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주(북한)

 

'''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
김영주
金英柱 | Kim Yong-ju
'''
'''출생'''
1920년 9월 21일[1] (104세)
평안남도 대동군
'''국적'''
[image] 북한
'''학력'''
[image] 모스크바 종합대학교 정치경제학 학사
모스크바정치대학 법학 석사
'''직업'''
관료, 정치가
'''주요경력'''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장(1960~1973)
최고인민회의 3~5기 대의원(1962~1977)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조직비서(1966~1974)
조선로동당 정치국 위원(1969~1974)
정무원 부총리(1974~1993?)
국가 부주석(1993~1998)
조선로동당 정치국 위원(1993~2010)
최고인민회의 9(보선)~13기 대의원(1993~2019)
최고인민위원회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1998~2019)
'''주요서훈'''
[image] 김정일훈장(2012)
'''정당'''

1. 개요
2. 생애
2.1. 초기 이력
2.2. 당의 2인자
2.3. 김정일 시대
2.4. 근황
3. 여담
4.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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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일성의 동생.''' 전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 최고인민회의 제13기 대의원이다.
자신의 형 김일성은 물론, 조카 김정일보다도 훨씬 오래 살고 있는데 1948년 북한 정권 수립, 6.25 전쟁, 8월 종파사건, 천리마 운동, 김정일 승계, 고난의 행군 , 화폐개혁 실패 등 북한 현대사를 체험한 산증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일제 강점기 때 고등보통학교까지 졸업했으며,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 제국관동군 통역을 맡았다고 한다. 해방 직후에는 소련군정 주관의 시험으로 소련 유학에 합격해 모스크바 종합대학교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하고 모스크바정치대학에서 법학 석사 학위까지 받았다. 1952년부터 모스크바 고급당학교 연구반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다가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1953년 3월 북한으로 들어왔고, 군법 재판소의 사법행정서기관을 맡기도 했다. 1954년 로동당 조직지도부 지도원으로 일하기 시작했으며 57년에 과장, 부부장으로 승진했다. 김영주는 소련 유학파들을 적재적소에 대거 등용하여 조선로동당의 조직을 확대하고 내각의 행정 역량을 확대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고 한다. 이처럼 능력이 있었기에 김일성은 물론 김정일도 김영주를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으며, 1970년대 중반엔 북한 내에서 소련 유학파의 대부 격으로 여겨졌다.
흔히 뉴라이트조갑제가 이 사람이 관동군 특무였다고 주장하면서 북한 체제가 친일파를 적극 기용했다고 까는데, 탈북자 출신인 동아일보 주성하 기자가 반박한 바 있다.[2] 김일성이 변경에서 워낙 악명(?)을 떨쳤기 때문에, 일제는 이 사람을 붙잡아다가 선무공작에 이용했고, 이게 바로 뉴라이트가 주장하는 일제의 밀정이라는 것인데... 자세한 것은 친일반민족행위자/북한 참조.

2.2. 당의 2인자


1960년부터 당의 조직지도부장을 맡아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렸으며 이에 대해 당의 갑산파, 군의 허봉학, 김창봉 등이 김영주를 일제에 부역한 반동으로 조직지도부장에 어울리지 않다고 반발하자 1967년 갑산파 사건을 통해 박금철과 갑산파를 쓸어버렸으며 1969년에는 허봉학, 김창봉을 극좌 좌경 맹동주의자로 몰아서 역시 숙청하는 등 김일성의 절대적인 수령제의 건설과 김일성 우상숭배의 정착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1966년 조선로동당 제2차 당대표자회의에서 당 비서에 임명, 1969년 조선로동당 정치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정치위원회가 정치국으로 개편되면서 정치국원을 맡아 2010년, 김정일에게 해임되기까지 41년간 정치국원으로 있었다.
박정희 정부에선 북한의 2인자를 김영주로 파악하고 어떻게든 김영주와의 라인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고 북측에 거의 강요하듯이 김영주와의 직접 회담을 요구하였다. 북측에선 김영주의 건강상태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난색을 표했으나 남한에서 김영주를 만나야 회담이 의미가 있다고 밀어붙혔고 그 결과로 1972년 5월에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두 번 회담을 하는 등, '''7.4 남북 공동 성명''' 발표에 일정 정도 기여하였다. 이 시기에는 실제로 김일성이 김영주를 자신의 후계자로 고려하고 있었다는 분석이 많다.
좌측부터 이후락, 김영주, 김일성.
허나 명실상부하게 김일성의 후계자로 여겨졌던 김영주를 물러나게 한 것은 다름아닌 그의 건강이었다. 70년대부터 김영주의 건강은 극심하게 악화되었고 이 때문에 7.4 남북공동성명 때도 북에서 김영주를 집요하게 요구하는 남측에 김영주의 건강을 이유로 수차례 거절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김영주를 만난 이후락은 김영주의 건강이 정말로 좋지 않은가 알아보기 위해 그에게 강제로 술을 먹였는데 김영주는 한잔을 딱 마시고는 그대로 기절하여 며칠이나 일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김영주에게 금주령을 내렸던 김일성이 노해서 김영주를 질책했다고. 결국 김영주는 공직수행이 불가능한 정도가 되어서 이후락의 평양 방문에 대한 답방도 자신이 아니라 부수상 박성철을 보내야 했으며, 1970년대 초부터 건강 이상을 호소하면서 공직에서 물러나고 싶다는 의사를 계속 비추었고 김정일을 자신의 후임으로 임명하고 싶다고 김일성에게 제의했지만 김일성은 이를 두고 시기상조라고 거절했다. 하지만 1973년에 지방으로 내려가면서 사실상 중앙정계에서 은퇴하였고 대외보도 자료에서도 모습을 감추었다. 1974년 시점에서 김정일이 당중앙이라 불리면서 후계구도를 구축하기 시작했고 김영주는 여전히 모습을 보이지 않아 '곁가지' 신세가 되어 숙청당했거나 지방한직에 임명되어 앞으로 모습을 드러낼 일이 없을 거라 여겨졌다. 이러한 분석은 황장엽이 망명한 후 김정일이 김영주를 숙청했다고 주장하면서 한때 정설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북한의 실세가 김영주에서 김정일로 교체되는 것을 지켜봤던 선전선동부 부부장 박병엽은 당시 김영주가 밀려난 것은 아니라고 증언한 바 있다. 정무적 감각이 매우 뛰어난 김영주가 향후 후계 구도에서 김정일이 부상하는 것을 막는 것은 사실 상 어렵다고 생각하고 김정일 세력과 어느 정도 선에서 타협을 하고 물러났다고 한다. 이러한 타협으로 실제로 자신의 자리를 김정일에게 넘겨준 김영주는 자강도에 있는 특각에서 편안히 지냈으며, 그의 가족이나 평소 김영주 라인에 섰던 간부들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게다가 박병엽의 증언에 따르면 김영주는 김성애가 김일성의 집에 들어온 이후 계모에 대한 반항심으로 밖으로 나도는 김정일을 거두어 사실상 자기가 키우는 등 어린 김정일과 매우 친밀한 관계였고 이후로도 후견인을 자처했기 때문에 김정일과 매우 친밀한 관계라고 설명한 바가 있다. 실제로 김영주가 산송장 취급받는 김성애에 비해서 명예직이나마 당의 요직을 거치면서 계속 대외활동도 하고 있는 것은 김정일과 김영주의 관계가 양호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유추가 가능하여 현재는 김영주와 김정일이 정적이었다는 설은 설득력을 잃은 상태이다. 게다가 김영주가 은퇴하던 1970년대 초는 김영주가 당조직지도부장으로 철권을 쥐고 있던데에 반해 김정일은 정치국에도 몸을 담지 못한 선전선동부의 일원에 불과했고 그런 김정일이 김영주를 몰아내는 것은 수령의 아들이라 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뭣보다도 김정일을 적극적으로 정치국과 조직지도부에 추천한 인물이 다름아닌 김영주였다. 이 때문에 일본의 저명한 북한 연구자 와다 하루키 교수도 김영주를 김정일의 후견인으로 해석한다.

2.3. 김정일 시대


1974년 부총리로 임명된 이후 한동안 완전히 잊혀진 사람이었던 김영주는 말년의 김일성이 김영삼 대한민국 대통령의 남북 정상회담 시도로 정치 전면를 총지휘하면서 이 과정에서 친 김일성 성향의 구세대 인물(...)들이 필요해지면서 다시 정치에 등장했다. 이 과정에서 그 대표격인 김영주의 복귀설이 돌았고, 실제로 1993년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이자 국가 부주석으로 임명되었다. 이 때문에 김일성이 김정일을 쳐내고 김영주를 다시 세우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분석도 있었지만 그보단 그냥 정권의 무게감을 주기 위해 불렀다는 것이 중론이다. 실제로 이때 조직지도부장, 선전선동부장,국방위원장, 정치국 상무위원 등의 요직을 꿰어차고 북한의 실권을 휘두르고 있던 김정일이 김영주의 등장을 자신에 대한 위협을 인식했다면 김영주의 국가 부주석 임명을 묵과했을리도 없고 김일성이 죽은 후에 김영주를 가만 뒀을 리도 없다.
부주석으로 임명된 후 얼마 가지 않은 1994년 김일성이 죽고, 김일성이 중시한 오진우가 이듬해인 1995년 사망, 그들의 권력기반을 장악해 세력을 확장했고 1999년 유일한 견제세력이란 평을 듣던 리종옥사망하자 과 출신성분을 내세워 최고인민회의 제11기 대의원으로 뽑혔고 1998년부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의 자리에 올라 건강상의 이유로 은퇴한 것이 무색하게 20년 넘게 해먹고 있었으나 2019년 4월 헌법개정으로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 자리가 폐지됨에 따라 21년 만에 자리에서 내려오게 되었다.

2.4. 근황


[image]

2015년 김영주가 북한의 지방의회 대의원 선거에 참여하는 모습이 북한 매체를 통해 공개되면서, 거동이 다소 불편한 것 외에는 현재까지도 건강상의 큰 이상은 없는 것이 확인되었다. 정작 1970년대부터 건강 문제가 있었고 그것 때문에 후계자 논의에서도 빠졌던 걸 생각하면 인생사 정말 모를 일이다. 정작 그 대신 권력을 물려받은 김정일보다 훨씬 오래 살고 있다. 다만 2015년 보도 이후 지금까지 살아있다는 증거는 딱히 나오지 않고 있다. 죽었다는 증거도 없어서 그렇지... 물론 나이가 100세가 된 노인이니 공개활동을 열심히 한다면 그게 더 이상한 노릇이긴 하다.
슬하에 김영성과 아들 김정현을 두고 있다. 김영주는 김일성의 동생이지만, 이미 나이가 많아 후계구도에서 밀려나서 그런지 김정은이 건드리지 않아서[3]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2020년 9월 21일 100세 생일을 맞았다.

3. 여담


  • 김정일과는 평소에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이복동생이었던 김평일과 그 가족들이 김일성 사후에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도 김영주의 도움 덕분이었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 김일성 말고도 김철주라는 형이 하나 더 있었는데 김철주는 빨치산 운동을 하다가 1935년에 사망했다.[4]
  • 2020년 기준으로 나이가 나이인 만큼 일선에서 물러나 있으나 백두혈통빨은 어디가지 않는지 2020년 8월 20일에 있었던 신의주 세관원 전원 체포 사건이 있었을 당시 절대 다수의 세관원들이 숙청되어 감옥에 가거나 추방당했지만 세관원으로 있던 김영주의 손녀는 건들 수 없어 곧바로 빠져나왔다고한다.#


4. 대중매체에서


1980년작 KBS-TV 100분 드라마 《붉은 왕조》에선 배우 김성겸이 연기했는데, 1982년작 《지금 평양에선》과 1984년작 6.25 연속기획 《함정》에서도 같은 배역을 맡았다.


[1] 1922년생이라는 말이 있지만 김일성 생년과 딱 10년 차이나게 북한에서 의도적으로 맞추려는 것으로 추정된다.[2] 주성하 기자는 확고한 반김, 반북 성향이나, 사실이 아닌 것까지 이용해서 북한을 비판하지 않는다. 허위사실을 가지고 하는 비판은 비판한 사람이 오히려 진실성이 의심받게 되므로 백해무익하다.[3] 사실 고모부 장성택이나 이복형 김정남처럼 현역에서 활동하거나 후계자리를 위협할 정도의 권력을 가졌거나 계승 자격을 가진 것도 아니며 이미 은퇴한 지 오래이니 김정은이 굳이 무리수를 둬가며 건드릴 이유가 없기는 하다.[4] 여기서 자 돌림임을 알 수 있다. 참고로 김일성의 본명은 김성이다.