려와 함께 바사 호를 건조하기로 하고, 헨릭과는 바사 호의 건조 이후, 4년간 스웨덴 해군에서 유지보수를 하고 신예함 4척 건조에 참여하기로 계약을 맺었다. 그 자신도 해군력 강화 정책을 펼치면서 군함 건조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기에 바사 호의 설계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1626년에 첫 번째 함을 건조, 1627년 진수하여 1628년 스웨덴 해군이 인수했는데 이때 헨드릭은 지병으로 사망했다.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함명을 자신의 왕조 이름을 따서 바사(Vasa)라고 지었다.
3. 제원
- 최소 배수량 1210t
- 전장 69m
- 폭 11.7m
- 높이 52.2m
- 흘수선 4.75m
- 인원: 승조원 145명, 전투원 300명
- 함포
- 24 파운드포 48문
- 3 파운드 8문
- 1 파운드 2문
- 그외 대포 6문
4. 침몰
1628년 8월 10일, 스웨덴의 스톡홀름항에서 수많은 인파들과 귀족들이 보는 앞에서 폴란드로 첫 항해에 나섰다. 바사호는 엄청난 환호와 함께 천천히 항구를 빠져나가 연안으로 뱃머리를 돌린다. 바사 호는 첫 항해를 구경하로 온 이들에게 선물이라도 주는 듯 한쪽 현의 함포를 일제사격을 하는 장관을 보여줬다.
그런데 '''갑작스런 돌풍과 대포의 반동이 합쳐져 배가 좌현으로 기울더니 전복되어 침몰'''했다. 그것도 출항한 지 30분 만에.[2]
이 소식을 들은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통탄해하며 '대포는 건져 올려서 녹여 쓰고, 돛대는 쳐서 없애 나로 하여금 이 배를 잊게 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에 따라 대포들은 모두 건져내었다. 북방의 사자에게 남긴 몇 안 되는 상처인 셈.
5. 침몰 이유
바사 호는 당시의 선박 제조술이 총동원된 걸작품이었다. 하지만 선체 자체는 잘 만들어진 반면 하갑판과 상갑판의 균형이 맞지 않았던 데다, 대포를 너무 많이 탑재했다. 장식물도 너무 많았고, 구스타브 아돌프 2세가 갑작스럽게 용골을 수정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바람에 설계가 수정되었다. 이 때문에 처음과 달리 제대로 설계가 되지 않아 윗쪽은 무겁고 아랫쪽은 가벼워, '''무게중심이 높아져 버렸다.''' [3] 다시 말해 무게가 한 쪽으로 쏠릴 때 선체가 쉽게 기울어지게 된 것이다. 조선공들은 이런 결함을 보완하고자 함선을 건조하며 균형을 맞추는 용도로 하갑판에 돌 수 톤을 깔았는데, 이마저도 상갑판과 하갑판의 균형을 맞추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게다가 대포 32문을 장착할 때 처음에는 12파운드짜리를 사용하려고 했지만, 구스타프 아돌프 2세는 화력을 강화하기 위해 상갑판마저도 24파운드 대포로 무장하라고 명령했다. 상대적으로 협소한 상갑판에 무거운 대포가 가득차 무게중심이 위로 올라왔는데, 이것이 바사 호 침몰의 결정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군사법원이 그 누구에게도 유죄 판결을 내리지 않고 바사 호 침몰사건을 종결한 사실에서도 입증된다. 한마디로 이 배의 설계에 간섭을 한 아돌프 2세의 잘못....
6. 발견
스웨덴 해군 해양학자로 일했던 고고학자 안드레스 프란첸(Anders Franzén, 1918~1993)이 발견하여 1956년 8월에 선체가 모습을 드러냈고, 이후 1961년에 완전히 발굴이 된다. 보존을 위해 배는 수십 년간 염분을 제거하는 작업을 거쳐야 했다.
현재 이 배는 복원이 되었고, 과거의 비극적이면서도 황당했던 기억과 무관하게 스웨덴 최고의 관광 상품이 되었다. 또한 당시의 선박 역사를 아는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7. 미디어에서의 모습
한국 소설 베니스의 개성상인의 최후반 에피소드에 등장한다. 자세한 내용은 등장인물 항목 참조.
플라잉 더치맨(캐리비안의 해적)의 모델이 되기도 하였다. 기묘하게도 2001년, 동명의 바그너의 오페라, '플라잉 더치맨'의 DVD 촬영도 이 선박이 전시된 박물관 홀에서 진행되었다.
게임 대항해시대 온라인에서도 바아사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4] 희귀한 선박재질인 스웨덴군 공용 재질이 장착되어 있고, 모든 서버에서 이벤트 보상으로 소량 풀린 배라 가치가 상당하지만, 실제 성능은 대형선이면서도 선측포 슬롯이 4칸인 둥 유명무실하다. 스웨덴의 군선이 탐난다면 바아사의 자매함이고 건조가 가능한 애플릿을 주문하는게 속 편할 것이다.[5]
[1] 북방의 사자왕으로도 불려진 인물.[2] 베니스의 개성상인에서 접목된 팩트. 배의 무게 중심이 지나치게 위에 있어서 함포 사격 뒤에 급선회 기동을 하면 실제 회전점과 겉보기 회전점의 괴리가 너무 큰 탓에 좌초되기 쉬운 구조였다고....[3] 심지어 현대에 들어서도 이런 이유로 전복되는 사례가 종종 있다. 세월호 참사에서도 선실을 무리하게 늘린 개수 때문에 무게중심이 위로 쏠려 전복되었다.[4] 가장 기초적인 소형 캐러벨선의 이름이 바사(Barca)로 되어 있기 때문.[5] 애플릿은 커스텀 조선 패치 전에는 스웨덴군 공용 재질로 건조가 가능했으나, 현재는 선체의 재질인 너도밤나무나 기본 재질 삼나무 등을 골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